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의의 수준  (마 5:43-48)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판단이 다를 수 있습니다. 특히 오늘 같은 시대에는 생각이나 의식이 너무 다른 시대입니다. 부부간에도, 세대 간의 생각도, 민족 간의 생각도 다릅니다. 오늘 남북 간의 생각이 얼마나 다르고 상이합니까. 또 동서양의 생각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우리나라와 미국과의 생각이 다른 차원이 아니고 정반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오라고 할 때 손 전체로 오라고 손짓 합니다. 그런데 미국인들은 손가락 하나로 오라고 손짓합니다. 연필을 깎을 때에도 우리는 앞으로 밀어서 깎는데 미국인들은 앞으로 당겨서 깎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위험에 처했을 때 119를 누르는데 미국인들은 911을 누릅니다. 정반대 아닙니까.

프랑스에서는 작위부인 명칭을 마담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살롱을 작위 자가 손님을 초대해서 음악과 시와 사교하는 거실을 살롱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담이나 살롱을 아주 나쁘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문화의 차이입니다. 프랑스 대통령 드골이 영국을 방문해서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마담”이라고 인사를 했습니다. 영국인들이 여왕보고 마담이라고 했다고 발끈했습니다. 그러니까 프랑스 신문이 남의 나라 문화도 이해 못하는 무식한 영국인이라고 일침을 가했습니다. 불란서에서는 가장 고상한 명칭인 마담이 영국에 가서는 “술 따르는 마담”이라는 말로 인식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있었던 조승희 사건이 잘 마무리 되었습니다. 이 사건이 터지고 나서 범인이 한국교포인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너나 할 것 없이 한국인 모두가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너무나 우려가 많았는데 아무 일 없이 잘 마무리 되어 참으로 다행입니다. 그 사건을 마무리 하는 과정을 살펴보면서 미국은 우리 한국과는 너무나 생각도 의식도 생활 방식도 문제를 보는 시각도 차이가 크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을 바라보면서 우리 한국인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었습니다.

“개인주의의 장점”

우리나라는 지극히 집단적이고 감정적이라는 점이 이번에 사건을 보면서 여실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미국은 지극히 개인주의적이고 이성적이라는 점도 드러났습니다. 개인주의에도 장단점이 있습니다. 미국인들은 개인주의가 많이 발달해 있습니다. 미국인들은 조금만 침해를 받아도 곧바로 고발합니다. 그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사람들입니다. 어린 아이들도 부모가 때리면 부모를 경찰에 신고합니다. 그리고 청소년들이 18세만 되면 대학에 들어가서 자립합니다. 그때부터 부모를 떠나서 스스로 학비를 벌어서 공부합니다. 이 점은 아주 냉정하리만치 철저합니다. 미국의 자동차 회사가 망해도 차 값이 싸면 서슴없이 값싼 일본차를 구입합니다. 이것이 미국인들의 개인주의적 삶입니다. 여기서 지극히 합리적이고 냉철한 의식이 발달되었습니다.  

여기에 비하면 우리는 너무 집단적이고 감정적입니다. 우리는 자식이 18세가 되어도 애기로 여깁니다. 외제차를 보면 곱게 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남모르게 지나가다가 슬쩍 긁고 지나가기도 하고 우리 차만을 고집합니다. 우리는 그것이 애국이라고 생각하고 나라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보니까 개인주의에도 장점이 참 많았습니다. 아이들이 죄를 지으면 부모와 연계하지 않았습니다. 사건을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로 보았습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누가 사고를 쳤을 때 “뉘 집 자손이냐”부터 따집니다. 그리고 부모를 찾아가 책임지라고 닦달합니다. 학교에서 아이가 문제가 있으면 곧 바로 부모를 오라고 합니다. 그러면 젊은 교사 앞에 늙으신 부모들이 죄인처럼 머리를 숙이고 쩔쩔맵니다.

조승희사건이 터졌을 때 모든 한국인들이 모두 죄인처럼 그렇게 할 말을 잊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창피하고 부끄럽다고 한탄했습니다. 저는 그때 미국에 있었는데 이쯤에는 대통령의 사과 성명이 나와야 하지 않느냐 생각했는데 곧 바로 사과성명이 나왔습니다. 그 점에서 나도 지극히 한국적 사고를 가진 한국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인들은 하나같이 왜 개인적인 일인데 난리를 떠는지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잘잘못은 개인의 문제이지 그래서 본인만 책임을 지면되는데 왜 온 나라가 저렇게 야단이냐고 오히려 이해 못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우리하고 너무나 생각에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니 미국하고 부딪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근래 몇 년 동안 한국에서 하는 행동들이 미국인들이 이해될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나라에서는 미국인에 대해서 많은 오해들을 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번 사건을 처리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미국인들의 생각이 지극히 합리적이라는 것을 우리는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모습을 바꾸어 생각해 보았습니다. 만일 우리나라에 와 있는 미군 병사가 이 땅에서 그런 사고를 저질렀다면 우리나라는 지금쯤 어떻게 하고 있을까, 여러분은 어떻게 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합니까. 미국은 확실히 우리 보다 세련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상대에 대한 배려”

확실히 미국은 우리보다 개인에 대한 배려와 이해가 깊었습니다. 속마음으로는 “조승희”라는 이름만 듣거나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고 죽이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왜 남의 나라에 와서 살면 조용히 살 것이지 그런 짓을 하느냐” 하고 돌을 던질 법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달랐습니다. 한편 마음으로는 분노했지만 또 한편 마음으로는 그런 끔찍한 사건을 저지른 당사자 조승희는 얼마나 힘들었겠나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그를 돌보지 않고 친구가 되어주지 못함으로 이런 사건이 벌어진 것에 대해서 자책했습니다. 그래서 희생자들과 똑같이 무덤을 만들어 주었고 같이 추모했고 오히려 용서를 구했습니다.  

우리는 집단적 사고에 묻혀 살아갑니다. 너무 감정이 앞섭니다. 아버지의 원수는 곧 나의 원수입니다. 그래서 사명으로 알고 원수를 대대로 갚습니다. 역적은 3대까지 짓이겼습니다. 어머니가 생활고로 자살할 때는 아이들을 다 데리고 함께 집단자살을 합니다. 부모가 죄를 지으면 자손들에게까지 그 죄를 씌웁니다. 그런데 미국인들의 모습을 보니까 오히려 조승희 부모와 형제들이 당할 고난을 안타까워했습니다. 이 배려의 문화가 성숙한 문화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문화가 부족합니다. 그들도 속으로는 자식을 잃고 마음으로는 분노했을 것입니다. 부모 심정은 동서양 할 것 없이 다 똑같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은 내 아들 살려내라고 울부짖지 않았습니다. 죽은 아이들의 시체를 메고 총장실을 점거하지도 안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감정을 최대한 조절하고 속으로 삭이면서 상대를 생각했습니다. 가해자는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았을까를 생각하였고 그에게 힘이 되어주지 못한 것을 자책하였습니다. 얼마나 이성적인 사고입니까.

그에 비하면 우리는 너무나 감정적입니다. 감정을 무분별하게 폭발시킵니다. 그 좋은 예가 미선이 효순이의 경우입니다. 두 여중생이 훈련 중이던 미군의 장갑차에 치여 죽자 범 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습니다. 그리고 “미군이 일부러 여중생들을 깔아뭉갰다”, “불쌍한 우리 미선이 효순이, 모이자 시청 앞으로 몰아내자 미국 놈들“. 그러면서 반미시위를 벌리고 집회 때 마다 죽은 아이들의 사진을 들고 군중들의 감정을 부추겼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너무 살아가는 방식이 서툽니다.

이제 우리도 감정적이기 보다 모두를 생각하는 성숙한 마음을 가져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도 이제는 더 이상 단일민족이 아닙니다. 우리나라도 이제는 국제화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 와서 결혼해서 살고 있는 동남아 외국인들이 10만 명에 달하고 있습니다. 현재 농촌에는 며느리의 절반이 동남아에서 온 여인들입니다. 1990년도에는 농촌 결혼부부 100쌍 중 한 쌍이던 것이 2005년도에는 100쌍 중 외국인과 결혼하는 비율이 13쌍으로 늘어났고 2006년에는 외국인과 결혼한 건수가 39,071건으로 늘어났습니다. 이제 농촌의 이장을 하려면 5개 국어를 해야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제 우리나라도 머지않아 혼혈인구가 상당부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 중 한 사람이 이 땅에서 이 같은 끔찍한 범행을 저질렀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당장 외국인들을 다 내보내라고 야단날 것입니다. 이제는 이 땅에 와 있는 동남아인들을 멸시하는 태도도 이참에 바꾸어야 합니다. 이제는 공존하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발휘해야 합니다.  

“이 정신의 바탕”

그것은 그 밑바탕에는 기독교 정신이 흐르고 있다는 것일 것입니다. 미국은 3-400년 전에 기독교 문화로 형성된 사회입니다. 그 건국이념의 바탕에는 성경말씀을 실천하고 숨 쉬고 살아온 문화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한나라의 문화와 전통과 역사는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미국이 타락하고 세속화 되고 이기주의적인 모습들도 있지만 그래도 그 밑바탕엔 아직도 이 성경의 가르침의 정신이 흐르고 있습니다. 미국인들의 신앙의식을 조사한 것을 보니까 59%가 지금도 성경을 읽는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은 신앙의 열정은 없습니다. 주일날 교회에 꼬박 출석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미국인 중 65%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지금도 미국인들의 생각 저 밑바닥에는 아직도 이 성경말씀에 바탕을 둔 삶의 기조가 흐르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정신을 예수님께서 2천 년 전에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오늘 읽은 이 본문말씀은 산상수훈의 일부분입니다. 산상수훈은 예수님의 교훈 중에서도 핵심내용을 말합니다. 그 핵심 내용 중에서도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그 정신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오.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했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구약에서 말씀하신 율법적인 말씀에 비추어서 구약과 신약,  율법과 복음, 율법과 은혜를 비교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의의 수준이 어느 정도여야 하는가를 갈파한 내용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서 펼쳐야 할 정신과 이상과 뜻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들이 수백 년 동안 의식에 자리 잡고 마음에 자리 잡고 생각에 자리 잡고 있다가 이 정신이 문화로 발전되고 역사로 숨 쉬다가 어느 순간 사건을 만나고 판단이 요구되는 일에 접하게 되면 여지없이 그 정신이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어떤 교과서를 보고 공부하고 어떤 이야기를 듣고 자라느냐 하는 문제는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분문을 보면 몇 가지 뜻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룩의 수준”

본문 끝 절에 보면 “하나님이 온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거룩의 수준을 향하여 자라가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수준에 이르기에는 우리는 너무나 미흡합니다. 그래서 노력하고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노력하고 힘쓰면 얼마든지 성결해지고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그런 가능성을 주셨고 자질을 주셨습니다. 그것을 손양원 목사라는 분이 본보기로 우리들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는 두 아들이 6,25때 공비들로부터 죽임 당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두 아들을 죽인 공비를 용서하고 마침내는 양아들로 삼았습니다. 도저히 불가능한 일인데 하니까 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럴만한 자질을 주셨습니다. 그러고 그렇게 하라고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내가 온전한 것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가페를 실천하라”

아가페 사랑은 신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아가페 사랑을 실천해 보여주셨습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매달고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함으로서 그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그것도 우리 인간이 불가능한 것 같지만 그것조차도 가능합니다. 그것을 스데반이 실천해 보여 주었습니다. 스데반이 자기를 돌로 쳐 죽이는 사람들을 향해서 “저들을 용서하소서!”하고 기도하면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을 향해서 “저들을 용서하소서!”하고 기도 했는데 그것이 아가페의 마음입니다. 언뜻 보면 안 될 것 같은데 하면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의의수준입니다.

“천국시민의 도덕률 제시”

율법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는 것이 율법의 정신입니다. 살인자는 죽어야 합니다. 다치게 한 사람은 자신도 그에 상응하는 만큼 다치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율법의 도덕률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원수를 용서하라, 그를 사랑하라, 그를 위해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율법이 아니고 복음입니다. 율법보다 복음이 한수 위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율법의 완성인 것입니다. 여기서 천국 시민의 도덕률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그 도덕률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오. 세리도 그렇게 하느니라.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나은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하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이것이 천국시민이 가져야 할 생활의 도덕률이고 가치관입니다. 우리는 지난 사건을 통해서 미국인들의 의식에서 그런 모습을 엿보게 되고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미국이 많은 문제점을 지닌 나라입니다. 그래서 오늘 지탄도 많이 받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결정적일 때에는 이 같은 기독교적 가치관과 의의 수준이 나타나고 발휘되고 있습니다.  

역시 주께서 가르쳐 주신 교훈의 차원은 세상을 감동하게 합니다. 이 교훈이 이 세상을 고치고 싸매고 치유하는 길이고 방법이라는 것을 우리는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 정신이 발휘될 때 이 세상에 인종차별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어설픈 이기적인 민족주의도 극복이 되고 편협한 감정도 소화될 수 있고 치유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우물 안 개구리처럼 나만 생각하고 내 생각만 옳은 줄 알고 살아가는 편협한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넓은 지혜와 안목도 길러야 합니다. 그 삶의 실천을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부터 발휘해야 합니다. 그때 아주 세련된 그리스도인의 의의 수준이 이 땅에 나타나고 발휘되고 증명될 것입니다.  


출처/이정익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