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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내 사이의 야곱 (창 29:31-30:2)
요즈음 안방의 인기있는 사극들을 보면 옛날 왕들이 비빈들을 많이 두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이 그것을 보면서 웃는 말로 왕은 참 좋겠다 하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가령, 여인천하에 나오는 중종 같은 사람 보십시오. 그 여자들 틈바구니에서 얼마나 괴로움을 겪습니까? 정치도 온통 여인천하로 어지럽혀지지 않습니까? 또 요즘 시작한 제국의 아침도 보면 ,왕건이가 삼국통일을 잘 했다고 하지만 아내들을 많이 둠으로 그가 죽은 후에 나라가 얼마나 어려워집니까?
우리가 이런 것을 보면 하나님의 원리를 벗어난 결혼생활에는 결코 행복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신불신을 떠나서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신앙이 좋다 해도 하나님이 정하신 결혼생활의 원칙, 일부일처제를 벗어나서 결혼한 사람들은 가정생활이 불행했습니다.
아브라함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우리가 잘 아는 믿음의 조상입니다. 복의 근원으로 택함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도 하나님의 뜻을 잘 몰라서 그 종 하갈을 취해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일로 인해서 그의 가정에 얼마나 어려운 일이 많았습니까?
지금의 중동 분규도 결국은 그 결과가 아닙니까?
그 밖에 다윗도 생각해 보십시오.
그도 하나님의 뜻을 잘 몰라 아내를 많이 두었습니다.
그 때문에 자녀들 가운데 골육상쟁이 생기고 결국 자기도 한 아들에게 반역을 당하여 쫓겨다니는 설움도 당하지 않습니까?
그런 것이 다 가정이 복잡해서 생긴 문제입니다.
솔로몬은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
그도 처음에는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가장 지혜가 많은 왕이었는데 정치적인 목적으로 아내들을 많이 두고 정략결혼을 하고 해서 결국은 나중에는 그들 때문에 이방신을 섬기는 잘못까지 범하지 않습니까?
이게 다 하나님의 원리를 떠나 결혼생활을 했기 때문입니다.
야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내가 둘이었습니다.
거기다가 두 아내의 몸종들까지 합치면 넷입니다.
그들의 남편 노릇을 해야 했고, 그들을 통해서 낳은 아이들의 아버지 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려니 얼마나 복잡한 일이 많았겠습니까? 얼마나 골치 아픈 일들이 많았겠습니까?
성경은 이런 그의 골치 아팠던 일들을 소상하게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역사하셨는지, 궁극적으로는 야곱을 어떻게 훈련시키셨는지를 보여주는데, 이제 그것들을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29:31을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레아에게 총이 없음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무자하였더라
이것이 하나님이 행하신 일입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총이 없는 레아를 위해서는 태를 열어 주셨지만,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라헬에게는 무자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실 뿐만 아니라, 약자의 아픔을 이해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레아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참 안 된 여자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총이 없게 태어났습니다.
외모도 볼품이 없고 안력도 부족하여 사내들에게 별로 매력이 없는 여자였습니다.
집안에서도 천덕꾸러기였을 것입니다.
그냥 놔두면 결혼도 못할 그런 여자였습니다.
그나마 아버지의 꾀로 동생이 시집 갈 때 어떻게 덤으로 끼어서 가게 되었는데, 그렇게 해서 시집을 갔으니 얼마나 구박이 심했겠습니까?
아마 야곱은 레아만 보면 화가 치밀어 올랐을 것입니다.
외삼촌 라반에게 속은 것이 생각나서 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라헬만 좋아합니다.
그러니 레아가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렇지만 어찌 할 도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자기도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라반이 레아에게 라헬처럼 하라고 시켰겠지만 레아도 은근히 야곱의 아내가 되기를 바랬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시치미를 떼고 앉아서 라헬 행세를 한 것이지요.
그것을 생각할 때에 야곱으로서는 더 미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피장파장입니다. 야곱도 그랬으니까요.
야곱이 그 어머니 리브가의 말을 듣고 아버지 앞에서 에서 행세를 한 것이나 레아가 아버지의 말을 듣고 라헬 행세를 한 것이나 피장파장이 아닙니까?
야곱에게 이런 일이 있은 것은 야곱으로 하여금 자기가 아버지와 형에게 한 일이 어떤 일이었는지를 깨닫게 해 주시려는 하나님의 뜻도 있었는 줄 압니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레아가 야곱의 아내는 되었지만 줄곧 천대를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사실 아버지로부터도 버림을 받은 자입니다.
귀찮은 딸이었는데 그런 식으로 치운 것입니다.
남편으로부터도 사랑을 받지 못하는 아내였습니다.
여자가 자기 남편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것, 그것만큼 서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레아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거기다가 동생 라헬로부터는 얼마나 구박을 받았겠습니까?
아마도 자기는 정실 노릇을 하고 언니 레아는 종 부리듯이 했을 것입니다.
이런 레아, 그는 정말 약자 중에 약자입니다.
어느 누구로부터도 총을 받지 못하는 가련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이런 레아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를 돌보십니다.
그래서 그의 태를 열어서 아이를 낳게 해 주십니다.
그 대신에 라헬은 레아에 비해 많은 것을 가졌기 때문에 당분간 아이를 못 낳게 태를 닫았습니다.
정말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약자의 아픔을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레아였기 때문에 그는 아이를 낳으면서 신앙이 더 깊어집니다.
그래서 그 뒤에 그가 아이를 낳고 이름을 지은 것을 보면 그의 신앙의 성장을 엿볼 수 있습니다.
첫째를 낳았을 때 이름을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르우벤이라 했습니다.
르우벤이라는 이름의 뜻은 "보라,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가 감격해서 그렇게 이름을 지은 것 같습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 아들을 낳았을 때는 시므온이라고 했습니다.
시므온이란 "들으심"이라는 뜻입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기도를 들어 주셨다"는 의미에서 그런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 그가 그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하나님께 늘 기도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세 번째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러자 그의 이름을 레위라고 지었습니다.
그 뜻은 "연합됨"인데,"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는 소망을 가지고 그런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때 그는 이름을 유다라고 합니다.
그 뜻은 "찬양"인데,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는 뜻에서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레아의 믿음이 갈수록 성숙하여 지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아픔과 고통은 우리의 믿음을 성숙시킵니다.
그래서 히 12:11에 보면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는다"고 했습니다.
약 1:2-4에도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도 아픔과 고통이 있을 수 있습니다.
때론 그것이 우리의 잘못 때문에 받는 징계성일 때는 있고, 때론 우리의 잘못과 상관없이 우리에게 찾아오는 시련일 수도 있습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은 뜻 없이 우리에게 아픔이나 고통을 주시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보다 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기도하고 소망을 가지고 찬송하며 살라고 우리에게 그런 것을 허용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게 해서 레아는 비록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동생의 구박을 받았어도 그 신앙은 점점 더 무르익어 갔습니다.
반면에 라헬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다음 30:1을 보십시오.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 형을 투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나로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그 남편에게 투정을 부립니다.
그러니까 야곱이 무어라고 합니까?
2절에 보니까, 야곱이 라헬에게 노를 발하여 가로되 그대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야곱이 몹시 화가 나서 한 말입니다.
라헬이 하도 투정을 부리고 못 살게 구니까 화가 나서 내 뱉은 말인데, 정말 명답을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라헬로 성태치 못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야곱은 어렴풋하게 나마 그의 신앙 경험으로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라헬은 전혀 그런 의식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라헬은 신앙적이질 못합니다.
우리가 레아와 라헬을 비교해 보면, 라헬은 외모적으로 아주 잘 생겼지만 신앙이나 인격이 좀 못 됐고, 레아는 외모는 못 생겼지만 신앙이나 인격적인 면에서는 라헬보다는 나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사내들이 다 그렇듯이 야곱이 외모에 반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라헬과 결혼을 했고 또 얼마동안 사랑을 하면서 잘 살았는데 이 여자가 살고 보니까 성질이 얼마나 고약한지 야곱이 학을 뗀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까지 나온 것입니다.
라헬이 한 두 번 그를 괴롭혔으면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그 언니가 아들들을 데리고 노는 것만 보면, 또 야곱이 그 아이들을 귀여워하는 것만 보면 투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라헬이었습니다.
그 라헬이 자기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어떻게 합니까?
3절에 보니까, 그의 여종 빌하에게로 들어가라고, 그가 아들을 낳아 내 무릎에 두리니 그러면 나도 그를 인하여 자식을 얻겠노라 하고 (4)그 시녀 빌하를 남편에게 첩으로 줍니다.
얼마나 인간적인 방법입니까?
그러나 라헬에게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아들을 낳아야겠다는 것입니다.
옛날 야곱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아버지의 축복을 받아야 하겠다는 때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빌하가 그에게 아들을 낳아 주지요.
그래서 라헬은 그 이름을 "단"이라 합니다.
그 뜻은 "재판장"이라는 뜻인데,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푸시려고 내 소리를 들으사 내게 아들을 주셨다는 뜻으로 그런 이름을 지었다고 6절에 말하고 있습니다.
재미를 본 라헬이 다시 빌하로 하여금 자기 남편에게 아이를 더 낳게 합니다.
그래서 둘째를 낳았는데, 그 이름을 "납달리"라, "경쟁"이라 이름합니다.
그 까닭은 내가 형과 크게 경쟁하여 이기었다는 뜻이었다고 말합니다.(8절)
그렇게 해서 자매 간에 아들 낳기 경쟁을 합니다.
그래서 라헬이 이기는 것 같습니다.
그 동안 신앙적이었던 레아도 이런 동생의 경쟁을 의식합니다.
그래서 자기도 인간적인 방법을 씁니다.
그래 가지고 자기 시녀 실바를 야곱에게 첩으로 바칩니다.
그래서 또 아들을 얻고 그 이름을 "갓"이라 하는데,"복 되도다"라는 뜻입니다.
라헬이 시녀로 두 아들을 낳게 했으니까 자기도 두 아들을 낳아야겠기에 또 아들을 낳게 합니다. 그리고 그 아들은 "아셀"이라고 "기쁨"이라고 이름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얼마나 기가 찬 일입니까?
자매끼리 아들 낳기 경쟁을 합니다.
그 가운데 야곱은 아들 낳는 도구가 됩니다.
마치 돼지 키우는데 가보면 종돈이 있지 않습니까?
암놈들 많은 가운데 수놈 한 마리 놔두고 돌아가며 새끼를 배게 합니다.
야곱이 꼭 그런 것 같습니다.
이 두 자매의 아들 낳기 경쟁은 거기서 멈추는 것 아닙니다.
여기 14절에 보니까, 맥추 때에 레아의 맞아들 르우벤이 나가서 들에서 합환채를 얻어 어미 레아에게 드렸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비아그라와 같은 성분을 가진 약초입니다.
욕심 많은 라헬이 그 말을 듣고 레아에게 말합니다.
형의 아들의 합환채를 내게 달라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15)레아가 그에게 말합니다.
네가 내 남편을 빼앗은 것이 작은 일이냐 그런데 네가 내 아들의 합환채도 빼앗고자 하느냐
그러니까 라헬이 대답합니다.
그러면 형의 아들의 합환채 대신에 오늘 밤에 내 남편이 형과 동침하리라
그래서 (16)저물 때에 야곱이 들에서 돌아오매 레아가 나와서 그를 영접하며 이르되 내게로 들어오라 내가 내 아들의 합환채로 당신을 샀노라
그래 가지고 그 밤에 야곱이 레아와 동침하였더라
뭐 임금님이 오늘은 이 빈의 처소에 들고 내일은 저 빈의 처소에 드는 것과 같습니다.
그랬는데 (17)하나님이 레아를 들으셨으므로 그가 잉태하여 다섯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18)레아가 내가 내 시녀를 남편에게 주었으므로 하나님이 내게 그 값을 주셨다 하고 그 이름을 잇사갈 (고용하다는 뜻)이라 하였고, 그 뒤에 (19)레아가 다시 잉태하여 여섯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아서 (20)레아가 말하기를 하나님이 내게 후한 선물을 주시도다 내가 남편에게 여섯 아들을 낳았으니 이제는 그가 나와 함께 거하리라 하면서 그 이름을 스불론이라(후한 선물 혹은 거함이라는 뜻) 하였으며 (21)그 후에 그가 딸을 낳고 그 이름을 디나라 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 두 자매의 아들 낳기 경쟁은 결국 레아의 판정승으로 끝납니다.
앞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레아에게는 총이 없으므로 아들을 낳는 데 있어서는 그가 라헬보다 앞서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22절을 보십시오.
(22)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를 들으시고 그 태를 여신 고로 (23)그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하나님이 나의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 (24)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함이었더라
하나님이 결국은 라헬의 태도 열었습니다.
그 까닭은 이제는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그가 야곱의 사랑만 믿고 자기의 외모를 자랑하고 교만하였을 것입니다.
언니 레아에게도 몹쓸 일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언니 레아는 하나님께 기도 많이 하고 신앙심이 깊어 졌는데, 라헬은 그럴 틈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태를 막으셨습니다.
그래서 자기도 얼마나 부끄러운 존재인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특별히 그 당시 여인들에게 있어서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보다 부끄러운 일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 다 갖춘 라헬이 아이까지 잘 낳으면 그 영혼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그의 태를 막은 것입니다.
레아에게는 오히려 태를 여심으로 그의 부족을 채우게 해 주시고, 라헬에게는 태를 닫음으로 그의 부함을 가난하게 만들어서 그의 마음을 가난하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마음이 가난해지고 이제는 하나님께 기도도 하게 되니까, 그의 태를 열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으면 교만해져서 몹쓸 사람이 될 것을 아십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좀 부족하게 만드십니다.
그래 가지고 훈련을 받아서 스스로 낮아지고 겸손해지면 그 때는 하나님이 필요한 것을 다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야고보서 1:9-10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9)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10)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그 앞에 보면 우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면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하면서, 그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한데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면서, 그렇게 기도해서 지혜를 얻으면 이렇게 된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낮은 형제는, 그러니까 인간적으로 어떤 면에서 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다시 말해서 그 낮은 처지가 결국 주님으로 말미암아 높아지는 기회인 줄 알고 그것 자체를 감사하고 기뻐하고, 또 부한 형제, 다시 말해서 인간적으로 모든 면에서 부족함이 없이 다 갖춘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다시 말해서 자기도 언젠가는 낮아질 것임을 알고 겸손하도록 노력하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누리는 모든 영화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참 중요한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레아와 라헬에게서 배웁니다.
아마 야곱도 그 틈바구니에서 그것을 배웠을 것입니다.
사실, 이 두 여인 사이에서 제일 많이 연단을 받은 자는 야곱 자신이었을 것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린 것과 같이, 야곱은 두 아내 사이에서 자기 자신을 보았을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의 아내가 되려고 비록 아버지의 시킴을 받기는 했지만 거짓을 행하고 자기 아내가 된 레아를 보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아버지의 축복을 받으려고 어머니의 시킴을 받고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받은 자기 자신을 보았을 것입니다.
두 아내가 경쟁하면서 아들을 낳으려고 한 것을 보면서, 자기가 자기 형과 경쟁을 하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장자의 명분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했던 자기의 추한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결국은 그런 어려움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의지하며 기도한 레아를 통해서 또 자기의 교만과 자부를 다 버리고 겸손히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은 라헬을 보면서, 자기가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서 자기의 과거를 벗고 새 출발한 것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어쨌든 하나님은 이 두 아내를 통해서 야곱을 철저히 훈련시키셨습니다.
밖으로는 외삼촌 라반을 통해서, 안으로는 아내들을 통해서 호된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그 훈련을 통해 그는 점점 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숙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하나님은 그에게 자녀의 축복도 주셨습니다.
두 아내의 틈바구니에서 어려운 일도 많이 겪었지만 또 그 때문에 자녀도 많이 얻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런 방법으로 그에게 약속하신 자녀들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인간의 죄악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우리를 훈련하실 것은 훈련하시고 이루실 뜻은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오늘도 쉬지 않고 일하십니다. 부지런히 그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오늘 우리들을 통해서도 이렇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의 손길을 의식하면서 오늘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원하시는 사람으로 걸어가는 우리 모두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이 철 목사 설교 자료 중에서
요즈음 안방의 인기있는 사극들을 보면 옛날 왕들이 비빈들을 많이 두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이 그것을 보면서 웃는 말로 왕은 참 좋겠다 하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가령, 여인천하에 나오는 중종 같은 사람 보십시오. 그 여자들 틈바구니에서 얼마나 괴로움을 겪습니까? 정치도 온통 여인천하로 어지럽혀지지 않습니까? 또 요즘 시작한 제국의 아침도 보면 ,왕건이가 삼국통일을 잘 했다고 하지만 아내들을 많이 둠으로 그가 죽은 후에 나라가 얼마나 어려워집니까?
우리가 이런 것을 보면 하나님의 원리를 벗어난 결혼생활에는 결코 행복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신불신을 떠나서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신앙이 좋다 해도 하나님이 정하신 결혼생활의 원칙, 일부일처제를 벗어나서 결혼한 사람들은 가정생활이 불행했습니다.
아브라함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우리가 잘 아는 믿음의 조상입니다. 복의 근원으로 택함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도 하나님의 뜻을 잘 몰라서 그 종 하갈을 취해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일로 인해서 그의 가정에 얼마나 어려운 일이 많았습니까?
지금의 중동 분규도 결국은 그 결과가 아닙니까?
그 밖에 다윗도 생각해 보십시오.
그도 하나님의 뜻을 잘 몰라 아내를 많이 두었습니다.
그 때문에 자녀들 가운데 골육상쟁이 생기고 결국 자기도 한 아들에게 반역을 당하여 쫓겨다니는 설움도 당하지 않습니까?
그런 것이 다 가정이 복잡해서 생긴 문제입니다.
솔로몬은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
그도 처음에는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가장 지혜가 많은 왕이었는데 정치적인 목적으로 아내들을 많이 두고 정략결혼을 하고 해서 결국은 나중에는 그들 때문에 이방신을 섬기는 잘못까지 범하지 않습니까?
이게 다 하나님의 원리를 떠나 결혼생활을 했기 때문입니다.
야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내가 둘이었습니다.
거기다가 두 아내의 몸종들까지 합치면 넷입니다.
그들의 남편 노릇을 해야 했고, 그들을 통해서 낳은 아이들의 아버지 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려니 얼마나 복잡한 일이 많았겠습니까? 얼마나 골치 아픈 일들이 많았겠습니까?
성경은 이런 그의 골치 아팠던 일들을 소상하게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역사하셨는지, 궁극적으로는 야곱을 어떻게 훈련시키셨는지를 보여주는데, 이제 그것들을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29:31을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레아에게 총이 없음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무자하였더라
이것이 하나님이 행하신 일입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총이 없는 레아를 위해서는 태를 열어 주셨지만,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라헬에게는 무자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실 뿐만 아니라, 약자의 아픔을 이해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레아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참 안 된 여자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총이 없게 태어났습니다.
외모도 볼품이 없고 안력도 부족하여 사내들에게 별로 매력이 없는 여자였습니다.
집안에서도 천덕꾸러기였을 것입니다.
그냥 놔두면 결혼도 못할 그런 여자였습니다.
그나마 아버지의 꾀로 동생이 시집 갈 때 어떻게 덤으로 끼어서 가게 되었는데, 그렇게 해서 시집을 갔으니 얼마나 구박이 심했겠습니까?
아마 야곱은 레아만 보면 화가 치밀어 올랐을 것입니다.
외삼촌 라반에게 속은 것이 생각나서 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라헬만 좋아합니다.
그러니 레아가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렇지만 어찌 할 도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자기도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라반이 레아에게 라헬처럼 하라고 시켰겠지만 레아도 은근히 야곱의 아내가 되기를 바랬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시치미를 떼고 앉아서 라헬 행세를 한 것이지요.
그것을 생각할 때에 야곱으로서는 더 미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피장파장입니다. 야곱도 그랬으니까요.
야곱이 그 어머니 리브가의 말을 듣고 아버지 앞에서 에서 행세를 한 것이나 레아가 아버지의 말을 듣고 라헬 행세를 한 것이나 피장파장이 아닙니까?
야곱에게 이런 일이 있은 것은 야곱으로 하여금 자기가 아버지와 형에게 한 일이 어떤 일이었는지를 깨닫게 해 주시려는 하나님의 뜻도 있었는 줄 압니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레아가 야곱의 아내는 되었지만 줄곧 천대를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사실 아버지로부터도 버림을 받은 자입니다.
귀찮은 딸이었는데 그런 식으로 치운 것입니다.
남편으로부터도 사랑을 받지 못하는 아내였습니다.
여자가 자기 남편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것, 그것만큼 서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레아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거기다가 동생 라헬로부터는 얼마나 구박을 받았겠습니까?
아마도 자기는 정실 노릇을 하고 언니 레아는 종 부리듯이 했을 것입니다.
이런 레아, 그는 정말 약자 중에 약자입니다.
어느 누구로부터도 총을 받지 못하는 가련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이런 레아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를 돌보십니다.
그래서 그의 태를 열어서 아이를 낳게 해 주십니다.
그 대신에 라헬은 레아에 비해 많은 것을 가졌기 때문에 당분간 아이를 못 낳게 태를 닫았습니다.
정말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약자의 아픔을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레아였기 때문에 그는 아이를 낳으면서 신앙이 더 깊어집니다.
그래서 그 뒤에 그가 아이를 낳고 이름을 지은 것을 보면 그의 신앙의 성장을 엿볼 수 있습니다.
첫째를 낳았을 때 이름을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르우벤이라 했습니다.
르우벤이라는 이름의 뜻은 "보라,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가 감격해서 그렇게 이름을 지은 것 같습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 아들을 낳았을 때는 시므온이라고 했습니다.
시므온이란 "들으심"이라는 뜻입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기도를 들어 주셨다"는 의미에서 그런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 그가 그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하나님께 늘 기도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세 번째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러자 그의 이름을 레위라고 지었습니다.
그 뜻은 "연합됨"인데,"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는 소망을 가지고 그런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때 그는 이름을 유다라고 합니다.
그 뜻은 "찬양"인데,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는 뜻에서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레아의 믿음이 갈수록 성숙하여 지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아픔과 고통은 우리의 믿음을 성숙시킵니다.
그래서 히 12:11에 보면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는다"고 했습니다.
약 1:2-4에도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도 아픔과 고통이 있을 수 있습니다.
때론 그것이 우리의 잘못 때문에 받는 징계성일 때는 있고, 때론 우리의 잘못과 상관없이 우리에게 찾아오는 시련일 수도 있습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은 뜻 없이 우리에게 아픔이나 고통을 주시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보다 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기도하고 소망을 가지고 찬송하며 살라고 우리에게 그런 것을 허용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게 해서 레아는 비록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동생의 구박을 받았어도 그 신앙은 점점 더 무르익어 갔습니다.
반면에 라헬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다음 30:1을 보십시오.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 형을 투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나로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그 남편에게 투정을 부립니다.
그러니까 야곱이 무어라고 합니까?
2절에 보니까, 야곱이 라헬에게 노를 발하여 가로되 그대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야곱이 몹시 화가 나서 한 말입니다.
라헬이 하도 투정을 부리고 못 살게 구니까 화가 나서 내 뱉은 말인데, 정말 명답을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라헬로 성태치 못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야곱은 어렴풋하게 나마 그의 신앙 경험으로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라헬은 전혀 그런 의식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라헬은 신앙적이질 못합니다.
우리가 레아와 라헬을 비교해 보면, 라헬은 외모적으로 아주 잘 생겼지만 신앙이나 인격이 좀 못 됐고, 레아는 외모는 못 생겼지만 신앙이나 인격적인 면에서는 라헬보다는 나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사내들이 다 그렇듯이 야곱이 외모에 반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라헬과 결혼을 했고 또 얼마동안 사랑을 하면서 잘 살았는데 이 여자가 살고 보니까 성질이 얼마나 고약한지 야곱이 학을 뗀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까지 나온 것입니다.
라헬이 한 두 번 그를 괴롭혔으면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그 언니가 아들들을 데리고 노는 것만 보면, 또 야곱이 그 아이들을 귀여워하는 것만 보면 투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라헬이었습니다.
그 라헬이 자기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어떻게 합니까?
3절에 보니까, 그의 여종 빌하에게로 들어가라고, 그가 아들을 낳아 내 무릎에 두리니 그러면 나도 그를 인하여 자식을 얻겠노라 하고 (4)그 시녀 빌하를 남편에게 첩으로 줍니다.
얼마나 인간적인 방법입니까?
그러나 라헬에게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아들을 낳아야겠다는 것입니다.
옛날 야곱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아버지의 축복을 받아야 하겠다는 때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빌하가 그에게 아들을 낳아 주지요.
그래서 라헬은 그 이름을 "단"이라 합니다.
그 뜻은 "재판장"이라는 뜻인데,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푸시려고 내 소리를 들으사 내게 아들을 주셨다는 뜻으로 그런 이름을 지었다고 6절에 말하고 있습니다.
재미를 본 라헬이 다시 빌하로 하여금 자기 남편에게 아이를 더 낳게 합니다.
그래서 둘째를 낳았는데, 그 이름을 "납달리"라, "경쟁"이라 이름합니다.
그 까닭은 내가 형과 크게 경쟁하여 이기었다는 뜻이었다고 말합니다.(8절)
그렇게 해서 자매 간에 아들 낳기 경쟁을 합니다.
그래서 라헬이 이기는 것 같습니다.
그 동안 신앙적이었던 레아도 이런 동생의 경쟁을 의식합니다.
그래서 자기도 인간적인 방법을 씁니다.
그래 가지고 자기 시녀 실바를 야곱에게 첩으로 바칩니다.
그래서 또 아들을 얻고 그 이름을 "갓"이라 하는데,"복 되도다"라는 뜻입니다.
라헬이 시녀로 두 아들을 낳게 했으니까 자기도 두 아들을 낳아야겠기에 또 아들을 낳게 합니다. 그리고 그 아들은 "아셀"이라고 "기쁨"이라고 이름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얼마나 기가 찬 일입니까?
자매끼리 아들 낳기 경쟁을 합니다.
그 가운데 야곱은 아들 낳는 도구가 됩니다.
마치 돼지 키우는데 가보면 종돈이 있지 않습니까?
암놈들 많은 가운데 수놈 한 마리 놔두고 돌아가며 새끼를 배게 합니다.
야곱이 꼭 그런 것 같습니다.
이 두 자매의 아들 낳기 경쟁은 거기서 멈추는 것 아닙니다.
여기 14절에 보니까, 맥추 때에 레아의 맞아들 르우벤이 나가서 들에서 합환채를 얻어 어미 레아에게 드렸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비아그라와 같은 성분을 가진 약초입니다.
욕심 많은 라헬이 그 말을 듣고 레아에게 말합니다.
형의 아들의 합환채를 내게 달라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15)레아가 그에게 말합니다.
네가 내 남편을 빼앗은 것이 작은 일이냐 그런데 네가 내 아들의 합환채도 빼앗고자 하느냐
그러니까 라헬이 대답합니다.
그러면 형의 아들의 합환채 대신에 오늘 밤에 내 남편이 형과 동침하리라
그래서 (16)저물 때에 야곱이 들에서 돌아오매 레아가 나와서 그를 영접하며 이르되 내게로 들어오라 내가 내 아들의 합환채로 당신을 샀노라
그래 가지고 그 밤에 야곱이 레아와 동침하였더라
뭐 임금님이 오늘은 이 빈의 처소에 들고 내일은 저 빈의 처소에 드는 것과 같습니다.
그랬는데 (17)하나님이 레아를 들으셨으므로 그가 잉태하여 다섯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18)레아가 내가 내 시녀를 남편에게 주었으므로 하나님이 내게 그 값을 주셨다 하고 그 이름을 잇사갈 (고용하다는 뜻)이라 하였고, 그 뒤에 (19)레아가 다시 잉태하여 여섯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아서 (20)레아가 말하기를 하나님이 내게 후한 선물을 주시도다 내가 남편에게 여섯 아들을 낳았으니 이제는 그가 나와 함께 거하리라 하면서 그 이름을 스불론이라(후한 선물 혹은 거함이라는 뜻) 하였으며 (21)그 후에 그가 딸을 낳고 그 이름을 디나라 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 두 자매의 아들 낳기 경쟁은 결국 레아의 판정승으로 끝납니다.
앞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레아에게는 총이 없으므로 아들을 낳는 데 있어서는 그가 라헬보다 앞서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22절을 보십시오.
(22)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를 들으시고 그 태를 여신 고로 (23)그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하나님이 나의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 (24)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함이었더라
하나님이 결국은 라헬의 태도 열었습니다.
그 까닭은 이제는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그가 야곱의 사랑만 믿고 자기의 외모를 자랑하고 교만하였을 것입니다.
언니 레아에게도 몹쓸 일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언니 레아는 하나님께 기도 많이 하고 신앙심이 깊어 졌는데, 라헬은 그럴 틈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태를 막으셨습니다.
그래서 자기도 얼마나 부끄러운 존재인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특별히 그 당시 여인들에게 있어서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보다 부끄러운 일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 다 갖춘 라헬이 아이까지 잘 낳으면 그 영혼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그의 태를 막은 것입니다.
레아에게는 오히려 태를 여심으로 그의 부족을 채우게 해 주시고, 라헬에게는 태를 닫음으로 그의 부함을 가난하게 만들어서 그의 마음을 가난하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마음이 가난해지고 이제는 하나님께 기도도 하게 되니까, 그의 태를 열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으면 교만해져서 몹쓸 사람이 될 것을 아십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좀 부족하게 만드십니다.
그래 가지고 훈련을 받아서 스스로 낮아지고 겸손해지면 그 때는 하나님이 필요한 것을 다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야고보서 1:9-10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9)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10)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그 앞에 보면 우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면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하면서, 그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한데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면서, 그렇게 기도해서 지혜를 얻으면 이렇게 된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낮은 형제는, 그러니까 인간적으로 어떤 면에서 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다시 말해서 그 낮은 처지가 결국 주님으로 말미암아 높아지는 기회인 줄 알고 그것 자체를 감사하고 기뻐하고, 또 부한 형제, 다시 말해서 인간적으로 모든 면에서 부족함이 없이 다 갖춘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다시 말해서 자기도 언젠가는 낮아질 것임을 알고 겸손하도록 노력하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누리는 모든 영화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참 중요한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레아와 라헬에게서 배웁니다.
아마 야곱도 그 틈바구니에서 그것을 배웠을 것입니다.
사실, 이 두 여인 사이에서 제일 많이 연단을 받은 자는 야곱 자신이었을 것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린 것과 같이, 야곱은 두 아내 사이에서 자기 자신을 보았을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의 아내가 되려고 비록 아버지의 시킴을 받기는 했지만 거짓을 행하고 자기 아내가 된 레아를 보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아버지의 축복을 받으려고 어머니의 시킴을 받고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받은 자기 자신을 보았을 것입니다.
두 아내가 경쟁하면서 아들을 낳으려고 한 것을 보면서, 자기가 자기 형과 경쟁을 하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장자의 명분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했던 자기의 추한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결국은 그런 어려움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의지하며 기도한 레아를 통해서 또 자기의 교만과 자부를 다 버리고 겸손히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은 라헬을 보면서, 자기가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서 자기의 과거를 벗고 새 출발한 것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어쨌든 하나님은 이 두 아내를 통해서 야곱을 철저히 훈련시키셨습니다.
밖으로는 외삼촌 라반을 통해서, 안으로는 아내들을 통해서 호된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그 훈련을 통해 그는 점점 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숙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하나님은 그에게 자녀의 축복도 주셨습니다.
두 아내의 틈바구니에서 어려운 일도 많이 겪었지만 또 그 때문에 자녀도 많이 얻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런 방법으로 그에게 약속하신 자녀들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인간의 죄악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우리를 훈련하실 것은 훈련하시고 이루실 뜻은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오늘도 쉬지 않고 일하십니다. 부지런히 그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오늘 우리들을 통해서도 이렇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의 손길을 의식하면서 오늘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원하시는 사람으로 걸어가는 우리 모두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이 철 목사 설교 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