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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복음 21:15~18)
작년 봄에 있었던 일로 기억합니다. 압둘 라흐만이라는 사람은 파키스탄에 있는 기독교 단체에서 일하다가 기독교로 개종한 아프가니스탄 사람입니다. 그가 고향에 갔다가 기독교로 개종한 것 때문에 당국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프가니스탄 헌법에는 엄연히 종교의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회교 율법은 개종자를 사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다고 합니다. 결국 그는 꼼짝없이 죽임을 당할 위기에 빠졌습니다. 실제로 당국은 그를 처형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서방 국가들과 세계 언론이 자유와 인권을 들먹이며 아프가니스탄 정부를 압박했습니다. 결국 국제 사회에서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된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그를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할 병자라면서 석방했습니다.
신문을 통해서 그 소식을 읽으며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아직까지 예수를 믿는 것이 그렇게 힘든 나라가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압둘 라흐만이 왜 끝까지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신앙만 포기하면 얼마든지 편안하게 살 수 있는데 어째서 고집을 꺾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까닭은 오직 한 가지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가진 부활의 소망, 그 믿음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압둘 라흐만도 확실한 부활 신앙 때문에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끝까지 싸워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 합해서 모두 일곱 명의 제자들이 갈릴리로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전처럼 고기나 잡으러 가겠다 하는 시몬 베드로를 따라 함께 갔습니다. 그리고 배에 함께 올라 밤이 새도록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그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밤이 새도록 그물을 던졌기 때문에 매우 피곤했습니다. 고기라도 좀 잡혔으면 그나마 위로가 되었겠지만... 그들은 낙심하고 실망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단순하지만 분명한 사실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이 없는 삶은 빈 그물뿐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과 함께하지 않을 것 같으면 그 결과는 낭패와 실망뿐이라는 말입니다.
날이 새어 갈 무렵 예수님이 호숫가에 오셔서 그들을 향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없나이다.” 그러자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말씀하신 대로 그들이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졌더니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그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요한복음 기자는 분명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눈을 씻고 찾아도 볼 수 없었던 고기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이 잡혔습니다. 예수님이 함께하시며 그 길을 인도하실 것 같으면 결코 실패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 것 같으면 꿈도 꿀 수 없었던 놀라운 복과 은혜를 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부활의 아침, 제자들 중 가장 먼저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가서 빈 무덤을 확인했던 바로 그 제자가 비로소 예수님을 알아봤습니다. 그가 베드로에게 말했습니다. “주님이시라!”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그 즉시 바다로 뛰어내렸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배울 점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러 갈 때 겉옷을 두른 후에 뛰어내렸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주님에 대한 예의를 갖춘 것입니다. 우리가 가정이나 일터에서 종종 실수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예절을 지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존경하면 존경할수록 더욱 더 예의 범절을 깍듯이 지켜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는 그 경황 중에도 겉옷을 두름으로써 나름대로 주님에 대한 예의를 지키려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모두 육지에 올라보니 예수님이 숯불 위에 떡과 생선을 구우시며 조반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양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셨는지 막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고 하시면서... 늘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조반을 잡수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그 아침 무엇 때문에 제자들과 함께 조반을 잡수시려고 하셨을까요? 제자들의 허기진 배를 채워 주시려고? 아니면 밤새도록 고기 잡이에 실패한 제자들을 위로하시려고? 그보다는 좀 더 중요한 목적이 있었을 것 같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주님의 부활이 현실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시려고 그들을 찾아가셨고 그들과 함께 조반을 잡수셨던 것입니다.
부활 후 제법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부활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헛것을 봤고 헛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심지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봤던 제자들 중에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기자가 분명히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까?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마 28:16~17)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결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할 것 같으면 제자들로서는 더 이상 할 일이 없지 않겠습니까?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잘 믿는다고 하면서 정작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할 것 같으면 오늘 우리도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여러 가지 설명이 있을 수 있지만 여기서 믿음이란 곧 구체적으로 사랑할 대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는 믿음을 의미하지 않을까요? 때문에 그 믿음은 부활하신 주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조반을 잡수신 후 예수님이 시몬 베드로에게 진지하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예수님이 두 번째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내 양을 치라!” 예수님이 세 번째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씩이나 물으시므로 근심하며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그러자 예수님이 다시금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
왜 주님은 시몬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을까요? 그 까닭은 주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이 약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믿음이 약했기 때문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기를 잡으려고 갈릴리로 돌아왔습니다. 주님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결코 사랑할 수 없기 때문에 주님은 거듭 물으셨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필요한 것은 사랑이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결코 주님이 맡기신 사명 또한 감당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여기서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양은 모두 다 주님의 양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의 양은 한결같이 목자의 손길과 같은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양은 자기 스스로 꼴을 찾아 먹을 수도 없습니다. 따뜻하게 돌보지 않을 것 같으면 쉽게 해를 당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주님이 우리에게 믿고 맡기신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맡기신 양을 우리가 먹이고 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대는 믿지 않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믿는 사람들까지도 부활 신앙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꼭 부활을 믿지 못해서라기보다는 부활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 옛날 디베랴 호수에서 제자들이 왜 고기 잡이에 정신을 빼앗겼을까요? 부활하신 주님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사랑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제자들의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하지 않습니까? 주님은 베드로가 고기를 잡으러 간 것을 책망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은 결코 호수에 그물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부끄럽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몇 번을 물으시더라도 똑같이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형을 언도하는 재판관들 앞에서 압둘 라흐만이 담대하게 말했던 것처럼...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그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양을 정성껏 돌봄으로 말미암아 장차 주님 보좌 앞에 섰을 때 “잘했다!” 칭찬받는 충성스러운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출처/강석공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작년 봄에 있었던 일로 기억합니다. 압둘 라흐만이라는 사람은 파키스탄에 있는 기독교 단체에서 일하다가 기독교로 개종한 아프가니스탄 사람입니다. 그가 고향에 갔다가 기독교로 개종한 것 때문에 당국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프가니스탄 헌법에는 엄연히 종교의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회교 율법은 개종자를 사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다고 합니다. 결국 그는 꼼짝없이 죽임을 당할 위기에 빠졌습니다. 실제로 당국은 그를 처형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서방 국가들과 세계 언론이 자유와 인권을 들먹이며 아프가니스탄 정부를 압박했습니다. 결국 국제 사회에서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된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그를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할 병자라면서 석방했습니다.
신문을 통해서 그 소식을 읽으며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아직까지 예수를 믿는 것이 그렇게 힘든 나라가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압둘 라흐만이 왜 끝까지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신앙만 포기하면 얼마든지 편안하게 살 수 있는데 어째서 고집을 꺾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까닭은 오직 한 가지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가진 부활의 소망, 그 믿음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압둘 라흐만도 확실한 부활 신앙 때문에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끝까지 싸워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 합해서 모두 일곱 명의 제자들이 갈릴리로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전처럼 고기나 잡으러 가겠다 하는 시몬 베드로를 따라 함께 갔습니다. 그리고 배에 함께 올라 밤이 새도록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그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밤이 새도록 그물을 던졌기 때문에 매우 피곤했습니다. 고기라도 좀 잡혔으면 그나마 위로가 되었겠지만... 그들은 낙심하고 실망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단순하지만 분명한 사실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이 없는 삶은 빈 그물뿐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과 함께하지 않을 것 같으면 그 결과는 낭패와 실망뿐이라는 말입니다.
날이 새어 갈 무렵 예수님이 호숫가에 오셔서 그들을 향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없나이다.” 그러자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말씀하신 대로 그들이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졌더니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그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요한복음 기자는 분명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눈을 씻고 찾아도 볼 수 없었던 고기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이 잡혔습니다. 예수님이 함께하시며 그 길을 인도하실 것 같으면 결코 실패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 것 같으면 꿈도 꿀 수 없었던 놀라운 복과 은혜를 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부활의 아침, 제자들 중 가장 먼저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가서 빈 무덤을 확인했던 바로 그 제자가 비로소 예수님을 알아봤습니다. 그가 베드로에게 말했습니다. “주님이시라!”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그 즉시 바다로 뛰어내렸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배울 점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러 갈 때 겉옷을 두른 후에 뛰어내렸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주님에 대한 예의를 갖춘 것입니다. 우리가 가정이나 일터에서 종종 실수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예절을 지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존경하면 존경할수록 더욱 더 예의 범절을 깍듯이 지켜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는 그 경황 중에도 겉옷을 두름으로써 나름대로 주님에 대한 예의를 지키려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모두 육지에 올라보니 예수님이 숯불 위에 떡과 생선을 구우시며 조반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양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셨는지 막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고 하시면서... 늘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조반을 잡수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그 아침 무엇 때문에 제자들과 함께 조반을 잡수시려고 하셨을까요? 제자들의 허기진 배를 채워 주시려고? 아니면 밤새도록 고기 잡이에 실패한 제자들을 위로하시려고? 그보다는 좀 더 중요한 목적이 있었을 것 같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주님의 부활이 현실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시려고 그들을 찾아가셨고 그들과 함께 조반을 잡수셨던 것입니다.
부활 후 제법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부활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헛것을 봤고 헛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심지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봤던 제자들 중에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기자가 분명히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까?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마 28:16~17)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결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할 것 같으면 제자들로서는 더 이상 할 일이 없지 않겠습니까?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잘 믿는다고 하면서 정작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할 것 같으면 오늘 우리도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여러 가지 설명이 있을 수 있지만 여기서 믿음이란 곧 구체적으로 사랑할 대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는 믿음을 의미하지 않을까요? 때문에 그 믿음은 부활하신 주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조반을 잡수신 후 예수님이 시몬 베드로에게 진지하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예수님이 두 번째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내 양을 치라!” 예수님이 세 번째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씩이나 물으시므로 근심하며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그러자 예수님이 다시금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
왜 주님은 시몬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을까요? 그 까닭은 주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이 약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믿음이 약했기 때문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기를 잡으려고 갈릴리로 돌아왔습니다. 주님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결코 사랑할 수 없기 때문에 주님은 거듭 물으셨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필요한 것은 사랑이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결코 주님이 맡기신 사명 또한 감당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여기서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양은 모두 다 주님의 양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의 양은 한결같이 목자의 손길과 같은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양은 자기 스스로 꼴을 찾아 먹을 수도 없습니다. 따뜻하게 돌보지 않을 것 같으면 쉽게 해를 당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주님이 우리에게 믿고 맡기신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맡기신 양을 우리가 먹이고 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대는 믿지 않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믿는 사람들까지도 부활 신앙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꼭 부활을 믿지 못해서라기보다는 부활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 옛날 디베랴 호수에서 제자들이 왜 고기 잡이에 정신을 빼앗겼을까요? 부활하신 주님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사랑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제자들의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하지 않습니까? 주님은 베드로가 고기를 잡으러 간 것을 책망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은 결코 호수에 그물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부끄럽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몇 번을 물으시더라도 똑같이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형을 언도하는 재판관들 앞에서 압둘 라흐만이 담대하게 말했던 것처럼...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그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양을 정성껏 돌봄으로 말미암아 장차 주님 보좌 앞에 섰을 때 “잘했다!” 칭찬받는 충성스러운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출처/강석공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