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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3:14~18
대망의 새해의 첫날이 밝았습니다.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 21:5)고 하신 하나님께서 새해에도 우리 앞에 복되고 새로운 일을 전개하실 것입니다.
여기 본문 말씀에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분부가 있습니다. 14절에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선택받은 이스라엘의 조상이자 오늘날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모든 그리스도인의 조상이기도 합니다(롬 4:16).
한편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하여 선민 역사의 중심을 이루게 하였고, 동시에 세상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선지자로 사명을 다하게 하였습니다. 어느 때나 선지자는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먼저보고 먼저알아 이를 사람들에게 나타내 주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하나님께로 향하여 열린 눈을 가지고 환상을 보며 계시의 비젼을 품고 사는 자입니다.
본문 말씀 중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신 것도 이런 이유에서 주신 말씀입니다. 여기 “너 있는 곳”이란 아브라함의 현재 서 있는 위치를 뜻합니다. 이는 공간적인 의미도 있지만 시간적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말입니다. 다음 절에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고 하신 축복의 약속이 뒷받침되는 말입니다. 이는 현재와 비교할 수 없는 미래의 환상을 그려보라는 축복의 명령입니다.
우리에게 꿈과 소망의 문을 여는 새해 첫 주일에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시는 말씀의 의미를 살펴보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I. 원점(原點)에 서서 보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때때로 예상하지 못한 일을 당하기도 하고 그 일로 인하여 삶의 방향을 바꾸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고향을 떠나 가나안 땅에 온 후 뜻하지 않은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시도를 하도록 방향전환의 계기를 만났습니다.
(1) 은혜의 체험이 있었습니다.
애당초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고 하였습니다(창 12:1-2).
이 때의 상황에 대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라고 하였습니다(히 11:8).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약속대로 그와 함께 하시며 그의 길에 복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애굽에 내려갔다가 큰 위험을 당할 뻔 하였지만 하나님께서 도와 주셨고, 오히려 많은 재물을 얻어서 나오게 되었습니다(창 12:10-20). 창세기 13:2에“아브람에게 육축과 은금이 풍부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2) 고통스러운 일도 경험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날 때 조카 롯을 데리고 나왔습니다. 롯은 아브라함의 막내 동생인 하란의 아들인데, 하란이 갈대아 우르에서 일찍 죽었기 때문에 그는 큰 아버지인 아브라함에게 얹혀살았습니다.
그동안 아브라함에게 재산이 많아 진 것만큼 롯도 양과 소가 많아서 두 집 식구가 같이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창 13:5-6). 아브라함이 롯에게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고 하였습니다(8,9절). 그러나 선취권을 받은 롯은 자기 욕심대로 요단 온 들을 다 차지하고 아브라함을 떠났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인간적인 배신감과 허탈함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3) 초심(初心)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 14절에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어떤 일을 계획하고 그것이 어느 정도 이루어져 간다고 생각될 때 자신감과 자만심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러다가 계획이 빗나가고 실패를 하게 되면 오히려 좌절하거나 낙심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런 것은 다 인간의 연약함을 깨닫게 하고 불완전한 세상에서 인간이 가지는 한계를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런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실존을 알고 하나님께 의지하는 사람은 자기의 본래 모습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원점에서 다시 출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욥기 22:23에 “네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가고 또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버리면 다시 흥하리라”고 하였습니다.
Ⅱ. 신령한 눈을 열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살면서도 하늘나라를 대망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비록 육신에 머물러 있지만, 그 영혼은 하나님께로 지향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것은 마음의 눈으로 하나님과 교통하는 신비로운 체험을 항 수 있기 때문입니다.
(1)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려야 됩니다.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 땐 만족함이 없었네…나의 하나님 한분만으로 나는 만족하였네’ 이러한 찬송은 신령한 눈을 열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의 고백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동안 친자식처럼 가꾸며 돌보았던 롯을 떠나보내고 한없이 쓸쓸하고 허탈하였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눈을 들고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였습니다.
이제부터 시야를 넓히고 그 대상을 새롭게 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을 보고 세상을 보는데서 하나님을 보고 신령한 세계를 소망하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렘 17:5). 시편 42:5에는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
(2) 주권자 하나님을 의식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민족의 연대와 나라의 국경을 정하시고 그 모든 것을 통치하십니다(행 17:26). 일반적으로 인류의 역사를 말할 때 힘센 자들에 의해서 뺏고 빼앗기는 악순환의 연속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 좌우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여기 아브라함에게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심도 그의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세계가 다 하나님의 통치영역임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땅 위에 펼쳐지는 삼라만상에서부터 사람이 살고 행하는 일들도 하나하나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모두가 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운행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런 원리를 모르는 사람은 소돔성으로 찾아드는 롯과 같이 눈 앞에 보이는 것만 잡으려고 달려갑니다. 그곳은 하나님 앞에 큰 죄인으로 낙인찍혀 있어서(창 13:13), 잠시 후 유황불로 소멸되고 마는 것을 목도한 다음 비로소 후회하게 됩니다.
(3) 제단 중심의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과 호흡을 같이 하면서 영적인 삶의 풍요로움을 즐기는 자들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하나님께 제단을 쌓는 예배 중심의 생활을 통하여 실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며 영원히 이르게 되는 하나님의 약속에 소망을 가지게 된 아브라함은 평생 동안 하나님께 제단 쌓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18절에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고 하였습니다.
Ⅲ. 예비된 축복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께 받은 축복 가운데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된 것이 가장 귀한 것입니다. 신명기 7:6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업이 되고 우리가 하나님의 기업이 되어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성취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축복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큰 소망과 비젼을 안고 뜻 있는 삶을 사는 자입니다.
(1) 축복의 언약들
일찍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그와 그 후손에게 축복하겠다는 약속을 하였습니다. 창세기 12:2에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약속은 단순히 아브라함 개인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브라함을 통하여 이루어지게 되는 큰 민족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며, 그 민족을 통해서 전개하시려는 하나님의 원대한 경륜을 계시해 주신 내용입니다. 본문 말씀 16절에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찐대 네 자손도 세리라”고 하였습니다.
(2) 언약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합니다.
하나님의 계시와 언약에 대한 신앙을 가진 사람도 때때로 그 약속에 대한 신뢰가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향하여 현장을 확인하고 실물 교훈을 강조하시곤 하였습니다. 이사야 40:26에는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중의 새를 보라…” 또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고 하였습니다(마 6:26, 28).
다윗은 피조세계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창조솜씨와 심오한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고 감격해 하였습니다. 시편 19:3-4에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고 하였습니다.
중생한 성도는 하나님의 언약하신 말씀을 현장에서 확인할 때 더욱 든든한 신앙으로 굳히게 됩니다. 본문 말씀 17절에는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의 현장을 직접 밟고 다니며 신실하신 하나님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3) 축복을 수용할 수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믿음으로 수용할 수 있습니다. 본문 말씀 14절에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였습니다. 15절에 “보이는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하였습니다. 16절에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같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17절에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약속들을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수용하여야 됩니다. 자기보다 오고 오는 후손들을 위해서 「아멘」으로 화답하여야 되고 또 그것을 종과 횡으로 수용할 수 있게 큰 그릇으로 준비하여야 됩니다. 여기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는 것은 넓게 보고 멀리 보는 안목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 후손들과 메시야 시대에 대한 비젼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Ⅳ. 사명을 보는 눈을 열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그를 통하여 인류와 역사에 전개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창세기 18:19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이 세상사람 앞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의 표본이 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성도는 세상 사람들 중에 선지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됩니다.
(1) 말씀을 파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계시와 환상을 통하여 신실한 언약을 맺었습니다. 특히 그의 후손 가운데 인류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창 22:18).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이 약속을 믿고 있었으며 그 약속이 실현될 것을 바라고 즐거워하였습니다(요 8:56). 하나님께서는 그가 언약하신 약속을 신실하게 지켰습니다. 그 중에도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애굽에 내려가서 사백 년 동안 고생을 하다가 사대 만에 나오게 될 것이라는 언약은(창 15:13-16), 유월절과 함께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으로 성취되었습니다(신 7:8).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신 언약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야 됩니다.
(2) 거룩하게 구별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이 할례를 받게 하였습니다. 창세기 17:10에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 남자는 난지 팔일 만에 양피를 베고 할례를 받으므로써 하나님의 백성된 증거를 삼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구별되었다는 뜻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과 구별되고 죄악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온갖 우상숭배와 음행으로 얼룩진 세상 가운데서 그 백성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면서 구별되게 살아야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하나님께 헌신된 성도들의 삶을 나타내는 것입니다(빌 2:15).
(3) 축복의 공여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창 22:18). 성도가 세상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것은 그것으로 자기 한 사람만 즐기며 행복하기 위한 목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를 통하여 모든 사람이 다 같이 즐기며 복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성도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게 되면 다른 사람에게 바른 길을 일러주고 삶의 의미를 되새기게 해 줄 것입니다.
또한 성도가 하나님께 복을 받아 풍성한 삶을 살게 되면 그것이 이웃과 민족에게로 공여되어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축복에 참여하고 더 풍성한 삶으로 확대되어 가는 것입니다. 동서남북으로 퍼져나가고 종과 횡으로 영역을 넓혀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2006년 새해에는 우리 모두가 선지자적 사명에 진력하여 엄청난 하나님의 축복을 확대 재생산 하면서 다른 사람과 함께 누릴 수 있도록 공여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손상률목사 설교 중에서
대망의 새해의 첫날이 밝았습니다.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 21:5)고 하신 하나님께서 새해에도 우리 앞에 복되고 새로운 일을 전개하실 것입니다.
여기 본문 말씀에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분부가 있습니다. 14절에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선택받은 이스라엘의 조상이자 오늘날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모든 그리스도인의 조상이기도 합니다(롬 4:16).
한편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하여 선민 역사의 중심을 이루게 하였고, 동시에 세상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선지자로 사명을 다하게 하였습니다. 어느 때나 선지자는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먼저보고 먼저알아 이를 사람들에게 나타내 주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하나님께로 향하여 열린 눈을 가지고 환상을 보며 계시의 비젼을 품고 사는 자입니다.
본문 말씀 중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신 것도 이런 이유에서 주신 말씀입니다. 여기 “너 있는 곳”이란 아브라함의 현재 서 있는 위치를 뜻합니다. 이는 공간적인 의미도 있지만 시간적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말입니다. 다음 절에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고 하신 축복의 약속이 뒷받침되는 말입니다. 이는 현재와 비교할 수 없는 미래의 환상을 그려보라는 축복의 명령입니다.
우리에게 꿈과 소망의 문을 여는 새해 첫 주일에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시는 말씀의 의미를 살펴보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I. 원점(原點)에 서서 보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때때로 예상하지 못한 일을 당하기도 하고 그 일로 인하여 삶의 방향을 바꾸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고향을 떠나 가나안 땅에 온 후 뜻하지 않은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시도를 하도록 방향전환의 계기를 만났습니다.
(1) 은혜의 체험이 있었습니다.
애당초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고 하였습니다(창 12:1-2).
이 때의 상황에 대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라고 하였습니다(히 11:8).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약속대로 그와 함께 하시며 그의 길에 복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애굽에 내려갔다가 큰 위험을 당할 뻔 하였지만 하나님께서 도와 주셨고, 오히려 많은 재물을 얻어서 나오게 되었습니다(창 12:10-20). 창세기 13:2에“아브람에게 육축과 은금이 풍부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2) 고통스러운 일도 경험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날 때 조카 롯을 데리고 나왔습니다. 롯은 아브라함의 막내 동생인 하란의 아들인데, 하란이 갈대아 우르에서 일찍 죽었기 때문에 그는 큰 아버지인 아브라함에게 얹혀살았습니다.
그동안 아브라함에게 재산이 많아 진 것만큼 롯도 양과 소가 많아서 두 집 식구가 같이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창 13:5-6). 아브라함이 롯에게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고 하였습니다(8,9절). 그러나 선취권을 받은 롯은 자기 욕심대로 요단 온 들을 다 차지하고 아브라함을 떠났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인간적인 배신감과 허탈함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3) 초심(初心)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 14절에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어떤 일을 계획하고 그것이 어느 정도 이루어져 간다고 생각될 때 자신감과 자만심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러다가 계획이 빗나가고 실패를 하게 되면 오히려 좌절하거나 낙심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런 것은 다 인간의 연약함을 깨닫게 하고 불완전한 세상에서 인간이 가지는 한계를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런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실존을 알고 하나님께 의지하는 사람은 자기의 본래 모습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원점에서 다시 출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욥기 22:23에 “네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가고 또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버리면 다시 흥하리라”고 하였습니다.
Ⅱ. 신령한 눈을 열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살면서도 하늘나라를 대망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비록 육신에 머물러 있지만, 그 영혼은 하나님께로 지향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것은 마음의 눈으로 하나님과 교통하는 신비로운 체험을 항 수 있기 때문입니다.
(1)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려야 됩니다.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 땐 만족함이 없었네…나의 하나님 한분만으로 나는 만족하였네’ 이러한 찬송은 신령한 눈을 열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의 고백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동안 친자식처럼 가꾸며 돌보았던 롯을 떠나보내고 한없이 쓸쓸하고 허탈하였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눈을 들고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였습니다.
이제부터 시야를 넓히고 그 대상을 새롭게 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을 보고 세상을 보는데서 하나님을 보고 신령한 세계를 소망하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렘 17:5). 시편 42:5에는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
(2) 주권자 하나님을 의식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민족의 연대와 나라의 국경을 정하시고 그 모든 것을 통치하십니다(행 17:26). 일반적으로 인류의 역사를 말할 때 힘센 자들에 의해서 뺏고 빼앗기는 악순환의 연속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 좌우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여기 아브라함에게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심도 그의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세계가 다 하나님의 통치영역임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땅 위에 펼쳐지는 삼라만상에서부터 사람이 살고 행하는 일들도 하나하나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모두가 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운행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런 원리를 모르는 사람은 소돔성으로 찾아드는 롯과 같이 눈 앞에 보이는 것만 잡으려고 달려갑니다. 그곳은 하나님 앞에 큰 죄인으로 낙인찍혀 있어서(창 13:13), 잠시 후 유황불로 소멸되고 마는 것을 목도한 다음 비로소 후회하게 됩니다.
(3) 제단 중심의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과 호흡을 같이 하면서 영적인 삶의 풍요로움을 즐기는 자들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하나님께 제단을 쌓는 예배 중심의 생활을 통하여 실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며 영원히 이르게 되는 하나님의 약속에 소망을 가지게 된 아브라함은 평생 동안 하나님께 제단 쌓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18절에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고 하였습니다.
Ⅲ. 예비된 축복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께 받은 축복 가운데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된 것이 가장 귀한 것입니다. 신명기 7:6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업이 되고 우리가 하나님의 기업이 되어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성취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축복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큰 소망과 비젼을 안고 뜻 있는 삶을 사는 자입니다.
(1) 축복의 언약들
일찍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그와 그 후손에게 축복하겠다는 약속을 하였습니다. 창세기 12:2에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약속은 단순히 아브라함 개인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브라함을 통하여 이루어지게 되는 큰 민족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며, 그 민족을 통해서 전개하시려는 하나님의 원대한 경륜을 계시해 주신 내용입니다. 본문 말씀 16절에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찐대 네 자손도 세리라”고 하였습니다.
(2) 언약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합니다.
하나님의 계시와 언약에 대한 신앙을 가진 사람도 때때로 그 약속에 대한 신뢰가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향하여 현장을 확인하고 실물 교훈을 강조하시곤 하였습니다. 이사야 40:26에는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중의 새를 보라…” 또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고 하였습니다(마 6:26, 28).
다윗은 피조세계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창조솜씨와 심오한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고 감격해 하였습니다. 시편 19:3-4에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고 하였습니다.
중생한 성도는 하나님의 언약하신 말씀을 현장에서 확인할 때 더욱 든든한 신앙으로 굳히게 됩니다. 본문 말씀 17절에는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의 현장을 직접 밟고 다니며 신실하신 하나님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3) 축복을 수용할 수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믿음으로 수용할 수 있습니다. 본문 말씀 14절에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였습니다. 15절에 “보이는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하였습니다. 16절에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같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17절에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약속들을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수용하여야 됩니다. 자기보다 오고 오는 후손들을 위해서 「아멘」으로 화답하여야 되고 또 그것을 종과 횡으로 수용할 수 있게 큰 그릇으로 준비하여야 됩니다. 여기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는 것은 넓게 보고 멀리 보는 안목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 후손들과 메시야 시대에 대한 비젼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Ⅳ. 사명을 보는 눈을 열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그를 통하여 인류와 역사에 전개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창세기 18:19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이 세상사람 앞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의 표본이 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성도는 세상 사람들 중에 선지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됩니다.
(1) 말씀을 파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계시와 환상을 통하여 신실한 언약을 맺었습니다. 특히 그의 후손 가운데 인류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창 22:18).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이 약속을 믿고 있었으며 그 약속이 실현될 것을 바라고 즐거워하였습니다(요 8:56). 하나님께서는 그가 언약하신 약속을 신실하게 지켰습니다. 그 중에도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애굽에 내려가서 사백 년 동안 고생을 하다가 사대 만에 나오게 될 것이라는 언약은(창 15:13-16), 유월절과 함께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으로 성취되었습니다(신 7:8).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신 언약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야 됩니다.
(2) 거룩하게 구별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이 할례를 받게 하였습니다. 창세기 17:10에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 남자는 난지 팔일 만에 양피를 베고 할례를 받으므로써 하나님의 백성된 증거를 삼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구별되었다는 뜻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과 구별되고 죄악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온갖 우상숭배와 음행으로 얼룩진 세상 가운데서 그 백성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면서 구별되게 살아야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하나님께 헌신된 성도들의 삶을 나타내는 것입니다(빌 2:15).
(3) 축복의 공여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창 22:18). 성도가 세상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것은 그것으로 자기 한 사람만 즐기며 행복하기 위한 목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를 통하여 모든 사람이 다 같이 즐기며 복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성도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게 되면 다른 사람에게 바른 길을 일러주고 삶의 의미를 되새기게 해 줄 것입니다.
또한 성도가 하나님께 복을 받아 풍성한 삶을 살게 되면 그것이 이웃과 민족에게로 공여되어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축복에 참여하고 더 풍성한 삶으로 확대되어 가는 것입니다. 동서남북으로 퍼져나가고 종과 횡으로 영역을 넓혀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2006년 새해에는 우리 모두가 선지자적 사명에 진력하여 엄청난 하나님의 축복을 확대 재생산 하면서 다른 사람과 함께 누릴 수 있도록 공여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손상률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