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6:1~2


   기독교의 믿음은 “지금”을 현실로 맞으면서 미래의 소망에 속하는 사건을 지금 실상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같이 확신하면서 생활하는 태도를 말함이며 아직 나타나 보이지 않는 세계를 마치 확신하는 증거를 갖고 신앙하는 생활태도를 말함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비전에 산다. 신념에 산다. 이상에 산다. 위대한 미래를 모험한다. 이런 것이 믿음의 양상이다. 새해 벽두에 그리스도인들이 시간이해를 통하여 믿음을 회복하는 기회를 얻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본문에서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 이로다” 하는 ‘지금’의 시간이해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에 대한 궁금증을 알고자 하는 것이다.

   현대의 과학문명은 인공위성을 설치하면서 우주시대를 맞이하였고 컴퓨터로 인해 한 순간에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소식을 일순간에 공동으로 함께 하게 되었다. 굉장한 핵물리학과 비상한 속도를 가지고 광활한 공간을 지배하고 있다. 이렇게 비상한 속도로서 시간을 어느 정도 정복하고 있는 현실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그러나 현대의 인간문명은 인간이 공간을 정복할 만큼 시간을 정복하기는 어렵다는 사실 또한 인정해야 한다. 공간의 차원에서 왕래가 가능하고 시간의 차원에서는 왕래가 불가피 하지만 실패는 만회(挽回)할 수 없이 지나가 버리고 끝을 맺고 만다는 사실 또한 인정해야 한다. 시간도 공간도 자연의 소지(素地)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사람은 자연을 정복한 만큼 역사를 정복하지는 못 하였다. 인간존재가 시간을 정복 한다는 것은 마치 자기의 운명을 자기가 좌우하는 신적인 능력을 가져보자는 유한된 자의 오만에서 나온 소치(所致)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일찍이 시간에 관한 명상을 한 성 어거스틴은 그의 고백록에서 ‘고백록’ 제10장제14절에 시간의 존재성(reality)에 관한 물음을 물었다. 성 어거스틴에 의하면 ‘시간의 두 부분 즉 과거와 미래는 그 실존성을 주장하기 어렵다고 했으며 과거는 이미 지나갔으니 지금은 없는 것이요 미래는 아직은 오지 아니 했으니 또한 지금은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있는 것은 현재 만이라고 해야 하겠는 데 현재라는 퍼짐이 없는 추상적이며 명목적인 가정적인 점에 불가 한 것이며 우리가 지금이라고 말할 때에 그 ‘지금’은 항상 벌서 지나가 버리고 난 다음이다. 그러므로 과거 현재 미래는 똑 같은 유령과도 같이 그 실존성이 없는 것이며 시간의 흐름이라는 무(無)에로 향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 성 어거스틴의 물음임을 철학적으로 이해하면 하는 것이다.

   성 어거스틴은 이러한 물음에 대해서 시간은 그 시작과 그 끝이 있는 창조된 것이라는 것을 주장함으로서 그리고 시간은 우리의 기억에 그 자취를 머물러 두고 있다는 것을 지적함으로서 시간의 실제성을 확립 하였다. 이로서 Paul Tillich는 시간에 대한 명상을 어거스틴이 제시한 시간이해를 이렇게 생각 하였다.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의 셋으로 구분 되는 것이기에 과거는 이미 지나 갔으니 지금은 없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지금은 없고 지금은 지금이라고 말하는 순간에는 이미 지나가 버렸으므로 시간은 그 실제성이 없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물음이었다. 그는 시간성은 곧 무상(temporality=transitoriness)이 아니냐 하는 것이었다. 풀이하면 시간은 모두 과거가 되어 버리고 결국 죽음으로 향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의 무상이 아니냐는 것이다. 틸리히는 시간의 3구분은 그러한 3분단이 아니라 시간의 3양태(modes) 라는 것이다. 시간에는 부단히 과거에로 향하는 무상성도 있지만 시간에는 또 부단히 새 것을 창조하는 미래성도 있으며 거기에서는 ‘아직은 없었던 것’이 나타나고 되어지는 다른 양태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잠세적(潛勢的)인 것(potentiality)이 실현되는 마당이 시간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 어거스틴의 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은 시간은 미래적인 양태라고 하는 것이다. 이 시간은 장래를 지향하고 있다. 그리고 물론 자연적인 시간에는 시작도 끝도 없지만 역사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 따라서 역사적인 시간에는 그 중심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양적인 시간이 아니라 질적인 시간이며 이렇게 질과 방향을 가진 시간은 공간으로부터 그 자체를 분리시키어 부단히 미래를 지향해 가며 부단히 새것을 창조하며 항상 무엇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시간은 그 의미와 내용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간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시간은 반복이 아니고 목적이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잠세적인 것이 실현될 가능성이 내포된 것이 시간이라고 하기에 시간은 항상 무엇인가를 잉태하고 있다고 한다. 또 다른 말로하면 과거는 결정이지만 미래는 자유라고 한다. 이런 것들이 시간 속에 감추어진 뜻인바 그것이 곧 구원이며 신국(神國)이라고 말한다. 신국은 역사에 감추어진 목표라 한다. 분명하게 말하면 틸리히는 ‘현재’라는 시간 이해는 ‘영원을 수용하는 힘’이라 한다. 곧 시간은 우리 현재의 경험 속에서 실재(實在)가 된다는 것이다. 현재가 실재적이 되는 까닭은 영원이 시간 안에 돌입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현재라고 말한다. 성 어거스틴의 말로 ‘지금’이라고 말하는 순간에 그 지금은 이미 지나갔다고 했지만 그러나 틸리히에 의하면 영원은 언제나 현재(現在)한다는 의미이다. 이 현재는 영원의 임재(Presence)이며 영원이 임재 하기에 우리는 현재를 가지고 있는 것이고 이러한 현재가 곧 우리의 설 자리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지금’이라고 부르는 매 순간에 있어서 시간적인 그 무엇과 영원한 그 무엇이 결합된다고 한다. 현재는 시작(지금)은 있으되 그 뒤 끝이 없는 무한한 과거와 또 시작(지금)은 있으되 그 앞 끝이 없는 무한한 미래의 결합이고 모든 것을 삼키어 버리는 죽음의 과거와 모든 것을 생산하는 자유의 미래를 통합(integrate)시키고 ‘영원을 시간 속에 수용시키는 ’순간‘ 이것이 현재이다. 바로 이것을 영원한 현재(eternal now)라고 한다. 이 영원한 현재라는 말은 시간과 역사의 내적인 질이므로 이것을 실존적으로 실현시키는 계기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적인 행위 곧 결단인 것이다. 이러한 신앙적인 행위에서 시간과 역사는 자기 자신을 초월해서 그 종말에 대면하게 된다. 이 경우에 초월이란 이원론적인 혹은 공간적인 비유(simile)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초월하는 것(self-transcending)임을 말함이다. 이것이 자기 결단이다. 결단은 항상 현재의 행동이다. 그것은 임의로의 행동이 아니라 말하자면 시간의 운명이다. 이 운명적인 시간은 궁극적인 것을 의도하는 순간이며 때가 찬(time is fulfilled) 것이다. 로고스가 시간에서 그 본질을 계시하는 것이다.

   로고스 자신은 보편타당한 존재의 구조이기에 무시간적인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시간에 나타날 때 그것을 카이로스(kairos)라고 한다. 카이로스는 자연적인 시간인 크로노스(kronos)와는 달라서 이것은 시간의 중심이며 삶과 역사에 의미를 부여하는 중심이다. 틸리히는 시간에 대한 간결한 표현으로 이렇게 말한다. “시계의 바늘이 돌아갈 때 한 헛된 순간이 다음에 오는 또 하나의 헛된 순간을 잇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은 우리에게 말하기를 영원이 이 순간에 절선(切線=at hand)했다”고 했다. 순간은 지나간다. 그러나 영원은 머무른다. 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 넘어가는 우리의 시간경과(timing)는 시간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시간경과의 가장 깊은 뜻은 순간을 삼 키워 버리는 그 다음 순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시간을 긍정하는 시간위에 있는 영원이다.

   이것이 시간의 진지함이며 시간경과이다. 우리의 시간경과에서 하나님은 하나님나라 도래를 할 때 타이밍을 맞추신다. ‘하나님은 공허한 시간을 충만한 시간으로 높이신다.’는 틸리히의 말을 기억하면서 나는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 이로다.”한 바울선생의 뜻을 헤아리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은총을 새해 한 해를 “지금”이라는 의미로 “시간에서 영원을 찾는 길” 임을 고백하며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기원한다.

출처/배성산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