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38
회개에 합당한 열매 (마3 : 7 - 12)
철학자인 파스칼은 그의 팡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천사도 아니거니와 짐승도 아니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인간들은 천사처럼 살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짐승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거기에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천사가 아닙니다. 그러나 천사같은 그런 존재로 살아가겠다고 높은 이상을 내세우면서도 실제로 사는 것은 너무나도 모순적입니다. '짐승처럼, 그것도 가장 사악하고 더러운 짐승처럼 살아가고 있다. 여기에 문제가 있고 고민이 있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현대인을 비판하는 확실한 정의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유대교에서는 사함 받을 수 없는 죄가 있다고 합니다. 도저히 사함 받을 수 없는 죄를 많이 열거하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 두가지만 말씀을 드립니다. 하나가 회개하기 위하여 범죄하는 거죠. 지금 뉘우치는 것이 있어요. 회개하고 있는데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또 다른 죄를 짓는 거예요. 또 하나는 회개하고 같은 죄를 계속 반복하는 것이죠. 회개하고 또 죄짓고 또 죄짓고. 개가 토했던 것을 다시 먹는 것처럼 늘 회개하며 늘 같은 죄를 반복하는 이러한 죄는 영영 사함 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회개가 없기 때문이요. 회개하지 않는 죄가 사함 받을 수는 없으니까 말입니다. 열매없는 회개는 회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죄라고 하면 먼저 죄 짓는 죄가 있고, 둘째는 회개하지 않는 죄가 있고, 셋째는 변명하는 죄가 있고, 넷째는 죄를 정당화하는 죄가 있습니다. 다섯째는 정당화하기 위해서 내가 지은 죄를 죄 아니라고 정당화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정죄합니다. 여기까지 나아가면 이제는 강퍅하게 되는 것이요 영영 구제 불능한 운명에 빠지게 됩니다.
심리학자 아들러는 사람이라는 것은 외부적인 요구에 대한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보호장치를 몇 가지 가지고 있는 그런 경향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가 변명입니다. 잘못된 것을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밖에서 그것에 대하여 비판할 때에 또 자기 양심도 이것을 비판하게 될 때 변명을 하게 됩니다. 이러면은 영영 영영 구제받을 길이 없습니다. 변명처럼 어리석은 짓은 없습니다. 어떤 일에도 믿는 사람은 변명은 하지 말아야됩니다. 최소한도 변명은 하지 말아야 됩니다. 어떤 일에도 변명은 생각하지도 말 것입니다. 대체로 두가지로 변명을 합니다. 하나는 'Yes, but…' 또 하나는 '단지 …하였더라면' 하는 가정법을 씁니다. 먼저는 보세요. 예컨데 학생이 공부를 잘해서 시험을 잘 봐야 하는데 '잘 보려고 했는데 그러나 다른 과목도 공부해야되기 때문에 이 과목은 망쳤다'는 거요. 그렇다고 인정을 하면서도 '그러나' 하고 무엇 무엇 무엇 변명을 늘어놓아요. 또 한가지는 가정법을 써요. '만일에 나도 대학을 나왔더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대학 못 나온 열등의식 때문에 이같은 일들이 있어졌다' 변명합니다. '내가 만일에 돈이 있었다면, 내가 만일에 건강했다면, 나는 이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기의 부족한 처지를 비롯해서 변명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이 일로부터 정직함으로부터 자기를 회피하는 행위입니다.
또 한가지는 공격형입니다. 자기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공격합니다. 실패에 대한 원인을 타인에게 돌립니다. 다른 사람에게 돌려서 '너도 그랬지' '너라는 사람이' '너 때문이요' 이렇게. 공격형, 그런 심리를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이게 아주 체질이 된 사람이 있어요. 이 사람은 반성할 줄을 모릅니다. 회개가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거리를 두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건 딜레이(Delay)형입니다. 회개는 하겠는데 '좀 더 있다. 아직은 이르다. 회개를 해도 하기야 죽기 전에 해야지. 예수님 옆에 있던 십자가에 매달린 강도도 직전에 회개했는데 아주 직전에 그곳까지 가서 해야지.' 자꾸 미뤄나가는 그런 가운데서 자기와 문제를 이렇게 문제되지 않게 끌고 나가려고 합니다.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이게 체질이 됩니다. 이게 성품이 됩니다. 그러면 진실은 아주 멀어집니다.
그런가 하면 배제형이 있습니다. 이건 아예 문제 삼지를 않습니다. '나만 죄인이냐? 죄가 그것 뿐이더냐?' 세상을 탓하고 심지어는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그럴 수밖에 없었노라. 회개할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배제해 버리는 이러한 심리입니다. 이것은 강퍅하게 된 것이올시다. 다시 돌이킬 길이 없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보면 광야에 세례요한은 외칩니다.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말합니다. 구약성경에 있어서 회개의 정의는 이렇습니다. 회개란 뭐냐? 죄를 떠나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에스겔 33장 그리고 호세야 14장에서 누누이 설명합니다. 여러 성경에서 말씀합니다. 회개란, 죄를 떠나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먼저는 회개란 후회와 뉘우침만은 회개가 아닙니다. 한평생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려도 그건 회개가 아닙니다. 또한 죄에서 떠나는 행동이 있어야 됩니다. 죄스러운 생활에서 떠나야 되고 두 번째는 하나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이런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가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참 엄격한 말씀이올시다. 누가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형벌이 무섭고 비난이 무섭고 아니 지옥이 무서워서 그렇게 회개하는 것, 다시 말하면 강요된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자발적이래야 됩니다. 누가 하라서 하는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벌이 무서워서 심판이 무서워서 형무소가 무서워서 그건 회개가 아닙니다. 비난도 상관이 없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강요되어서 억지로 하는 회개, 이런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남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내 양심을 내가 살피며 자발적으로 자원해서 회개하는 회개만이 진정한 회개요 또 열매를 맺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많은 사람들이 회개는 하면서도 이 현실에 안주하려고 합니다. 떠나기를 싫어합니다. 아주 이상합니다. 담배가 나쁜 줄 알면서도 끊지 않습니다. 이건 나쁜 줄 알면서도 여전히 거기서 매력을 느끼고 있어요. 그것을 즐기고 있어요. 심지어는 아주 위험한 모험을 모험을 즐기고 있어요. 언제까지 그럴 것입니까? 벌써 죄악된 생활에 길들어 졌어요. 심리적으로 길들어져서 아주 그 생활에서 떠나기를 싫어해요. 저는 그런 학생을 보았어요. 고3학생이에요. 공부 열심히 하다가 병들어서 병원에 갔어요. 물론 병원에 있는 동안 공부 안했어요. 병은 나았어요. 그런데 자꾸 아프데요. 아픈 동안 모든 문제가 없으니까 그렇게 잔소리하던 어머니도 잔소리가 없고 그 병원에서 나오려고 하질 않아요. 의사는 아픈 거 없다는데 여기가 아파요. 저기가 아파요. 내 그런 놈을 봤다니까요. 정말 딱 하더라고요. 그래서는 아침 늦게까지 안 일어나요. 도대체가……. 가만히 보았더니 여기서 헤어나오려고 하지를 않아요. 그래서 내가 물었어요. "너 낳고자 하느냐?" 그랬어요. "아! 나아야지요." 그래서 "거짓말하지마!" 그랬습니다. 여러분 안주하려는 마음이 무서운 것이에요.
자, 그렇다면 회개라는 것은 은총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만 얘기할 수가 있는 거예요. 먼저는 회개의 기회를 주셔야 됩니다. 내가 회개하고 싶었는데 그만 갑자기 차사고로 죽었다. 이거 회개 못합니다. 그래서 전 생각합니다. 가끔 그런 지도도 합니다. 병원에 입원해 가지고 몇 달 동안 병원에 있으면서 친구를 불러다가 사과하고 자기 부인에게 내가 그 동안 잘못했소 그런 장면을 내가 볼 때 본인에게 얘기합니다. 당신은 복이 많다고 죽고 사느냐의 문제가 아니오. 회개할 기회가 있잖아. 이게 얼마나 큰 축복이냐 그래요. 그 때 가서 울음을 터뜨리는 걸 봅니다. 만일에 꽝하고 죽었으면 어떻게 되겠냐. 이같은 회개를 할 수 있었겠냐. 회개의 기회를 주셔야돼요. 가룟 유다라는 사람을 여러분이 압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번 여러번 기회를 주셨지만 끝내 회개하지 않고 그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 가담을 했고 그 다음에 뉘우쳤지마는 돌이킬 길이 없었어요. 이미 때는 지났어요. 이런 우스운 얘기가 있습니다. 11시에 회개하겠다고 했는데 10시 반에 죽었다고요. 하나님이 회개의 기회를 주셔야 됩니다.
또 하나님이 믿음을 주셔야 됩니다. 무슨 믿음인가. 사랑에 대한 믿음이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이 아직도 나를 사랑하신다. 내게 향한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 그것을 믿을 때 진정한 회개가 있는 거요. 아무리 때려도 거기에는 회개가 없습니다. 아이들 우는 거 같으면서 잘못했다고 말을 하지만 속으로는 두고보자 그런데요. 참으로 회개는 사랑을 깨달을 때만 있습니다. 어떤 고등학교 학생이 아버지 어머니 잔소리가 싫어서 집을 나가 버렸어요. 어머니는 기가 막힙니다. 그럴 줄은 몰랐는데 한 달을 수소문 해가지고 겨우 아이가 있는 집을 찾았습니다. 계단 밑에 있는 조그만 방 하나를 얻어가지고 거기서 자취를 하고 있는 거예요. 거기에 아이가 없을 때 들어가보고, 보니 방안이 엉망이에요. 냉장고는 텅텅 비어있고 옷은 여기저기 벗어가지고 내던졌고. 어머니가 하루종일 다 청소하고 말끔하게 씻어줬어요. 냉장고를 가득히 채웠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않고 냉장고 벽에다가 그 아이의 백일사진을 떡 붙여놓고 왔습니다. 어머니가 백일 된 아이를 안고 너무 좋아하는 그 모습을 딱 붙여놓고 왔습니다. 애가 저녁에 돌아와서 그걸 보고 통곡을 했습니다. 왜요? 어머니는 지금도 나를 사랑하신다. 그리고 돌아왔습니다. 여러분, 말이 필요가 없습니다. 믿음이 가야됩니다. 사랑에 대한 믿음이 가야 됩니다. '아직도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구나. 하나님은 지금도 나를 사랑하신다.' 십자가를 쳐다보면서 그 사랑을 확인하게 될 때에 그 사랑에 감격하게 될 때에 그때에 흘리는 눈물이 진짜요. 형벌이 무서워서 회개하는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내가 무서워서 회개하는 회개가 회개가 아닙니다. 형무소가 무서워서 벌벌 떠는 것도 회개가 아닙니다. 오로지 사랑을 믿으며 회개하기.
또한 회개에는 하나님께서 용기를 주셔야 됩니다.
용기가 없는 자는 회개 못합니다. 구약에서 보면 다윗이라는 사람을 압니다. 그는 엄청난 죄를 지었습니다. 남의 아내를 취했을 뿐더러 그 남편을 죽였습니다. 숨겨졌던 악이지만 나단 선지가 와서 당신이 죄인이요 할 때 그는 왕의 보좌에서 아무 거리낌없이 무릎을 꿇었습니다. 내가 죄인입니다. 내가 죄를 지었나이다. 회개의 용기가 있었습니다. 용기 없는 사람은 회개 못합니다. 회개해야지, 해야지, 그리고 한평생 찌그러진 얼굴로 삽니다. 구겨진 얼굴로 삽니다. 병든 양심으로 삽니다. 회개에 용기가 필요합니다. 어떤 용기요? 명예와 지위와 체면 다 내동댕이쳐야 됩니다. 왜요? 진실이 먼저니까. 이까짓 체면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다 내 던져야 됩니다. 그리고 모든 운명을 하나님께 맡길 겁니다. 회개한 다음에 되어지는 일, 그 어떠한 일이었다 하더라도 상관할 것 없습니다. 모든 운명을 하나님께 맡기는 그 용기가 있고야 회개할 수 있어요. 회개가 쉬운 게 아니에요. 회개의 열매란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힘을 줘야됩니다. 위선을 벗어버리는 힘을 주셔야 됩니다. 거짓을 활짝 벗어버리는, 체면같은 것 던져버려야 회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회개하지 못하고 그냥 자꾸 미뤄 미뤄 가는 동안에 점점 수렁으로 빠져들고 그 어느 때에 가서는 회개할 수가 없게 되어버립니다. 회개할 때에 비로소 자유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비로소 얼굴이 밝아질 수 있습니다. 참으로 회개할 때에 병도 치료받을 수가 있습니다. 환한 양심 환한 얼굴 온전한 인격을 다시 세우게 될 것입니다.
탈무드에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것처럼 마음 가벼운 일은 없다." 어떻습니까? "I am sorry. That's my fault" 하는 순간, 마음은 편안해 집니다. 미안합니다. 그럼 그건 내 잘못이었어요. 이보다 더 신바람 나는 일은 없어요. 그런가하면 자기가 옳다고 고집하는 것처럼 마음 무거운 일은 없다. 알아서 하세요. 어느 쪽을 선택하시렵니까? 내가 옳고 내가 잘났다고 하면서 점점 썩어가는 운명을 갈 것입니까? 아니면 그건 내 잘못입니다, 하고 환하게 광명을 찾을 것입니까? 회개는 사람을 자유케 합니다.
오늘 성경에 말씀하십니다. "속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지 마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는 특권의식이 내 죄를 정당화할 수는 없어요. 내 과거에 새운 공로가 오늘의 죄를 정당화 해주지 못합니다. 과거에 아무리 좋은 일을 많이 했고 아무리 특권이요 아브라함의 후손이라 해도 오늘 죄는 오늘 죄요, 오늘 죄인은 오늘 죄인입니다. 그 화려한 과거가 오늘 나의 이 불의함을 씻어줄 수 없다는 걸 알아야 돼요. 또한 조상의 의, 즉 아브라함의 의가 내 죄를 사할 수는 없는 거예요. 그 자손 되었다고 하는 것이 오늘 나의 죄를 씻어줄 수는 없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만 회개할 수 있습니다.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것, 회개할 용기를 주시는 것, 회개할 깊은 마음을 진실을 주시는 것, 그것이 은혜올시다. 병들어서 회개하든 실패해서 회개하든 감옥에 들어앉아서 회개하든 회개는 복입니다. 회개는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은총의 기회가 됩니다. 은혜로 회개케 하시고 은혜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게 하십니다. 여기에 승리가 있고 여기에 새로운 능력이 있고 밝은 세상이 있는 것입니다.
출처/곽선희목사 설교 자료 중에서
철학자인 파스칼은 그의 팡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천사도 아니거니와 짐승도 아니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인간들은 천사처럼 살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짐승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거기에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천사가 아닙니다. 그러나 천사같은 그런 존재로 살아가겠다고 높은 이상을 내세우면서도 실제로 사는 것은 너무나도 모순적입니다. '짐승처럼, 그것도 가장 사악하고 더러운 짐승처럼 살아가고 있다. 여기에 문제가 있고 고민이 있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현대인을 비판하는 확실한 정의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유대교에서는 사함 받을 수 없는 죄가 있다고 합니다. 도저히 사함 받을 수 없는 죄를 많이 열거하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 두가지만 말씀을 드립니다. 하나가 회개하기 위하여 범죄하는 거죠. 지금 뉘우치는 것이 있어요. 회개하고 있는데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또 다른 죄를 짓는 거예요. 또 하나는 회개하고 같은 죄를 계속 반복하는 것이죠. 회개하고 또 죄짓고 또 죄짓고. 개가 토했던 것을 다시 먹는 것처럼 늘 회개하며 늘 같은 죄를 반복하는 이러한 죄는 영영 사함 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회개가 없기 때문이요. 회개하지 않는 죄가 사함 받을 수는 없으니까 말입니다. 열매없는 회개는 회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죄라고 하면 먼저 죄 짓는 죄가 있고, 둘째는 회개하지 않는 죄가 있고, 셋째는 변명하는 죄가 있고, 넷째는 죄를 정당화하는 죄가 있습니다. 다섯째는 정당화하기 위해서 내가 지은 죄를 죄 아니라고 정당화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정죄합니다. 여기까지 나아가면 이제는 강퍅하게 되는 것이요 영영 구제 불능한 운명에 빠지게 됩니다.
심리학자 아들러는 사람이라는 것은 외부적인 요구에 대한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보호장치를 몇 가지 가지고 있는 그런 경향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가 변명입니다. 잘못된 것을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밖에서 그것에 대하여 비판할 때에 또 자기 양심도 이것을 비판하게 될 때 변명을 하게 됩니다. 이러면은 영영 영영 구제받을 길이 없습니다. 변명처럼 어리석은 짓은 없습니다. 어떤 일에도 믿는 사람은 변명은 하지 말아야됩니다. 최소한도 변명은 하지 말아야 됩니다. 어떤 일에도 변명은 생각하지도 말 것입니다. 대체로 두가지로 변명을 합니다. 하나는 'Yes, but…' 또 하나는 '단지 …하였더라면' 하는 가정법을 씁니다. 먼저는 보세요. 예컨데 학생이 공부를 잘해서 시험을 잘 봐야 하는데 '잘 보려고 했는데 그러나 다른 과목도 공부해야되기 때문에 이 과목은 망쳤다'는 거요. 그렇다고 인정을 하면서도 '그러나' 하고 무엇 무엇 무엇 변명을 늘어놓아요. 또 한가지는 가정법을 써요. '만일에 나도 대학을 나왔더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대학 못 나온 열등의식 때문에 이같은 일들이 있어졌다' 변명합니다. '내가 만일에 돈이 있었다면, 내가 만일에 건강했다면, 나는 이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기의 부족한 처지를 비롯해서 변명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이 일로부터 정직함으로부터 자기를 회피하는 행위입니다.
또 한가지는 공격형입니다. 자기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공격합니다. 실패에 대한 원인을 타인에게 돌립니다. 다른 사람에게 돌려서 '너도 그랬지' '너라는 사람이' '너 때문이요' 이렇게. 공격형, 그런 심리를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이게 아주 체질이 된 사람이 있어요. 이 사람은 반성할 줄을 모릅니다. 회개가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거리를 두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건 딜레이(Delay)형입니다. 회개는 하겠는데 '좀 더 있다. 아직은 이르다. 회개를 해도 하기야 죽기 전에 해야지. 예수님 옆에 있던 십자가에 매달린 강도도 직전에 회개했는데 아주 직전에 그곳까지 가서 해야지.' 자꾸 미뤄나가는 그런 가운데서 자기와 문제를 이렇게 문제되지 않게 끌고 나가려고 합니다.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이게 체질이 됩니다. 이게 성품이 됩니다. 그러면 진실은 아주 멀어집니다.
그런가 하면 배제형이 있습니다. 이건 아예 문제 삼지를 않습니다. '나만 죄인이냐? 죄가 그것 뿐이더냐?' 세상을 탓하고 심지어는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그럴 수밖에 없었노라. 회개할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배제해 버리는 이러한 심리입니다. 이것은 강퍅하게 된 것이올시다. 다시 돌이킬 길이 없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보면 광야에 세례요한은 외칩니다.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말합니다. 구약성경에 있어서 회개의 정의는 이렇습니다. 회개란 뭐냐? 죄를 떠나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에스겔 33장 그리고 호세야 14장에서 누누이 설명합니다. 여러 성경에서 말씀합니다. 회개란, 죄를 떠나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먼저는 회개란 후회와 뉘우침만은 회개가 아닙니다. 한평생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려도 그건 회개가 아닙니다. 또한 죄에서 떠나는 행동이 있어야 됩니다. 죄스러운 생활에서 떠나야 되고 두 번째는 하나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이런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가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참 엄격한 말씀이올시다. 누가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형벌이 무섭고 비난이 무섭고 아니 지옥이 무서워서 그렇게 회개하는 것, 다시 말하면 강요된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자발적이래야 됩니다. 누가 하라서 하는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벌이 무서워서 심판이 무서워서 형무소가 무서워서 그건 회개가 아닙니다. 비난도 상관이 없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강요되어서 억지로 하는 회개, 이런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남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내 양심을 내가 살피며 자발적으로 자원해서 회개하는 회개만이 진정한 회개요 또 열매를 맺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많은 사람들이 회개는 하면서도 이 현실에 안주하려고 합니다. 떠나기를 싫어합니다. 아주 이상합니다. 담배가 나쁜 줄 알면서도 끊지 않습니다. 이건 나쁜 줄 알면서도 여전히 거기서 매력을 느끼고 있어요. 그것을 즐기고 있어요. 심지어는 아주 위험한 모험을 모험을 즐기고 있어요. 언제까지 그럴 것입니까? 벌써 죄악된 생활에 길들어 졌어요. 심리적으로 길들어져서 아주 그 생활에서 떠나기를 싫어해요. 저는 그런 학생을 보았어요. 고3학생이에요. 공부 열심히 하다가 병들어서 병원에 갔어요. 물론 병원에 있는 동안 공부 안했어요. 병은 나았어요. 그런데 자꾸 아프데요. 아픈 동안 모든 문제가 없으니까 그렇게 잔소리하던 어머니도 잔소리가 없고 그 병원에서 나오려고 하질 않아요. 의사는 아픈 거 없다는데 여기가 아파요. 저기가 아파요. 내 그런 놈을 봤다니까요. 정말 딱 하더라고요. 그래서는 아침 늦게까지 안 일어나요. 도대체가……. 가만히 보았더니 여기서 헤어나오려고 하지를 않아요. 그래서 내가 물었어요. "너 낳고자 하느냐?" 그랬어요. "아! 나아야지요." 그래서 "거짓말하지마!" 그랬습니다. 여러분 안주하려는 마음이 무서운 것이에요.
자, 그렇다면 회개라는 것은 은총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만 얘기할 수가 있는 거예요. 먼저는 회개의 기회를 주셔야 됩니다. 내가 회개하고 싶었는데 그만 갑자기 차사고로 죽었다. 이거 회개 못합니다. 그래서 전 생각합니다. 가끔 그런 지도도 합니다. 병원에 입원해 가지고 몇 달 동안 병원에 있으면서 친구를 불러다가 사과하고 자기 부인에게 내가 그 동안 잘못했소 그런 장면을 내가 볼 때 본인에게 얘기합니다. 당신은 복이 많다고 죽고 사느냐의 문제가 아니오. 회개할 기회가 있잖아. 이게 얼마나 큰 축복이냐 그래요. 그 때 가서 울음을 터뜨리는 걸 봅니다. 만일에 꽝하고 죽었으면 어떻게 되겠냐. 이같은 회개를 할 수 있었겠냐. 회개의 기회를 주셔야돼요. 가룟 유다라는 사람을 여러분이 압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번 여러번 기회를 주셨지만 끝내 회개하지 않고 그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 가담을 했고 그 다음에 뉘우쳤지마는 돌이킬 길이 없었어요. 이미 때는 지났어요. 이런 우스운 얘기가 있습니다. 11시에 회개하겠다고 했는데 10시 반에 죽었다고요. 하나님이 회개의 기회를 주셔야 됩니다.
또 하나님이 믿음을 주셔야 됩니다. 무슨 믿음인가. 사랑에 대한 믿음이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이 아직도 나를 사랑하신다. 내게 향한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 그것을 믿을 때 진정한 회개가 있는 거요. 아무리 때려도 거기에는 회개가 없습니다. 아이들 우는 거 같으면서 잘못했다고 말을 하지만 속으로는 두고보자 그런데요. 참으로 회개는 사랑을 깨달을 때만 있습니다. 어떤 고등학교 학생이 아버지 어머니 잔소리가 싫어서 집을 나가 버렸어요. 어머니는 기가 막힙니다. 그럴 줄은 몰랐는데 한 달을 수소문 해가지고 겨우 아이가 있는 집을 찾았습니다. 계단 밑에 있는 조그만 방 하나를 얻어가지고 거기서 자취를 하고 있는 거예요. 거기에 아이가 없을 때 들어가보고, 보니 방안이 엉망이에요. 냉장고는 텅텅 비어있고 옷은 여기저기 벗어가지고 내던졌고. 어머니가 하루종일 다 청소하고 말끔하게 씻어줬어요. 냉장고를 가득히 채웠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않고 냉장고 벽에다가 그 아이의 백일사진을 떡 붙여놓고 왔습니다. 어머니가 백일 된 아이를 안고 너무 좋아하는 그 모습을 딱 붙여놓고 왔습니다. 애가 저녁에 돌아와서 그걸 보고 통곡을 했습니다. 왜요? 어머니는 지금도 나를 사랑하신다. 그리고 돌아왔습니다. 여러분, 말이 필요가 없습니다. 믿음이 가야됩니다. 사랑에 대한 믿음이 가야 됩니다. '아직도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구나. 하나님은 지금도 나를 사랑하신다.' 십자가를 쳐다보면서 그 사랑을 확인하게 될 때에 그 사랑에 감격하게 될 때에 그때에 흘리는 눈물이 진짜요. 형벌이 무서워서 회개하는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내가 무서워서 회개하는 회개가 회개가 아닙니다. 형무소가 무서워서 벌벌 떠는 것도 회개가 아닙니다. 오로지 사랑을 믿으며 회개하기.
또한 회개에는 하나님께서 용기를 주셔야 됩니다.
용기가 없는 자는 회개 못합니다. 구약에서 보면 다윗이라는 사람을 압니다. 그는 엄청난 죄를 지었습니다. 남의 아내를 취했을 뿐더러 그 남편을 죽였습니다. 숨겨졌던 악이지만 나단 선지가 와서 당신이 죄인이요 할 때 그는 왕의 보좌에서 아무 거리낌없이 무릎을 꿇었습니다. 내가 죄인입니다. 내가 죄를 지었나이다. 회개의 용기가 있었습니다. 용기 없는 사람은 회개 못합니다. 회개해야지, 해야지, 그리고 한평생 찌그러진 얼굴로 삽니다. 구겨진 얼굴로 삽니다. 병든 양심으로 삽니다. 회개에 용기가 필요합니다. 어떤 용기요? 명예와 지위와 체면 다 내동댕이쳐야 됩니다. 왜요? 진실이 먼저니까. 이까짓 체면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다 내 던져야 됩니다. 그리고 모든 운명을 하나님께 맡길 겁니다. 회개한 다음에 되어지는 일, 그 어떠한 일이었다 하더라도 상관할 것 없습니다. 모든 운명을 하나님께 맡기는 그 용기가 있고야 회개할 수 있어요. 회개가 쉬운 게 아니에요. 회개의 열매란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힘을 줘야됩니다. 위선을 벗어버리는 힘을 주셔야 됩니다. 거짓을 활짝 벗어버리는, 체면같은 것 던져버려야 회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회개하지 못하고 그냥 자꾸 미뤄 미뤄 가는 동안에 점점 수렁으로 빠져들고 그 어느 때에 가서는 회개할 수가 없게 되어버립니다. 회개할 때에 비로소 자유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비로소 얼굴이 밝아질 수 있습니다. 참으로 회개할 때에 병도 치료받을 수가 있습니다. 환한 양심 환한 얼굴 온전한 인격을 다시 세우게 될 것입니다.
탈무드에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것처럼 마음 가벼운 일은 없다." 어떻습니까? "I am sorry. That's my fault" 하는 순간, 마음은 편안해 집니다. 미안합니다. 그럼 그건 내 잘못이었어요. 이보다 더 신바람 나는 일은 없어요. 그런가하면 자기가 옳다고 고집하는 것처럼 마음 무거운 일은 없다. 알아서 하세요. 어느 쪽을 선택하시렵니까? 내가 옳고 내가 잘났다고 하면서 점점 썩어가는 운명을 갈 것입니까? 아니면 그건 내 잘못입니다, 하고 환하게 광명을 찾을 것입니까? 회개는 사람을 자유케 합니다.
오늘 성경에 말씀하십니다. "속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지 마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는 특권의식이 내 죄를 정당화할 수는 없어요. 내 과거에 새운 공로가 오늘의 죄를 정당화 해주지 못합니다. 과거에 아무리 좋은 일을 많이 했고 아무리 특권이요 아브라함의 후손이라 해도 오늘 죄는 오늘 죄요, 오늘 죄인은 오늘 죄인입니다. 그 화려한 과거가 오늘 나의 이 불의함을 씻어줄 수 없다는 걸 알아야 돼요. 또한 조상의 의, 즉 아브라함의 의가 내 죄를 사할 수는 없는 거예요. 그 자손 되었다고 하는 것이 오늘 나의 죄를 씻어줄 수는 없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만 회개할 수 있습니다.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것, 회개할 용기를 주시는 것, 회개할 깊은 마음을 진실을 주시는 것, 그것이 은혜올시다. 병들어서 회개하든 실패해서 회개하든 감옥에 들어앉아서 회개하든 회개는 복입니다. 회개는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은총의 기회가 됩니다. 은혜로 회개케 하시고 은혜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게 하십니다. 여기에 승리가 있고 여기에 새로운 능력이 있고 밝은 세상이 있는 것입니다.
출처/곽선희목사 설교 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