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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같은 제사장의 5대 삶 (벧전2장 1-10절)
< 온전한 제물이 되십시오 >
미국에 있는 저희 ‘기독교 선교 연맹(C&MA)’에서는 정책적으로 바자회를 통해 선교하지 못하게 합니다. 바자회(bazaar)란 자기가 쓰지 않는 것을 기증해 팔아서 헌금이나 기부금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뜻은 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쓰다 남은 것’을 통해 선교하기보다는 ‘정성스럽게 구별한 것’을 통해서 선교하기를 원하십니다.
구약 말씀을 보면 흠이 있는 제물은 엄격히 금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차피 제물을 죽이고 불태울 것인데, 조금 병들고 상한 것을 가져오면 어떤가?”라고 가볍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건강한 수양의 가격이 20만원이면 발이 부러진 것이나 병든 것을 10만원 주고 사서 가져오고 싶은 생각도 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병든 제물로 형식적으로 헌신하기보다는 온전한 헌신을 원하십니다.
인천에서 어렵게 목회할 때, 교회에 봉고차가 필요했습니다. 그때 한 형제가 생활정보지에 ‘봉고차 기증해주실 분’이란 광고를 내자 며칠 후에 한분이 중고 봉고차를 기증하겠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송도에 가서 그 차를 보니까 겉모습도 꽤 괜찮았고, 기증자는 사소한 것 몇 가지만 고치면 쓸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꽤 돈을 들여 명의 이전을 하고 몇 군데를 고쳤습니다. 그 차가 1달 만에 교회형제들과 포천에 야유회 갔다가 주저앉았습니다. 그것 때문에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폐차 비용까지 들었습니다. 그 일을 겪으면서 하나님께서 온전한 제물을 원하신다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실감했었습니다.
요새 제가 쓴 사랑칼럼 중에 몇 편이 저의 허락도 없이 수십만 명에게 메일로 편지를 보내는 곳에서 인용되어 보내진 적이 있습니다. 게다가 글이 온전히 인용되지 않고 일부만 인용되어 보내졌습니다. 그분을 저도 압니다. 좋은 분입니다. 그리고 좋은 일을 하니까 그분에게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 모습을 통해 ‘온전하지 못한 제물’을 대할 때 하나님께서 어떤 마음을 가지실지에 대해 조금은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가끔 교회에 무엇인가 드리고 싶고 선교사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드리고 싶은 감동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그때 쓰다가 막 버리려는 것을 드리기보다는 좋은 것을 최선을 다해 구별해 드리십시오. 집이 팔리면 드리겠다고 하지 말고 작은 물질이라도 정성껏 구별해서 드리십시오. 하나님은 온전한 제물을 원하십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이 온전한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는 왕 같은 제사장이면서도 동시에 온전한 제물로 살아야 합니다.
< 왕 같은 제사장의 5대 삶 >
본문 5절 말씀을 보면 ‘거룩한 제사장’이란 표현이 나옵니다. 또한 본문 9절 말씀을 보면 ‘왕 같은 제사장들’이란 표현이 나옵니다. 이 표현은 엄청난 축복의 표현입니다. 성도가 왕 같은 제사장의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버려야 할 것을 버려야 합니다
본문 1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이 구절을 한 마디로 말하면 “죄를 버리라!”는 말입니다. 죄는 모든 축복과 행복을 빼앗는 근원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사랑과 온기를 느끼지 못하게 하고, 용서와 성결을 막고,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게 하고, 자기방어에 급급하게 만듭니다. 또한 죄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인도를 보지 못하게 하고, 심령의 평안을 막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에 대한 믿음을 잃게 만들고, 더 이상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무엇보다 죄를 버리려고 힘써야 합니다.
특별히 이 구절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궤휼입니다. 궤휼이란 자기 야망을 위해 거짓되고 간사한 말을 하는 것을 뜻합니다. 궤휼은 사단의 미끼로 겉으로는 진리 같지만 그 안에 낚시 바늘이 있어서 똑똑한 사람도 잘 넘어갑니다. 제가 1995년부터 2년 동안 MBC 신우회 지도목사를 했는데, 1992년 불었던 시한부 종말론 열풍으로 수많은 똑똑한 PD들과 아나운서들까지 넘어가 그때까지도 후유증이 있었습니다.
그 뒤 2년쯤 후에 수원의 한 교회 목사가 이단으로 교회에서 쫓겨나면서 30명의 성도를 끌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성령’과 ‘영성’을 내세워 선교회를 만들고 30명으로부터 재산 헌납을 요구했습니다. 그 무리에 속한 MBC의 한 차장도 그 목사의 전도사업 자금을 대겠다고 돈을 꿔서 많은 신우회 회원들이 수억의 돈을 떼였습니다. 그 일로 다시 MBC 신우회가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교회에서는 절대 돈놀이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돈이 개입되면 누군가 실족하는 영혼이 반드시 생깁니다.
어떤 목사님은 목회를 잘하다 이단 때문에 교회가 깨져서 지금 마을버스를 운전하십니다. 어떤 목사님은 개척교회를 해서 150명까지 부흥되면서 제게 자랑했습니다. “목사님! 저희 교회는 매주 교패를 2개씩 붙여요.” 그런데 그 교회에 이단시 되는 전도운동이 들어와 교회가 완전히 깨져 그 목사님은 다시 혼자가 되었습니다.
어떤 대형 마트는 값싸게 물건을 대량으로 납품받아 1차 생산자의 등골을 빼먹고 경쟁 제품을 싸게 판매해 자기 마트가 싼 것처럼 소비자를 인식시키면서 독과점 제품에서 폭리를 취합니다. 그것은 경영이 아니라 궤휼입니다. 사람이 왜 궤휼에 넘어갑니까? 자세히 보면 물질적인 욕심과 영적인 욕심 때문입니다. 성도는 대박을 약속하는 것은 무조건 경계해야 하고,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그처럼 죄와 욕심을 잘 버릴 때 왕 같은 제사장처럼 살 수 있습니다.
2. 사모해야 할 것을 사모해야 합니다
본문 2절 말씀을 보십시오.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이 구절에서 순전하고 신령한 젖은 말씀을 뜻하는데, 그처럼 말씀을 갓난아기들이 젖을 찾듯이 간절히 찾아야 합니다.
말씀은 영혼의 양식입니다. 말씀이 없으면 성장도 없습니다. 말씀은 인생의 산을 오를 때 용기를 주는 밧줄과도 같고, 인생의 골짜기에 있을 때는 길을 인도하는 나침판과 같습니다. 또한 말씀은 인생의 비바람 속에서 확신의 우산이 되고, 메마른 사막에서는 끊임없는 생수를 주는 수통과도 같습니다. 왕 같은 제사장이 되려면 죄와 욕심을 과감히 버리고 말씀과 기도와 헌신을 앞세운 생활을 오늘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철학자 키일케골의 글입니다. 어느 날, 겨울이 되자 철새들이 남쪽으로 날아가다 배가 고팠습니다. 그때 철새 대장이 말했습니다. “얘들아! 저 밑의 옥수수를 뜯어먹고 가자.” 그래서 옥수수를 배불리 먹은 후에 다시 날아가는데 그때 철새 한 마리가 “이 맛있는 옥수수를 두고 어떻게 떠나나? 내일 떠나자!”고 하면서 계속 옥수수 밭에 남았습니다.
다음 날, 그 철새는 떠나야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또 중얼거렸습니다. “이 맛있는 음식을 두고 어떻게 떠나나? 내일 떠나자!” 그렇게 밤낮 내일 떠난다고 결심만 했습니다. 얼마 후, 첫 눈이 내리자 철새는 진짜 결심했습니다. “이제 떠나자!” 그런데 그 동안 옥수수를 너무 많이 먹어 날갯죽지에 살이 붙어 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 철새는 첫 눈에 파묻혀 죽었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무엇을 버려야 하고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 압니다. 그런데 “내일 하자!”고 결심만 하다가 소중한 시간을 다 버리고 뒤늦게 후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내일 하자!”라는 말을 주의해야 합니다. 내일의 찬란한 꿈을 가지고 “지금 하자! 오늘부터 하자!”고 해야 합니다.
히말라야 산속에 가면 야맹조란 새가 있습니다. 이 새는 낮에는 열심히 놀다가 밤이 되면 남의 새 둥지에 들어갑니다. 그러면 그 둥지의 주인장 새가 불청객인 야맹조를 막 쪼면서 한참 구박합니다. 그러면 야맹조는 너무 서러워서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결심합니다. “정말 서러워서 못살겠다. 내일은 꼭 내 둥지를 짓겠다.”
다음 날이 되자 야맹조는 어제 눈물로 했던 결심을 잊어버리고 또 여기저기 놀러 다닙니다. 결국 밤이 되어 남의 둥지 신세를 질 수밖에 없어서 또 남의 둥지에 들어가면 또 한참 쪼이고 구박을 받습니다. 그때도 또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다짐합니다. “정말 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껍고 치사해서 못 참겠다. 내일은 반드시 내 둥지를 짓겠다.” 그렇게 내일, 내일 하다가 아직까지도 둥지를 못 짓고 지금도 히말라야 산 속에서 구박받고 있습니다.
그처럼 “내일 하자!”고 하면 이미 진 것입니다. “나중에 자리 잡은 후에 교회에 다니자!”고 하면 자리를 잡은 후에는 더 못 다닙니다. 지금 버려야 할 것은 버려야 하고 해야 할 것은 해야 합니다. 지금부터 예배에 최선을 다해 참석하고, 말씀과 기도생활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다음에 여유가 생기면 선교하자!”고 하지 말고 지금부터 선교하고, 봉사문제에서도 지금부터 최대한 봉사자리를 찾아서 봉사해야 합니다.
3. 자신의 신분을 자각해야 합니다
본문 4-5절 말씀을 보십시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찌니라.”
이 구절을 보면 베드로는 예수님을 당시 메시아를 표현하는 ‘산 돌(living stone)’이라고 하면서 성도도 산 돌처럼 행동해서 교회를 성장시키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라고 권면합니다. 그 말은 구원받은 성도로서 자신의 신분을 가치 있게 여기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자기 신분을 소중히 여기면 그 신분에 대한 각성 때문에 언행이 달라집니다. 집사직을 소중히 여기면 집사다운 행동이 나오게 됩니다.
인천에서 목회할 때, 근처의 한 큰 교회가 무섭게 싸웠습니다. 그때 목사파와 장로파가 싸우는데, 목사파는 교회 안에서 교회 물건들을 다 가져와 출입구를 막고 있었고, 장로파는 교회 밖에서 농성하면서 수많은 상스러운 욕을 다하고 돌을 던져 교회 유리창을 깼습니다. 그 모습이 TV에 방영되어서 수많은 사람들의 전도를 막았습니다. 성도는 교회를 망치는 거침돌이 되지 말고 교회를 세우는 산 돌이 되어야 합니다.
고대 그리스 스파르타 지역에 한 왕이 있었습니다. 당시 그 왕은 강한 성벽을 구축했습니다. 어느 날, 근처의 한 군주가 스파르타를 방문했습니다. 그가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말했습니다. “왕이여! 이번에 새로 구축한 강한 성벽을 한번 보여주시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때 스파르타 왕이 만족한 모습으로 자신의 잘 훈련된 군사들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저 잘 훈련된 충성스런 군사들이 바로 스파르타의 성벽입니다.”
우리는 스파르타 왕의 잘 훈련된 충성스런 군사들처럼 교회의 견고한 ‘산 돌’들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산 돌이 됩니까? 본문 4절 말씀을 보면 베드로는 ‘산 돌’의 축복을 받기 위해 주님께 나오라고 권면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여러 방면에서 축복의 비결을 찾지만 가장 간단하고도 확실한 축복의 비결은 진실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나오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도 변함없이 주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힘들다고 교회에 나오기를 포기하면 주님의 은혜를 체험할 길이 없습니다. 로마서 8장 3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주님은 풍성한 축복을 준비해 놓고 우리가 나오기만 기다리십니다.
계속해서 본문 6절 말씀을 보십시오.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이 구절을 보면 우리가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인 예수님을 믿으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7-8절 말씀을 보면 믿지 않는 자에게는 산 돌이 심판하고 때리는 돌이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주님이 예비하신 은혜는 백억 짜리 수표보다 더 가치 있는 백지수표와 같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으면 그 수표를 현금화할 수 없습니다. 지금도 축복의 가능성은 무한합니다. 중요한 것은 굳건한 믿음으로 그 축복을 취하는 것입니다.
4. 희생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본문 9절 전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 구절을 보면 목사만 제사장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제사장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제사장은 특권도 있지만 자신이 제물이 되어 다른 사람의 중보자가 되어야 하는 책임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인이 제사장이라는 말은 “나도 목사다!”라고 과시하라는 말이 아니라 모두가 자신을 드리고 헌신하고 희생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구약 시대에 제사장은 귀에 피를 발랐습니다. 말씀대로 살겠다는 뜻입니다. 또한 엄지손가락에도 피를 발랐습니다. 내 재치를 하나님을 위해 드리겠다는 표시입니다. 발가락에도 피를 발랐습니다. 내 행로가 여호와께 속했다는 표시입니다. 또한 제사장들은 나팔을 가지고 아침마다 나팔을 불어 백성을 깨웠고, 그 나팔로 안식일과 희년을 선포하고 전쟁의 경보를 울리기도 했습니다. 그처럼 성도들은 서로 깨어 근신하게 하고 격려해주어야 합니다.
또한 제사장은 제단을 관리하고, 불을 피우고, 재판 일도 했습니다. 그 모든 일은 사실상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지 않으면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처럼 제사장은 섬기는 일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드린 자입니다. 그러므로 만인 제사장설은 특권적인 개념이 아니라 책임적인 개념입니다. 즉 제사장 자리는 감투자리가 아니라 봉사자리입니다. 예수님은 제사장이면서 희생 제물이셨습니다. 우리도 희생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기독교의 가장 기본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누군가 죽어야 누군가 산다!”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가정과 교회가 살아납니다. 그처럼 우리가 종 같이 제물이 되어 누군가를 섬겨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높여주실 것입니다.
5. 거룩한 선전물들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 9절 하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왜 하나님은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셨습니까? 예수님의 이름을 전파하라는 목적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도의 가장 중요한 사명입니다.
제사장 헬라어로 ‘폰티넥스’라고 하는데 그 뜻은 ‘다리를 놓는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사람은 죄 때문에 하나님과 만날 수 없었지만 예수님이 제사장으로서 다리를 놓아 주심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에게 그 만남만큼 소중한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만남 안에 영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이 영혼을 사랑하는 것처럼 영혼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서 전도에 힘써야 합니다. 주님의 마지막 명령은 우리의 최초의 관심이 되어야 한다(The Lord's last command is to be our first concern).
우리는 주님의 편지이고 주님의 향기입니다. 구약 시대 제사장들이 입는 옷에는 석류가 달려 있었습니다. 석류는 과일 중에서 가장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 과일입니다. 그래서 제사장이 가는 곳에는 언제나 향기로운 냄새가 났습니다. 그처럼 우리가 가는 곳마다 향기로운 냄새가 나서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직장이 변화되도록 해야 합니다. 또한 선교에도 물심양면으로 힘써 동참해야 합니다.
선교사 세계에서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있습니다. 기적적인 선교체험이 있고 선교에 관한 설교를 잘하는 베테랑 선교사님들은 후원자가 넘칩니다. 책들을 통해서 유명해지면 후원자는 비례해서 많아집니다. 반면에 어떤 선교사님은 후원자가 적어서 힘듭니다. 이번에 파송되는 여승훈 선교사처럼 신임 선교사는 더욱 후원자를 만나기가 힘듭니다. 사실 여 목사님처럼 초임 선교사나 무명의 선교사들에게 우리의 관심과 기도가 더 필요합니다.
이번에 저희들이 전체 이주비 421만을 다 해드리지는 못하지만 그 비용에 거의 근접해서 후원해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터넷 후원자 중에서도 2분이 헌신해주셨습니다. 그처럼 이주비용은 대략 해결되었지만 아직도 여 목사님 가족과 친지 외에는 정기 후원교회와 후원자가 거의 연결되지 못했습니다. 한번에 목돈을 후원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매월 5만원이나 10만원씩 후원하는 정기후원자들도 필요합니다. 그런 분들도 연결될 수 있게 기도해주십시오.
전도와 선교는 성도의 필생 사명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천국 시민으로서 이 땅에서는 나그네처럼 살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하늘에서 발행된 여권에 이 땅의 비자를 받아 이 땅에서 잠깐 사는 것입니다. 그 비자에는 ‘사명’이라는 두 글자가 쓰여 있습니다. 그 사명을 향해서 전 존재를 거십시오. 그 사명을 위해 가정도 잘 돌보고, 건강도 잘 돌보고, 이웃과도 잘 지내고, 열심히 교회도 섬기고, 자녀도 잘 키우고, 사업에서도 성공해야 합니다.
<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사십시오 >
어느 날, 한 선교대회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이 대화하다가 한 사람이 평범한 질문을 했습니다. “무슨 일 하세요?(What do you do?)” 다른 사람이 재치 있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안수 받은 배관공입니다(I am an ordained plumber).” 그처럼 모든 성도는 영적으로는 다 안수 받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선생님은 안수 받은 선생님처럼 가르치고, 사업가는 안수 받은 사업가처럼 사업하고, 심지어는 주부도 안수 받은 주부처럼 살아야 합니다.
성도들은 모두 제사장과 사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제사장의 삶을 살지 않으면 삶에 결코 만족과 보람도 없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놀라운 보물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교회의 힘은 ‘설교자(preacher)’보다는 ‘일반 사람들(people)에게서 나옵니다. 일반 사람들이 움직일 때 성장의 은혜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사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 엄청난 기대를 걸고 계십니다.
어느 날, 오랫동안 교회를 섬기던 한 집사님이 천국에 갔습니다. 그가 주님 앞에 서자 주님은 그가 세상에서 주님을 위해 한 여러 가지 일에 대한 기록을 죽 보셨습니다. 그리고 한 장 한 장 그 기록을 죽 보시면서 마침내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아무개야! 너는 왜 더욱 너답게 살지 않았지? 내가 너를 창조할 때 아주 특별한 존재로 창조했는데, 네 기록을 보니까 너는 내 의도대로 살지 않았더구나!”
우리는 그런 소리를 듣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놀라운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자기 주위에 벽을 쳐서 사람들이 진짜 자기를 못 보게 하고, 자기를 외면하고 자기답게 살지 않고 다른 사람처럼 살면 삶이 허무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 삶에 가끔 고난과 문제가 다가옵니까? 좀더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살고,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더욱 자기답게 살라고 주어진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려고 특별히 창조하고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자질과 능력이 없어. 저 일은 사역자 일이야!”라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하나님 앞에 멋지게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도 체험하지 못한 우리만의 특별한 체험이 책 몇 십 권을 쓸 정도로 있습니다. 그 체험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많습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얼마나 필요한 존재인지 모릅니다.
우리의 체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영혼 구원에 사용하라고 하나님이 특별히 주신 체험입니다. 그 체험을 활용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되어 자기답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무엇을 주시고, 무엇을 이루게 하실 때마다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는지에 대한 목적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목적이란 ‘보다 많은 영혼을 구원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 목적을 위해 돈도 벌고, 일도 하고, 성공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공하면 사람들은 말할 것입니다. “저 사람 성공했어!” 그러나 우리는 그 말을 들으려고 성공한 것도 아니고 이 땅에 존재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교회가 부흥하면 사람들이 말할 것입니다. “분당 샛별교회가 크게 부흥했어!” 그러나 그 말을 들으려고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 계셔! 하나님은 크고 위대하신 분이야!”라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입니다.
신문을 보면 어떤 광고는 잘 보이는 전면광고이고, 어떤 광고는 하단에 거의 보이지 않는 한두 줄 광고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잘 보이는 전면광고물이 되어야 합니다. 항상 주님처럼 살고, 주님을 철저히 의지하고, 복음을 힘써 전함으로 많은 영혼을 살려내어 교회를 부흥시키는 산 돌이 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 되길 바랍니다.
출처/이한규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 온전한 제물이 되십시오 >
미국에 있는 저희 ‘기독교 선교 연맹(C&MA)’에서는 정책적으로 바자회를 통해 선교하지 못하게 합니다. 바자회(bazaar)란 자기가 쓰지 않는 것을 기증해 팔아서 헌금이나 기부금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뜻은 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쓰다 남은 것’을 통해 선교하기보다는 ‘정성스럽게 구별한 것’을 통해서 선교하기를 원하십니다.
구약 말씀을 보면 흠이 있는 제물은 엄격히 금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차피 제물을 죽이고 불태울 것인데, 조금 병들고 상한 것을 가져오면 어떤가?”라고 가볍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건강한 수양의 가격이 20만원이면 발이 부러진 것이나 병든 것을 10만원 주고 사서 가져오고 싶은 생각도 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병든 제물로 형식적으로 헌신하기보다는 온전한 헌신을 원하십니다.
인천에서 어렵게 목회할 때, 교회에 봉고차가 필요했습니다. 그때 한 형제가 생활정보지에 ‘봉고차 기증해주실 분’이란 광고를 내자 며칠 후에 한분이 중고 봉고차를 기증하겠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송도에 가서 그 차를 보니까 겉모습도 꽤 괜찮았고, 기증자는 사소한 것 몇 가지만 고치면 쓸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꽤 돈을 들여 명의 이전을 하고 몇 군데를 고쳤습니다. 그 차가 1달 만에 교회형제들과 포천에 야유회 갔다가 주저앉았습니다. 그것 때문에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폐차 비용까지 들었습니다. 그 일을 겪으면서 하나님께서 온전한 제물을 원하신다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실감했었습니다.
요새 제가 쓴 사랑칼럼 중에 몇 편이 저의 허락도 없이 수십만 명에게 메일로 편지를 보내는 곳에서 인용되어 보내진 적이 있습니다. 게다가 글이 온전히 인용되지 않고 일부만 인용되어 보내졌습니다. 그분을 저도 압니다. 좋은 분입니다. 그리고 좋은 일을 하니까 그분에게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 모습을 통해 ‘온전하지 못한 제물’을 대할 때 하나님께서 어떤 마음을 가지실지에 대해 조금은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가끔 교회에 무엇인가 드리고 싶고 선교사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드리고 싶은 감동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그때 쓰다가 막 버리려는 것을 드리기보다는 좋은 것을 최선을 다해 구별해 드리십시오. 집이 팔리면 드리겠다고 하지 말고 작은 물질이라도 정성껏 구별해서 드리십시오. 하나님은 온전한 제물을 원하십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이 온전한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는 왕 같은 제사장이면서도 동시에 온전한 제물로 살아야 합니다.
< 왕 같은 제사장의 5대 삶 >
본문 5절 말씀을 보면 ‘거룩한 제사장’이란 표현이 나옵니다. 또한 본문 9절 말씀을 보면 ‘왕 같은 제사장들’이란 표현이 나옵니다. 이 표현은 엄청난 축복의 표현입니다. 성도가 왕 같은 제사장의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버려야 할 것을 버려야 합니다
본문 1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이 구절을 한 마디로 말하면 “죄를 버리라!”는 말입니다. 죄는 모든 축복과 행복을 빼앗는 근원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사랑과 온기를 느끼지 못하게 하고, 용서와 성결을 막고,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게 하고, 자기방어에 급급하게 만듭니다. 또한 죄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인도를 보지 못하게 하고, 심령의 평안을 막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에 대한 믿음을 잃게 만들고, 더 이상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무엇보다 죄를 버리려고 힘써야 합니다.
특별히 이 구절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궤휼입니다. 궤휼이란 자기 야망을 위해 거짓되고 간사한 말을 하는 것을 뜻합니다. 궤휼은 사단의 미끼로 겉으로는 진리 같지만 그 안에 낚시 바늘이 있어서 똑똑한 사람도 잘 넘어갑니다. 제가 1995년부터 2년 동안 MBC 신우회 지도목사를 했는데, 1992년 불었던 시한부 종말론 열풍으로 수많은 똑똑한 PD들과 아나운서들까지 넘어가 그때까지도 후유증이 있었습니다.
그 뒤 2년쯤 후에 수원의 한 교회 목사가 이단으로 교회에서 쫓겨나면서 30명의 성도를 끌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성령’과 ‘영성’을 내세워 선교회를 만들고 30명으로부터 재산 헌납을 요구했습니다. 그 무리에 속한 MBC의 한 차장도 그 목사의 전도사업 자금을 대겠다고 돈을 꿔서 많은 신우회 회원들이 수억의 돈을 떼였습니다. 그 일로 다시 MBC 신우회가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교회에서는 절대 돈놀이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돈이 개입되면 누군가 실족하는 영혼이 반드시 생깁니다.
어떤 목사님은 목회를 잘하다 이단 때문에 교회가 깨져서 지금 마을버스를 운전하십니다. 어떤 목사님은 개척교회를 해서 150명까지 부흥되면서 제게 자랑했습니다. “목사님! 저희 교회는 매주 교패를 2개씩 붙여요.” 그런데 그 교회에 이단시 되는 전도운동이 들어와 교회가 완전히 깨져 그 목사님은 다시 혼자가 되었습니다.
어떤 대형 마트는 값싸게 물건을 대량으로 납품받아 1차 생산자의 등골을 빼먹고 경쟁 제품을 싸게 판매해 자기 마트가 싼 것처럼 소비자를 인식시키면서 독과점 제품에서 폭리를 취합니다. 그것은 경영이 아니라 궤휼입니다. 사람이 왜 궤휼에 넘어갑니까? 자세히 보면 물질적인 욕심과 영적인 욕심 때문입니다. 성도는 대박을 약속하는 것은 무조건 경계해야 하고,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그처럼 죄와 욕심을 잘 버릴 때 왕 같은 제사장처럼 살 수 있습니다.
2. 사모해야 할 것을 사모해야 합니다
본문 2절 말씀을 보십시오.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이 구절에서 순전하고 신령한 젖은 말씀을 뜻하는데, 그처럼 말씀을 갓난아기들이 젖을 찾듯이 간절히 찾아야 합니다.
말씀은 영혼의 양식입니다. 말씀이 없으면 성장도 없습니다. 말씀은 인생의 산을 오를 때 용기를 주는 밧줄과도 같고, 인생의 골짜기에 있을 때는 길을 인도하는 나침판과 같습니다. 또한 말씀은 인생의 비바람 속에서 확신의 우산이 되고, 메마른 사막에서는 끊임없는 생수를 주는 수통과도 같습니다. 왕 같은 제사장이 되려면 죄와 욕심을 과감히 버리고 말씀과 기도와 헌신을 앞세운 생활을 오늘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철학자 키일케골의 글입니다. 어느 날, 겨울이 되자 철새들이 남쪽으로 날아가다 배가 고팠습니다. 그때 철새 대장이 말했습니다. “얘들아! 저 밑의 옥수수를 뜯어먹고 가자.” 그래서 옥수수를 배불리 먹은 후에 다시 날아가는데 그때 철새 한 마리가 “이 맛있는 옥수수를 두고 어떻게 떠나나? 내일 떠나자!”고 하면서 계속 옥수수 밭에 남았습니다.
다음 날, 그 철새는 떠나야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또 중얼거렸습니다. “이 맛있는 음식을 두고 어떻게 떠나나? 내일 떠나자!” 그렇게 밤낮 내일 떠난다고 결심만 했습니다. 얼마 후, 첫 눈이 내리자 철새는 진짜 결심했습니다. “이제 떠나자!” 그런데 그 동안 옥수수를 너무 많이 먹어 날갯죽지에 살이 붙어 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 철새는 첫 눈에 파묻혀 죽었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무엇을 버려야 하고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 압니다. 그런데 “내일 하자!”고 결심만 하다가 소중한 시간을 다 버리고 뒤늦게 후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내일 하자!”라는 말을 주의해야 합니다. 내일의 찬란한 꿈을 가지고 “지금 하자! 오늘부터 하자!”고 해야 합니다.
히말라야 산속에 가면 야맹조란 새가 있습니다. 이 새는 낮에는 열심히 놀다가 밤이 되면 남의 새 둥지에 들어갑니다. 그러면 그 둥지의 주인장 새가 불청객인 야맹조를 막 쪼면서 한참 구박합니다. 그러면 야맹조는 너무 서러워서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결심합니다. “정말 서러워서 못살겠다. 내일은 꼭 내 둥지를 짓겠다.”
다음 날이 되자 야맹조는 어제 눈물로 했던 결심을 잊어버리고 또 여기저기 놀러 다닙니다. 결국 밤이 되어 남의 둥지 신세를 질 수밖에 없어서 또 남의 둥지에 들어가면 또 한참 쪼이고 구박을 받습니다. 그때도 또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다짐합니다. “정말 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껍고 치사해서 못 참겠다. 내일은 반드시 내 둥지를 짓겠다.” 그렇게 내일, 내일 하다가 아직까지도 둥지를 못 짓고 지금도 히말라야 산 속에서 구박받고 있습니다.
그처럼 “내일 하자!”고 하면 이미 진 것입니다. “나중에 자리 잡은 후에 교회에 다니자!”고 하면 자리를 잡은 후에는 더 못 다닙니다. 지금 버려야 할 것은 버려야 하고 해야 할 것은 해야 합니다. 지금부터 예배에 최선을 다해 참석하고, 말씀과 기도생활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다음에 여유가 생기면 선교하자!”고 하지 말고 지금부터 선교하고, 봉사문제에서도 지금부터 최대한 봉사자리를 찾아서 봉사해야 합니다.
3. 자신의 신분을 자각해야 합니다
본문 4-5절 말씀을 보십시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찌니라.”
이 구절을 보면 베드로는 예수님을 당시 메시아를 표현하는 ‘산 돌(living stone)’이라고 하면서 성도도 산 돌처럼 행동해서 교회를 성장시키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라고 권면합니다. 그 말은 구원받은 성도로서 자신의 신분을 가치 있게 여기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자기 신분을 소중히 여기면 그 신분에 대한 각성 때문에 언행이 달라집니다. 집사직을 소중히 여기면 집사다운 행동이 나오게 됩니다.
인천에서 목회할 때, 근처의 한 큰 교회가 무섭게 싸웠습니다. 그때 목사파와 장로파가 싸우는데, 목사파는 교회 안에서 교회 물건들을 다 가져와 출입구를 막고 있었고, 장로파는 교회 밖에서 농성하면서 수많은 상스러운 욕을 다하고 돌을 던져 교회 유리창을 깼습니다. 그 모습이 TV에 방영되어서 수많은 사람들의 전도를 막았습니다. 성도는 교회를 망치는 거침돌이 되지 말고 교회를 세우는 산 돌이 되어야 합니다.
고대 그리스 스파르타 지역에 한 왕이 있었습니다. 당시 그 왕은 강한 성벽을 구축했습니다. 어느 날, 근처의 한 군주가 스파르타를 방문했습니다. 그가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말했습니다. “왕이여! 이번에 새로 구축한 강한 성벽을 한번 보여주시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때 스파르타 왕이 만족한 모습으로 자신의 잘 훈련된 군사들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저 잘 훈련된 충성스런 군사들이 바로 스파르타의 성벽입니다.”
우리는 스파르타 왕의 잘 훈련된 충성스런 군사들처럼 교회의 견고한 ‘산 돌’들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산 돌이 됩니까? 본문 4절 말씀을 보면 베드로는 ‘산 돌’의 축복을 받기 위해 주님께 나오라고 권면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여러 방면에서 축복의 비결을 찾지만 가장 간단하고도 확실한 축복의 비결은 진실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나오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도 변함없이 주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힘들다고 교회에 나오기를 포기하면 주님의 은혜를 체험할 길이 없습니다. 로마서 8장 3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주님은 풍성한 축복을 준비해 놓고 우리가 나오기만 기다리십니다.
계속해서 본문 6절 말씀을 보십시오.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이 구절을 보면 우리가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인 예수님을 믿으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7-8절 말씀을 보면 믿지 않는 자에게는 산 돌이 심판하고 때리는 돌이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주님이 예비하신 은혜는 백억 짜리 수표보다 더 가치 있는 백지수표와 같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으면 그 수표를 현금화할 수 없습니다. 지금도 축복의 가능성은 무한합니다. 중요한 것은 굳건한 믿음으로 그 축복을 취하는 것입니다.
4. 희생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본문 9절 전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 구절을 보면 목사만 제사장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제사장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제사장은 특권도 있지만 자신이 제물이 되어 다른 사람의 중보자가 되어야 하는 책임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인이 제사장이라는 말은 “나도 목사다!”라고 과시하라는 말이 아니라 모두가 자신을 드리고 헌신하고 희생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구약 시대에 제사장은 귀에 피를 발랐습니다. 말씀대로 살겠다는 뜻입니다. 또한 엄지손가락에도 피를 발랐습니다. 내 재치를 하나님을 위해 드리겠다는 표시입니다. 발가락에도 피를 발랐습니다. 내 행로가 여호와께 속했다는 표시입니다. 또한 제사장들은 나팔을 가지고 아침마다 나팔을 불어 백성을 깨웠고, 그 나팔로 안식일과 희년을 선포하고 전쟁의 경보를 울리기도 했습니다. 그처럼 성도들은 서로 깨어 근신하게 하고 격려해주어야 합니다.
또한 제사장은 제단을 관리하고, 불을 피우고, 재판 일도 했습니다. 그 모든 일은 사실상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지 않으면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처럼 제사장은 섬기는 일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드린 자입니다. 그러므로 만인 제사장설은 특권적인 개념이 아니라 책임적인 개념입니다. 즉 제사장 자리는 감투자리가 아니라 봉사자리입니다. 예수님은 제사장이면서 희생 제물이셨습니다. 우리도 희생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기독교의 가장 기본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누군가 죽어야 누군가 산다!”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가정과 교회가 살아납니다. 그처럼 우리가 종 같이 제물이 되어 누군가를 섬겨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높여주실 것입니다.
5. 거룩한 선전물들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 9절 하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왜 하나님은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셨습니까? 예수님의 이름을 전파하라는 목적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도의 가장 중요한 사명입니다.
제사장 헬라어로 ‘폰티넥스’라고 하는데 그 뜻은 ‘다리를 놓는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사람은 죄 때문에 하나님과 만날 수 없었지만 예수님이 제사장으로서 다리를 놓아 주심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에게 그 만남만큼 소중한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만남 안에 영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이 영혼을 사랑하는 것처럼 영혼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서 전도에 힘써야 합니다. 주님의 마지막 명령은 우리의 최초의 관심이 되어야 한다(The Lord's last command is to be our first concern).
우리는 주님의 편지이고 주님의 향기입니다. 구약 시대 제사장들이 입는 옷에는 석류가 달려 있었습니다. 석류는 과일 중에서 가장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 과일입니다. 그래서 제사장이 가는 곳에는 언제나 향기로운 냄새가 났습니다. 그처럼 우리가 가는 곳마다 향기로운 냄새가 나서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직장이 변화되도록 해야 합니다. 또한 선교에도 물심양면으로 힘써 동참해야 합니다.
선교사 세계에서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있습니다. 기적적인 선교체험이 있고 선교에 관한 설교를 잘하는 베테랑 선교사님들은 후원자가 넘칩니다. 책들을 통해서 유명해지면 후원자는 비례해서 많아집니다. 반면에 어떤 선교사님은 후원자가 적어서 힘듭니다. 이번에 파송되는 여승훈 선교사처럼 신임 선교사는 더욱 후원자를 만나기가 힘듭니다. 사실 여 목사님처럼 초임 선교사나 무명의 선교사들에게 우리의 관심과 기도가 더 필요합니다.
이번에 저희들이 전체 이주비 421만을 다 해드리지는 못하지만 그 비용에 거의 근접해서 후원해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터넷 후원자 중에서도 2분이 헌신해주셨습니다. 그처럼 이주비용은 대략 해결되었지만 아직도 여 목사님 가족과 친지 외에는 정기 후원교회와 후원자가 거의 연결되지 못했습니다. 한번에 목돈을 후원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매월 5만원이나 10만원씩 후원하는 정기후원자들도 필요합니다. 그런 분들도 연결될 수 있게 기도해주십시오.
전도와 선교는 성도의 필생 사명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천국 시민으로서 이 땅에서는 나그네처럼 살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하늘에서 발행된 여권에 이 땅의 비자를 받아 이 땅에서 잠깐 사는 것입니다. 그 비자에는 ‘사명’이라는 두 글자가 쓰여 있습니다. 그 사명을 향해서 전 존재를 거십시오. 그 사명을 위해 가정도 잘 돌보고, 건강도 잘 돌보고, 이웃과도 잘 지내고, 열심히 교회도 섬기고, 자녀도 잘 키우고, 사업에서도 성공해야 합니다.
<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사십시오 >
어느 날, 한 선교대회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이 대화하다가 한 사람이 평범한 질문을 했습니다. “무슨 일 하세요?(What do you do?)” 다른 사람이 재치 있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안수 받은 배관공입니다(I am an ordained plumber).” 그처럼 모든 성도는 영적으로는 다 안수 받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선생님은 안수 받은 선생님처럼 가르치고, 사업가는 안수 받은 사업가처럼 사업하고, 심지어는 주부도 안수 받은 주부처럼 살아야 합니다.
성도들은 모두 제사장과 사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제사장의 삶을 살지 않으면 삶에 결코 만족과 보람도 없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놀라운 보물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교회의 힘은 ‘설교자(preacher)’보다는 ‘일반 사람들(people)에게서 나옵니다. 일반 사람들이 움직일 때 성장의 은혜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사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 엄청난 기대를 걸고 계십니다.
어느 날, 오랫동안 교회를 섬기던 한 집사님이 천국에 갔습니다. 그가 주님 앞에 서자 주님은 그가 세상에서 주님을 위해 한 여러 가지 일에 대한 기록을 죽 보셨습니다. 그리고 한 장 한 장 그 기록을 죽 보시면서 마침내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아무개야! 너는 왜 더욱 너답게 살지 않았지? 내가 너를 창조할 때 아주 특별한 존재로 창조했는데, 네 기록을 보니까 너는 내 의도대로 살지 않았더구나!”
우리는 그런 소리를 듣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놀라운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자기 주위에 벽을 쳐서 사람들이 진짜 자기를 못 보게 하고, 자기를 외면하고 자기답게 살지 않고 다른 사람처럼 살면 삶이 허무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 삶에 가끔 고난과 문제가 다가옵니까? 좀더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살고,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더욱 자기답게 살라고 주어진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려고 특별히 창조하고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자질과 능력이 없어. 저 일은 사역자 일이야!”라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하나님 앞에 멋지게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도 체험하지 못한 우리만의 특별한 체험이 책 몇 십 권을 쓸 정도로 있습니다. 그 체험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많습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얼마나 필요한 존재인지 모릅니다.
우리의 체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영혼 구원에 사용하라고 하나님이 특별히 주신 체험입니다. 그 체험을 활용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되어 자기답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무엇을 주시고, 무엇을 이루게 하실 때마다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는지에 대한 목적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목적이란 ‘보다 많은 영혼을 구원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 목적을 위해 돈도 벌고, 일도 하고, 성공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공하면 사람들은 말할 것입니다. “저 사람 성공했어!” 그러나 우리는 그 말을 들으려고 성공한 것도 아니고 이 땅에 존재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교회가 부흥하면 사람들이 말할 것입니다. “분당 샛별교회가 크게 부흥했어!” 그러나 그 말을 들으려고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 계셔! 하나님은 크고 위대하신 분이야!”라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입니다.
신문을 보면 어떤 광고는 잘 보이는 전면광고이고, 어떤 광고는 하단에 거의 보이지 않는 한두 줄 광고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잘 보이는 전면광고물이 되어야 합니다. 항상 주님처럼 살고, 주님을 철저히 의지하고, 복음을 힘써 전함으로 많은 영혼을 살려내어 교회를 부흥시키는 산 돌이 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 되길 바랍니다.
출처/이한규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