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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도와 축복 (창 9:20-29)
오늘은 가정의 달 둘째 주 어버이 주일입니다. 가정의 달 어버이를 공경하여 하나님의 축복이 넘치는 가정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느 일간지에 「무너지는 가정, 깊어가는 한국병」이라는 테마로 연재되는 글을 보았습니다. 5월 7일자 기사 내용은 노인 봉양은커녕 방치 학대를 당하는 노인들의 실체를 다루었습니다. 탑골공원에 나오는 김 모 노인은 하루에 자식에게 1000원 용돈을 받으려고 자식과 며느리에게 눈치를 봐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傳統의 孝’ 는 사라졌다고 하였습니다.
특히 IMF 이후 지속되는 중산층 붕괴와 핵가족화에 따른 가정해체 속에 ‘자식이 부모를 모시는 전통적인 孝道觀’ 이 급속히 허물어지고 소외된 노인들이 길거리로 내 몰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 12시에 청량리 다일공동체를 방문해보았습니다. 매일 하루에 600여명이 밥을 얻어먹습니다. 한 노인에게 어디서 오셨느냐고 물었더니 의정부에서 오셨다고 합니다. 자식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강남에서 아들이 살고 있답니다.
우리 민족은 특별히 동방예의지국이라 역사와 전통이 있는 민족이었습니다.
특별히 부모 공경에 대해서는 매우 지극한 정성이 있었습니다.
부모님을 공경하고 감사하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는 생에 대한 감사요. 둘째는 세상에 태어나 첫 번째 스승이 부모이기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교육제도가 오늘날 같이 좋지를 않아 전부를 부모님께 배웠습니다. 언어로부터 시작하여 풍속이며 문화며 가치관이며 도덕이며 윤리며 심지어 농사를 짓는 법, 밭을 갈고 모를 심고 추수를 하고 가마니를 만들고 멍석을 만들고 밥을 짓고 국을 끓이고 고추장과 간장을 만드는 등 전부를 부모에게 배워야 했다. 그러므로 부모님을 공경하고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셋째는 토지 유산에 대한 감사입니다. 농경사회는 농토를 많이 가진 부모를 만나게 되면 평생을 안락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님께 받은 유산, 토지에 대한 고마움이 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은혜가 고마워 그 은혜를 보답하려고 했습니다. 돌아가셨어도 그 은혜를 기억하고 제사를 지내 보답할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의미는 변질되었습니다. 살아계신 부모에게는 불효하다가 돌아가셨다 하면 장례를 거창하게 지내고 제사를 또한 정성을 다해 지냅니다. 그 이유가 뭔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 이유는 매우 치사합니다. 살아계신 부모는 이제 별로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늙어 명퇴했지요. 이제 가진 돈도 없고 써먹을 만한 체력도 없고 망령이나 떨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죽으면 귀신이 되어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산 부모는 능력이 없지만 죽은 부모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제사를 잘 드리면 능력 있는 조상이 도와준다는 이기적인 미신입니다. 효도가 이렇게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성경은 어떻게 말합니까?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는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 고 하였습니다. 범사에 형통함이 있고 장수가 있습니다. (엡6:1-3)부모를 공경해서 복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성경에도 수없이 많고 야사에도 얼마든지 들을 수 있습니다.
부모 공경은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이 계명에는 이유가 없습니다. 부모에게는 단지 순종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다수가결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부모에 대한 자녀의 순종은 절대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성도들로 하여금 복을 받게 하시려고 주신 계명입니다.
부모를 거역하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불효자에게는 엄한 벌을 내리신 것을 봅니다. 가령 부모님께 손 지검을 하는 자는 내다 죽이라는 것입니다. 부모를 저주하거나 미쳤다고 욕하는 자는 증인 둘만 있으면 끌어다 죽이라고 명하였습니다.
부모님은 하나님의 대리자요 또한 하나님의 대행자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대행자라는 말은 자녀를 축복하는 권한이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위해 복을 빌면 자녀가 복을 받습니다.
이삭은 야곱에게 축복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에서는 그 복을 사기 당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이삭이 야곱을 야곱이 열두 아들을 요셉이 그 아들을 축복합니다. 가만히 아비의 축복을 보면 그 기준이 아들이 아버지를 기쁘시게 한대로입니다.
아버지는 자녀를 축복하는 축복권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아주 유명한 말씀입니다.
노아가 600세가 넘었을 때입니다. 방주에서 나온 노아는 포도나무를 심고 포도를 따 그 포도로 포도주를 만들어 취하도록 마셨습니다. 사실 몰라서 그렇지 나이 많으면 낙이라고는 먹는 것뿐입니다. 노아 영감님이 포도주를 싫 컷 잡수시고 그냥 옷이 벗겨져 부끄러운 것도 모르고 잠에 취했습니다. 이때 아들 중에 함이 제일 먼저 아버지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런 때에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가장 바람직하기는 혹 누가 아버지의 그 모습을 볼까하여 재빨리 덮어드렸어야 옳았습니다. 그러나 함은 그만 다른 형제들에게 달려가 소문을 냈습니다. 노망이 들어서 벌거벗고 누워있다고 흉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그토록 무서운 불행한 저주의 원인이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러나 그의 형제들은 깜짝 놀라 무슨 소리냐고 달려가서 아버지를 덮어드렸습니다.
본문에 보면 덮어드릴 뿐 아니라 자기들도 보지 않으려고 뒷걸음질을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 뒷걸음질을 했다는 것이 그렇게 마음에 들 수가 없습니다. 보지 않으려고 뒷걸음 칠 친 것입니다. 이미 아는 것을 생각지 않으려는 귀한 행동입니다. 여기에 진정한 효가 있고 축복의 비결이 있습니다. 효도가 음식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님의 명예를 높여 드리는데 효가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하였습니다.
(잠 10:12)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약 5:20)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 (벧전 4:8) 무엇보다도 열심 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을 뿐 아니라 아예 보이지 않게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장점이 있고 단점도 있습니다. 그런데 장점만 보일 때는 사랑할 때이고 단점이 보일 때는 미워할 때입니다. 사랑은 악한 과거를 기억하지 않습니다. 함은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형들은 아버지를 덮어드렸습니다. 결국 노아는 일어나 함에게는 형제의 종이 되리라고 저주했습니다.(25절) 그리고 셈을 위하여 ‘셈의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축복하였고(26절) 야벳은 창대케 되는 복으로 축복하였습니다. (27절)
하나님은 효성만큼 축복하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복을 받기를 워하십니까? 부모를 공경하십시오. 어떻게요 한끼의 음식이 문제가 아닙니다. 1) 부모의 명예를 높여드리십시오.
2) 부모의 허물을 기억하고 말하지 마십시오. 축복은 효만큼 받게 될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 교회에게 잊을 수 없는 사랑을 회상하고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갈 4:12절 ‘내게 해롭게 하지 않았다.’
갈 4:14절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15절 ‘눈이라도 빼어주려고 하였다.’ 바울사도는 그의 약점과 허물을 덮어주는 갈라디아 교회를 인하여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그들의 변심을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복된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부모를 해롭게 하지 마십시오. 부모의 허물과 약점을 보지도 말고 말하지도 마십시오. 이제 부모를 사랑하고 부모의 명예를 높여드리십시오 부모를 기쁘시게 하십시오. 그래서 하나님께 복을 받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유병희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