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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성된 믿음 (계 2:10)
지난주에는 한 해 동안 주님의 몸 된 효민교회를 받들어 섬길 일군들에게 임명장을 드렸습니다. 작년 한 해 동안 하나님은 우리교회에 많은 부흥을 허락하셨습니다. 올해에는 더 큰 부흥이 기대됩니다. 교회의 부흥과 더불어 우리교회가 꿈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교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직분자들의 역할이 절대적입니다. 교회의 직분은 세상적인 직분과 같지 않습니다. 교회의 직분자들이 감당해야할 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의 고귀한 몸을 위해 우리들이 부름을 받았고, 부족하기 그지없는 우리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일에 쓰임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맡은 일에 충성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구원받은 성도의 본분입니다. 마땅히 행해야할 도리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말씀하시기를“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서머나 교회를 향해 하신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아시아 일곱 교회 중 책망을 듣지 않고 칭찬만 들은 교회는 필라델피아 교회와 서머나 교회입니다. 서머나 교회 감독이었던 폴리갑은 사도요한의 친구였는데 86세에 화형을 당해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그가 죽기 전 지방 총독이 그를 존경했으므로 그를 살리고자, 그리스도를 한 번만 욕하면 죽이지 않고 살려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폴리갑은 말하기를“내가 86년 동안 그를 섬겨왔으나 그분은 한번도 나를 버리신 적이 없는데 내가 그를 어떻게 모독하겠는가?”라고 했습니다. 그 후 폴리갑은 화형으로 순교를 당했습니다.
서머나라는 말의 뜻은“쓰다”라는 의미입니다. 믿음 때문에 쓰디쓴 고통을 당하고 핍박을 받았습니다. 당시에는“황제가 주님이다(Caesar is Lord)”라고 고백하도록 강요를 당했는데, 그리스도인들은“예수님이 나의 주님이다(Jesus is my Lord)”라고 끝까지 고백하며 핍박을 받았고 순교도 했습니다. 이 서머나 교회를 향해 예수님께서 칭찬하시면서 요한계시록 2:10에“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하셨습니다.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충성하게 되어 있습니다.“충성(Faithful)”이란 말과“믿음(Faith)”이란 말은 어원이 같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충성하게끔 되어 있고, 진실한 믿음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충성하지 않습니다. 충성된 성도는 어떠한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요?
1. 충성은 희생을 감수합니다.
희생 없이 충성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죽도록 충성하라”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죽임을 당하는 순간이 오더라도 충성하라는 뜻입니다. 런던의 박물관에“충성”이라는 제목의 그림이 있는데, 이것은 AD 79년 이태리의 폼페이 도시가 화산재로 뒤덮일 때의 광경을 그린 그림입니다. 사치와 허영과 음란의 도시인 폼페이가 화산재로 뒤덮일 때 다른 사람들은 모두 생명을 건지고자 도망을 칩니다. 그러나 성문을 지키는 한 병사는 그 와중에서도 도망을 가지 않고 자기가 지켜야할 그 자리에 꿋꿋이 서 있다가 그 뜨거운 화산재에 싸여 죽는 장면의 그림입니다. 이것이 곧 충성입니다. 희생 없는 충성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교회가 이만큼 발전하게 된 것도 각 분야에서 남이 알게 모르게 희생하며 충성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일은 세상 사람들은 편히 쉬는 날입니다. 육신의 안식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주말입니다. 그러나 충성된 하나님의 자녀들은 온 종일 교회에서 봉사합니다. 차량으로 봉사하는 분들, 추운 날 아침 일찍 교회 문 앞에 서서 차량을 안내하시는 분들, 남달리 교회에 일찍 와서 성가를 연습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은 예배를 마치고 다 집으로 돌아갔는데 밤늦게 까지 남아 찬양을 연습하므로 은혜를 끼치는 찬양대원들, 어린 생명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아침 일찍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며 기도하는 교회학교 교사들, 온종일 수많은 사람들의 식사를 위해 주방에서 봉사하시는 분들, 평일에도 성전을 드나들며 성전을 청결하게 하기위해 청소로 봉사하는 분들, 복음을 전하고자 아파트 집집을 다니며 핀잔을 받아가며 전도한 전도대원들, 이러한 성도들의 숨은 희생과 충성이 있었기에 교회가 운영되며 부흥되는 것입니다.
충성은 희생 없이 할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5:58에 권면하시기를“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하셨습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한 희생과 충성은 결코 헛되지 않고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세상의 것과는 비교할 수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말씀하시기를“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하셨습니다.
2. 충성은 변하지 않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은“죽는 순간 까지”라는 뜻도 있지만“죽음이 앞에 닥치더라도”변절하지 않고, 믿음을 지키는 것을 가리킵니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평안할 때나 환란의 때에나 변함없이 믿음을 지켜 나가는 것이 충성입니다. 기분이 좋고 내 마음에 맞으면 반짝 열심을 내다가 내 마음에 맞지 않거나, 욕을 먹거나, 억울하게 오해를 받으면 직분이고 책임이고 다 팽개치는 것은 충성이 아닙니다.
로마 근교에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의 핍박을 피하여 땅굴 속에 들어가 살다가 죽은 카타콤이 있습니다. 햇빛도 없고 습기 찬 그 지하 동굴에서 처참하게 살다가 죽으면 그 동굴 한쪽에서 장사를 지냈습니다. 200년이 넘도록 그 생활이 계속되었는데, 그때 죽은 순교자가 175만~400만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그들이 늘 암송한 말씀이“복음을 인하여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는 디모데후서 2:9의 말씀이었습니다.
중세기 암흑시기에 믿음을 지키다가 죽은 사람이 5천만 명 가량이나 된다고 합니다. 중국이 공산화 된 다음에 순교한 사람이 백만 명 이상이나 되며, 아프리카 내전과 혁명 때에 믿음을 지키다가 순교한 사람이 수천 수만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믿음을 배반하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그 혹독한 온갖 고문을 당하다가 피투성이가 되어 기절하기를 수없이 하고, 손톱 발톱이 빠질 정도로 대나무 꼬챙이로 찔러도 변절하지 않고 믿음을 지키다가 그 추운겨울 옥사했습니다. 신사 앞에 머리 한번만 숙이면 그 고통을 당하지 않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편안히 행복하게 살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죽기까지 믿음의 절개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충성입니다.
3. 충성은 겉과 속이 같습니다.
“충성(忠誠)”이란 한자의 의미를 보면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충(忠)”자는“가운데(中)”과“마음(心)”자가 합해진 글자입니다.“성(誠)”자는“말씀 (言)”과“이룰 (成)”자가 합해진 글자입니다. 그러므로 말과 행동을 같이하고 중심을 바치는 것이 충성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해관계에 따라 말과 행동이 다르고 형편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하며 손바닥 뒤집듯 하는 것은 충성과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눈가림만 하고 사람들이 보는 데서는 무엇을 하는 척하고, 보이지 않으면 게으름을 피우는 것은 충성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6:6~7의 말씀에“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하셨습니다.
골로새서 3:22에도“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하셨습니다.
충성된 그리스도이은 항상 정직하고 진실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가장 미워하시고 저주하신 사람은 강도나 살인자나 창녀가 아니라, 겉으로는 거룩한 체하고 속에는 온갖 탐욕으로 가득한 제사장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이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위선을 지적하시면서“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라고 저주하셨습니다. 외식이란 “위선자”란 뜻입니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서양의 어느 귀족의 집 현관에 이상한 동상이 하나 서있었다고 합니다. 얼굴 한 쪽은 친절하게 웃고 있는 얼굴이고, 다른 한 쪽은 찡그리고 비죽거리는 얼굴 모양입니다. 그 집 주인은 하인들이 주인이 보는 앞에서는 굽신거리고 상냥하지만 돌아서면 찡그린 얼굴로 입을 비죽거리고 욕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앞에 서서 말할 때 다르고, 돌아서서 말할 때 다른 것은 참된 충성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당시, 거룩한 척 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그들이 멸시하는 세리, 창녀, 도둑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더 가깝다고 하셨습니다. 그 까닭은 세리와 창녀와 도둑들은 겉도 나쁘고 속도 나쁘지만 위선의 껍질을 뒤집어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늘 진실하게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4. 충성은 게으르지 않습니다.
게으른 사람이 충성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게으름은 인생의 최대의 적이라고 합니다. 게으른 사람은 마귀도 쓰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죄 같지 않으면서 큰 죄가 게으름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하신 말씀 가운데, 어떤 사람이 먼 나라에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금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씩 나눠주고“내가 다시 돌아 올 때까지 열심히 장사해서 이문을 남기도록 하라.”하고 떠났습니다. 다시 돌아와 보니까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즉시 가서 부지런히 장사하여 갑절을 남겼고, 두 달란트 받은 자도 역시 열심히 장사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그대로 땅에 묻어 두었다가 내어 놓으면서“당신은 무서운 사람인지라 잘못해서 밑지면 어떻게 하나 해서 땅에 묻어 두었다가 그대로 가져왔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때에 주인이 대노해서 책망하기를“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 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태복음 25:26~30)하셨습니다. 게으른 사람을 가리켜 그냥“게으른 종아”라고 하지 않으시고“악하고 게으른 종아”하셨습니다. 개으름을 악하다고 하셨습니다.
이 달란트 비유를 보면 갑절을 남긴 충성된 두 사람은 말이 적습니다. 주인 앞에서“주인께서 주신 것으로 갑절을 남겼습니다.”라는 한 마디 뿐입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를 그대로 두었다가 가지고 온 게으른 종은 참 말이 많습니다.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마태복음 25:24~25) 라고 했습니다. 이 게으른 사람의 말을 분석해보면 자기를 변명하면서 주인에 대해서는 악평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곳에나 마찬가지입니다. 충성된 사람은 말을 많이 하지 않습니다. 대신 행동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게으른 사람은 그 반대입니다. 행동은 없습니다. 그러나 말은 몇 갑절 더 많이 합니다. 그러므로 말 많은 사람은 결코 충성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충성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말하기를“매일 인생의 마지막 날과 같이 여겨야 한다. 그리고‘나는 오직 한번만 인생을 산다’라는 각오로 매일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살아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의 공통점은 부지런한 사람입니다. 야곱은 외삼촌 집에서 열심히 머슴살이를 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풍성한 복을 받았습니다. 요셉 역시 무슨 일을 맡기든지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러한 요셉이 훗날 애굽의 총리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모세는 부지런히 처가의 양떼를 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목동의 일을 최선을 다해 감당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나라의 대왕의 되었습니다. 베드로도 열심히 고기잡이를 하다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수제자가 되었습니다.
게으른 사람이 어떻게 교회 봉사를 하겠습니까? 땀 흘려 한 일이 없으니 그 사람에게는 돌아갈 상급이 없습니다. 밤늦도록 자리에 누워 TV 채널만 돌리던 사람이 어떻게 새벽기도를 하겠습니까?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겠습니까? 게으른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은 말씀하시길“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에베소서 5:16) 하셨습니다.
영국의 한 왕자가 사냥을 나갔다가 길을 잃고 헤매는 중 James라는 한 목동을 만나서 길을 좀 안내해주실 부탁을 했습니다. 그 목동은 대답하기를“안 됩니다. 저는 남의 집 양을 치는 목동인데 양떼를 놔두고 길을 안내할 수 없습니다.”하고 거절했습니다. 월급이 얼마냐고 묻고 월급의 세배를 줄테니 좀 안내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 목동은 또 거절하면서“못합니다. 저는 이 양떼를 버리고 갈 수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총을 겨누면서“안내하지 않으면 총을 쏴 죽이겠다.”고 했습니다. 그는 역시 말하기를“예, 죽을지언정 당신을 따라가지 아니하고 양들을 돌보겠습니다. 그러나 길을 말로는 안내해 드리지요. 저 산을 세 번 넘은 후에 서족으로 계곡을 따라 20분정도 가면 도로가 나옵니다.”대답을 했습니다. 할 수 없이 왕자는 그대로 돌아갔습니다. 후에 그 왕자가 왕이 되자 James를 불러 재상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린도전서 4:2)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남달리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부족하기 그지없는 우리들에게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지체로 부르셔서 직분을 맡기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충성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충성으로 교회가 부흥되어 수많은 죽어가는 영혼들이 구원을 받게 됩니다. 우리의 충성으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의 충성은 훗날 우리가 받아 눌릴 상급이 됩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라디아 6:8-9)하셨습니다. 본문에는“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하셨습니다. 시편 101:6의 말씀에“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거하게 하리니”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해, 그리고 우리가 장차 받아 누릴 영광된 상급을 바라보며 충성을 다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이익로 목사 설교 중에서
지난주에는 한 해 동안 주님의 몸 된 효민교회를 받들어 섬길 일군들에게 임명장을 드렸습니다. 작년 한 해 동안 하나님은 우리교회에 많은 부흥을 허락하셨습니다. 올해에는 더 큰 부흥이 기대됩니다. 교회의 부흥과 더불어 우리교회가 꿈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교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직분자들의 역할이 절대적입니다. 교회의 직분은 세상적인 직분과 같지 않습니다. 교회의 직분자들이 감당해야할 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의 고귀한 몸을 위해 우리들이 부름을 받았고, 부족하기 그지없는 우리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일에 쓰임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맡은 일에 충성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구원받은 성도의 본분입니다. 마땅히 행해야할 도리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말씀하시기를“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서머나 교회를 향해 하신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아시아 일곱 교회 중 책망을 듣지 않고 칭찬만 들은 교회는 필라델피아 교회와 서머나 교회입니다. 서머나 교회 감독이었던 폴리갑은 사도요한의 친구였는데 86세에 화형을 당해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그가 죽기 전 지방 총독이 그를 존경했으므로 그를 살리고자, 그리스도를 한 번만 욕하면 죽이지 않고 살려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폴리갑은 말하기를“내가 86년 동안 그를 섬겨왔으나 그분은 한번도 나를 버리신 적이 없는데 내가 그를 어떻게 모독하겠는가?”라고 했습니다. 그 후 폴리갑은 화형으로 순교를 당했습니다.
서머나라는 말의 뜻은“쓰다”라는 의미입니다. 믿음 때문에 쓰디쓴 고통을 당하고 핍박을 받았습니다. 당시에는“황제가 주님이다(Caesar is Lord)”라고 고백하도록 강요를 당했는데, 그리스도인들은“예수님이 나의 주님이다(Jesus is my Lord)”라고 끝까지 고백하며 핍박을 받았고 순교도 했습니다. 이 서머나 교회를 향해 예수님께서 칭찬하시면서 요한계시록 2:10에“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하셨습니다.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충성하게 되어 있습니다.“충성(Faithful)”이란 말과“믿음(Faith)”이란 말은 어원이 같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충성하게끔 되어 있고, 진실한 믿음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충성하지 않습니다. 충성된 성도는 어떠한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요?
1. 충성은 희생을 감수합니다.
희생 없이 충성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죽도록 충성하라”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죽임을 당하는 순간이 오더라도 충성하라는 뜻입니다. 런던의 박물관에“충성”이라는 제목의 그림이 있는데, 이것은 AD 79년 이태리의 폼페이 도시가 화산재로 뒤덮일 때의 광경을 그린 그림입니다. 사치와 허영과 음란의 도시인 폼페이가 화산재로 뒤덮일 때 다른 사람들은 모두 생명을 건지고자 도망을 칩니다. 그러나 성문을 지키는 한 병사는 그 와중에서도 도망을 가지 않고 자기가 지켜야할 그 자리에 꿋꿋이 서 있다가 그 뜨거운 화산재에 싸여 죽는 장면의 그림입니다. 이것이 곧 충성입니다. 희생 없는 충성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교회가 이만큼 발전하게 된 것도 각 분야에서 남이 알게 모르게 희생하며 충성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일은 세상 사람들은 편히 쉬는 날입니다. 육신의 안식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주말입니다. 그러나 충성된 하나님의 자녀들은 온 종일 교회에서 봉사합니다. 차량으로 봉사하는 분들, 추운 날 아침 일찍 교회 문 앞에 서서 차량을 안내하시는 분들, 남달리 교회에 일찍 와서 성가를 연습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은 예배를 마치고 다 집으로 돌아갔는데 밤늦게 까지 남아 찬양을 연습하므로 은혜를 끼치는 찬양대원들, 어린 생명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아침 일찍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며 기도하는 교회학교 교사들, 온종일 수많은 사람들의 식사를 위해 주방에서 봉사하시는 분들, 평일에도 성전을 드나들며 성전을 청결하게 하기위해 청소로 봉사하는 분들, 복음을 전하고자 아파트 집집을 다니며 핀잔을 받아가며 전도한 전도대원들, 이러한 성도들의 숨은 희생과 충성이 있었기에 교회가 운영되며 부흥되는 것입니다.
충성은 희생 없이 할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5:58에 권면하시기를“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하셨습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한 희생과 충성은 결코 헛되지 않고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세상의 것과는 비교할 수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말씀하시기를“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하셨습니다.
2. 충성은 변하지 않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은“죽는 순간 까지”라는 뜻도 있지만“죽음이 앞에 닥치더라도”변절하지 않고, 믿음을 지키는 것을 가리킵니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평안할 때나 환란의 때에나 변함없이 믿음을 지켜 나가는 것이 충성입니다. 기분이 좋고 내 마음에 맞으면 반짝 열심을 내다가 내 마음에 맞지 않거나, 욕을 먹거나, 억울하게 오해를 받으면 직분이고 책임이고 다 팽개치는 것은 충성이 아닙니다.
로마 근교에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의 핍박을 피하여 땅굴 속에 들어가 살다가 죽은 카타콤이 있습니다. 햇빛도 없고 습기 찬 그 지하 동굴에서 처참하게 살다가 죽으면 그 동굴 한쪽에서 장사를 지냈습니다. 200년이 넘도록 그 생활이 계속되었는데, 그때 죽은 순교자가 175만~400만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그들이 늘 암송한 말씀이“복음을 인하여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는 디모데후서 2:9의 말씀이었습니다.
중세기 암흑시기에 믿음을 지키다가 죽은 사람이 5천만 명 가량이나 된다고 합니다. 중국이 공산화 된 다음에 순교한 사람이 백만 명 이상이나 되며, 아프리카 내전과 혁명 때에 믿음을 지키다가 순교한 사람이 수천 수만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믿음을 배반하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그 혹독한 온갖 고문을 당하다가 피투성이가 되어 기절하기를 수없이 하고, 손톱 발톱이 빠질 정도로 대나무 꼬챙이로 찔러도 변절하지 않고 믿음을 지키다가 그 추운겨울 옥사했습니다. 신사 앞에 머리 한번만 숙이면 그 고통을 당하지 않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편안히 행복하게 살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죽기까지 믿음의 절개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충성입니다.
3. 충성은 겉과 속이 같습니다.
“충성(忠誠)”이란 한자의 의미를 보면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충(忠)”자는“가운데(中)”과“마음(心)”자가 합해진 글자입니다.“성(誠)”자는“말씀 (言)”과“이룰 (成)”자가 합해진 글자입니다. 그러므로 말과 행동을 같이하고 중심을 바치는 것이 충성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해관계에 따라 말과 행동이 다르고 형편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하며 손바닥 뒤집듯 하는 것은 충성과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눈가림만 하고 사람들이 보는 데서는 무엇을 하는 척하고, 보이지 않으면 게으름을 피우는 것은 충성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6:6~7의 말씀에“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하셨습니다.
골로새서 3:22에도“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하셨습니다.
충성된 그리스도이은 항상 정직하고 진실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가장 미워하시고 저주하신 사람은 강도나 살인자나 창녀가 아니라, 겉으로는 거룩한 체하고 속에는 온갖 탐욕으로 가득한 제사장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이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위선을 지적하시면서“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라고 저주하셨습니다. 외식이란 “위선자”란 뜻입니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서양의 어느 귀족의 집 현관에 이상한 동상이 하나 서있었다고 합니다. 얼굴 한 쪽은 친절하게 웃고 있는 얼굴이고, 다른 한 쪽은 찡그리고 비죽거리는 얼굴 모양입니다. 그 집 주인은 하인들이 주인이 보는 앞에서는 굽신거리고 상냥하지만 돌아서면 찡그린 얼굴로 입을 비죽거리고 욕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앞에 서서 말할 때 다르고, 돌아서서 말할 때 다른 것은 참된 충성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당시, 거룩한 척 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그들이 멸시하는 세리, 창녀, 도둑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더 가깝다고 하셨습니다. 그 까닭은 세리와 창녀와 도둑들은 겉도 나쁘고 속도 나쁘지만 위선의 껍질을 뒤집어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늘 진실하게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4. 충성은 게으르지 않습니다.
게으른 사람이 충성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게으름은 인생의 최대의 적이라고 합니다. 게으른 사람은 마귀도 쓰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죄 같지 않으면서 큰 죄가 게으름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하신 말씀 가운데, 어떤 사람이 먼 나라에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금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씩 나눠주고“내가 다시 돌아 올 때까지 열심히 장사해서 이문을 남기도록 하라.”하고 떠났습니다. 다시 돌아와 보니까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즉시 가서 부지런히 장사하여 갑절을 남겼고, 두 달란트 받은 자도 역시 열심히 장사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그대로 땅에 묻어 두었다가 내어 놓으면서“당신은 무서운 사람인지라 잘못해서 밑지면 어떻게 하나 해서 땅에 묻어 두었다가 그대로 가져왔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때에 주인이 대노해서 책망하기를“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 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태복음 25:26~30)하셨습니다. 게으른 사람을 가리켜 그냥“게으른 종아”라고 하지 않으시고“악하고 게으른 종아”하셨습니다. 개으름을 악하다고 하셨습니다.
이 달란트 비유를 보면 갑절을 남긴 충성된 두 사람은 말이 적습니다. 주인 앞에서“주인께서 주신 것으로 갑절을 남겼습니다.”라는 한 마디 뿐입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를 그대로 두었다가 가지고 온 게으른 종은 참 말이 많습니다.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마태복음 25:24~25) 라고 했습니다. 이 게으른 사람의 말을 분석해보면 자기를 변명하면서 주인에 대해서는 악평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곳에나 마찬가지입니다. 충성된 사람은 말을 많이 하지 않습니다. 대신 행동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게으른 사람은 그 반대입니다. 행동은 없습니다. 그러나 말은 몇 갑절 더 많이 합니다. 그러므로 말 많은 사람은 결코 충성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충성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말하기를“매일 인생의 마지막 날과 같이 여겨야 한다. 그리고‘나는 오직 한번만 인생을 산다’라는 각오로 매일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살아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의 공통점은 부지런한 사람입니다. 야곱은 외삼촌 집에서 열심히 머슴살이를 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풍성한 복을 받았습니다. 요셉 역시 무슨 일을 맡기든지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러한 요셉이 훗날 애굽의 총리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모세는 부지런히 처가의 양떼를 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목동의 일을 최선을 다해 감당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나라의 대왕의 되었습니다. 베드로도 열심히 고기잡이를 하다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수제자가 되었습니다.
게으른 사람이 어떻게 교회 봉사를 하겠습니까? 땀 흘려 한 일이 없으니 그 사람에게는 돌아갈 상급이 없습니다. 밤늦도록 자리에 누워 TV 채널만 돌리던 사람이 어떻게 새벽기도를 하겠습니까?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겠습니까? 게으른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은 말씀하시길“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에베소서 5:16) 하셨습니다.
영국의 한 왕자가 사냥을 나갔다가 길을 잃고 헤매는 중 James라는 한 목동을 만나서 길을 좀 안내해주실 부탁을 했습니다. 그 목동은 대답하기를“안 됩니다. 저는 남의 집 양을 치는 목동인데 양떼를 놔두고 길을 안내할 수 없습니다.”하고 거절했습니다. 월급이 얼마냐고 묻고 월급의 세배를 줄테니 좀 안내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 목동은 또 거절하면서“못합니다. 저는 이 양떼를 버리고 갈 수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총을 겨누면서“안내하지 않으면 총을 쏴 죽이겠다.”고 했습니다. 그는 역시 말하기를“예, 죽을지언정 당신을 따라가지 아니하고 양들을 돌보겠습니다. 그러나 길을 말로는 안내해 드리지요. 저 산을 세 번 넘은 후에 서족으로 계곡을 따라 20분정도 가면 도로가 나옵니다.”대답을 했습니다. 할 수 없이 왕자는 그대로 돌아갔습니다. 후에 그 왕자가 왕이 되자 James를 불러 재상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린도전서 4:2)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남달리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부족하기 그지없는 우리들에게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지체로 부르셔서 직분을 맡기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충성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충성으로 교회가 부흥되어 수많은 죽어가는 영혼들이 구원을 받게 됩니다. 우리의 충성으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의 충성은 훗날 우리가 받아 눌릴 상급이 됩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라디아 6:8-9)하셨습니다. 본문에는“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하셨습니다. 시편 101:6의 말씀에“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거하게 하리니”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해, 그리고 우리가 장차 받아 누릴 영광된 상급을 바라보며 충성을 다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이익로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