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38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사람 (마태복음5:1-12)
지난 한주간은 버지니아공대 참사로 온 세계가 큰 충격과 슬픔에 빠졌습니다. 16일 총기난사로 33명이 죽고, 17명이 부상당했습니다. 이 비극을 연출한 범인 조승희씨는 1992년 초등학교2학년 때 미국으로 건너가서 조지아공대 영문학과에 재학 중인 23세 청년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으나, 미국인들은 개인적인 성격장애에서 비롯된 정신병적인 소행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수사과정에서 밝혀진 학교 측과 경찰의 잘못된 판단과 대응에 대하여 책임을 추궁하기보다 모두가 조용히 추모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끔직한 일을 저지른 범인을 정죄하기보다 오히려 그의 죽음까지 애도하며, 유족들을 위로하는 추모의 글들을 남기고 있었습니다. 버지니아텍 캠프스 중앙 잔디밭에 사망자를 기리는 33개의 추모석을 타원형으로 놓았는데, 이중에는 조씨의 추모석도 있습니다. 다른 추모석과 동일하게 만들었고, ‘바버라’ 라고 하는 사람은 이런 추모의 글을 남겼습니다.
“네가 그렇게 필사적으로 필요로 했던 도움을 받지 못했다는 걸 알고 가슴이 아팠다.
머지않아 너의 가족이 평온을 찾아 치유될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축복을!”
이 시간 우리 다같이 잠간 침묵의 기도를 드리기를 원합니다.
조성희씨를 포함한 모든 유가족들에게 주님의 위로가 함께 하시도록,
그리고 우리 주변에 아직도 영적인 외톨이로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기를 잠시 묵도 합시다.
오늘 성경에서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이 받을 여덟 번째 복을 말씀하십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여기서 예수님은 “‘의’를 위하여”를 “나를 인하여”라는 말로 바꾸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 천국에서 받을 상이 큼이라.”
이 여덟 번째 복은 그 동안 말씀드렸던 일곱까지 복과는 성격을 달리합니다.
그동안의 복들은 자기 자신과 이웃에 관계되는 복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상대방으로부터 무슨 영향을 받을 것이 없습니다. 나 스스로가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있는 삶의 선택과 결단력이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여덟 번째 복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내 삶에 상당한 어려움이 가해질 때, 내가 선택해야하는 삶의 복입니다. 그러므로 이 여덟 번째 복이 사실상 복 가운데 최고 절정에 있습니다.
이 복을 받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중요합니다.
첫째, 자신이 예수의 사람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의를 위하여, 예수님을 위하여 핍박을 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내 자신이 예수의 사람임을 인정해야 가능한 것입니다. 이를테면 베드로는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보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위해서 받을 수 있는 핍박을 거절한 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다음, 아리마데 사람 요셉이 나타나서 예수님의 시체를 인수하여 자기의 새 무덤에 장례식을 행했습니다. 사실 그는 상당한 모험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받을 수 있는 모든 일을 감수한 결단이었습니다.
지난 12일자 동아일보에 전 문화부장관 이어령 씨가 오는 7월에 세례를 받기로 했다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어쩌면 이 일 때문에 이 분이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 동안 일생을 같이 해 온 많은 친구들로부터 어떤 오해를 받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완숙기에 접어든 73세에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접하게 된 데에는 자녀의 문제가 계기가 되었습니다. 지난 15년간 딸에게 닥친 시련이 결정적 작용을 하였습니다. 미국에 유학을 하고 미국에서 검사로 아버지의 자랑스런 딸에게 1992년 ‘감상샘 암’ 판정을 받은 뒤부터 수술을 했으나, 1996년과 1999년 두 차례나 암이 재발하였고, 불행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작은 외손자가 “특수자폐아동”으로 판명이 나서 아이를 위하여 고생한 일, 그리고 시력가지 잃어버린 딸이 한국에 와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이와 같은 과정에서 믿음의 역사를 교회에서 간증하게 된 일이 있은 다음 이 전정관이 말했습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딸에게 내가 못해 준 것을 해 준 분이 있다면 대단한 것 아니냐”
마태복음10:32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을 세상의 빛이라 하시면서 등불은 켜서 됫박 아래 감추어 두지 않고 등경 위에 올려둔다 하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자신의 믿음을 특별한 이유가 아니면, 공개적으로 밝힘으로서 혹시 받을 수 있을 불이익을 감수합니다.
둘째, 그리스도인들이 받을 수 있는 핍박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지금 우리의 현실을 근거하여 말씀을 드린다면 주님께서 말씀하시던 때와는 상황이 상당히 다릅니다. 그 때는 예수를 따른다고 하는 것부터 상당한 결단이 필요한 때였습니다. 이를테면 우리나라 기독교초반기에도 양반가문에서 서양귀신 예수를 믿고 상투를 자른다든지 하는 것은, 아주 못된 상놈들이나 하는 짓이라 하여 가문의 호적에서 제명을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 대한민국에서 이와 같은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앙적으로 바르게 사는 경우 사회적인 칭찬을 받게 됩니다.
이를테면 지난 20일 조선일보 사회면에는 “천사가 되어 떠난 33세 주부” ‘뇌사 상태 빠지자 신장, 각막 등 기증......헬기로 긴급 이송해 수술 환자 14명에 생명과 빛을 나누어주게 되었다’고 섰습니다. 제주도에서 자영업을 하시는 강모라는 남편이 지난 3월 27일 감기를 유난히 앓는다 싶던 아내가 갑자기 구토를 하면서 병원에 갔다가 불과 20일 만에 뇌사판정을 받았습니다. 가족들이 의논하여 장기기증을 하게 되었습니다. 강씨의 고백이 시렸습니다.
“아내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고, 말없이 성실한 사람이었죠. 마지막까지 좋은 일을 하는 것이 그 사람의 뜻이라 믿어요. 아이들에게도 자랑스러운 엄마로 남을 겁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밝히는 것마저 거절하였다고 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예수님 때문에 핍박은 있습니다.
하나는 양심의 가책으로 인하여 받는 고통입니다.
지난 주간 저와 교우여러분들에게 보낸 한 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두 장의 분량으로 빼곡히 쓴 글의 내용은 대략 이러했습니다. 1980년대 초반 고등부학생으로 우리교회에 출석한 분으로, 당시 교회활동을 열심히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주일에 세브란스병원에서 찬양과 재활어린이들을 위한 봉사를 마치고 교회에 돌아왔습니다. 우연히 옆에 놓인 낡은 성경책을 열어보다가 그 속에 들어있는 5천원을 슬쩍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20여년을 지나오다가, 지난 3월 강남성모병원 로비에 꽂혀있는 베데스다 2월호를 보게 되었습니다. 우연히 눈에 익은 그 책자를 펼쳐서 글을 읽다가 평양대부흥운동의 시작이 종교교회 개척선교사 하디 목사님의 회개운동에서 시작되었다는 글을 읽다가 자신의 마음속에 깊이 감추어두어 잊어버렸던, 27년 전 5000원의 20배를 갚기로 했다면서 10만원을 봉투에 넣어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쓰고 있었습니다.
“27년 전 5000원의 가치를 지금가치로 환산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지만, 20배로 갚기로 하였습니다. 참회와 회개에 금액의 다과가 문제가 아니고 회개의 용기가 필요하며, 어떤 형식으로든 증표가 필요했기에 참회의 글과 함께 보냅니다. 부디 받아주시고, 그 때 어떤 교인이 하지 못했던 헌금을 27년 만에 대신 보내니 주님 사업에 긴히 사용되기를 기도드립니다. 다 보고 계셨던 주님, 용서해주세요. 감사합니다.”
물론 이것을 박해나 핍박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 같았으면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지날 수 있는 일을 이 분은 27년 동안의 참회를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은 그리스도인의 양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받는 양심의 가책은 실로 고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사소한 문제에도 민감하여 회개해야만 시원한 깨어있는 양심은 우리그리스도인들의 고통일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신앙적인 가치관에 충돌이 받는 고통입니다.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 다하고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갔던 사람들 중에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이방나라에서 생활하면서도 자신들의 성결생활을 지키기 위하여 뜻을 정하고 살았습니다.
다니엘1:8입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기를 환관장에게 구하니 하나님이 다니엘로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
그리고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왕을 상징하는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풀무불속에 던짐을 받았습니다. 이런 모든 일들은 자기의 신앙적인 가치와 다른 것과 충돌할 때 일어나는 고통입니다.
이 땅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 살면서 사사건건 모든 것을 다 문제 삼지 않습니다. 결정적으로 삶의 가치관의 충돌이 올 때 고통을 감수하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남들이 먹고 마시고 즐기는 대로 다 따라할 수 없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래서 때때로 갈등과 고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할 때 오는 박해입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가만있을 때는 아무런 제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성령의 충만을 받고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고 전하는 일들로 인하여 사람들은 몹시 긴장하였습니다. 힘 있는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과 장로들은 제자들을 붙잡아서 협박하며 채찍질하며 말했습니다.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행5:40, 4:18)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을 전한다고 항상 박해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실로 우리 주변에는 믿기로 작정이 되어 복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상식과 교양으로 복음을 전할 때 많은 거부감을 줄일 수가 있습니다. 사거리 한복판에서서 “예수천당”이라고 외치면서 전도할 수도 있지만, 조용히 전도대상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인격적인 감화와 사랑으로 접근하여 복음을 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전도는 천하보다 귀한 한 생명을 구하는 일입니다. 어린아이든, 노인이든, 청년이든, 어른이든 모두가 동일하게 존귀한 생명입니다. 이 생명을 구하는 일에 때로는 마땅히 지불해야하는 고통의 대가가 있을 수 있습니다.
3.주님의 복음을 위하여 핍박을 받는 사람에게 주시는 복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감당해야할 사명과 책임만 부여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복음전파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감당해야하는 지상명령입니다.
마태복음28:19,20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주님은 당신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약속하십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전능하신 예수님이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은 전도할 때뿐 아니라, 범사에도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전도자들이 세상에서 능력이 있는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마가복음10:28-30 입니다.
“베드로가 여짜와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얻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주님과 그 복음을 위하여 헌신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두 가지 놀라운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박해도 받지만 헌신한 것의 백배나 받습니다. 그리고 내세에 영생을 얻게 하십니다.
이 엄청난 축복에서 한 사람도 예외의 사람이 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할 것이 있습니다.
열린 마음으로 쉽게 하십시오. 그냥 내가 믿는 예수, 나의 주시며 살아계신 예수님을 말하십시오. 교회를 소개하십시오. 비난과 거부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 사람이 나를 거부하지 않고 비난할 사람이 아니라면 내가 전하는 복음을 거부하거나 비난할 이유는 없습니다. 저도를 즐기십시오. 그리고 축복을 받으십시오. 약속하신 주님의 말씀을 삶 속에서 확인하십시오.
“의(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의 것입니다.”
출처/최이우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지난 한주간은 버지니아공대 참사로 온 세계가 큰 충격과 슬픔에 빠졌습니다. 16일 총기난사로 33명이 죽고, 17명이 부상당했습니다. 이 비극을 연출한 범인 조승희씨는 1992년 초등학교2학년 때 미국으로 건너가서 조지아공대 영문학과에 재학 중인 23세 청년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으나, 미국인들은 개인적인 성격장애에서 비롯된 정신병적인 소행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수사과정에서 밝혀진 학교 측과 경찰의 잘못된 판단과 대응에 대하여 책임을 추궁하기보다 모두가 조용히 추모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끔직한 일을 저지른 범인을 정죄하기보다 오히려 그의 죽음까지 애도하며, 유족들을 위로하는 추모의 글들을 남기고 있었습니다. 버지니아텍 캠프스 중앙 잔디밭에 사망자를 기리는 33개의 추모석을 타원형으로 놓았는데, 이중에는 조씨의 추모석도 있습니다. 다른 추모석과 동일하게 만들었고, ‘바버라’ 라고 하는 사람은 이런 추모의 글을 남겼습니다.
“네가 그렇게 필사적으로 필요로 했던 도움을 받지 못했다는 걸 알고 가슴이 아팠다.
머지않아 너의 가족이 평온을 찾아 치유될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축복을!”
이 시간 우리 다같이 잠간 침묵의 기도를 드리기를 원합니다.
조성희씨를 포함한 모든 유가족들에게 주님의 위로가 함께 하시도록,
그리고 우리 주변에 아직도 영적인 외톨이로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기를 잠시 묵도 합시다.
오늘 성경에서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이 받을 여덟 번째 복을 말씀하십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여기서 예수님은 “‘의’를 위하여”를 “나를 인하여”라는 말로 바꾸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 천국에서 받을 상이 큼이라.”
이 여덟 번째 복은 그 동안 말씀드렸던 일곱까지 복과는 성격을 달리합니다.
그동안의 복들은 자기 자신과 이웃에 관계되는 복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상대방으로부터 무슨 영향을 받을 것이 없습니다. 나 스스로가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있는 삶의 선택과 결단력이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여덟 번째 복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내 삶에 상당한 어려움이 가해질 때, 내가 선택해야하는 삶의 복입니다. 그러므로 이 여덟 번째 복이 사실상 복 가운데 최고 절정에 있습니다.
이 복을 받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중요합니다.
첫째, 자신이 예수의 사람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의를 위하여, 예수님을 위하여 핍박을 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내 자신이 예수의 사람임을 인정해야 가능한 것입니다. 이를테면 베드로는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보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위해서 받을 수 있는 핍박을 거절한 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다음, 아리마데 사람 요셉이 나타나서 예수님의 시체를 인수하여 자기의 새 무덤에 장례식을 행했습니다. 사실 그는 상당한 모험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받을 수 있는 모든 일을 감수한 결단이었습니다.
지난 12일자 동아일보에 전 문화부장관 이어령 씨가 오는 7월에 세례를 받기로 했다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어쩌면 이 일 때문에 이 분이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 동안 일생을 같이 해 온 많은 친구들로부터 어떤 오해를 받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완숙기에 접어든 73세에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접하게 된 데에는 자녀의 문제가 계기가 되었습니다. 지난 15년간 딸에게 닥친 시련이 결정적 작용을 하였습니다. 미국에 유학을 하고 미국에서 검사로 아버지의 자랑스런 딸에게 1992년 ‘감상샘 암’ 판정을 받은 뒤부터 수술을 했으나, 1996년과 1999년 두 차례나 암이 재발하였고, 불행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작은 외손자가 “특수자폐아동”으로 판명이 나서 아이를 위하여 고생한 일, 그리고 시력가지 잃어버린 딸이 한국에 와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이와 같은 과정에서 믿음의 역사를 교회에서 간증하게 된 일이 있은 다음 이 전정관이 말했습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딸에게 내가 못해 준 것을 해 준 분이 있다면 대단한 것 아니냐”
마태복음10:32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을 세상의 빛이라 하시면서 등불은 켜서 됫박 아래 감추어 두지 않고 등경 위에 올려둔다 하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자신의 믿음을 특별한 이유가 아니면, 공개적으로 밝힘으로서 혹시 받을 수 있을 불이익을 감수합니다.
둘째, 그리스도인들이 받을 수 있는 핍박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지금 우리의 현실을 근거하여 말씀을 드린다면 주님께서 말씀하시던 때와는 상황이 상당히 다릅니다. 그 때는 예수를 따른다고 하는 것부터 상당한 결단이 필요한 때였습니다. 이를테면 우리나라 기독교초반기에도 양반가문에서 서양귀신 예수를 믿고 상투를 자른다든지 하는 것은, 아주 못된 상놈들이나 하는 짓이라 하여 가문의 호적에서 제명을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 대한민국에서 이와 같은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앙적으로 바르게 사는 경우 사회적인 칭찬을 받게 됩니다.
이를테면 지난 20일 조선일보 사회면에는 “천사가 되어 떠난 33세 주부” ‘뇌사 상태 빠지자 신장, 각막 등 기증......헬기로 긴급 이송해 수술 환자 14명에 생명과 빛을 나누어주게 되었다’고 섰습니다. 제주도에서 자영업을 하시는 강모라는 남편이 지난 3월 27일 감기를 유난히 앓는다 싶던 아내가 갑자기 구토를 하면서 병원에 갔다가 불과 20일 만에 뇌사판정을 받았습니다. 가족들이 의논하여 장기기증을 하게 되었습니다. 강씨의 고백이 시렸습니다.
“아내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고, 말없이 성실한 사람이었죠. 마지막까지 좋은 일을 하는 것이 그 사람의 뜻이라 믿어요. 아이들에게도 자랑스러운 엄마로 남을 겁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밝히는 것마저 거절하였다고 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예수님 때문에 핍박은 있습니다.
하나는 양심의 가책으로 인하여 받는 고통입니다.
지난 주간 저와 교우여러분들에게 보낸 한 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두 장의 분량으로 빼곡히 쓴 글의 내용은 대략 이러했습니다. 1980년대 초반 고등부학생으로 우리교회에 출석한 분으로, 당시 교회활동을 열심히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주일에 세브란스병원에서 찬양과 재활어린이들을 위한 봉사를 마치고 교회에 돌아왔습니다. 우연히 옆에 놓인 낡은 성경책을 열어보다가 그 속에 들어있는 5천원을 슬쩍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20여년을 지나오다가, 지난 3월 강남성모병원 로비에 꽂혀있는 베데스다 2월호를 보게 되었습니다. 우연히 눈에 익은 그 책자를 펼쳐서 글을 읽다가 평양대부흥운동의 시작이 종교교회 개척선교사 하디 목사님의 회개운동에서 시작되었다는 글을 읽다가 자신의 마음속에 깊이 감추어두어 잊어버렸던, 27년 전 5000원의 20배를 갚기로 했다면서 10만원을 봉투에 넣어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쓰고 있었습니다.
“27년 전 5000원의 가치를 지금가치로 환산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지만, 20배로 갚기로 하였습니다. 참회와 회개에 금액의 다과가 문제가 아니고 회개의 용기가 필요하며, 어떤 형식으로든 증표가 필요했기에 참회의 글과 함께 보냅니다. 부디 받아주시고, 그 때 어떤 교인이 하지 못했던 헌금을 27년 만에 대신 보내니 주님 사업에 긴히 사용되기를 기도드립니다. 다 보고 계셨던 주님, 용서해주세요. 감사합니다.”
물론 이것을 박해나 핍박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 같았으면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지날 수 있는 일을 이 분은 27년 동안의 참회를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은 그리스도인의 양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받는 양심의 가책은 실로 고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사소한 문제에도 민감하여 회개해야만 시원한 깨어있는 양심은 우리그리스도인들의 고통일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신앙적인 가치관에 충돌이 받는 고통입니다.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 다하고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갔던 사람들 중에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이방나라에서 생활하면서도 자신들의 성결생활을 지키기 위하여 뜻을 정하고 살았습니다.
다니엘1:8입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기를 환관장에게 구하니 하나님이 다니엘로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
그리고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왕을 상징하는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풀무불속에 던짐을 받았습니다. 이런 모든 일들은 자기의 신앙적인 가치와 다른 것과 충돌할 때 일어나는 고통입니다.
이 땅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 살면서 사사건건 모든 것을 다 문제 삼지 않습니다. 결정적으로 삶의 가치관의 충돌이 올 때 고통을 감수하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남들이 먹고 마시고 즐기는 대로 다 따라할 수 없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래서 때때로 갈등과 고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할 때 오는 박해입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가만있을 때는 아무런 제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성령의 충만을 받고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고 전하는 일들로 인하여 사람들은 몹시 긴장하였습니다. 힘 있는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과 장로들은 제자들을 붙잡아서 협박하며 채찍질하며 말했습니다.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행5:40, 4:18)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을 전한다고 항상 박해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실로 우리 주변에는 믿기로 작정이 되어 복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상식과 교양으로 복음을 전할 때 많은 거부감을 줄일 수가 있습니다. 사거리 한복판에서서 “예수천당”이라고 외치면서 전도할 수도 있지만, 조용히 전도대상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인격적인 감화와 사랑으로 접근하여 복음을 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전도는 천하보다 귀한 한 생명을 구하는 일입니다. 어린아이든, 노인이든, 청년이든, 어른이든 모두가 동일하게 존귀한 생명입니다. 이 생명을 구하는 일에 때로는 마땅히 지불해야하는 고통의 대가가 있을 수 있습니다.
3.주님의 복음을 위하여 핍박을 받는 사람에게 주시는 복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감당해야할 사명과 책임만 부여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복음전파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감당해야하는 지상명령입니다.
마태복음28:19,20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주님은 당신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약속하십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전능하신 예수님이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은 전도할 때뿐 아니라, 범사에도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전도자들이 세상에서 능력이 있는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마가복음10:28-30 입니다.
“베드로가 여짜와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얻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주님과 그 복음을 위하여 헌신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두 가지 놀라운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박해도 받지만 헌신한 것의 백배나 받습니다. 그리고 내세에 영생을 얻게 하십니다.
이 엄청난 축복에서 한 사람도 예외의 사람이 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할 것이 있습니다.
열린 마음으로 쉽게 하십시오. 그냥 내가 믿는 예수, 나의 주시며 살아계신 예수님을 말하십시오. 교회를 소개하십시오. 비난과 거부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 사람이 나를 거부하지 않고 비난할 사람이 아니라면 내가 전하는 복음을 거부하거나 비난할 이유는 없습니다. 저도를 즐기십시오. 그리고 축복을 받으십시오. 약속하신 주님의 말씀을 삶 속에서 확인하십시오.
“의(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의 것입니다.”
출처/최이우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