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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 시 121:1~8)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온갖 죄악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어디를 가도 안심하고 살 수 있는 곳이 아무 데도 없습니다. 예기치 못했던 불행과 재난이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습니다. 이번에 동남아에서 일어난 지진과 해일 재앙을 보십시오. 자연재해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가를 실감케 합니다.
해일에 휩쓸려 희생당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해변에서 물놀이를 즐기는 데만 몰두해 있었지, 그날 그 같은 재앙을 만날 것을 예상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는 태국에 신혼여행을 갔다가 참변을 당한 사람들도 있어서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우리가 만나는 불행은 자연재해뿐이 아닙니다. 우리나라는 몇 년 전에 경제위기를 만나 IMF의 통제를 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수많은 회사가 도산하고 장사가 안 돼서 얼마나 어려웠는지 모릅니다. 졸지에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수십 년 계속해서 고도성장을 구가하던 한국인들이 쓰디쓴 맛을 보았습니다.
인생의 고난은 누구에게나 다가옵니다. 여기에는 그리스도인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아니, 그리스도인이기에 세인들이 겪지 않는, 신앙 문제로 인한 핍박을 받기도 합니다.
갑작스레 문제를 만나게 되면 누구나 당황하고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그러한 때에 오늘 봉독한 시편 121편은 우리에게 큰 위로와 힘을 줍니다.
첫번째로, 우리가 의지해야 할 분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누구나 곤란한 일을 당하게 되면 자기를 도와 줄 사람을 찾습니다. 부모 형제나 친구들을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특히, 믿는 사람들은 자기 가족을 돌아보는 데 힘써야 합니다(딤전 5:8).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계속해서 우리와 함께 하며 도움을 줄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부모는 돌아가시고, 형제들은 제 살길을 찾아 뿔뿔이 헤어지고, 친구들은 멀어지게 마련입니다. 설령 우리와 함께 있어 줄지라도 모든 재난에서 우리를 도와 줄 것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도움을 주고 싶어도 그만한 능력이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람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욥의 세 친구를 보십시오. 그들은 욥의 불행을 듣고 찾아왔으나 아무 도움도 주지 못했습니다. 이번 지진이 났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덮쳐오는 해일에 사랑하는 가족이 휩쓸려가는 데도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성도님들께서는 10. 26 사건을 잘 아실 것입니다. 대통령이 자기 심복 중에 심복인 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 때 그 장소에는 경호실장이 동석했으나 비극을 막지 못했습니다. 너무나 믿었던 사람에 의한 도발이었기에 대비를 못한 것입니다. 바로 이런 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시 146:3,4)라고 말씀합니다.
시인은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고 말했습니다. “산을 향하여 눈을 든다” 함은 더 이상 기댈 곳이 없어진 상황에서 취하는 태도입니다. 시인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강구해 보았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그 때 그는 좌절하지 않고, 산을 향하여 그의 시선을 돌렸습니다. 시인이 바라다본 산은 예루살렘의 시온 산을 말합니다. 그 산 위에는 하나님의 성전이 서 있습니다.
시인이 성전을 향하여 눈을 든 까닭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처럼 믿음이 있는 사람은 곤란한 문제를 만났을 때 자신을 의지하거나 사람들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그는 하나님의 전이 있는 산을 향하여 눈을 듭니다. 다시 말해서,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시인은 산을 바라보면서 자문자답합니다.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이십니다. 곧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고 명하시자, 빛이 생겨났습니다.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었습니다. 온 우주 삼라만상이 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문제가 아무리 클지라도 하나님께는 조금도 문제가 될 리가 만무합니다.
혹 보면, “내 일은 내 힘으로 해결해야지, 구태여 하나님의 도움을 구할 것이 어디 있느냐?”고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만약 그렇다면 그 사람은 인생의 곤란함을 미처 맛보지 못한 사람이라고 밖에 볼 수 없을 것입니다. 한창 나이의 젊은이들은 자신의 완력을 믿고 으스댑니다. 그러나 사자와 맞닥뜨려서도 용맹을 뽐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한 때 나폴레옹은 “나의 사전에는 불가능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일개 초급장교에서 출발해서 프랑스의 황제가 되고 전 유럽을 손에 넣을 때까지는 그랬습니다. 그러나 워털루 싸움에서 패하고 무인고도에 유배되어 아무 소망도 없는 형편에서도 자기에게는 불가능이 없다고 주장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 말은 한갓 만용에 불과합니다.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라는 말이 있습니다. 힘이 산이라도 빼어 던질 만하고, 세상을 덮을 정도로 기력이 웅대함을 일컫는 말로서, 중국 역사에 나오는 항우에게 주로 사용합니다. 그 당시 힘으로 항우를 대적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힘을 믿고 기고만장했습니다. 그러나 천하장사 항우도 결국 전쟁에 패하여 자결하고 말았습니다. 항우와 같은 장사도 어찌해 볼 수 없는 일이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불완전하고 연약하며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레미야 9장 23절, 24절에는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인생의 위기를 만났을 때 그 눈을 땅을 향하고 사람을 향하여 도움을 구하는 사람은 낭패를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고난을 만났을 때 눈을 들어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앙망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간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소망이 있습니다.
유다 왕 히스기야 때에 예루살렘이 앗수르 대군에 의해 포위된 적이 있었습니다.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에 등잔불과 같이 위태로운 지경에 처했습니다. 앗수르 왕은 빨리 항복하지 않으면 성을 함락시키겠다고 위협합니다. 도무지 위기를 모면할 방책이 없었습니다. 이럴 때 다른 왕들이라면 아마 애굽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아니면 앗수르에게 항복하는 편을 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그런 방법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신하들을 거느리고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항복을 강요하는 앗수르 왕의 편지를 하나님 앞에 펴 놓고 엎드려서 눈물로 간구했습니다. 그리하였더니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그 밤에 하나님의 사자가 앗수르 진을 치니 아침에 일어나 본즉 185,000명의 적군이 모두 사늘한 시체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로써 히스기야는 화살 한 대 쏘지 않고 칼 한 번 쓰지 않고 대승리를 거두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인생의 위기를 만났을 때 자신의 처지를 바라보고 절망하지 마시고 히스기야와 같이 눈을 들어 하나님을 앙망하시기 바랍니다. 문제를 만났을 때만 그럴 것이 아니라, 평온한 때에도 눈을 들어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할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모든 시련을 극복하고 승리케 될 것입니다.
두번째로,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방법에 관해 살펴봅시다.
우리가 눈을 들어 하나님을 앙망할 때, 하나님께서는 어떤 방법으로 우리를 도와주실까요? 첫째로, 실족치 않게 해 주십니다. 3절에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치 않게 하시며”라고 했습니다. 사전적인 의미로 ‘실족’이란, 발을 잘못 디뎌 넘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의미로는 우리가 시련을 만났을 때 끝까지 믿음으로 이기지 못하고 시험에 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중도에 세상으로 가 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서 예수님 때문에 실족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그들의 예수님을 믿은 동기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떡을 얻어먹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라 다녔던 유대인들과 같이 오늘날도 이 세상 것을 얻을 목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생의 말씀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현세적인 축복만을 받기 원해서 종교생활을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결국 생명의 주님을 믿지 못하고 실족해서 도로 세상으로 가버리고 맙니다.
우리는 복음을 바로 알고 믿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목적은 영혼의 구원을 얻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시험을 당해서 실족하지 않으려면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세상 유혹과 마귀의 시험에 실족치 않도록 우리를 붙들어 주십니다.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 14:12)하신 대로 우리가 자기 지혜를 믿고 행하면 결국 실족하여 패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눈을 들어 하나님을 앙망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걸음을 지켜주심으로 실족치 않고 의와 평강의 길로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위험에서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3절에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고 했습니다. 현대는 과거처럼 호랑이나 늑대와 같은 맹수들로 인한 위험은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과거보다 안전한 세상이 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과거보나 더 위험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문밖만 나서면 질주하는 수많은 차량을 대합니다. 언제라도 사고가 날 여지가 있습니다. 건물들이 밀집되어 있고, 집집마다 전기 제품이 부지기수이고, 보일러와 가스 주방기기가 설치되어 있어서 누전이나 가스 누설로 인한 화재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생활이 편리해진 대신에 사고가 날 확률도 높아졌습니다.
자연재해나 교통사고나 화재 보다 더 무서운 것은 사악한 사람들에 의한 범죄입니다. 얼마 전에 여자들만 수십 명을 해친 범인이 체포되었습니다 마는, 요즘은 개인적인 원한도 없이 무고한 사람들을 해치는 패역한 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아직 범인을 잡지 못한 살인사건들이 누적되어 갑니다. 특히, 우리 사회는 인신매매가 공공연히 자행되는 사회입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타락했는지 성매매금지법이 시행되자 이에 대한 항의가 끈질기게 지속되고 있습니다. 마음 놓고 밤길을 갈 수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 사회는 부정부패가 심해서 자의건, 타의건 간에 부정에 연루되기 쉽습니다. 도처에 우리를 넘어뜨리고 망하게 만들려는 함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인구는 많고, 사회는 복잡해져 가는데 사회안전망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심약한 사람들 중에는 공항장애를 일으켜서 혼자서 외출도 하지 못하고 불안 속에서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 같은 세상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불꽃같으신 눈으로 우리를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유능한 경호원이라도 졸다가 낭패를 당할 때가 있지만, 우리 하나님께서는 졸지도 아니하시며 그의 자녀들을 보호해 주십니다. 또한 이 세상에 아무리 강한 자라도 하나님처럼 강할 수는 없습니다.
시편 91편을 지은 성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1)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2)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3)이는 저가 너를 새 사냥군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4)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나니 5)너는 밤에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과 6)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7)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하리로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악인들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항상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성도님들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 3절에 하나님을 일컬어 “너를 지키시는 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보호자가 되셔서 지켜주시면 누가 감히 우리를 해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무엇이기에 하나님께서 이같이 대우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셔서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앙망하는 성도들에게 평안을 주십니다. 5절에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그늘의 고마움을 절실히 느끼지 못하고 살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늘의 고마움을 잘 알고 있습니다. 특히, 광야에서는 그늘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한 낮에 쨍쨍 내리쬐는 햇빛으로 곤비한 때에 큰 바위를 만나 그 그늘에 들어가면 얼마나 시원한지 모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생활을 할 때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그들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눈을 들어 하나님을 앙망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참 평안을 주십니다.
엄마 품에 안긴 갓난아이는 주위 여건이 어떠하든지 간에 한없는 평안을 누립니다. 갓난아이의 평안은 자기 엄마를 절대적으로 믿는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품에 안겨 있는 우리에게 평안이 없을 리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찌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사 49:15,16)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성도님들의 이름을 손바닥에 새기고 기억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고 하셨습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조건부적입니다. 건강하면 평안하지만 병들면 평안도 사라집니다. 부하면 평안하지만 가난하면 평안도 사라집니다. 일이 잘되면 평안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평안도 사라집니다. 이처럼 세상이 주는 평안은 우리가 처한 형편과 여건에 좌우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본질적으로 전혀 다른 것입니다. 어떠한 형편이나 악조건도 주님께서 주신 평안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역경과 시련을 만났을 때 성도들이 할 일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들만 누릴 수 있습니다. 이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실 때 세상의 염려 근심이 우리를 넘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켜주시되 모든 악한 세력으로부터도 지켜 주십니다. 6절에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고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해는 낮을 주관하고, 달은 밤을 주관합니다. 그러므로 해와 달은 모든 것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그런가 하면, 팔레스틴에서는 낮에 해가 사람들을 상하게 하듯이, 밤의 달도 사람들의 건강을 해친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해와 달조차도 성도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지켜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우리 우편에서 그늘이 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사야 41장 10절에 보니,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붙들어주시되 왼손이 아닌 오른손으로 붙들어주십니다. 우편, 또는 오른손은 권능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위하여 모든 환난을 면케 해 주십니다. 이 말씀은, 성도들은 전혀 환난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고 하셨습니다. 성도들도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환난을 당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환난을 넉넉히 이길 힘을 주십니다.
우리가 감당치 못할 시험은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는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앙망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지켜 주십니다.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귀하게 여기시는 것이 우리의 영혼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영혼의 구원을 받기 위함입니다(벧전1:9). 이제 성도들의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호받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28)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10:28,29)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은 받은바 구원의 확실함을 아시고 언제나 담대한 마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성도들과 영원히 함께 계십니다. 8절에,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고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16)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17)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고 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지금 형통한 삶을 누리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혹 곤란한 처지에 놓여 있으십니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형통할 때나 곤고한 때나 성도님의 눈을 들어 하나님의 전이 서 있는 성산을 바라보십시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앙망하고 그 분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 가운데서 사악한 세상을 이기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간증하며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김양인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