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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아는 지식 (이사야 1:1-3)
서론
점쟁이나 무당을 찾아가서 자신의 소원을 이야기하고 소원을 비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것보다 훨씬 진지합니다. 그 사람들은 무당이 써주는 부적을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는 것보다 도 소중히 여깁니다. 서울 장안에서 용하다고 소문난 무당을 찾아가서 굿을 한번 하기 위해서 그 사람들이 지불하는 액수를 보면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앞에 드리는 헌금 액수와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가리켜 신앙인이라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무당 앞에서 아무리 진지하고, 아무리 거액의 헌금을 하더라도 사람들은 그러한 이들을 가리켜 “미신을 좇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미신과 신앙의 차이는 무엇이겠습니까? 미신은 내게 있는 돈이나 재물이나 달란트나 그 무엇이든 간에 나의 소유로 신을 달래고 어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럴때 나는 결코 변화되지 않습니다. 오직 신을 변화 시켜서 나의 목적을 성취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미신입니다
반면에 절대자이신 신을 인간이 좌지우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그 신 앞에서 날마다 내가 변화되어 가는 것을 신앙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신앙과 미신의 진정한 차이점은 바로 나의 변화 유무에 있습니다. 아무리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예배당에 나와 앉아 있다고 할지라도 삼위일체 하나님 되신 그분을 나의 돈이나 재능으로 달래고 얼러서 내 목적을 성취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미신을 좇는 행위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내가 날마다 바뀌어 간다면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참됨 믿음은 바른 앎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바르게 알아야 바르게 변화될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때 도대체 하나님에 대해서 “무엇을” 믿는다는 의미인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조금도 오해할수 없는 문명한 단어와 어휘를 사영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설명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믿는 것을 의미하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는 마태복음 6잘 7-9절을 함께 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대부분 사람들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나를 알지 못한신다”는 그릇된 인식에서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지금 나의 사정을 모르신다는 전제로부터 시작됩니다. 이처럼 아무리 내게 필요한 것이 있더라도 하나님께 구하지 않으면 주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은 “늘 먹고 사는 문제”를 뛰어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하시느니라" 우리의 믿음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어린아이에게 있어야 할 것을 어린아이 자신이 정확하게 압니까? 아니면 부모님이 더 잘압니까? 당연히 부모님이 더 잘압니다. 지금 밥을 먹어야 할때인지, 무엇을 보아야 할때인지, 무엇을 해야 할때인지,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때인지 부모가 더 잘압니다. 세상에 어느 자식이 “엄마 저녁밥 주세요”라고 요구해야 부모로부터 밥을 얻어 먹습니까? 오히려 자식은 노느라고 밥먹을 생각조차 하지 않아도 부모가 먼저 챙겨주는 법입니다. 대체로 아이들이 달라고 조르는 것은 과자나, 쵸코렛이나 만화책이나 없어도 좋은 것들입니다
반면에 부모가 미리 알고 챙겨주는 것은 아이들에게 없으면 안되는 것들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기도해서 생명인 공기를 얻었습니까? 어젲밤에 청야기도를 했기 때문에 오늘 아침에 태양이 떠올랐습니까? 우리가 40일 금식 기도를 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비가 내렸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 가운데 정말로 중요한 것은 한 가지도 기도하지 아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하나님이 다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내게 필요한 것을 마리 아신다”는 출발점에서 하나님을 믿느냐, 아니면 “하나님은 내게 필요한 것을 모르신다”는 출발점에서 하나님을 믿느냐에 따라 우리 믿음의 질이 달라집니다.
마태복음 6장7-8절을 다음에 무엇이 나옵니까? 그 유명한 주님의 기도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먼저 알고 계시고 책임져 주시는 분이시므로 “그러므로”이렇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주님의 기도를 별 의미 없이 고백할 때가 많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 기도문은 수동태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누구에 의해서 거룩히 여김을 받습니까? 바로 나 자신입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 나의 삶에 의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되기를 바랍니다”라는 고백입니다
또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것은 “나의 삶을 통해서 아버지의 뜻이 이 땅위에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라는 기도입니다
또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일용할 양식이 없어서 죽는 사람들의 비율은 미미합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게 하십니다. 그러면 기도하지 않으면 일용할 양식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겟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일용할 양식만으로도 자족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결단, 더 이상 욕망의 노예가 되지 않겠다는 결단의 기도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이것은 이제부터 용서의 삶을 살겠다는 결단의 기도입니다
이처럼 성숙한 신앙생활을 할수 있는 동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있어야 할 것을 미리 아시고 책임져 주시는 분이시므로 이제부터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내 삶을 바쳐 드리는 성숙의 단계로 접어들 수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어떤 분인지를 소개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으라는 말씀입니다. 바른 관계를 맺어가면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6장은 이렇게 끝납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이 구절은 마치 오늘 밤 12시까지는 오늘 걱정만하다가 12시 종이 땡치면 내일 걱정을 시작하라는 뜻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성경원문 그데로 이 문장을 직역하면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니 너는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는 맺는 데 주력하라. 그러면 내일을 허락하시는 하나님, 내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너의 내일을 책임져 주실 것이다.” 내일을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하나님, 내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책임져주신다는 사실을 알고 신뢰할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내게 필요한 것이라면 어떤 방법을 쓰시든지 주시는 분이시며 내게 필요없는 것은 아무리 간구해도 주시지 않는 분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성숙한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내 기도의 목표와 내용이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주님의 뜻을 바르게 분별할 것인지 오늘 내가 두 발을 딛고 있는 이 삶의 현장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바가 무엇이며 그 주님을 위하여 나의 일거수 일투족으로 무엇을 해할 것인지를 알게 해 달라고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내게 있어야 될 것을 나보다 더 정확하게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믿음의 성장은 하나님을 아는 바른 지식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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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리가 함께 봉독한 본문을 보면 하나님이 탄식하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을 자식에 비유하고 있는데 그 자식들이 아버지를 모른다는 것을 탄식하고 있습니다. “미우라아야꼬”라는 유명한 일본인 작가는 부모임의 마음을 “어버이 친”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부모란 떠나가는 자식의 등뒤를 바라보다가 보이지 않으면 동산 위에 올라가서 보고 그래도 보이지 않으면 나무위에 올라가서 서서 바라본다...아이들을 떠나보내는 부모님의 마음을 한 마디로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자식으로 키웠는데, 그 자식들이 당신이 아비인 줄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소도 주인을 알고 나귀도 주인의 구유를 아는데 하나님의 자식은 그 아버비를 알지 못한다는 하나님의 통탄의 소리를 우리를 깨달을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그리고 “너는 나의 자녀”라고 인쳐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분을 아버지라고 생각지 아니하고 그분에게 등을 돌리며 살아왔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못한다면 이렇게 하나님을 등돌리며 살아갈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부터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속에서 살아갈수 잇기를 축복합니다
자식인 우리들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때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의 인생은 전혀 새로운 삶으로 펼쳐갈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안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출처/김창수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