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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순종하고 있는가 (사사기 4:1~9)
드오리아(Dauria)의 소설중 영화로 유명한 “하이눈”(High Noon, 게리쿠퍼 주연, “백주의 결투”)이 있습니다. 주인공인 보안관은 그 마을의 법질서를 사수하려 하였습니다. 그 지역 악당들과의 대결을 앞두고 보안관은 마을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총 잘 쏘는 사람을 구하지 않습니다. 내가 필요로 하는 사람은 ‘이 일이 나의 일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마을 주민 중에는 ‘이 일은 나의 일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결국 보안관 혼자서 결투를 벌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우리는 ‘소명’(Calling)이라고 합니다. 소명을 깨달은 사람은 ‘이 일은 나의 일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나를 불러 주셨다는 의미는 내가 이 일을 위해서 태어났다고 하는 소명의 결단을 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강남 교회의 일원이 되어 교회를 섬긴다고 하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그것은 우리 교회가 저명한 교회라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몸된 교회로 인정하시고 이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 교회를 섬기는 것이 나의 일이다’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이 교회가 내 교회라고 생각하고 섬기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명의식과 주인의식을 가지고 교회를 섬기느냐 하는 것은 큰 일을 겪으면서 드러나게 됩니다. 교회에 대해 소명의식과 주인의식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큰 일을 겪을 때, 적극적으로 나서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의식을 갖지 못한 이들은 소극적이고 주저하게 됩니다. 우리 교회는 이번에 성전 건축이라는 대 역사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번 성전 건축은 대단한 일입니다. 가진 것 없는 우리 성도들이 감당하기엔 분명히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일이 내 일’이라는 주인의식과 소명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결국 성공적으로 해 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한다면 아무리 좋은 여건이 마련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결코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일은 내 일입니다.”고 나서야 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은 지난 주일 말씀과 연결되어 있는 ‘드보라 선지자와 바락’의 이야기입니다. 특히 ‘이 일이 내 일이다’라는 소명을 발견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 앞에서 주저하는 바락이 영광을 얻지 못하는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 말씀에 절대 순종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1.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으면 그만큼 손해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바락 장군을 좋게 보았기 때문에 여선지자 드보라를 통해서 바락에게 이스라엘을 20년 동안이나 괴롭혀 온 가나안의 야빈 왕과 그의 군대장과 시스라의 군대와 맞서 싸우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다볼 산으로 가라. 내가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그 병거들과 그 무리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 그를 네 손에 붙이리라”(삿 4:6-7)
하나님께서는 침략국인 가나안의 군대 장관과 군대가 아무리 강할 지라도, 바락으로 하여금 그들을 맞이하여 승리를 얻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붙이다’는 말은 4장 2절에 나오는 ‘팔다’는 말과 같은 말로, '꼼짝 못하게 하다' 또는 '패하게 하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과거 이스라엘이 대적에게 완전히 패하였듯이, 이제 ‘야빈과 시스라의 군대가 꼼짝없이 이스라엘에게 패하게 되리라’는 하나님의 의지가 담긴 약속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바락 장군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운 마음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담대히 나가지 못하고, 드보라에게 간청하기를,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는 가지 않겠노라”(삿 4:8)고 했습니다. 지금 드보라를 통해 바락에게 명령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바락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드보라의 동행여부에 따라 자신의 거취를 결정하겠다는 것입니다.
바락은 하나님을 믿기는 했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받은 드보라 선지자를 더욱 의지했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크게 쓰시겠다는데 주저했습니다. 이에 드보라는 기꺼이 함께 가겠다고 했지만, 이 전쟁에서 승리의 영광은 바락이 아닌 사람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승리의 기쁨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진행하고 있는 성전 건축의 기쁨 또한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이들의 것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으로 성전 건축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래 저희 교회는 현재 교회가 위치한 곳의 빈 땅에 교육관을 지어서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교육공간을 마련해 주려고 계획했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 우리는 24시간 연속 기도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연속기도를 시작하고 6개월이 지났을 때, 우리 교회는 여러 가지 우여곡절 끝에 하나님의 인도로 지금 화곡동 부지를 매입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우리는 어려운 난관에 부닥칠 때마다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셔서 그 모든 문제들을 정리하시고 해결해 주시는 것을 하시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이 일을 분명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강서 양천 지역을 우리의 손에 붙여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케 하시고, 인재를 양성하고 세계 선교의 일익을 감당함으로써 한국 교회의 모델을 제시하라고 이 일을 진행시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이루어 주실테니, 같이 가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일이 내 일이다’라는 마음으로 기쁘게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락을 지명하여 부르신 것처럼,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이 이 일을 감당하시기를 바라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바락처럼, 다른 사람이 해야 나도 한다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장로님이 했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장로님에게 미루거나 하면 안됩니다. 그 일은 ‘내’가 꼭 감당해야 합니다. 혹시나 바락처럼, 뭔가 조건을 내걸며 하나님의 약속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고 주저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손해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손해입니다.
2. 하나님은 우리가 불순종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일을 맡기십니다.
드보라는 주저하는 바락을 데리고 게데스로 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스불론 지파와 납달리 지파 중에서 1만 명의 군사를 모아 다볼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가나안의 군대장관 시스라는 기손 강으로 철병거 900승을 비롯하여 자신의 모든 군사를 집결시키고 이스라엘과의 일전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드보라를 통해 말씀하신 상황이었습니다. “내가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그 병거들과 그 무리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삿 4:7).
이제 “그를 네 손에 붙이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확인하는 일만 남은 것입니다. 전쟁의 결과는 이미 결정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을 깨달은 드보라는 하나님께서 주실 승리를 확신하고 주저하고 있는 바락을 격려하여 “일어나라.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네 손에 붙이신 날이라 여호와께서 너의 앞서 행하지 아니하시느냐?(삿 4:14)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드보라와 바락의 대조적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선자인 드보라는 하나님의 말씀만 굳게 믿고 담대하였으나, 오히려 남자인 바락 장군은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세상적으로 능력있고 지혜있는 사람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연약한 자를 통해서도 일하십니다. 능력이 있고 지혜가 있어도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사람보다는, 부족하지만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자들을 통해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도 주저하는 바락 장군을 향해 드보라 선지자는 말합니다. “그러나 네가 이제 가는 길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이라”(삿 4:9) 본래 하나님께서 “시스라를 네 손에 붙이겠다”고 바락에게 약속하셨지만, 바락이 그 명령에 주저함을 보시고, 바락 대신 한 여인의 손에 시스라를 파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여인은 누구입니까? 그 여인은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이었습니다. 헤벨은 가나안 왕과 긴밀한 관계였습니다. 그러기에 헤벨의 아내 야엘이 시스라를 정중하게 대접하며 “나의 주여 들어오소서. 내게로 들어오시고 두려워 마소서”(삿 4:18)라고 할때, 그 말을 믿고 그 집에 들어간 것입니다.
시스라는 이스라엘의 추격을 피해 도망하느라 지칠대로 지쳐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평소에 우호관계에 있던 헤벨의 일가를 만나 잠시 지친 몸을 쉬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야엘의 환대 속에 시스라는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시스라가 잠이 든 것을 확인한 야엘은 장막의 말뚝을 시스라의 관자놀이에 내리치는 엽기적인 방법으로 시스라를 처치하였습니다. 정말 엽기적인 살인 사건입니다. 어떻게 한 여인이 이렇게 잔인하게 사람을 해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녀를 나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녀를 복 받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은 다른 여인보다 복을 받을 것이니 장막에 거한 여인보다 더욱 복을 받을 것이로다”(삿 5:24)고 했습니다.
한편 바락은 머뭇거리고 주저하다가 승리의 영광을 이방 여인에게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본문에 보면 바락이 한 일은 전혀 드러나지 않습니다. 전쟁의 승리도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적장인 시스라를 처치하는 것도 바락이 아닌 한 가냘픈 여인의 몫으로 돌아갔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은 내가 감당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감동시키셔서 그 일을 하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아무런 차질도 없이 진행됩니다. 하나님의 일은 중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누구나 들어 쓰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불순종한 사람만 손해를 보게 됩니다. 우리들도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기지 못하게 하라”(계 3:11)는 말씀처럼, 하나님이 명령한 일을 하지 않아서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지 않게 해야 합니다.
3. 불순종한 사람의 삶은 허무하게 끝나고 말 것입니다.
시스라가 도망친 것을 안 바락은 곧 그 뒤를 추격하여 이방 하로셋과 그 일대를 수색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헤벨의 장막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때는 이미 시스라가 야엘의 손에 죽임을 당하고 난 이후였습니다. 이로써 바락은 드보라의 예언(9절)대로 시스라를 죽이는 영예를 자신이 취하지 못하고 한갓 여인에 불과한 야엘에게 승리의 영광을 넘겨 주게 되었음을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이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놓치고 항상 뒤늦게 쫓아가기에 바쁜 바락의 모습은 안타깝다 못해 처량하기까지 합니다. 비록 이스라엘과 가나안의 전쟁은 이스라엘의 대 승리로 끝났지만, 바락은 허망하기만 했습니다. 자신의 손으로 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전쟁에서의 승리도 하나님께서 가나안의 철병거를 무용지물로 만들어 놓으셔서 자중지란에 빠지게 하셨기에 얻은 것이었고, 적장을 처치하는 것마저도 이방의 연약한 여인에게 한 발 늦었으니, 바락은 전쟁의 승리를 만끽하기 보다는 자기 자신의 불신앙과 불순종을 확인하고 무력감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와같은 바락의 모습은 곧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평생동안 교회에 나오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였으나, 혹시 교회 안에서의 나의 모습이 바락과 같지는 않습니까? 분명한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을 대하고서도 주저하다가 헌신의 기회를 놓치고 영광과 칭찬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목회자로서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분명 어떤 일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내려 주시려고 시키신 일인데,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그 일을 마다하거나, 마지못해 억지로 끌려다녀서 아무런 보람과 기쁨도 얻지 못하고, 결국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지 못할 때, 정말 강권해서라도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그 복을 받게 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과 그 성취의 중간 단계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그 명령이 성취되지 않은 채, 진행 과정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으로 일은 진행되고 있는데, 우리는 이 자리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그 어떤 반응이든 해야 합니다.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 것은 곧 불순종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성경은 바락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물쭈물하는 그를 대신하여 이방의 연약한 여인을 통해 대역사를 진행시키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주저함이 때로는 소극적인 불순종이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신 것입니다.
바락은 하나님의 명령과 성취의 중간 지점에서 우물쭈물했습니다. 그 결과 바락은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하고, 모든 영광과 칭찬을 놓쳐버린 채, 허무하고 수치스럽게 끝내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계획을 세워 놓으시고 친히 이루어 주실 것이라 약속하고, 다 마련된 잔치 자리에 참여할 일만 남았는데, 주저하다가 그 잔치 자리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렇게 통탄할 일이 어디있습니까?
예수께서는 천국 잔치 비유를 통해, 아무리 큰 잔치를 배설하고 사람을 청하여도 이런 저런 핑계로 참석하지 못하는 사람 대신 전혀 예기치 못했던 사람들을 데려다가 잔치 자리를 채울 것이라 하시면서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눅 14:24)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 승리의 약속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능력과 지혜는 볼 것이 없으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이미 승리를 얻게 될 것이라고 결정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이런 주님의 말씀을 믿고 나아가야 합니다. 혹시라도 바락처럼 하나님의 능력보다 사람을 더 의지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명령 앞에 주저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가 다른 사람이 아닌 나를 통해서 이루어지도록 자발적으로 순종하고 나서기를 바랍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과 칭찬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출처/전병금 목사 설교 중에서
드오리아(Dauria)의 소설중 영화로 유명한 “하이눈”(High Noon, 게리쿠퍼 주연, “백주의 결투”)이 있습니다. 주인공인 보안관은 그 마을의 법질서를 사수하려 하였습니다. 그 지역 악당들과의 대결을 앞두고 보안관은 마을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총 잘 쏘는 사람을 구하지 않습니다. 내가 필요로 하는 사람은 ‘이 일이 나의 일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마을 주민 중에는 ‘이 일은 나의 일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결국 보안관 혼자서 결투를 벌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우리는 ‘소명’(Calling)이라고 합니다. 소명을 깨달은 사람은 ‘이 일은 나의 일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나를 불러 주셨다는 의미는 내가 이 일을 위해서 태어났다고 하는 소명의 결단을 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강남 교회의 일원이 되어 교회를 섬긴다고 하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그것은 우리 교회가 저명한 교회라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몸된 교회로 인정하시고 이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 교회를 섬기는 것이 나의 일이다’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이 교회가 내 교회라고 생각하고 섬기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명의식과 주인의식을 가지고 교회를 섬기느냐 하는 것은 큰 일을 겪으면서 드러나게 됩니다. 교회에 대해 소명의식과 주인의식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큰 일을 겪을 때, 적극적으로 나서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의식을 갖지 못한 이들은 소극적이고 주저하게 됩니다. 우리 교회는 이번에 성전 건축이라는 대 역사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번 성전 건축은 대단한 일입니다. 가진 것 없는 우리 성도들이 감당하기엔 분명히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일이 내 일’이라는 주인의식과 소명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결국 성공적으로 해 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한다면 아무리 좋은 여건이 마련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결코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일은 내 일입니다.”고 나서야 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은 지난 주일 말씀과 연결되어 있는 ‘드보라 선지자와 바락’의 이야기입니다. 특히 ‘이 일이 내 일이다’라는 소명을 발견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 앞에서 주저하는 바락이 영광을 얻지 못하는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 말씀에 절대 순종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1.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으면 그만큼 손해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바락 장군을 좋게 보았기 때문에 여선지자 드보라를 통해서 바락에게 이스라엘을 20년 동안이나 괴롭혀 온 가나안의 야빈 왕과 그의 군대장과 시스라의 군대와 맞서 싸우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다볼 산으로 가라. 내가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그 병거들과 그 무리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 그를 네 손에 붙이리라”(삿 4:6-7)
하나님께서는 침략국인 가나안의 군대 장관과 군대가 아무리 강할 지라도, 바락으로 하여금 그들을 맞이하여 승리를 얻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붙이다’는 말은 4장 2절에 나오는 ‘팔다’는 말과 같은 말로, '꼼짝 못하게 하다' 또는 '패하게 하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과거 이스라엘이 대적에게 완전히 패하였듯이, 이제 ‘야빈과 시스라의 군대가 꼼짝없이 이스라엘에게 패하게 되리라’는 하나님의 의지가 담긴 약속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바락 장군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운 마음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담대히 나가지 못하고, 드보라에게 간청하기를,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는 가지 않겠노라”(삿 4:8)고 했습니다. 지금 드보라를 통해 바락에게 명령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바락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드보라의 동행여부에 따라 자신의 거취를 결정하겠다는 것입니다.
바락은 하나님을 믿기는 했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받은 드보라 선지자를 더욱 의지했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크게 쓰시겠다는데 주저했습니다. 이에 드보라는 기꺼이 함께 가겠다고 했지만, 이 전쟁에서 승리의 영광은 바락이 아닌 사람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승리의 기쁨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진행하고 있는 성전 건축의 기쁨 또한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이들의 것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으로 성전 건축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래 저희 교회는 현재 교회가 위치한 곳의 빈 땅에 교육관을 지어서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교육공간을 마련해 주려고 계획했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 우리는 24시간 연속 기도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연속기도를 시작하고 6개월이 지났을 때, 우리 교회는 여러 가지 우여곡절 끝에 하나님의 인도로 지금 화곡동 부지를 매입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우리는 어려운 난관에 부닥칠 때마다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셔서 그 모든 문제들을 정리하시고 해결해 주시는 것을 하시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이 일을 분명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강서 양천 지역을 우리의 손에 붙여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케 하시고, 인재를 양성하고 세계 선교의 일익을 감당함으로써 한국 교회의 모델을 제시하라고 이 일을 진행시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이루어 주실테니, 같이 가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일이 내 일이다’라는 마음으로 기쁘게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락을 지명하여 부르신 것처럼,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이 이 일을 감당하시기를 바라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바락처럼, 다른 사람이 해야 나도 한다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장로님이 했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장로님에게 미루거나 하면 안됩니다. 그 일은 ‘내’가 꼭 감당해야 합니다. 혹시나 바락처럼, 뭔가 조건을 내걸며 하나님의 약속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고 주저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손해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손해입니다.
2. 하나님은 우리가 불순종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일을 맡기십니다.
드보라는 주저하는 바락을 데리고 게데스로 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스불론 지파와 납달리 지파 중에서 1만 명의 군사를 모아 다볼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가나안의 군대장관 시스라는 기손 강으로 철병거 900승을 비롯하여 자신의 모든 군사를 집결시키고 이스라엘과의 일전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드보라를 통해 말씀하신 상황이었습니다. “내가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그 병거들과 그 무리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삿 4:7).
이제 “그를 네 손에 붙이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확인하는 일만 남은 것입니다. 전쟁의 결과는 이미 결정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을 깨달은 드보라는 하나님께서 주실 승리를 확신하고 주저하고 있는 바락을 격려하여 “일어나라.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네 손에 붙이신 날이라 여호와께서 너의 앞서 행하지 아니하시느냐?(삿 4:14)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드보라와 바락의 대조적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선자인 드보라는 하나님의 말씀만 굳게 믿고 담대하였으나, 오히려 남자인 바락 장군은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세상적으로 능력있고 지혜있는 사람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연약한 자를 통해서도 일하십니다. 능력이 있고 지혜가 있어도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사람보다는, 부족하지만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자들을 통해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도 주저하는 바락 장군을 향해 드보라 선지자는 말합니다. “그러나 네가 이제 가는 길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이라”(삿 4:9) 본래 하나님께서 “시스라를 네 손에 붙이겠다”고 바락에게 약속하셨지만, 바락이 그 명령에 주저함을 보시고, 바락 대신 한 여인의 손에 시스라를 파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여인은 누구입니까? 그 여인은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이었습니다. 헤벨은 가나안 왕과 긴밀한 관계였습니다. 그러기에 헤벨의 아내 야엘이 시스라를 정중하게 대접하며 “나의 주여 들어오소서. 내게로 들어오시고 두려워 마소서”(삿 4:18)라고 할때, 그 말을 믿고 그 집에 들어간 것입니다.
시스라는 이스라엘의 추격을 피해 도망하느라 지칠대로 지쳐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평소에 우호관계에 있던 헤벨의 일가를 만나 잠시 지친 몸을 쉬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야엘의 환대 속에 시스라는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시스라가 잠이 든 것을 확인한 야엘은 장막의 말뚝을 시스라의 관자놀이에 내리치는 엽기적인 방법으로 시스라를 처치하였습니다. 정말 엽기적인 살인 사건입니다. 어떻게 한 여인이 이렇게 잔인하게 사람을 해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녀를 나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녀를 복 받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은 다른 여인보다 복을 받을 것이니 장막에 거한 여인보다 더욱 복을 받을 것이로다”(삿 5:24)고 했습니다.
한편 바락은 머뭇거리고 주저하다가 승리의 영광을 이방 여인에게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본문에 보면 바락이 한 일은 전혀 드러나지 않습니다. 전쟁의 승리도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적장인 시스라를 처치하는 것도 바락이 아닌 한 가냘픈 여인의 몫으로 돌아갔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은 내가 감당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감동시키셔서 그 일을 하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아무런 차질도 없이 진행됩니다. 하나님의 일은 중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누구나 들어 쓰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불순종한 사람만 손해를 보게 됩니다. 우리들도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기지 못하게 하라”(계 3:11)는 말씀처럼, 하나님이 명령한 일을 하지 않아서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지 않게 해야 합니다.
3. 불순종한 사람의 삶은 허무하게 끝나고 말 것입니다.
시스라가 도망친 것을 안 바락은 곧 그 뒤를 추격하여 이방 하로셋과 그 일대를 수색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헤벨의 장막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때는 이미 시스라가 야엘의 손에 죽임을 당하고 난 이후였습니다. 이로써 바락은 드보라의 예언(9절)대로 시스라를 죽이는 영예를 자신이 취하지 못하고 한갓 여인에 불과한 야엘에게 승리의 영광을 넘겨 주게 되었음을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이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놓치고 항상 뒤늦게 쫓아가기에 바쁜 바락의 모습은 안타깝다 못해 처량하기까지 합니다. 비록 이스라엘과 가나안의 전쟁은 이스라엘의 대 승리로 끝났지만, 바락은 허망하기만 했습니다. 자신의 손으로 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전쟁에서의 승리도 하나님께서 가나안의 철병거를 무용지물로 만들어 놓으셔서 자중지란에 빠지게 하셨기에 얻은 것이었고, 적장을 처치하는 것마저도 이방의 연약한 여인에게 한 발 늦었으니, 바락은 전쟁의 승리를 만끽하기 보다는 자기 자신의 불신앙과 불순종을 확인하고 무력감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와같은 바락의 모습은 곧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평생동안 교회에 나오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였으나, 혹시 교회 안에서의 나의 모습이 바락과 같지는 않습니까? 분명한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을 대하고서도 주저하다가 헌신의 기회를 놓치고 영광과 칭찬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목회자로서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분명 어떤 일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내려 주시려고 시키신 일인데,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그 일을 마다하거나, 마지못해 억지로 끌려다녀서 아무런 보람과 기쁨도 얻지 못하고, 결국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지 못할 때, 정말 강권해서라도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그 복을 받게 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과 그 성취의 중간 단계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그 명령이 성취되지 않은 채, 진행 과정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으로 일은 진행되고 있는데, 우리는 이 자리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그 어떤 반응이든 해야 합니다.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 것은 곧 불순종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성경은 바락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물쭈물하는 그를 대신하여 이방의 연약한 여인을 통해 대역사를 진행시키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주저함이 때로는 소극적인 불순종이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신 것입니다.
바락은 하나님의 명령과 성취의 중간 지점에서 우물쭈물했습니다. 그 결과 바락은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하고, 모든 영광과 칭찬을 놓쳐버린 채, 허무하고 수치스럽게 끝내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계획을 세워 놓으시고 친히 이루어 주실 것이라 약속하고, 다 마련된 잔치 자리에 참여할 일만 남았는데, 주저하다가 그 잔치 자리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렇게 통탄할 일이 어디있습니까?
예수께서는 천국 잔치 비유를 통해, 아무리 큰 잔치를 배설하고 사람을 청하여도 이런 저런 핑계로 참석하지 못하는 사람 대신 전혀 예기치 못했던 사람들을 데려다가 잔치 자리를 채울 것이라 하시면서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눅 14:24)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 승리의 약속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능력과 지혜는 볼 것이 없으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이미 승리를 얻게 될 것이라고 결정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이런 주님의 말씀을 믿고 나아가야 합니다. 혹시라도 바락처럼 하나님의 능력보다 사람을 더 의지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명령 앞에 주저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가 다른 사람이 아닌 나를 통해서 이루어지도록 자발적으로 순종하고 나서기를 바랍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과 칭찬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출처/전병금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