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은 어떻게 하나님의 복을 받았나?  (창25:28-34)


성경에 많은 인물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 모세, 다윗, 바울과 같은 위대한 신앙의 인물들이 있는가 하면, 저주받은 인생을 산 가룟 유다, 빌라도와 같은 인물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 우리의 모습과 인생을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이 있다면 단연 야곱을 들 수 있습니다. 야곱의 대한 기록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참으로 우리 인생과 흡사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야곱은 복을 받기 위해서 속이기도 하고, 또 속아 넘어가기도 하고 또 열심히 살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기억하기도 하고, 때로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기도 하고, 그러다가 다급해 지면 인간의 잔꾀를 부리다가 잘 통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기도로 메어 달리기도 하는 등 이러한 모습들은 어쩌면 우리들의 살아가는 모습과 그렇게도 닮은꼴인지 모르겠습니다.

야곱은 이렇게 복을 받기 위해서는 무척이나 몸부림을 치면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고야 말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밤부터 시작되는‘2006 축복성회’를 앞두고 이번 성회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은혜를 받으며 또한 금년에 축복을 받을 것인지에 대해서 축복의 사람 야곱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면서 야곱의 삶을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첫째, 야곱은 처절한 투쟁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쟁취했습니다.
야곱은 이삭의 쌍둥이 아들입니다. 형이 에서이고 자신은 동생으로서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때문에 야곱은 장남으로 태어나지 못한 것을 매우 분통스럽게 여기면서 장남의 명분을 무척이나 사모한 사람이었습니다. 왜 그랬냐하면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었습니다.

야곱 당시는 족장시대였습니다. 족장시대는 아버지가 자신이 죽기 전에 장남에게 축복 권을 행사했습니다. 그래서 장남은 동생들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얻을 수가 있는 권리가 있었고 재산분배를 할 때도 동생들보다 훨씬 더 많은 유산을 상속받을 수 있었습니다.

장남의 이러한 특권은 야곱의 아들들에게서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야곱의 열 두 아들 가운데‘르우벤’이 장남이었습니다. 그러나 르우벤은 아버지의 첩인‘빌하’와 간통을 했기 때문에 장남의 명분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래서 실질적은 장자권이 ‘라헬’의 첫째 아들인‘요셉’에게로 넘어가게 됩니다. 요셉이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장자 권을 물려받은 것은 그의 어머니‘라헬’이 첩이 아닌 정실부인이었고 요셉은 라헬의 첫 아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요셉은 실질적인 장자 권을 얻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열 두 지파 가운데 두 개의 지파를 차지하게 됩니다. 바로 므낫세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인데 므낫세와 에브라임은 요셉의 아들입니다. 요셉은 장자 권을 얻음으로 두 개의 지파를 차지하는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장남이라고 해서 모두 똑 같은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부자 집에서 장남으로 태어나면 그만큼 많은 것을 차지할 수 있겠지만 가난한 집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봐야 물려받을 것이 뭐 있겠습니까? 그래서 같은 장남이라도 유복한 집안에 장남으로 태어나는 것이 더 축복이 됩니다.

그렇다면 족장시대에는 누구의 장남으로 태어나는 것이 가장 큰 축복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장남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엄청난 축복을 약속하셨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독자 이삭의 장남으로 태어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모든 축복을 자동으로 물려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축복이 무엇입니까? 창세기를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얼마나 많은 축복을 약속하셨는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말씀이 창세기 12장2-3절이 말씀입니다. 우리 함께 읽어보겠습니다.“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이 말씀이 바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축복의 내용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단순히‘복을 주겠다’고 하시지 않으시고“복의 근원이 될 것” 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여러분, 복이 더 좋습니까? 복의 근원이 더 좋습니까? 당연히 복의 근원이 더 좋은 것입니다.

‘복의 근원’은‘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어떻게 복의 근원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인간 아브라함에게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고 축복하셨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으로부터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는 축복을 받은 사람은 아브라함 밖에는 없습니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축복하신 기사가 많이 있지만 참으로 아브라함에게 하신 축복의 말씀보다 더 큰 축복의 말씀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이 자기 아들 중 한 사람에게 축복 권을 행사하면 그 아들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이 축복을 이어받게 됩니다. 이삭은 당연히 장남에게 이 축복 권을 행사할 것이므로 이삭의 장남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굉장한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자기가 장남으로 태어나지 못한 것을 무척이나 마음 아파하며 속상해하고 분통스러워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형과 아버지를 속인 끝에 마침내 장남의 명분과 축복을 가로채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와 같지 않습니까? 축복을 차지하기 위해서 투쟁하는 것으로 인생의 대부분을 보내고 있습니다. 방법이 옳고 그르냐를 논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축복을 향한 인간의 열망, 그리고 그 축복을 위한 투쟁자체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천국이 침노하는 자의 것인 것처럼 축복은 투쟁하는 자의 것입니다. 축복 받고자 노력하고 간구하는 자의 것입니다. 야곱처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쟁취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야곱은 이후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그리고 형 에서를 만나러 가는 과정에서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됩니다. 축복을 받고자 투쟁을 하되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좇아서 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축복 받는 삶이되기를 원하신다면 여러분의 인생을 축복을 위해 투쟁하는 인생으로 바꾸어 놓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 안에서 야곱처럼 투쟁하십시오, 노력하십시오, 그러면 얻을 것입니다.

둘째, 결국 야곱은 자기 소원대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야 말았습니다.

먼저 물질의 복을 받았습니다. 야곱이 자기를 죽이려한 형 에서를 피해 요단강을 건너갈 때는 가진 것이라고는 지팡이 하나 밖에는 없었지만, 그러나 20년 후 얍복 강을 건너 고향 땅으로 돌아올 때는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가축을 이끌고 왔습니다.

창32:14 이하에는 야곱이 에서의 마음을 풀기 위해 보낸 선물의 수효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 수효가 실로 엄청납니다. 그러니 선물이 이 정도라면 실제 야곱이 가지고 있는 가축 떼가 어느 정도였겠습니까? 당시 히브리인들은 가축을 기르는 목축업에 종사했기 때문에 가축의 수가 바로 부의 잣대였습니다.

다음으로 자녀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야곱은 아들만 해도 12명을 낳았습니다. 요즘은 많이 달라져서 자녀를 많이 낳지 않지만 당시에는 자녀를 많이 낳는 다는 것은 대단한 축복이었습니다. 아들을 많이 낳으면 그만큼 자손이 번창 하여 큰 민족을 이룰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에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시127:4-5)라고 했습니다.

셋째는 장례식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은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 가운데 가장 화려하고 성대한 장례식을 치른 사람입니다. 창세기 50장에 보면 야곱의 장례의 기록이 나오는데 이 기록에 의하면 야곱이 죽었을 때, 애굽 사람들이 70일 동안을 애곡했다고 했습니다(3절). 그리고 매장지인 막벨라 굴로 향할 때는 애굽 왕 바로의 모든 신하와 바로 궁의 장로들과 애굽 땅이 모든 장로들이 다 따라갔다고 증거합니다(7절). 이 뿐만 아니라 심히 많은 병거와 기병들이 장례 행렬을 호위했다는 것입니다(9절).

이것은 야곱의 장례식이 얼마나 화려하고 성대 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야곱은 죽은 후에도 하나님의 축복을 크게 받은 축복의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들도 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축복을 풍성히 누리는 축복받은 인생들로 바뀌어지기를 축원합니다.

셋째, 야곱은 사모하는 마음으로 이 축복을 받았습니다.
본문 34절을 보면 야곱은 형 에서에게 떡과 팥죽을 주고 장자 권을 삽니다. 에서에게 맹세까지 강요합니다.(33절) 그런데 이 행동이 옳은 것입니까? 누가 봐도 야곱의 행동은 형의 약점을 이용한 비난받아 마땅한 비열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날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은 야곱의 이 야비하고 비열한 행동이 아닙니다.

우리도 야곱처럼 이런 방법을 배워 축복받자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본문에 이렇게 비열한 야곱의 행위를 숨김없이 그대로 기록해 놓으신 것은 야곱의 소행을 본받으라는 것이 아니라 야곱의 하나님에 대한 갈망, 그 사모함을 본받으라는 뜻입니다.

비록 야곱이 하나님의 축복이 자기에게 이루어지기를 믿음으로 기다리지 못하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취하려는 잘못을 범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만큼 야곱이 하나님의 축복을 갈망했다는 사실입니다. 야곱은“나는 하나님의 축복이 없이는 절대로 살아갈 수 없다”는 인생관을 가지고 하나님의 축복에 목숨을 내건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야곱의 행적을 읽을 때 많은 회의를 느끼곤 했습니다. 그리고 비위가 상할 때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본문의 내용 이후에 전개되는 내용에서 보면 야곱의 여러 가지 부족한 면을 보게 됩니다.

형을 이용하더니 아버지를 속이고 그것도 모자라 나중에는 형과 재회하는 장면에서 가족들을 자기에 앞서서 사지로 내몰고..... 어떻게 사람이 이런지 뿐만 아니라 외삼촌의 집에서 20년을 사는 동안에도 외삼촌을 속여 가면서 재산을 긁어모았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결국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야 말았습니다. 큰 축복을 기어이 받고야 말았습니다. 여러분, 그 힘 그 비결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큰일입니다. 사실이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형을 기만하고 아버지를 속이고 하면서까지 얻은 것이라고는 자신도 속임을 당하고 자칫 형의 손에 비참한 종말을 맞이해야하는 위험뿐이었습니다. 그렇게까지 수단방법 안 가리고 노력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축복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야곱이 축복을 받은 것은 바로 이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사모함’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것 하나 보시고 야곱을 축복하신 것입니다. 이것 빼고는 사기꾼 야곱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 할만한 조건이 없습니다. 만일 야곱에게 이 사모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 그렇게도 처절한 몸부림을 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편107편 9절은“하나님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모하는 자에게 풍성한 은혜를 채워주십니다.

야곱처럼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싶은 분들은 야곱처럼 하나님의 축복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야곱의 방법을 취하지 말고 야곱의 마음을 취하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하나님의 축복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투쟁하는 자가 쟁취하는 것입니다.



출처 : 유풍덕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