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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 (요 5:17-24)
제가 일 년 반 전에 우리나라에 돌아왔을 때, 양복을 새로 하나 맞추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평소에 제 아버지 양복을 해 드리던 어느 재단사 한 분을 만나게 되었는데, 이 분이 제 몸 치수를 재시다가 갑자기 깔깔 웃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왜냐고 했더니, “목사님의 등어깨가 구부정한 자세가 어쩌면 그렇게 할아버지 목사님하고 꼭 같습니까? 뒤에서 보면 정말 누군지 구별이 안 되겠습니다.”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사실 어릴 때부터 어머니를 많이 닮았다는 소리를 듣고 자라왔지만, 요즘 보면 그처럼 등어깨가 구부러진 것부터 시작해서 아버지를 닮은 것도 의외로 많은 것 같습니다.
기왕에 아버지 닮은 아들 될 바에야 아버지의 그 특별하고도 강력한 영력을 좀 닮았으며 얼마나 좋았겠습니까마는, 그러지는 못하고 그런 별로 좋지 못한(?) 것만 닮은 아들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여튼 세상의 부자(父子)지간은 어느 정도 닮을 수밖에 없는데, 우리 예수님께서 바로 그 점을 두고 당신과 하나님의 관계를 선포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요한복음에 기록된 다른 유명한 내용들, ‘로고스 사상’이라든지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 사건’들처럼 그렇게 우리에게 익숙하게 알려지고 있지는 않지만, 사실상 내용적으로 볼 때에는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결정적인 진리를 선포해 주는 말씀입니다.
17절 이하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성부 하나님의 연합에 대하여, 성부로부터 위임받은 신적 사명과 권위에 대하여 아주 조직적이며 논리 정연한 공식 선언을 정식으로 하고 계십니다.
그러면서도 그 선언은 또한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지극히 이해하기 쉬운 개념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과연 예수님께서 이 신적(神的) 부자관계 즉 ‘성부와 성자’를 통하여 우리에게 계시해 주고자 하시는 오묘하고도 귀중한 진리가 무엇입니까?
1. 우리는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언행을 통해서 성부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됩니다.
본문 17절과 18절에 기록하기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단순하면서도 아주 강력하게 호칭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호칭하는 것은 유대인들도 이미 하고 있던 일이었지만, 그들은 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아버지이기는 하지만 자신과는 거리가 있는 관계임을 의식하면서 호칭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간격을 다 없애 버리시고 그냥 ‘내 아버지’라고 진짜 부자관계인 것처럼 지극히 친밀하게 호칭하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예수님은 하나님과 그만큼 특별하게 가까운 사이, 아니 가까운 것 이상의 관계이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자리에 있던 “유대인들” 즉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야말로 예수님의 그 말씀이 어떤 중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고 주장하는 것은 바로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시는” 선포 그 자체라는 사실을 그들은 단박 정확하게 알아들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예수님에 대한 증오와 불신으로만 가득 차 있던 그들에게 예수님의 그와 같은 선포는 오히려 안식일에 일했다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죄목이 될 뿐이었습니다.
비록 유대인들이 믿지는 않았지만 또한 놓치지는 않았던 사실,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가리켜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라고 선포하신 이것이 초대교회사에서 최초의 큰 신학논쟁의 대상이 됩니다.
기독교 신앙을 헬라 철학과 접목시킨, 변론적이고 현실주의적인 설교로 사람들의 인기를 얻고 있던 아리우스(Arius)라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가 ‘유한 시간 내에 창조된 최초의 피조물’이라고 보았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신성(神性)은 없는 존재, 그냥 하나님과 ‘유사한 본성’(호모이우시오스homoiousios)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좀 더 쉽게 표현하자면, 예수님은 신은 아니고 그냥 ‘신적인 영웅’이라고 했던 것이며, 오늘날도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바로 그런 이단사상을 퍼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아리우스가 그런 사상을 민간에 그리고 학계에까지 퍼뜨리고 있을 때, 니케아 공회가 열려서 이 문제를 논의하게 됩니다.
그때 알렉산드리아교회의 감독 대신에 비서 자격으로 회의에 참석했던 아타나시우스(Athanasius)가 베드로후서 1장 4절을 근거로 예수 그리스도는 원래부터 ‘신성’을 가지셨으므로 신에 의하여 창조되어질 수 없는 존재라고 아리우스의 이단적 사상을 통렬하게 비판합니다.
그 결과 니케아 공회는 아타나시우스의 주장대로 ‘성자는 신성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성부와 동등하시다’라고 하는 교리,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일한 본성’(호모우시오스homoousios)을 가지신 분이라는 사실을 그 공회의 신앙고백으로 채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소위 ‘이오타 논쟁’이라는 것인데, 그것은 아리우스의 ‘호모이우시오스’와 아타나시우스의 ‘호모우시오스’ 사이에는 ‘이오타(i)'라는 단 한 개의 글자 차이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예수님을 그냥 사람으로만 보느냐 아니면 성자 하나님으로 믿느냐 하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신학 논쟁이었고, 오늘날까지도 그리스도에 대한 이단적 사상과 참된 신앙고백은 그 ‘이오타’라는 글자 한 개를 사이에 두고 극과 극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부르심으로써 당신이 ‘하나님과 동등됨’을 선포하신 후에, 그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일하시는’ 까닭에 당신도 그날에 일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안식일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제7일에 ‘쉬심’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해서 그런 하나님을 안식일에 일해도 된다는 논리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주장하셨던 것이겠습니까?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제7일에 창조사역으로부터 쉬신 것이지 그 만들어 놓으신 피조물들을 위한 다른 활동, 즉 만물을 보존하시고 운영하시고 섭리하시는 사역을 멈추신 것은 결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렇게 역사(役事)하지 아니하시면 예나 지금이나 이 우주와 그 안의 생명체들의 모든 활동은 당장 중지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일하시는’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다는 사실이야말로 모든 존재를 유지시키며 모든 생명을 작동시키는 원동력이며, 그런 성부 하나님의 일이 안식일에도 멈추지 않았던 것처럼 성자 예수님의 ‘선을 행하는 일’ 역시 멈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성부와 성자는 그 본성뿐 아니라 그 ‘하시는 일’도 꼭 같다는 사실은 이어지는 말씀에서 계속 강조되고 있습니다.
바로 19절에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는 말은 부정의 강조형, 즉 ‘결코, 절대로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본문의 문맥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아야 따라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아들은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바로 곁에서 보았기 때문에 꼭 같은 일을 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말씀에서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도 ‘그와 같이 행한다’는 말은 무슨 흉내를 내거나 모방한다는 뜻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것과 ‘같은 일’(the same thing)을 한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성부와 성자의 ‘동등성’은 자연히 성부와 성자의 ‘본질적 연합’으로 이어지게 되고 그것은 자연히 성부와 성자께서는 ‘같은 일’을 하고 계신다는 사실로 귀결됩니다.
성자는 절대로 성부 없이 독립적으로 일하지 않으십니다.
성자는 성부 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도 않으시는 분이시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본성부터 시작해서 그 행동에 이르기까지 문자 그대로 ‘부전자전’(like father like son)인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을 그대로 쏙 빼닮은 성자이신 까닭에, 우리는 바로 이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그대로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이란 사람이 결코 볼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영(靈)이신 까닭에 육신의 눈에 어떤 실상(實像)으로 나타날 수 없을 뿐 아니라, 지극히 높고 위대하신 영광의 존재이시므로 만약 사람이 그 하나님을 직접 보게 된다면 바로 그 자리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사 6:5).
그처럼 불가시적인 하나님을 사람으로 하여금 볼 수 있도록 만들어 주기 위하여, 그 성부와 꼭 같은 신성을 가지시고 그 성부와 꼭 같은 일을 하시는 성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 성자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보여 주셨던 모든 언행은 결코 사람으로서는 할 수 있는 말이나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그 말씀으로 말하자면, 그냥 좀 지혜로운 사람이 남길 수 있는 격언 정도가 아니라, 이미 사람의 차원을 완전히 넘어선 말씀들이었습니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이 땅의 선인(善人)들의 상식과 윤리를 완전히 뛰어 넘는 말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사람 중에 현자(賢者)라는 자들의 지능과 연구를 완전히 초월하는 말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는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라”는, 세상의 종교인(宗敎人)들의 득도(得道)와 법언(法言)이라는 것들의 추종을 아예 불허하는 말씀들뿐이었습니다.
절대로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말, 오직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신 성자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들이었습니다.
그 행하신 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세상의 어떤 인격자라는 사람이 예수님처럼 창녀의 눈에서 회개의 눈물이 나오게 하고 그 앞에 꿇어 엎드리도록 만들 수 있었습니까?
그 어떤 도인이 온 동네 사람, 아니 전 민족이 다 손가락질하는 세리에게 그처럼 자상하고 친근하게 접근하셔서 하루 저녁에 그를 완전히 새 사람으로 바꿀 수 있었습니까?
소위 ‘4대 성인(聖人)’이라 불리는 사람들 중에서 예수님을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 중 그 누가 예수님처럼 당신의 몸을 전 인류의 죄 용서를 위한 희생제물로 바쳐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셨습니까?
아무도 없었고 앞으로도 결코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사람으로서는 결코 보여 줄 수 없는 말씀과 행동을 남기신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요셉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독생자이셨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예수님만이 완전한 사람이신 동시에 완전한 하나님이신, 신인성(神人性)을 동시에 지니신 유일한 존재이시기 때문입니다.
마치 아들이 아버지와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성자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동등한 신성을 지니신 채 이 땅에 화육하셨으며, 마치 아들이 아버지와 꼭 같이 마음을 맞추고 행동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바로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사역하셨습니다.
이처럼 사람 가운데 오셔서 사셨지만 꼭 ‘성부 하나님처럼 말씀하시고 성부 하나님처럼 행동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높고 위대하신 성부 하나님을 직접 뵙고 만나게 되는 이 놀라운 특권과 은혜를 꼭 체험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우리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해서 성부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게 됩니다.
20절 이하 22절의 말씀에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성부의 관계를 설명하시면서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부자지간이라는 것은 두말할 것 없이 이 ‘사랑’ 때문에 연결될 뿐 아니라 친밀하게 유지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처럼 사랑하시는 독생자에게 육신이라는 ‘낮고 천한 몸’을 입히셔서 이 땅에까지 보내셨습니다.
어떤 아버지라도, 물론 하늘의 아버지께서도 정말 ‘아버지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도대체 성부께서 왜 그런 ‘못할 일’을 하셨겠습니까?
그것은 그 성자로 하여금 당신께서 보여 주신 일, 그리고 “그보다 더 큰 일”을 이 세상에서 친히 행하시게 하심으로써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기이히 여기게” 만드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자기의 행하시는 것”이란 앞에서 설명했던 예수님의 일반적인 언행을 통하여 나타난 것들이라고 할 때, “그보다 더 큰 일”이라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어떤 주석가들은 이것을 ‘더 큰 기적’이라든지 나중에 예수님께서 행하실 ‘성령 강림 사건’ 등으로 해석하지만, 본문에 곧 이어지는 문맥을 따라 볼 때에 이것은 바로 21절의 ‘구원’과 22절 이하의 ‘심판’을 뜻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신다”는 사실은 그 유대인들도 믿고 있었던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생명 부활의 구원을 이 세상에 구체적으로 성취시키기 위하여 성부께서 당신을 이 땅에 보내셨다고 선언하시면서, 그 뿐 아니라 마지막 날의 심판 권세마저 성부께서 당신에게 맡기셨다고 덧붙여 선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구원과 심판에 대한 권위를 성부로부터 위임받아서 성부께서 원하시는 그대로 꼭 같이 행하신다는 말씀은, 아까 스스로 하나님과 동등하시고 하나님과 같이 일하신다고 선언하신 사실에 대한 강력한 마침표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사람을 죽음에서 부활시키는 구원 사역이나 사람을 지옥에 떨어뜨리는 심판 사역을 두고 예수님께서는 ‘기적’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그냥 “일”이라고 하신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이 모든 것들이 사람에게는 ‘기이히 여겨질’ 수밖에 없는 기적이요 초자연적인 권능이지만, 예수님에게는 그냥 ‘일’에 불과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자 하나님으로서는 아주 간단하게 할 수 있는 일이며 성자 하나님께 주어진 자연스러운 일, 즉 고유의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부께서는 성자를 통하여 그런 놀라운 구원과 심판의 일을 행하게 하심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기이히 여기게’ 만드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바로 그 점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이어지는 23절과 24절에서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왜 성부께서는 그처럼 아버지와 꼭 같고 아버지와 꼭 같이 일하시는 성자를 세상에 보내셨는가?”에 대한 결론적 대답을 들려 주고 계십니다.
그것은 곧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공경하다”라는 말은 ‘명예롭게 하다, 영광스럽게 하다’라는 뜻인데,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다’라는 뜻으로 쓰인 말입니다.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것’은 바로 ‘그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는 것’과 동격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마태복음 21장 33절 이하의 ‘포도원 주인과 악한 농부’들의 비유에 나오는 그대로 주인이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하고 보내었을 때 오히려 그 아들을 “잡아 포도원 밖에 내어 쫓아 죽인” 행위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원래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 경외하는 생활을 구체적으로 발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보내어지신 것입니다.
계속 이어지는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점을 더욱 분명하게 하셨습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만이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고 영생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라고 강조하고 있듯이, 구세주를 보내신 하나님을 바로 믿는 것은 보내심을 받은 그 아들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깨닫고 그것부터 믿는 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기 “영생을 얻었고”라는 말이 현재형으로 되어 있으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는 말은 현재완료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일단 바로 믿음으로써 얻게 된 구원은 이미 확보된 상태, 절대로 예약취소되지 아니할 틀림없는 약속임을 확인해 주는 말씀입니다.
즉 오직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바로 믿느냐 안 믿느냐의 이 여부가 바로 사람의 구원과 심판을 좌우하고 절대적으로 결정짓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자기선언이나 ‘나는 이것을 증거한다.’라는 양심선언을 하면 그것은 그 개인의 인격과 명예가 완전히 다 걸린,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바로 그와 같은 엄청난 자기선언을 하셨습니다.
분명히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사람처럼 사신 분이신데도 당신을 가리켜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는 실제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며, 당신은 그 하나님과 꼭 같이 동등한 까닭에 꼭 같이 하나님으로서 공경을 받아야 할 대상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께서는 지금도 일하고 계시는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시며, 당신께서 하시는 일이 바로 그 하나님께서 지금 행하고 계시는 구원 사역과 앞으로 행하고자 하시는 심판 사역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당신의 ‘자기 선언’을 믿는 사람에게는 부활 영생을 약속하셨고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지옥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결코 사람의 입에서는 나올 수 없는, 정말 하나님의 입에서만 나올 수 있는 엉청난 말씀을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 앞에 선 우리 모두는 이제 그 주님의 ‘자기 선언’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양자택일에 자동적으로 서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접해 볼 수 있는 예수님의 인격에 비추어서 과연 예수님의 이런 말씀이 진실일까 아니면 거짓일까를 선택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 예수님의 말씀이 진실이 아니라면 예수님은 세상에서 제일가는 거짓말쟁이가 되든지, 아니면 더 이상 올라갈 데가 없는 교만에 빠진 광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에게 무료 의료봉사를 베풀어 준 유명한 슈바이처 박사는 또한 자유주의 신학자이기도 했는데, 그는 실제로 예수님을 무슨 자아도취증에 빠진 광신자라고 생각했습니다.
혹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되십니까?
저에게는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저는 예수님 같은 완벽한 인격자를 만나본 적이 없고, 예수님과 비길만한 ‘완전한 사람’을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런 예수님의 인격을 의심하고 예수님을 거짓말쟁이로, 혹은 사기꾼 교주로, 혹은 자기도취에 빠진 광신자로 여긴다는 것은 저로서는 도저히 생각조차 불가능한 일입니다.
일단 예수님의 인격에 감동받은 자는 그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확신에 넘치는 일이며, 그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믿고 천당과 지옥을 믿는 것 역시 아주 간단하면서도 증거 충분한 사실이 되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예수님 같은 사람을 의심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일단 예수님을 바로 알고 나면, 그 예수님을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이 오히려 정말 신기하고 이상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들을 공경함으로써 아버지를 공경할 수 있게 되며, 성자를 영접함으로써 성부 하나님을 확실히 믿을 수 있습니다.
화육강생하셔서 우리의 눈에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보여 주셨고 또한 우리 귀에 들리도록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예고해 주신 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고부동하게 믿고 그 선하심과 그 공의로우심을 경외할 줄 아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사람이 하나님을 안다’는 이 고고한 진리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라는 지극히 쉬운 말씀으로써 우리에게 계시되었습니다.
부자가 서로 끊을 수 없는 혈연관계를 맺고 있듯이, 성부와 성자는 한 하나님 안에 계십니다.
부자가 서로를 너무나 잘 알듯이, 성부와 성자는 그 뜻과 의지와 계획이 항상 일치하고 계십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손발이 척척 맞아 떨어지듯이, 성부와 성자는 그 선포하시는 말씀과 그 행하시는 일들이 꼭 같으십니다.
단지 성부와 성자의 차이는, 전자는 불가시적 존재인 반면에 후자만이 가시적인 존재라는 점입니다.
즉 성자는 성부가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그 성부를 믿고 구원 얻도록 해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서 구세주로 사역하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과 인간 사이에 있는 그 엄청난 간격을 메우고 그 높은 장벽을 허물어뜨려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지혜와 역사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화육강생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오직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런 일을 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2장 5절에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 예수라”고 선포했습니다.
예수님 외에는 사람이 하나님을 알 길도 볼 길도 만날 길도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 외에는 하나님을 믿고 구원 받을 수 있는 길도 전무합니다.
문자 그대로 ‘오직 예수’일 뿐인 것입니다.
이런 성자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이야말로 인류 역사에 벌어진 가장 기이하고도 놀라운 사건이며,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가까이 할 수도 없었던 죄인들에게는 가장 은혜롭고 고마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우리 가운데 오셔서 말씀하시고 일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보고, 그 하나님께서 아버지의 사랑으로 오늘도 베풀어 주고 계시는 구원의 초청에 믿음으로 응답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석기현목사 설교 중에서
제가 일 년 반 전에 우리나라에 돌아왔을 때, 양복을 새로 하나 맞추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평소에 제 아버지 양복을 해 드리던 어느 재단사 한 분을 만나게 되었는데, 이 분이 제 몸 치수를 재시다가 갑자기 깔깔 웃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왜냐고 했더니, “목사님의 등어깨가 구부정한 자세가 어쩌면 그렇게 할아버지 목사님하고 꼭 같습니까? 뒤에서 보면 정말 누군지 구별이 안 되겠습니다.”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사실 어릴 때부터 어머니를 많이 닮았다는 소리를 듣고 자라왔지만, 요즘 보면 그처럼 등어깨가 구부러진 것부터 시작해서 아버지를 닮은 것도 의외로 많은 것 같습니다.
기왕에 아버지 닮은 아들 될 바에야 아버지의 그 특별하고도 강력한 영력을 좀 닮았으며 얼마나 좋았겠습니까마는, 그러지는 못하고 그런 별로 좋지 못한(?) 것만 닮은 아들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여튼 세상의 부자(父子)지간은 어느 정도 닮을 수밖에 없는데, 우리 예수님께서 바로 그 점을 두고 당신과 하나님의 관계를 선포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요한복음에 기록된 다른 유명한 내용들, ‘로고스 사상’이라든지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 사건’들처럼 그렇게 우리에게 익숙하게 알려지고 있지는 않지만, 사실상 내용적으로 볼 때에는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결정적인 진리를 선포해 주는 말씀입니다.
17절 이하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성부 하나님의 연합에 대하여, 성부로부터 위임받은 신적 사명과 권위에 대하여 아주 조직적이며 논리 정연한 공식 선언을 정식으로 하고 계십니다.
그러면서도 그 선언은 또한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지극히 이해하기 쉬운 개념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과연 예수님께서 이 신적(神的) 부자관계 즉 ‘성부와 성자’를 통하여 우리에게 계시해 주고자 하시는 오묘하고도 귀중한 진리가 무엇입니까?
1. 우리는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언행을 통해서 성부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됩니다.
본문 17절과 18절에 기록하기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단순하면서도 아주 강력하게 호칭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호칭하는 것은 유대인들도 이미 하고 있던 일이었지만, 그들은 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아버지이기는 하지만 자신과는 거리가 있는 관계임을 의식하면서 호칭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간격을 다 없애 버리시고 그냥 ‘내 아버지’라고 진짜 부자관계인 것처럼 지극히 친밀하게 호칭하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예수님은 하나님과 그만큼 특별하게 가까운 사이, 아니 가까운 것 이상의 관계이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자리에 있던 “유대인들” 즉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야말로 예수님의 그 말씀이 어떤 중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고 주장하는 것은 바로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시는” 선포 그 자체라는 사실을 그들은 단박 정확하게 알아들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예수님에 대한 증오와 불신으로만 가득 차 있던 그들에게 예수님의 그와 같은 선포는 오히려 안식일에 일했다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죄목이 될 뿐이었습니다.
비록 유대인들이 믿지는 않았지만 또한 놓치지는 않았던 사실,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가리켜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라고 선포하신 이것이 초대교회사에서 최초의 큰 신학논쟁의 대상이 됩니다.
기독교 신앙을 헬라 철학과 접목시킨, 변론적이고 현실주의적인 설교로 사람들의 인기를 얻고 있던 아리우스(Arius)라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가 ‘유한 시간 내에 창조된 최초의 피조물’이라고 보았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신성(神性)은 없는 존재, 그냥 하나님과 ‘유사한 본성’(호모이우시오스homoiousios)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좀 더 쉽게 표현하자면, 예수님은 신은 아니고 그냥 ‘신적인 영웅’이라고 했던 것이며, 오늘날도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바로 그런 이단사상을 퍼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아리우스가 그런 사상을 민간에 그리고 학계에까지 퍼뜨리고 있을 때, 니케아 공회가 열려서 이 문제를 논의하게 됩니다.
그때 알렉산드리아교회의 감독 대신에 비서 자격으로 회의에 참석했던 아타나시우스(Athanasius)가 베드로후서 1장 4절을 근거로 예수 그리스도는 원래부터 ‘신성’을 가지셨으므로 신에 의하여 창조되어질 수 없는 존재라고 아리우스의 이단적 사상을 통렬하게 비판합니다.
그 결과 니케아 공회는 아타나시우스의 주장대로 ‘성자는 신성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성부와 동등하시다’라고 하는 교리,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일한 본성’(호모우시오스homoousios)을 가지신 분이라는 사실을 그 공회의 신앙고백으로 채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소위 ‘이오타 논쟁’이라는 것인데, 그것은 아리우스의 ‘호모이우시오스’와 아타나시우스의 ‘호모우시오스’ 사이에는 ‘이오타(i)'라는 단 한 개의 글자 차이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예수님을 그냥 사람으로만 보느냐 아니면 성자 하나님으로 믿느냐 하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신학 논쟁이었고, 오늘날까지도 그리스도에 대한 이단적 사상과 참된 신앙고백은 그 ‘이오타’라는 글자 한 개를 사이에 두고 극과 극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부르심으로써 당신이 ‘하나님과 동등됨’을 선포하신 후에, 그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일하시는’ 까닭에 당신도 그날에 일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안식일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제7일에 ‘쉬심’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해서 그런 하나님을 안식일에 일해도 된다는 논리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주장하셨던 것이겠습니까?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제7일에 창조사역으로부터 쉬신 것이지 그 만들어 놓으신 피조물들을 위한 다른 활동, 즉 만물을 보존하시고 운영하시고 섭리하시는 사역을 멈추신 것은 결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렇게 역사(役事)하지 아니하시면 예나 지금이나 이 우주와 그 안의 생명체들의 모든 활동은 당장 중지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일하시는’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다는 사실이야말로 모든 존재를 유지시키며 모든 생명을 작동시키는 원동력이며, 그런 성부 하나님의 일이 안식일에도 멈추지 않았던 것처럼 성자 예수님의 ‘선을 행하는 일’ 역시 멈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성부와 성자는 그 본성뿐 아니라 그 ‘하시는 일’도 꼭 같다는 사실은 이어지는 말씀에서 계속 강조되고 있습니다.
바로 19절에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는 말은 부정의 강조형, 즉 ‘결코, 절대로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본문의 문맥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아야 따라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아들은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바로 곁에서 보았기 때문에 꼭 같은 일을 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말씀에서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도 ‘그와 같이 행한다’는 말은 무슨 흉내를 내거나 모방한다는 뜻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것과 ‘같은 일’(the same thing)을 한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성부와 성자의 ‘동등성’은 자연히 성부와 성자의 ‘본질적 연합’으로 이어지게 되고 그것은 자연히 성부와 성자께서는 ‘같은 일’을 하고 계신다는 사실로 귀결됩니다.
성자는 절대로 성부 없이 독립적으로 일하지 않으십니다.
성자는 성부 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도 않으시는 분이시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본성부터 시작해서 그 행동에 이르기까지 문자 그대로 ‘부전자전’(like father like son)인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을 그대로 쏙 빼닮은 성자이신 까닭에, 우리는 바로 이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그대로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이란 사람이 결코 볼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영(靈)이신 까닭에 육신의 눈에 어떤 실상(實像)으로 나타날 수 없을 뿐 아니라, 지극히 높고 위대하신 영광의 존재이시므로 만약 사람이 그 하나님을 직접 보게 된다면 바로 그 자리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사 6:5).
그처럼 불가시적인 하나님을 사람으로 하여금 볼 수 있도록 만들어 주기 위하여, 그 성부와 꼭 같은 신성을 가지시고 그 성부와 꼭 같은 일을 하시는 성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 성자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보여 주셨던 모든 언행은 결코 사람으로서는 할 수 있는 말이나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그 말씀으로 말하자면, 그냥 좀 지혜로운 사람이 남길 수 있는 격언 정도가 아니라, 이미 사람의 차원을 완전히 넘어선 말씀들이었습니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이 땅의 선인(善人)들의 상식과 윤리를 완전히 뛰어 넘는 말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사람 중에 현자(賢者)라는 자들의 지능과 연구를 완전히 초월하는 말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는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라”는, 세상의 종교인(宗敎人)들의 득도(得道)와 법언(法言)이라는 것들의 추종을 아예 불허하는 말씀들뿐이었습니다.
절대로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말, 오직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신 성자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들이었습니다.
그 행하신 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세상의 어떤 인격자라는 사람이 예수님처럼 창녀의 눈에서 회개의 눈물이 나오게 하고 그 앞에 꿇어 엎드리도록 만들 수 있었습니까?
그 어떤 도인이 온 동네 사람, 아니 전 민족이 다 손가락질하는 세리에게 그처럼 자상하고 친근하게 접근하셔서 하루 저녁에 그를 완전히 새 사람으로 바꿀 수 있었습니까?
소위 ‘4대 성인(聖人)’이라 불리는 사람들 중에서 예수님을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 중 그 누가 예수님처럼 당신의 몸을 전 인류의 죄 용서를 위한 희생제물로 바쳐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셨습니까?
아무도 없었고 앞으로도 결코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사람으로서는 결코 보여 줄 수 없는 말씀과 행동을 남기신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요셉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독생자이셨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예수님만이 완전한 사람이신 동시에 완전한 하나님이신, 신인성(神人性)을 동시에 지니신 유일한 존재이시기 때문입니다.
마치 아들이 아버지와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성자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동등한 신성을 지니신 채 이 땅에 화육하셨으며, 마치 아들이 아버지와 꼭 같이 마음을 맞추고 행동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바로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사역하셨습니다.
이처럼 사람 가운데 오셔서 사셨지만 꼭 ‘성부 하나님처럼 말씀하시고 성부 하나님처럼 행동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높고 위대하신 성부 하나님을 직접 뵙고 만나게 되는 이 놀라운 특권과 은혜를 꼭 체험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우리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해서 성부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게 됩니다.
20절 이하 22절의 말씀에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성부의 관계를 설명하시면서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부자지간이라는 것은 두말할 것 없이 이 ‘사랑’ 때문에 연결될 뿐 아니라 친밀하게 유지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처럼 사랑하시는 독생자에게 육신이라는 ‘낮고 천한 몸’을 입히셔서 이 땅에까지 보내셨습니다.
어떤 아버지라도, 물론 하늘의 아버지께서도 정말 ‘아버지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도대체 성부께서 왜 그런 ‘못할 일’을 하셨겠습니까?
그것은 그 성자로 하여금 당신께서 보여 주신 일, 그리고 “그보다 더 큰 일”을 이 세상에서 친히 행하시게 하심으로써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기이히 여기게” 만드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자기의 행하시는 것”이란 앞에서 설명했던 예수님의 일반적인 언행을 통하여 나타난 것들이라고 할 때, “그보다 더 큰 일”이라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어떤 주석가들은 이것을 ‘더 큰 기적’이라든지 나중에 예수님께서 행하실 ‘성령 강림 사건’ 등으로 해석하지만, 본문에 곧 이어지는 문맥을 따라 볼 때에 이것은 바로 21절의 ‘구원’과 22절 이하의 ‘심판’을 뜻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신다”는 사실은 그 유대인들도 믿고 있었던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생명 부활의 구원을 이 세상에 구체적으로 성취시키기 위하여 성부께서 당신을 이 땅에 보내셨다고 선언하시면서, 그 뿐 아니라 마지막 날의 심판 권세마저 성부께서 당신에게 맡기셨다고 덧붙여 선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구원과 심판에 대한 권위를 성부로부터 위임받아서 성부께서 원하시는 그대로 꼭 같이 행하신다는 말씀은, 아까 스스로 하나님과 동등하시고 하나님과 같이 일하신다고 선언하신 사실에 대한 강력한 마침표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사람을 죽음에서 부활시키는 구원 사역이나 사람을 지옥에 떨어뜨리는 심판 사역을 두고 예수님께서는 ‘기적’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그냥 “일”이라고 하신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이 모든 것들이 사람에게는 ‘기이히 여겨질’ 수밖에 없는 기적이요 초자연적인 권능이지만, 예수님에게는 그냥 ‘일’에 불과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자 하나님으로서는 아주 간단하게 할 수 있는 일이며 성자 하나님께 주어진 자연스러운 일, 즉 고유의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부께서는 성자를 통하여 그런 놀라운 구원과 심판의 일을 행하게 하심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기이히 여기게’ 만드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바로 그 점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이어지는 23절과 24절에서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왜 성부께서는 그처럼 아버지와 꼭 같고 아버지와 꼭 같이 일하시는 성자를 세상에 보내셨는가?”에 대한 결론적 대답을 들려 주고 계십니다.
그것은 곧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공경하다”라는 말은 ‘명예롭게 하다, 영광스럽게 하다’라는 뜻인데,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다’라는 뜻으로 쓰인 말입니다.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것’은 바로 ‘그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는 것’과 동격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마태복음 21장 33절 이하의 ‘포도원 주인과 악한 농부’들의 비유에 나오는 그대로 주인이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하고 보내었을 때 오히려 그 아들을 “잡아 포도원 밖에 내어 쫓아 죽인” 행위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원래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 경외하는 생활을 구체적으로 발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보내어지신 것입니다.
계속 이어지는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점을 더욱 분명하게 하셨습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만이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고 영생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라고 강조하고 있듯이, 구세주를 보내신 하나님을 바로 믿는 것은 보내심을 받은 그 아들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깨닫고 그것부터 믿는 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기 “영생을 얻었고”라는 말이 현재형으로 되어 있으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는 말은 현재완료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일단 바로 믿음으로써 얻게 된 구원은 이미 확보된 상태, 절대로 예약취소되지 아니할 틀림없는 약속임을 확인해 주는 말씀입니다.
즉 오직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바로 믿느냐 안 믿느냐의 이 여부가 바로 사람의 구원과 심판을 좌우하고 절대적으로 결정짓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자기선언이나 ‘나는 이것을 증거한다.’라는 양심선언을 하면 그것은 그 개인의 인격과 명예가 완전히 다 걸린,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바로 그와 같은 엄청난 자기선언을 하셨습니다.
분명히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사람처럼 사신 분이신데도 당신을 가리켜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는 실제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며, 당신은 그 하나님과 꼭 같이 동등한 까닭에 꼭 같이 하나님으로서 공경을 받아야 할 대상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께서는 지금도 일하고 계시는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시며, 당신께서 하시는 일이 바로 그 하나님께서 지금 행하고 계시는 구원 사역과 앞으로 행하고자 하시는 심판 사역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당신의 ‘자기 선언’을 믿는 사람에게는 부활 영생을 약속하셨고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지옥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결코 사람의 입에서는 나올 수 없는, 정말 하나님의 입에서만 나올 수 있는 엉청난 말씀을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 앞에 선 우리 모두는 이제 그 주님의 ‘자기 선언’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양자택일에 자동적으로 서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접해 볼 수 있는 예수님의 인격에 비추어서 과연 예수님의 이런 말씀이 진실일까 아니면 거짓일까를 선택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 예수님의 말씀이 진실이 아니라면 예수님은 세상에서 제일가는 거짓말쟁이가 되든지, 아니면 더 이상 올라갈 데가 없는 교만에 빠진 광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에게 무료 의료봉사를 베풀어 준 유명한 슈바이처 박사는 또한 자유주의 신학자이기도 했는데, 그는 실제로 예수님을 무슨 자아도취증에 빠진 광신자라고 생각했습니다.
혹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되십니까?
저에게는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저는 예수님 같은 완벽한 인격자를 만나본 적이 없고, 예수님과 비길만한 ‘완전한 사람’을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런 예수님의 인격을 의심하고 예수님을 거짓말쟁이로, 혹은 사기꾼 교주로, 혹은 자기도취에 빠진 광신자로 여긴다는 것은 저로서는 도저히 생각조차 불가능한 일입니다.
일단 예수님의 인격에 감동받은 자는 그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확신에 넘치는 일이며, 그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믿고 천당과 지옥을 믿는 것 역시 아주 간단하면서도 증거 충분한 사실이 되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예수님 같은 사람을 의심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일단 예수님을 바로 알고 나면, 그 예수님을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이 오히려 정말 신기하고 이상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들을 공경함으로써 아버지를 공경할 수 있게 되며, 성자를 영접함으로써 성부 하나님을 확실히 믿을 수 있습니다.
화육강생하셔서 우리의 눈에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보여 주셨고 또한 우리 귀에 들리도록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예고해 주신 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고부동하게 믿고 그 선하심과 그 공의로우심을 경외할 줄 아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사람이 하나님을 안다’는 이 고고한 진리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라는 지극히 쉬운 말씀으로써 우리에게 계시되었습니다.
부자가 서로 끊을 수 없는 혈연관계를 맺고 있듯이, 성부와 성자는 한 하나님 안에 계십니다.
부자가 서로를 너무나 잘 알듯이, 성부와 성자는 그 뜻과 의지와 계획이 항상 일치하고 계십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손발이 척척 맞아 떨어지듯이, 성부와 성자는 그 선포하시는 말씀과 그 행하시는 일들이 꼭 같으십니다.
단지 성부와 성자의 차이는, 전자는 불가시적 존재인 반면에 후자만이 가시적인 존재라는 점입니다.
즉 성자는 성부가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그 성부를 믿고 구원 얻도록 해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서 구세주로 사역하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과 인간 사이에 있는 그 엄청난 간격을 메우고 그 높은 장벽을 허물어뜨려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지혜와 역사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화육강생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오직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런 일을 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2장 5절에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 예수라”고 선포했습니다.
예수님 외에는 사람이 하나님을 알 길도 볼 길도 만날 길도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 외에는 하나님을 믿고 구원 받을 수 있는 길도 전무합니다.
문자 그대로 ‘오직 예수’일 뿐인 것입니다.
이런 성자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이야말로 인류 역사에 벌어진 가장 기이하고도 놀라운 사건이며,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가까이 할 수도 없었던 죄인들에게는 가장 은혜롭고 고마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우리 가운데 오셔서 말씀하시고 일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보고, 그 하나님께서 아버지의 사랑으로 오늘도 베풀어 주고 계시는 구원의 초청에 믿음으로 응답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석기현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