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길, 바다도 못 막는 길  (출 14;21-25)

모세가 10가지 재앙을 애급에 퍼부었습니다. 모세는 200만명 이스라엘 백성들을 400년 만에 해방시켰습니다. 모두 홍해까지 나왔습니다. 이 때 바로는 노예들을 다 내보내고 나니 사회가 마비되었습니다. 일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짓던 모든 공사가 중단되었습니다.
벽돌 공장이 마비되었습니다.
각종 공장들이 쉬게 되었습니다.
농사 지을 사람이 없어 식량난이 발생할 것이 뻔하였습니다.
소 양을 돌볼 목자가 없어서 짐승들도 모두 굶어 죽게 되었습니다.
들판에 익어가는 밀보리를 거둘 노동력이 없어졌습니다. 들판에서 곡식이 썩어갈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잡아드리려고 따라 갔습니다. 마침 홍해 앞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모여 있었습니다. 바로는 외쳤습니다.

<하나님은 작전에 미숙한 분이로구나! 독안에 든 쥐다.>

무기가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탱크만 600대를 가진 애급 군대가 다시 잡아 가는 것은 이제 시간 문제였습니다. 점점 다가 오고 있었습니다. 앞에는 홍해, 뒤에는 애급 군사였습니다. 앞으로 가도 죽음, 뒤로 가도 죽음이었습니다. 앞으로 가도 문제, 뒤로 가도 문제였습니다. 두 가지 반응이 일어났습니다.

1. 포기한 백성들이 있었습니다.
2. 포기하지 아니한 모세가 돋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출 14: 11-12)

그러나 모세는 포기하지 않고 말했습니다.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3-14)

그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홍해에 지팡이를 내어 밀라고 명하셨습니다. 모세는 지팡이를 홍해로 내밀었습니다.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어민대 여호와께서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출 14;21)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넜습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다를 건널 때 양 쪽으로 물벽이 되어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애급 군사들이 이스라엘 백성들 뒤를 따랐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다 건넌 후 모세는 다시 지팡이를 홍해에 내밀었습니다. 홍해가 다시 합하여졌습니다. 애급 군사들은 모조리 바다에 빠져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믿음으로 가는 길은 놀라운 길입니다.

1. 그 길, 지나놓고 보아야 아는 길.
가나안으로 가는 믿음의 길은 지나놓고 보아야 아는 길입니다. 지날 때에는 왜 그리로 가야 하는 지 모르는 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왜 자기들을 홍해 앞으로 인도하지 알지 못 하였습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매장지가 없어서 이 곳으로 인도하였느냐고 따지고 들었습니다. 심지어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도 하나님이 왜 홍해 앞으로 인도하였지 몰랐지만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서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라고 외쳤습니다.
나중에 알았습니다. 애급이 다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히지 못 하도록 군사들을 죽여 버리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들어 있었습니다. 나중에서야 알았습니다.

또 이해 못 할 것이 있습니다.
애급에서 가나안까지는 불과 일주일이면 갈 수 있는 거리인데 왜 40년 걸리게 하셨을가 하는 의문점입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모세는 바란광야 가데스 바아네에서 정탐군 12명을 가나안 땅으로 보냈습니다. 40일간 그 땅을 담지하고 돌아온 12명은 온 백성들과 모세앞에서 결과 보고를 하였습니다.
10명이 먼저 보고하였습니다.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 즉 과연 젖과 꿀이 그 땅에 흐르고 이것은 그 땅의 실과니이다.그러나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김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민13;27-28)

이 말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원망의 화살을 던졌고 불평의 언어를 토하며 후회의 샘물을 품어대며 아우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만은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능히 이기리라>(민13;30)라고 말하며 지금 쳐들어 가자고 자신만만하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10명의 정탐군은 또 외쳤습니다.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 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를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을 것이니라>(민13;32-33)

이런 부정적이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그들은 도저히 가나안 땅으로 갈 용기가 생기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지도자를 세워 애급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말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하시는 말씀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로 거하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 가지 못 하리라......너희 자녀들은 너희의 패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40년을 광야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너희가 그 땅에서 탐지한 날수 40일의 하루를 일년으로 환산하여 그 40년간 너희가 너희의 죄악을 질지니 너희가 나의 싫어 버림을 알리라 하셨다 하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거니와 모여 나를 거역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단정코 이같이 행하리니 그들이 이 광야에서 소멸되어 거기서 죽으리라>(민14;27-35)

하루가 일년이 되고 40일이 40년이 되었습니다.
40은 성경에서 시험의 기간입니다.
예수님께서 40일간 광야에서 금식기도를 하신 것은 구세주로서 영적 일을 감당하기 위한 시험의 기간이었습니다(눅4;1-2) 예수님은 승리하셨습니다.
요나가 40일간 니느웨성에서 <회개하지 아니하면 화가 있다>라고 외친 것은 니느웨성을 향한  회개의 시험기간이었습니다(욘3;4) 니느웨성 사람들은 승리하였습니다.
모세가 40일간 산에서 금식하며 성막과 십계명과 율법 613가지를 받은 것은 모세가 지도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지를 시험당한 기간이었습니다(출34;28) 모세도 이 40일의 시험에서 승리하였습니다.
그러나 40일간 정탐하고 돌아 온 12 정탐군중 10명은 불합격하였습니다. 그래서 40년이나 광야에서 방황하게 되는 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40일은 시험의 수이고 40년은 형벌의 기간입니다.
모세는 사람을 죽인 댓가로 40년 미디안 광야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40일 시험에서 불합격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40년의 형벌이 주어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걸은 길은 형벌의 길이었습니다. 지나놓고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오늘 심각하게 생각하여 보십시다.
하나님! 다른 교회들은 모두 강북에서 강남으로 내려 오는 데 우리 교회만은 왜 강남에서 강북으로 올라 가나요?
하나님! 우리는 건축을 원하였는 데 왜 건축한 교회를 주시는 가요?
우리는 성경적인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무슨 뜻이 들어 있는 지 그 뜻이 나타날 때까지 가만히 침묵을 지키고 기다리는 신앙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체스터손(Chesterson)이라는 사람이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하였습니다.
<울타리가 세워진 이유를 알기 전에는 그 울타리를 결코 헐지 말라.>

하나님이 우리를 자양동으로 부르는 이유를 알기 전에는 하나님에게 결코 불평하거나 짜증을 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은 지나놓고 보아야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125억에 계약하면서 20억 계약금을 치루었습니다. 우리도 이상합니다. 그런데 지나놓고 보니까 알았습니다. 13억 정도 계약금을 치루면 되는 데 20억을 치룬 것은 해약을 방지하려는 하나님의 뜻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때 13억원 계약금을 걸었으면 해약이 비교적 쉬웠습니다. 한 교회가 해약금을 두 배로라도 치루고 인수받고 싶어한다는 말을 나중에 들었습니다.
그 길은 지날 때에는 왜 그리로 가야하는 지 모르는 길입니다. 지나놓고 보아야 아는 길입니다.  

2. 그 길,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
가나안으로 가는 믿음의 길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급에서 가나안으로 이끄는 길은 곧장 난 길이 아니었습니다. 흔적을 그려 보면 방황하는 길같이 보이는 길입니다. 그러나 순간마다 때마다 곳마다 하나님이 인도하여 주시는 길이었습니다.
바다가 있으면 갈라서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적들이 있으면 돌아서 피해가게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물이 없으면 반위를 갈라서 샘물이 나게 하시며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광야라 먹을 것이 없으면 만나를 하늘에서 쏟아 주시면서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고기가 먹고 싶을 때는 동풍을 불어서 메추라기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인 곳으로 몰아 주시며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40년 동안 신발을 닳지 않게 보호하여 주시면서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옷을 만들어 입을 수 없는 광야라 하나님은 옷도 헤어지지 않게 붙들어 주시면서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낮에는 작열하는 태양으로 100m도 걸을 수 없는 곳이라 구름기둥으로 햇빛을 가려 주시면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밤이면 추워서 잘 수 없는 사막 지대라 불기둥을 보내 주셔서 따뜻하게 보호하여 주시면서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가는 믿음의 길에 가장 적당한 방법을 사용하시면서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매일 기적으로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날마다 기적으로 인도하여 주신 기적의 길이었습니다.
동행의 표적이 없는 길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기적이 있다면 하나님이 인도하여 주시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기적으로 인도하여 주시고 계심을 우리는 125억을 치루면서 순간순간 체험하였습니다.
제1차 중도금을 치루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체험하였습니다.
1월 10일 주일 10억원을 치루어야 합니다. 1월 9일은 토요일입니다. 1월 8일 날이 밝자 7천만원 정도 부족하였습니다. 나는 교회를 떠나지 않고 하나님께 10억을 채워 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 분 한 분이 1,000만원, 500만원을 들고 나를 만나러 왔습니다.
12시가 되자 10억이 되었습니다. 10일에 주려고 하던 중도금을 8일 지불할 수 있었습니다.

2차 중도금 10억을 치룰 때는 더 확실한 하나님의 섭리를 보았습니다.
2월 10일이었습니다. 건축위원회에서 10억원을 다 맞추어 놓았는 데 한 분이 갑자기 10억을 못 맞추겠다고 9일 밝히는 것이었습니다. 갑자기 1억을 만들 수가 없어서 10일 중도금 날자를 어길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간을 조리는 안타까운 순간이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상대방 김 완식 목사님이 너그러운 마음으로 양해해 주었습니다. 고마웠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새벽기도 시간이었습니다. 9천만원이 부족하였습니다. 구할 길이 없었습니다. 새벽기도 시간에 김 동수 목사님이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성령님은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올라가서 기도를 부탁하거라.> 나는 강대상으로 올라 갔습니다. 목회하면서 다른 목사에게 설교를 시키고 도중에 중단시킨 것을 처음이었습니다.
나는 강대상에 서서 말했습니다.
<내가 목회하면서 이렇게 설교를 중단시키고 갑자기 선 것은 처음입니다. 왜 강대상으로 올라 왔을 가요? 성령님이 9천만원 부족한 것을 알리고 기도를 부탁하라고 말씀하셔서 올라 왔습니다.>
그리고 사정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데 한 집사님이 집에 가서 돈을 가지고 왔습니다. 한 분이 기도하는 내게 와서 5천만원을 12시까지 가지고 오겠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교회 교인인데 우리 교회에서 새벽제단을 쌓고 있는 집사님이 1천만을 가지고 왔습니다.
12시가 되자 10억이 되었습니다. 불과 몇 시간동안에 9천만원이 이루어졌습니다. 기쁨으로 10억을 들고 달렸습니다. 그 후에 이 분 저 분이 더 헌금한 것이 2,800만원이었습니다.
나는 1차 중도금, 2차 중도금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두고 두고 이야기하고 싶을 정도로 간증거리가 생겼습니다. 1차 중도금은 2일 먼저 주고, 2차 중도금은 2일 늦게 주었습니다. 모두가 정확한 주고 받는 법칙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고 하는 길로 가면 기적이 있고 표적이 있습니다.
그 길,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는 길입니다.

종교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공간종교(空間宗敎)와 시간종교(時間宗敎)가 있습니다. 공간종교의 대표적인 것이 불교입니다. 세속이라는 공간을 떠나 산속이라는 공간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장소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공간종교가 아닙니다. 어느 곳이든지 하나님이 임재하고 계십니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천국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곳이 지성소입니다. 공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시간에 그 곳에 역사하는 시간이 중요합니다.
항상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가게 되면 하나님이 항상 인도하여 주십니다.

3. 그 길, 축복의 길.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는 길, 가나안으로 가는 믿음의 길은 축복의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라는 길로만 가면 하나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목적지가 축복이면 가는 길은 축복의 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0년 살던 애급 땅을 떠나 가나안으로 갈 때에 꼭 구름기둥만 따라 갔습니다.
모세가 마음대로 인도하지 않았습니다.
12 족장들이 회의로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평탄한 길로 순조롭게 간 것도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원하는 길로 가지도 않았습니다.
이미 난 길로 가지도 않았습니다.
꼭 구름기둥이 가는 길로만 갔습니다.
알고 보니 그 길은 축복의 길이었습니다.

부모의 최고의 소원은 자녀가 잘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최고의 소원은 우리가 잘 되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최고로 관광객이 많은 교회는 강변교회입니다. 날마다 관광객으로 북적거리는 교회입니다. 나는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기 위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성막을 잘 복원시키고, 박물관을 잘 만들어 놓고 싶습니다.
강변 교회는 종이 68개가 달려 있습니다. 때때로 아름다운 종소리를 울려 줍니다.
120년 전에 지어진 교회입니다. 그 교회를 건축할 때 아름다운 이야기 하나가 있습니다.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가난하였습니다. 학교도 못 가고 9살 때부터 가게에 취직하여 물건을 팔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재산이 두 개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정직>이고 다른 하나는 <절제>였습니다. 그 소년은 개미처럼 부지런히 살았습니다. 돈을 열심히 모았습니다. 그 교회가 건축할 때 전 재산 4억불 약 4,000억원을 헌금하였습니다.
그의 손자가 미국 최고 부자가 된 록펠러입니다. 록펠러는 성공의 비결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을 건축한 분은 우리 할아버지였고 그 축복을 받은 사람은 그의 손자 나였다.>
하나님에게는 공짜가 결코 없습니다.
하나님의 집을 사랑하는 자를 하나님은 사랑하여 주십니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한 대학생이 우연히 채플에 참석하였습니다. 이 청년은 기독교 계통 대학에 학점을 따기 위 하여 갔다가 채플에 참석한 것이었습니다. 학생들은 채플시간에 의무적으로 마지 못 해 앉아 있으면서 비아량거리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열정적으로 설교한 후에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앞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아무도 나오는 이가 없었습니다. 학생들은 낄낄 웃으면서 그 청년 옆구리를 툭 쳤습 니다.
<어이. .예수가 자네를 부르는 군. 빨리 나가 보라구. 혹시 장학금을 줄 지 알아?>
학생들은 책상을 치며 웃었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 마음속에는 주님이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곧 일어나더니 목사님 앞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영접하겠노라고 말했습니 다. 그 청년이 바로 스탠리 죤스 박사였습니다. 그는 후에 힌두교 국가인 인도에서 수십만명 에게 복음을 전한 복음의 용병이 되었습니다. 큰 영적 거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그 길로 가면 축복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그 길은 바다도 막지 못 하는 길이었습니다.
그 길, 지나놓고 보아야 알 수 있는 길입니다.
그 길,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입니다.
그 길, 축복의 길입니다.

출처/강문호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