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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하나의 교회 (엡4:1-6)
지난 10일 로마천주교의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발표한 교서 때문에 기독교 안에서 적지 않은 파문이 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교황은 그 교서에서 “예수님은 지상에 단 하나의 교회만 세우셨다”고 주장하며 로마천주교가 유일한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규정했기 때문입니다. 개신교, 성공회, 정교회는 교회에 필수적인 요소들을 갖추지 못해 “교회”라는 이름을 붙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에 따르면 로마 교황의 존재와 으뜸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교회들은 온전치 못하며 따라서 교회라기보다는 종교공동체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로마천주교가 그동안 보여 온 교회간의 협력과 일치를 향한 행보가 형식적이었고 사실은 로마천주교의 패권주의적 욕심을 감추고 있는 것이 아니었는지 의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날 로마천주교가 겉으로는 종교다원주의를 표방하며 타종교들에 대해 화해적이고 포용적이며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안으로는 기독교의 전통적인 교회들조차도 로마천주교와 다르다는 이유로 일체 인정하지 않고 오직 로마천주교만이 참된 교회라는 의식을 강화해온 이중적 행태를 여실히 드러낸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로마천주교의 포용주의는 교세확장을 위한 제스츄어에 불과했으며, 그 덕으로 괄목할만한 교세의 성장을 이루자 이제는 다시 교만과 독선에 빠진 것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4-6절에 보면 몸도 하나고 성령도 한 분이시며 주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하나님도 한 분이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같은 에베소서 1장 22-23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만물을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으며 교회는 그의 몸이라 했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는 오직 하나의 교회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지상에 단 하나의 교회만 세우셨다”는 말은 전적으로 옳은 것이라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단 하나의 교회가 곧 로마천주교라는 주장은 터무니없고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상에 단 하나의 교회만 세우셨다”는 말은 모든 교회의 머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라는 뜻으로 말할 때만 옳고, 모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들이라고 말할 때만 맞는 말입니다. 교회의 근본적이고 가장 본질적인 의미는 하나님에 의해 구원에로 택하심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모든 인간에게 유일하신 구세주로 믿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이들의 무리입니다. 이 무리 전체를 의미하는 교회는 눈에 보이는 교회가 아닙니다. 이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를 가리켜 하나의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의 교회를 이루는 하나님의 백성이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온 지구상에 퍼져 살 때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수많은 지상의 교회들을 세워주시고 그 교회들 안에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 각각 양육과 돌보심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이 교회들은 눈에 보이는 교회들입니다. 온 지구상에 흩어져 있는 이 눈에 보이는 교회들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모든 사람에게 유일한 구세주로 인정하고 고백하는 근본신앙에 있어서 일치하는 한 다른 교리상의 차이나 성경해석상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같은 “그리스도의 교회”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기본적인 입장에 서지 않으면서 보여주는 화해와 협력과 일치의 모양새는 사실상 위선이고 기만행위에 불과한 것입니다. 베네딕토 16세의 교서가 로마천주교만을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규정하는 것은 마치 한 사람의 열 손 가락 중 한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들을 향해 같은 지체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니 한 머리에는 한 눈과 한 귀와 한 팔과 한 다리밖에는 달려있지 않다고 가르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베네딕토 16세의 이번 교서는 모든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대신 교황으로 대표되는 로마천주교를 그 머리의 자리에 두기를 원하는 속셈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교회의 머리로서의 로마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에게 복종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로 볼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모든 교회의 머리는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시고 모든 교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복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로마천주교나 동방정교회나 개신교나 할 것 없이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갖고 있는 한 예수 그리스도의 한 지체들이며, 또 그런 믿음이 분명히 있을 때에만 교회라 불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어떤 지상의 교회도 다른 교회 위에 군림하고 명령하며 지배하는 머리가 될 수 없습니다. 모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 자매일 뿐입니다.
로마천주교는 스스로 모든 교회의 머리가 되기를 원하는 논거로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을 내세우곤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셨을 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셨기(마16:15-19)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리라 하신 것은 베드로라는 한 사람 위에라기보다는 그가 고백한 그 신앙 위에 교회가 서리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고 못 들어가고 하는 것은 베드로 개인의 권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한 것과 같은 신앙고백을 할 수 있는지 아닌지에 달렸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그 유명한 신앙고백을 하고 난 직후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봐야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로부터 그 고백을 들으신 후부터 비로소 당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알리셨는데 그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하여 말하기를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했고 예수님께서는 그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며 꾸짖으셨던 것입니다(마16:21-23). 그리스도의 교회는 사탄이나 주님을 넘어지게 하려는 사람이나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자 위에 세워지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하게 고백하는 믿음 위에 세워질 뿐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베드로를 내세워 로마천주교가 모든 교회의 머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베네딕토 16세는 로마 교황의 존재와 으뜸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교회들은 온전치 못하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그의 후계자를 지명했다는 이야기를 알지 못합니다. 또 교황이란 말은 성경 어디에도 없는 말입니다. 우리는 로마천주교의 수장으로서의 교황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지상의 모든 교회가 그를 수장으로 인정해야 하고 그렇지 않는 모든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는 그의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로마천주교에는 교황무오설이라는 교리가 있습니다. 교황에게는 절대로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외에는 그 누구도 절대로 오류를 범할 수 없는 존재일 수 없다고 믿습니다. 교황이나 성직자나 성직자들이 다 모인 공의회라 할지라도 하나님과 같이 절대적인 존재는 없습니다. 개신교는 오직 하나님만을 절대자로 믿고 경배하는 신앙을 말합니다.
교황을 절대시하는 로마천주교에서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보다도 교황의 이름으로 공포된 것들의 집합체인 전통을 더욱 중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에 맞서 “오직 성경으로만”이라는 구호를 소리 높여 외친 것입니다. 개신교는 그 종교개혁자들의 정신을 따르는 교회입니다. 로마천주교에서는 성경을 많은 유사한 문서들 가운데서 정경으로 확정지은 것이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의 권위가 성경의 권위에 우선한다는 주장을 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은 교회가 성경이라고 해서 성경이 된 것이 아니라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문서들이었으므로 교회가 그것을 시인했을 뿐이라고 말함으로써 성경의 권위가 교회의 권위에 우선함을 이미 밝힌 바 있습니다.
교회의 권위를 최고로 중시하던 로마천주교는 종교개혁 당시까지만 해도 일반신도들이 성경을 읽지도 못하게 하고 소유하고만 있어도 엄히 처벌했습니다. 신부들이 읽고 가르쳐주는 대로 듣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신부들 자신도 성경을 읽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성경이 아예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을 잃어버리니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복음이 사라진 것입니다.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 참된 복음의 말씀을 되찾고 보다 순수한 신앙을 회복하자는 것이 종교개혁운동이었습니다. 그런데 로마천주교는 이 종교개혁운동을 인정하지 않고 무자비하게 탄압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모든 신자들이 성경을 자기의 말로 읽을 수 있도록 성경번역작업에 힘을 쏟았습니다. 로마천주교는 종교개혁자들과 성경번역자들과 번역성경을 출판하는 모든 사람들을 잡아 가두거나 죽였습니다. 교황의 권위도 필요하고 교회의 가르침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권위 있고 중요한 것은 없다는 신념이 개신교의 오랜 전통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무엇보다도 중요시했던 성경의 진리는 이신칭의론입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 유럽의 중세말기는 혼란과 불안의 시대였습니다. 오랜 동안 곳곳에서 전쟁이 빈발하며 계속되었습니다. 이슬람 터키의 군대가 비엔나 문턱까지 침공해 들어왔습니다. 흑사병 같은 역병이 돌아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습니다. 이제는 말세가 되었으며 최후의 심판이 임박했다는 위기감이 고조되었습니다. 게다가 교황이 둘로 갈렸습니다. 로마천주교가 둘로 나뉜 것입니다. 둘이 되었던 교황은 한때 셋까지 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교회가 나뉜 이후로는 죽어서 천당에 간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생각이 널리 유포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가장 심각한 문제로 사람들의 심령을 짓누르고 있었지만 시원한 대답을 얻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로마천주교가 내놓은 대답은 면죄부사상입니다. 교회에 헌금을 해서 면죄부를 사면 그들이 말하는 연옥에 가서 있을 기간을 탕감 받을 수 있다는 교리입니다. 교회에 헌금하는 행위로 연옥생활을 면제받을 수 있다는 교리의 근거는 행위에 의한 구원이라는 교리일 것입니다. 선행을 열심히 해서 공덕을 많이 쌓으면 자기의 구원을 이룰 수 있다는 사고가 깔려있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선행을 아주 많이 하면 자기를 구원하기에 필요한 공덕을 쌓고도 남아서 그 잉여분의 공덕으로 남까지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자들의 그 잉여분의 공덕을 비축하고 있어서 스스로 선행을 하지 못한 사람이라도 교회에 헌금을 하면 교회가 비축하고 있는 잉여분의 공덕을 나누어 주어 연옥에서의 고통스러운 날 중 얼마를 삭감해준다는 것입니다. 이런 교리는 성경의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로마천주교의 한 수도승이었습니다. 그 자신 그 시대의 고민인 구원의 문제, 구원의 확신의 문제를 안고 번뇌의 나날을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고행을 많이 하며 수도를 힘썼지만 구원의 확신과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하고 있다가 로마서의 말씀을 통해 그 해답을 얻은 것입니다. 그의 깨달음은 그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모든 사람을 위한 복음의 재발견이었던 것입니다. 그가 깨달은 로마서의 가르침이 무엇입니까?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6-17)한 것입니다. 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3:23-28)한 것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다 죄인이라는 것, 그래서 아무도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구원의 길이 있다는 것, 그를 믿는 믿음만으로 구원 얻는다는 것, 그 믿음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선물이라는 진리가 다 들어있습니다. 개신교는 이 구원의 복음을 따르는 교회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면죄부를 사는 행위나 그 어떤 스스로의 행위로도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다고 보지 않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자신의 선행과 공덕으로 남을 구원받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보기에 그 누구도 성자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오직 죄인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은혜와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되면서도 동시에 늘 죄인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훌륭한 신앙의 한 모범으로 존경하면서도 우리는 로마천주교처럼 마리아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온 인류의 공동대속자로 경배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또한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와 같은 사람 중 하나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죄가 없으신 분이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마리아가 인간이 공동대속자라는 것은 로마천주교가 만들어낸 교리이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베네딕토 16세는 특히 개신교에 대해서 성찬식에 대한 견해를 달리하기 때문에 올바른 의미에서 교회라고 볼 수 없다고 했다 합니다. 로마천주교에서는 성찬식에서 떡과 포도주를 들어 축사하고 나면 그 떡은 더 이상 떡이 아니고 주님의 살로 변하는 것이며, 그 포도주는 더 이상 포도주가 아니라 예수님의 피로 변한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떡과 포도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를 상징하는 것이고, 따라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성찬에서의 떡과 포도주가 아니라 그것이 상징하는 것,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을 내주시고 피를 흘리신 그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이라고 믿습니다. 그저 떡과 포도주를 받아먹기만 하면 구원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우리의 죄를 다 씻으셨으며 이제 그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신앙이 있어야 구원 받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성찬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신다는 것은 떡이 그의 살로 변하고 포도주가 그의 피로 바뀌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대속의 죽음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며 성찬을 받을 때 성령의 놀라운 역사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며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의 신비스러운 연합이 이루진다는 의미에서입니다. 이런 믿음 때문에 개신교는 교회라 볼 수 없다는 것이 베네딕토 16세의 최근 교서의 주장입니다.
16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때 반성하고 고쳤어야 할 것들을 로마천주교는 아직도 대부분 고수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로마천주교를 같은 기독교의 지체이고 자매교회로 인정하며 그들이 보다 올바른 복음의 이해에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로마천주교가 교황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고, 교황의 교서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 경청하며, 인간의 공덕보다는 하나님의 은혜에 더 의존하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본문말씀 2-3절에서의 사도 바울의 권면이 그들의 귀를 때리고 가슴을 치며 그들의 영을 깨우기를 바랍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교만하고 다른 지체를 용납하지 못하며 성령 안에서 하나 되기를 힘쓰지 않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이름을 지닐 자격을 스스로 내던지는 일입니다. 우리는 로마천주교가 바른 신앙, 겸손한 신앙으로 돌아오도록 계속해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출처/이수영 목사 설교 중에서
지난 10일 로마천주교의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발표한 교서 때문에 기독교 안에서 적지 않은 파문이 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교황은 그 교서에서 “예수님은 지상에 단 하나의 교회만 세우셨다”고 주장하며 로마천주교가 유일한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규정했기 때문입니다. 개신교, 성공회, 정교회는 교회에 필수적인 요소들을 갖추지 못해 “교회”라는 이름을 붙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에 따르면 로마 교황의 존재와 으뜸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교회들은 온전치 못하며 따라서 교회라기보다는 종교공동체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로마천주교가 그동안 보여 온 교회간의 협력과 일치를 향한 행보가 형식적이었고 사실은 로마천주교의 패권주의적 욕심을 감추고 있는 것이 아니었는지 의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날 로마천주교가 겉으로는 종교다원주의를 표방하며 타종교들에 대해 화해적이고 포용적이며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안으로는 기독교의 전통적인 교회들조차도 로마천주교와 다르다는 이유로 일체 인정하지 않고 오직 로마천주교만이 참된 교회라는 의식을 강화해온 이중적 행태를 여실히 드러낸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로마천주교의 포용주의는 교세확장을 위한 제스츄어에 불과했으며, 그 덕으로 괄목할만한 교세의 성장을 이루자 이제는 다시 교만과 독선에 빠진 것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4-6절에 보면 몸도 하나고 성령도 한 분이시며 주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하나님도 한 분이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같은 에베소서 1장 22-23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만물을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으며 교회는 그의 몸이라 했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는 오직 하나의 교회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지상에 단 하나의 교회만 세우셨다”는 말은 전적으로 옳은 것이라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단 하나의 교회가 곧 로마천주교라는 주장은 터무니없고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상에 단 하나의 교회만 세우셨다”는 말은 모든 교회의 머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라는 뜻으로 말할 때만 옳고, 모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들이라고 말할 때만 맞는 말입니다. 교회의 근본적이고 가장 본질적인 의미는 하나님에 의해 구원에로 택하심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모든 인간에게 유일하신 구세주로 믿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이들의 무리입니다. 이 무리 전체를 의미하는 교회는 눈에 보이는 교회가 아닙니다. 이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를 가리켜 하나의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의 교회를 이루는 하나님의 백성이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온 지구상에 퍼져 살 때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수많은 지상의 교회들을 세워주시고 그 교회들 안에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 각각 양육과 돌보심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이 교회들은 눈에 보이는 교회들입니다. 온 지구상에 흩어져 있는 이 눈에 보이는 교회들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모든 사람에게 유일한 구세주로 인정하고 고백하는 근본신앙에 있어서 일치하는 한 다른 교리상의 차이나 성경해석상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같은 “그리스도의 교회”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기본적인 입장에 서지 않으면서 보여주는 화해와 협력과 일치의 모양새는 사실상 위선이고 기만행위에 불과한 것입니다. 베네딕토 16세의 교서가 로마천주교만을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규정하는 것은 마치 한 사람의 열 손 가락 중 한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들을 향해 같은 지체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니 한 머리에는 한 눈과 한 귀와 한 팔과 한 다리밖에는 달려있지 않다고 가르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베네딕토 16세의 이번 교서는 모든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대신 교황으로 대표되는 로마천주교를 그 머리의 자리에 두기를 원하는 속셈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교회의 머리로서의 로마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에게 복종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로 볼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모든 교회의 머리는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시고 모든 교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복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로마천주교나 동방정교회나 개신교나 할 것 없이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갖고 있는 한 예수 그리스도의 한 지체들이며, 또 그런 믿음이 분명히 있을 때에만 교회라 불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어떤 지상의 교회도 다른 교회 위에 군림하고 명령하며 지배하는 머리가 될 수 없습니다. 모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 자매일 뿐입니다.
로마천주교는 스스로 모든 교회의 머리가 되기를 원하는 논거로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을 내세우곤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셨을 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셨기(마16:15-19)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리라 하신 것은 베드로라는 한 사람 위에라기보다는 그가 고백한 그 신앙 위에 교회가 서리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고 못 들어가고 하는 것은 베드로 개인의 권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한 것과 같은 신앙고백을 할 수 있는지 아닌지에 달렸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그 유명한 신앙고백을 하고 난 직후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봐야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로부터 그 고백을 들으신 후부터 비로소 당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알리셨는데 그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하여 말하기를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했고 예수님께서는 그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며 꾸짖으셨던 것입니다(마16:21-23). 그리스도의 교회는 사탄이나 주님을 넘어지게 하려는 사람이나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자 위에 세워지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하게 고백하는 믿음 위에 세워질 뿐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베드로를 내세워 로마천주교가 모든 교회의 머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베네딕토 16세는 로마 교황의 존재와 으뜸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교회들은 온전치 못하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그의 후계자를 지명했다는 이야기를 알지 못합니다. 또 교황이란 말은 성경 어디에도 없는 말입니다. 우리는 로마천주교의 수장으로서의 교황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지상의 모든 교회가 그를 수장으로 인정해야 하고 그렇지 않는 모든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는 그의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로마천주교에는 교황무오설이라는 교리가 있습니다. 교황에게는 절대로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외에는 그 누구도 절대로 오류를 범할 수 없는 존재일 수 없다고 믿습니다. 교황이나 성직자나 성직자들이 다 모인 공의회라 할지라도 하나님과 같이 절대적인 존재는 없습니다. 개신교는 오직 하나님만을 절대자로 믿고 경배하는 신앙을 말합니다.
교황을 절대시하는 로마천주교에서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보다도 교황의 이름으로 공포된 것들의 집합체인 전통을 더욱 중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에 맞서 “오직 성경으로만”이라는 구호를 소리 높여 외친 것입니다. 개신교는 그 종교개혁자들의 정신을 따르는 교회입니다. 로마천주교에서는 성경을 많은 유사한 문서들 가운데서 정경으로 확정지은 것이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의 권위가 성경의 권위에 우선한다는 주장을 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은 교회가 성경이라고 해서 성경이 된 것이 아니라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문서들이었으므로 교회가 그것을 시인했을 뿐이라고 말함으로써 성경의 권위가 교회의 권위에 우선함을 이미 밝힌 바 있습니다.
교회의 권위를 최고로 중시하던 로마천주교는 종교개혁 당시까지만 해도 일반신도들이 성경을 읽지도 못하게 하고 소유하고만 있어도 엄히 처벌했습니다. 신부들이 읽고 가르쳐주는 대로 듣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신부들 자신도 성경을 읽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성경이 아예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을 잃어버리니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복음이 사라진 것입니다.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 참된 복음의 말씀을 되찾고 보다 순수한 신앙을 회복하자는 것이 종교개혁운동이었습니다. 그런데 로마천주교는 이 종교개혁운동을 인정하지 않고 무자비하게 탄압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모든 신자들이 성경을 자기의 말로 읽을 수 있도록 성경번역작업에 힘을 쏟았습니다. 로마천주교는 종교개혁자들과 성경번역자들과 번역성경을 출판하는 모든 사람들을 잡아 가두거나 죽였습니다. 교황의 권위도 필요하고 교회의 가르침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권위 있고 중요한 것은 없다는 신념이 개신교의 오랜 전통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무엇보다도 중요시했던 성경의 진리는 이신칭의론입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 유럽의 중세말기는 혼란과 불안의 시대였습니다. 오랜 동안 곳곳에서 전쟁이 빈발하며 계속되었습니다. 이슬람 터키의 군대가 비엔나 문턱까지 침공해 들어왔습니다. 흑사병 같은 역병이 돌아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습니다. 이제는 말세가 되었으며 최후의 심판이 임박했다는 위기감이 고조되었습니다. 게다가 교황이 둘로 갈렸습니다. 로마천주교가 둘로 나뉜 것입니다. 둘이 되었던 교황은 한때 셋까지 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교회가 나뉜 이후로는 죽어서 천당에 간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생각이 널리 유포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가장 심각한 문제로 사람들의 심령을 짓누르고 있었지만 시원한 대답을 얻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로마천주교가 내놓은 대답은 면죄부사상입니다. 교회에 헌금을 해서 면죄부를 사면 그들이 말하는 연옥에 가서 있을 기간을 탕감 받을 수 있다는 교리입니다. 교회에 헌금하는 행위로 연옥생활을 면제받을 수 있다는 교리의 근거는 행위에 의한 구원이라는 교리일 것입니다. 선행을 열심히 해서 공덕을 많이 쌓으면 자기의 구원을 이룰 수 있다는 사고가 깔려있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선행을 아주 많이 하면 자기를 구원하기에 필요한 공덕을 쌓고도 남아서 그 잉여분의 공덕으로 남까지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자들의 그 잉여분의 공덕을 비축하고 있어서 스스로 선행을 하지 못한 사람이라도 교회에 헌금을 하면 교회가 비축하고 있는 잉여분의 공덕을 나누어 주어 연옥에서의 고통스러운 날 중 얼마를 삭감해준다는 것입니다. 이런 교리는 성경의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로마천주교의 한 수도승이었습니다. 그 자신 그 시대의 고민인 구원의 문제, 구원의 확신의 문제를 안고 번뇌의 나날을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고행을 많이 하며 수도를 힘썼지만 구원의 확신과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하고 있다가 로마서의 말씀을 통해 그 해답을 얻은 것입니다. 그의 깨달음은 그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모든 사람을 위한 복음의 재발견이었던 것입니다. 그가 깨달은 로마서의 가르침이 무엇입니까?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6-17)한 것입니다. 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3:23-28)한 것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다 죄인이라는 것, 그래서 아무도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구원의 길이 있다는 것, 그를 믿는 믿음만으로 구원 얻는다는 것, 그 믿음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선물이라는 진리가 다 들어있습니다. 개신교는 이 구원의 복음을 따르는 교회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면죄부를 사는 행위나 그 어떤 스스로의 행위로도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다고 보지 않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자신의 선행과 공덕으로 남을 구원받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보기에 그 누구도 성자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오직 죄인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은혜와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되면서도 동시에 늘 죄인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훌륭한 신앙의 한 모범으로 존경하면서도 우리는 로마천주교처럼 마리아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온 인류의 공동대속자로 경배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또한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와 같은 사람 중 하나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죄가 없으신 분이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마리아가 인간이 공동대속자라는 것은 로마천주교가 만들어낸 교리이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베네딕토 16세는 특히 개신교에 대해서 성찬식에 대한 견해를 달리하기 때문에 올바른 의미에서 교회라고 볼 수 없다고 했다 합니다. 로마천주교에서는 성찬식에서 떡과 포도주를 들어 축사하고 나면 그 떡은 더 이상 떡이 아니고 주님의 살로 변하는 것이며, 그 포도주는 더 이상 포도주가 아니라 예수님의 피로 변한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떡과 포도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를 상징하는 것이고, 따라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성찬에서의 떡과 포도주가 아니라 그것이 상징하는 것,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을 내주시고 피를 흘리신 그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이라고 믿습니다. 그저 떡과 포도주를 받아먹기만 하면 구원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우리의 죄를 다 씻으셨으며 이제 그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신앙이 있어야 구원 받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성찬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신다는 것은 떡이 그의 살로 변하고 포도주가 그의 피로 바뀌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대속의 죽음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며 성찬을 받을 때 성령의 놀라운 역사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며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의 신비스러운 연합이 이루진다는 의미에서입니다. 이런 믿음 때문에 개신교는 교회라 볼 수 없다는 것이 베네딕토 16세의 최근 교서의 주장입니다.
16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때 반성하고 고쳤어야 할 것들을 로마천주교는 아직도 대부분 고수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로마천주교를 같은 기독교의 지체이고 자매교회로 인정하며 그들이 보다 올바른 복음의 이해에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로마천주교가 교황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고, 교황의 교서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 경청하며, 인간의 공덕보다는 하나님의 은혜에 더 의존하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본문말씀 2-3절에서의 사도 바울의 권면이 그들의 귀를 때리고 가슴을 치며 그들의 영을 깨우기를 바랍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교만하고 다른 지체를 용납하지 못하며 성령 안에서 하나 되기를 힘쓰지 않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이름을 지닐 자격을 스스로 내던지는 일입니다. 우리는 로마천주교가 바른 신앙, 겸손한 신앙으로 돌아오도록 계속해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출처/이수영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