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89
하나님의 두려움 (렘 1:11-19)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예언자 예레미야가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는 장면을 소개하는 말씀입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유다 왕국이 바벨론에게 멸망하는 그 시대에 예언자로 부름을 받아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불행한 시대에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한 만큼, 그 자신도 역시 불행한 삶을 보냈습니다. 결혼도 하지 못했고, 그래서 가정의 단란한 행복이나 개인적인 삶의 풍요로운 여유를 지녀보지 못한 삶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대 민족으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돌아서게 하고자 하는 그의 지극한 노력은, 결국 후손들에게 인정받게 되어, 후세 사람들은 그를 진정한 애국자요 참된 하나님의 종으로 인정하게 되어, 그가 남긴 하나님의 말씀들을 “예레미야 서(書)”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존하여 오늘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예레미야는 예수님 시대에 예수님과 비견될 만한 훌륭한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었을 때, “어떤 사람들은 주님을 예레미야와 같다고들 합니다”라는 대답을 한 것을 미루어보다 우리는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예레미야는 유대인들에 진정한 예언자로서 알려져 있는 사람이었습니다(마 16:16이하). 그래서 독일의 어느 성서 신학자는 이러한 예레미야를 가리켜 “하나님께 그 인생이 차압당한(Beschlagnahme, Seizure) 사람”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오늘 저는 이러한 예레미야의 소명 기사(記事)를 읽으면서 17절의 말씀을 특별히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너는 네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내가 네게 명한 바를 다 그들에게 고하라.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두렵건대 내가 너로 그들 앞에서 두려움을 당하게 할까 하노라.” 이 말씀은 예레미야를 하나님의 일을 맡기시고자 부르시면서 주시는 하나님의 훈계요 경고요 또한 위로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배경을 좀 더 알기 쉽게 설명을 하면 이런 내용입니다. 예레미야가 예언활동을 하던 때는 유대가 바벨론에게 멸망하기 바로 전이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예레미야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주 듣기 싫어했습니다. 왜냐하면, 예레미야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 당시 사람들이 듣고 싶었던 종류의 말씀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러한 예레미야를 아주 싫어해서, 그를 미워하기도 하고 핍박하기도 하며 심지어는 죽이려고까지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마다 이런 반응을 받게 되는 예레미야로서는 사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가 싫을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으면서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이유가 있을까?” 하고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으려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을 전하지 않으려하면 할수록, 예레미야 자신이 못 견디게 될 만큼 마음의 고통이 심해지고 자기 스스로 모순에 빠지게 되는 어려움을 겪게 되는 체험을 많이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예레미야 자신이 이렇게 고백합니다(렘 20:7-10).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대저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강포와 멸망을 부르짖으오니,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여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그래서)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나는 무리의 비방과 사방의 두려움을 들었나이다. 그들이 이르기를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 하오며 나의 친한 벗도 다 나의 타락하기를 기다리며 피차 이르기를, ‘그가 혹시 유혹을 받으리니 우리가 그를 이기어 우리 원수를 갚자’ 하나이다.”
이렇게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대해서 심각하게 회의를 느꼈지만, 그렇다고 그 일을 안 하면 거기에 따르는 아픔과 고통을 겪게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일전에 소개해드린 아프리카 선교사 알버트 슈바이쳐(Albert Schweitzer, 1875-1965)의 고백과도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슈바이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예수가 누군지 잘 모른다. 그러나 그는 늘 나에게 명령을 한다. 그 명령을 순종하여 따르니 내게는 고난이 따라왔다. 그래서 그러한 고난을 피하고자, 그 예수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려하니, 나는 이상한 콤플렉스(complex)에 빠지게 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 슈바이쳐가 말하는 콤플렉스란 바로 예레미야가 사람들의 공격과 비난이 두렵고 힘들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으려고 피할 때마다 체험했던 모습과 같다고 생각됩니다.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체험하게 되는 신앙인의 체험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즉, 신앙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진정으로 순종하지 않을 때 지닐 수 있는 불안정이나 삶의 무의미함이나 불안 같은 모습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저항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17절의 말씀의 배경이라 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면 예레미야가 갖게 되는 이러한 두려움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우리 한국말에 이렇게 사람 앞에 두려움을 갖는 모습으로 표현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눅이 든다”는 말입니다.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자꾸 면박을 받고, 따돌림을 당하고, 비판과 비난을 많이 당하면 사람은 이렇게 주눅이 들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눅이 들면, 해야 할 일도 잘 못하게 되고, 한다고 해도 좋은 성과를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주눅 들지 않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기도 합니다.
흔히들 “사람은 기(氣)가 빠지거나 약해지면, 주눅이 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자신감을 갖거나, 주눅 들지 않기 위해서 “기를 충만히 저장하라”고 가르치기도 하고 그러기 위해서 흔히 “기체조”같은 것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이렇게 기를 저장하기 위해 기체조를 한다든지 하는 모습은 그만큼 에너지를 집약시키고자 하는 모습일 수 있겠습니다만, 다른 한 편으로는 경쟁 사회 속에서 불안감을 느끼거나 여러 가지 인간관계의 경쟁적 삶의 구조에서 오는 위기감과 불안감이 많음으로, 주눅 드는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현실임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기”라는 말은 영어로는 "spirit"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중에 17절의 말씀을 영국에서 번역한 New English Bible에서는 이렇게 번역을 합니다. “그들 면전에서 너의 기가 꺾이지 않도록 하거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그들 앞에서 너를 꺾어 버리리라(Do not let your spirit break at sight of them, or I will break you before their eyes).” 그런데 이 17절의 말씀을 우리 성경에서는 더 실감나게 번역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두렵건대, 내가 너로 그들 앞에서 두려움을 당하게 할까 하노라.”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것을 경고하시기를, 예레미야가 사람들 앞에서 두려워하여 기가 꺾이게 되면, 하나님께서 이러한 예레미야를 버릴 수밖에 없게 되는데, 바로 이렇게 될까봐 하나님은 두려워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두려움은 예레미야를 버리게 될 경우가 오게 될까 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즉, 예레미야가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기가 꺾여버리게 되면 하나님도 할 수 없이 예레미야를 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결과가 나타나게 될까 참으로 두렵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성경에서는 예레미야로 하여금 사람들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도록 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적절하게 잘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종들에게 원하시는 진정한 바램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종으로 쓰시지 않으시겠다는 경고도 여기에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배경에서 성경에서 말씀하는 “기(spirit)”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으로 인하여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세”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 앞에서의 자기 자신의 모습이 바로 극복해야 할 가장 첫 번째 대상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스스로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면, 그 외에 어떠한 인간의 핍박이나 공격은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오히려 이러한 일들은 하나님께서 막아 주시고 지켜 주신다고 약속을 하십니다. 19절에서 이를 확인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너를 치나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렇게 우리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들은 다른 사람이나 일들을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두려워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만을 진실로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면 다른 인간이나 이 세상일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이나 일들을 두려워하는 것은 사실상 하나님만을 진정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 내용에서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진정 두려워해야 할 것은, 우리가 이 세상이나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을 하지 못함으로 결국 하나님의 일을 못하게 하시는 그 하나님을 두려워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17절에서 “이 점이 내가 가장 우려하는 점”이라는 의미에서 “두렵건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보는 하나님은 일꾼들을 부르실 때마다 거의 공통적으로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노라”는 말씀을 주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거기에 따르는 어려움과 핍박 그리고 조롱이 담긴 공격 등이 많이 있음을 시사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바로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이해될 수 없는 모습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며,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서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모습 중에 은근하게 나타나는 모습이 바로 체면 차리는 일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체면을 차리는 차리고자 하는 모습이 때로는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자신의 모습을 감추는 모습이기도 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들이 극복하고 버려야 할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체면치레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버리지 못하면 우리의 신앙은 성장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두려워함으로 하나님 아닌 모든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용기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롬 1:16). 이렇게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가운데 체험하게 되는 하나님의 능력이 오늘날 우리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을 향한 체면이나 사람들로부터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래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간직한 사람은 예레미야처럼 이 세상의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질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꼭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감에 있어서 이렇게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세, 곧 사람들 앞에서 기가 꺾이지 않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런 사람은 이 세상의 권력 앞에서도 굴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사람은 이 세상의 물질 앞에서도 나약해지지 않습니다. 미국의 부호(富豪) 록펠러(Rockefeller)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나는 열 살 때 신문배달을 하고 주급 1달러 50센트를 받았다. 첫 주급을 어머니께 갖다 드렸더니 십일조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나에게 교회의 헌금제도를 가르치신 것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토대를 하나님께 둘 것인가 나 자신에게 둘 것인가를 가르치신 것이었다.” 이렇게 하나님께 삶의 토대를 둔 록펠러는 33세에 백만장자가 되었고, 43세에 미국 정유 산업을 장악했으며, 53세에는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19절, “그들이 너를 치나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렇게 하나님 때문에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은 곧 삶의 토대를 하나님께 둘 것인가, 아니면 나 자신에게 둘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이러한 현실 앞에서 하나님이 가장 두려워하시는 것은 우리가 삶의 토대를 나 자신에게 둠으로, 사람들을 의식하여 두려워함으로, 결국 하나님으로부터도 쓰임 받지 못하게 되는 현실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께 삶의 토대를 둠으로 일시적으로는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더라도, 결국 하나님의 쓰임을 받아, 자기를 외면하고 버린 사람들까지도 구원하게 되는 자리로 나아가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바로 선지자 예레미야의 인생이었고,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진실된 진리를 사모하는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삶의 자리로 나아가도록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이러한 자리로 여러분 모두를 초청하고 계십니다.
출처/노강국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