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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게 하시는 하나님 (삼하 8:1-14)
본문의 말씀은 우리에게 많은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인생의 모든 전쟁의 승패는 여호와 하나님께 있음을 확증하는 말씀으로서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교훈하시고 있습니다.
본문의 배경은 이러합니다. 다윗이 30세가 되던 해에 길보아 전투에서 사울이 전사함으로써(삼상 31장) 일단 유다 지파의 왕으로 추대되어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보셋의 정권]으로 인하여 통일 왕국을 이르지 못한 상황 속에 있었습니다. 당시 이스보셋은 이스라엘의 열 한 지파의 후원을 받고 있는 강력한 정권이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이스보셋]이 암살됨으로써(삼하 2:12-4:12) 마침내 7년 반 동안의 헤브론 시대를 마감하고 12지파 전체의 지지를 받아 통일된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통일왕국의 왕이 된 다윗은 그의 첫 과업으로 [여부스 사람]의 수중에 있었던 예루살렘을 빼앗아 그곳을 수도로 삼고, 그곳으로 법궤를 운반해 놓음으로써 명실상부(名實相符)한 ?신정적 왕정 국가?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6장) 그 후 다윗은 이스라엘을 괴롭혀오던 주변의 여러 나라들을 정복함으로써 국토를 확장해 나갔습니다. 본문은 이러한 과정 속에서 주변 나라와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다윗이 주변나라와 싸울 때에 막힘이 없이 승리를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다윗은 ①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서 승리했습니다.(1절) 본문 1절에 “...다윗은 블레셋 사람을 쳐서 항복을 받았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다윗은 블레셋과 싸워서 승리했습니다.
② 모압 사람들과 싸워서 승리했습니다.(2절) “다윗이 또 모압을 쳐서 저희로 땅에 엎드리게 하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다윗은 모압을 쳐서 이겼습니다. 그래서 모압을 이스라엘에 복속(服屬)시켰습니다. 이것은 예언 성취이기도 합니다(민24:17).
③ 소바 사람들과 싸워서 승리했습니다. 3절로 4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다윗은 소바 왕을 이겼습니다. 다윗은 소바왕 하닷셀이 자기 세력 확장을 꾀하러 가는 길을 다윗이 가로막아 이겼습니다.
④ 아람 사람들과 싸워서 승리했습니다. 5절로 8절 하반 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다윗은 아람과 싸워 이겼습니다. 다메섹의 아람 사람들이 소바 왕 하닷셀을 도우러 가는 사실을 알고, 저들을 처 물리침으로 하닷셀을 도우러 가는 사실을 알고, 저들을 쳐 물리침으로 이방의 세력들이 감히 동맹을 하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⑤ 에돔 사람들과 싸워서 승리했습니다. 본문 13-15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다윗은 다시 에돔과 싸워 이겼습니다. 다윗은 염곡에서 에돔을 쳐 물리치고 명예를 얻고 그들을 다윗의 종으로 삼았습니다.
이처럼 다윗은 블레셋 , 모압, 에돔, 소바, 에돔 사람들과 싸워서 승리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이처럼 막힘없이 주변 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다윗에게는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본문 6절과 14절을 주목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다메섹 아람에 수비대를 두매 아람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어 조공을 바치니라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 다윗이 에돔에 수비대를 두되 온 에돔에 수비대를 두니 에돔 사람이 다 다윗의 종이 되니라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
다윗이 주변의 나라들과 싸워서 승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하나님의 도우심에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실 때에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때에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이 전쟁했던 나라들은 모두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하나님의 대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저주의 대상들이었습니다. 저들은 선민의 원수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하여 전쟁을 하게 하셨고, 전쟁마다 승승장구(乘勝長驅)하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기억할 것은 다윗은 이러한 사실을 알고 살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결코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불레셋 사람 골리앗과 싸울 때에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삼상 17:47)라고 말하면서 그와 싸울 때에 승리의 은혜를 체험하였던 것입니다.
인생의 성공은 역시도 인간의 어떤 노력이나 재능이나 지혜나 아니면 우연이 아닙니다. 우리의 배후에서 간섭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실 때에 승리할 수 있습니다. 승리의 결정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생의 의 생사(生死)화복(禍福)을 주장하시고, 인생의 흥망성쇠(興亡盛衰)를 주장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모든 것이 달려 있음을 믿으셔야 합니다. 우리는 한나의 고백처럼 말로만이 아니라 분명한 신앙고백적인 삶이 있어야 합니다. 한나는 삼상 2장 6-8절에서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 위에 세우셨도다”라고 분명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높이기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고, 가난하게도 하시는 하나님을 믿으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면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승리할 수 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이길 수 있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승리의 비결입니다. 이것은 승리를 가져오는 감추진 비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기억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아무에게나 이기게 하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시기는 은혜를 베풀어 주실 만한 그릇이 준비된 사람에게 다윗과 같은 축복을 주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 다윗이 어떻게 하여 이기게 하시는 은혜를 받았는지를 함께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본문 4절에서 “그 마병 일천 칠백과 보병 이만을 사로잡고 병거 일백승의 말만 남기고 그 외의 병거의 말은 다 발의 힘줄을 끊었더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다윗은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순종할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다윗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전쟁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배경을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신 17:16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왕 된 자는 말을 많이 두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신 17:16,20) 만약 왕이 된 사람이 말을 많이 두게 되면 하나님보다 말을 더 의지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이를 알고 계신 하나님은 왕이 된 사람으로 하여금 말을 많이 두지 말 것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에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삼상 15장 2-3절을 보면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을 내가 추억하노니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 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 왕에게 아말렉을 진멸하되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을 다 없애버릴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 왕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얻은 전리품 가운데 좋은 아각, 양, 소, 기름진 것,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은 남기고 진멸하지 아니하고 좋지 아니한 것들은 다 진멸하여 없애버렸습니다.(삼상 15:7)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알고 계신 하나님께서는 사무엘 선지자를 통하여 사울에게 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는지를 물으니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을 남겼다”라고 구구한 변명을 하였습니다.(삼상 15:15) 이에 사무엘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났다”(삼상 15:22)라고 말씀하시면서 “....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라고 예언을 하였습니다. 결국 사울은 사무엘의 예언대로 블레셋 전투에서 크게 대패하였고 결국 스스로 자살하여 죽음으로 말미암아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삼상 31:6)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이방인과의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을 다 진멸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자의 최후는 참으로 비참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다윗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을 취하지 아니하고 다 진멸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손종하는 자는 버림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다시 기회를 주시지 않습니다. 기회가 박탈이 됩니다.
한 가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전리품을 취하지 말고 다 진멸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전리품을 의지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다윗이 전리품을 다 진멸하고 없애 버린 것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겠다는 단호한 행동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 20:7에서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을 많이 두지 말라고 하신 것을 하나님만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철저히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고, 하나님만을 의지하였습니다. 다윗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주변 지역을 정복하고, 틈을 내어 ?유브라데? 강과 ?레바논 산악? 지역가지 원정을 가서 그곳 땅을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전쟁을 수행하면서 상대국의 사람들을 무조건 학살하지 않고 어린아이와 노약자는 살려두되 이스라엘을 대항할 만한 체격을 소유한 자만을 죽이는 등(2절) 나름대로의 원칙을 가지고 정복해 나갔습니다. 특히 다윗은 전쟁을 통해 획득한 전리품 가운데 말(馬)은 최소한 숫자만 남기고 모두 그 발의 힘줄을 끊음으로써 쓸모없게 만들었습니다.(4절) 사실 당시 말은 전쟁을 신속히 수행하기 위해 매우 긴요한 군사력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당시 전쟁은 말의 많고 적음에 따라 승패가 좌우가 된다고 과언이 아닐 정도 말의 중요성은 대단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미련 없이 말들의 발 힘줄을 끊음으로써 말에 의지한 승리를 거부했습니다. 이와 같은 행위는 일찍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의 왕 된 자는 말을 많이 두지 말라”(신 17:16)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순종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은 전쟁의 승패는 말이 많음이나 군사력의 우세력을 달려 있지 않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전쟁은 여호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믿었고(삼상 17:47) 그렇기에 오직 여호와만을 의지하겠노라는 의지의 표시로 말의 힘줄을 끊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좋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자를 하나님은 세상이 흉내 낼 수 없는 풍성한 복과 은혜로 채워주신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신 28:1-68)
잠 3:6에서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범사에 우리로 하여금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인정한다고 말로만 한 것이 아니라 그의 삶 자체가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적인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인생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습니다. 그래서 시115:9-13에서 우리들을 향하여 세 번씩이나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너희 방패시로다" 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제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도 순종하지 않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서 아무리 예배를 드려도 그 예배는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대표적인 실례가 히스기야 왕입니다. 히스기야 왕은 전쟁에서 이기고 난 다음에 실패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함께 하셔서 십팔만 오천 명(185,000)을 하루아침에 멸하시는 은혜를 입었지만, 그가 병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그의 생명이 다시 15년을 연장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병들었을 때에 병문안을 왔던 블레셋 사신들에게 자기나라의 무기고를 열어 보이고 보석창고를 보여주었습니다.(사 39:3-7) 이것이 히스기야 왕의 실수였습니다. 그 모든 것은 나중에 다 바벨론에 뺏기고 맙니다.
시편의 기자는 시편 146편 기자가 3절로 5절에서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찌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사야는 2:22에서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數)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인생을 의지하는 자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승리합니다. 복을 받습니다. 어떠한 상황을 만날지라도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고후 4:8-9에서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 한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윗처럼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함으로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11-12절에서 “다윗왕이 그것도 여호와께 드리되 저가 정복한 모든 나라에서 얻은 은금 곧 아람과 모압과 암몬 자손과 블레셋 사람과 아말렉에게서 얻은것들과 소바 왕 르홉의 아들 하닷에셀에게서 노략한 것과 같이 드리니라 ”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다윗이 전리품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린 것은 승리의 영광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린 것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가는 곳마다 승리하고 수많은 전리품을 획득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사전에는 패배라는 말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처럼 전승 가도를 달리고 있던 다윗이었지만 결코 교만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다윗은 전쟁에서 얻은 수많은 전리품들을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인정하고 그 모두를 하나님께 바치기에 주저하지 않았습니다.(11절) 이 예물은 뒷날 솔로몬 성전 건축에 사용되었습니다.(왕상 6:1-7:51) 아무튼 다윗은 자신의 승리가 자신의 능력이 특출해서 이뤄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후원해 주셨기 때문에 감히 승리할 수 있었음을 고백하였습니다.
다윗은 모든 승리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자신은 단시 그분의 일꾼에 불과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승리했을 때에도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혹시라도 승리할 했을 때에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챘습니까? 우리는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고전 10:31에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정말 다윗과 같이 하나님 앞에 서는 삶을 사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오직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Soli Deo Gloria) 우리는 롬 11:36에서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모든 만물이 주님에게서 나오고(from God), 주로 말미암고(through God), 주에게로 (to God) 돌아간다는 것을 깨닫고 모든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 43:7에서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위하여 지음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마땅히 모든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만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하나님만이 홀로 선하신 분이시며(마 19:17), 또한 우리 안에서 선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착한 행실로 인한 영광은 당연히 사람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벧전 2:12). 사도 바울은 빌 4:20에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토록 영광을 돌릴지어다.”(빌 4:20) 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 삶의 모든 복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므로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자는 교만한 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자는 사단의 미혹을 받아 더 이상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없는 자리까지 떨어질 수 있습니다.
사울이 처음부터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챘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울에게 교만이 들어가자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는 하나님께서 멸하라고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고(삼상 15:18) 결국 하나님 앞에서 버림을 받은 왕으로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사울이 왕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습니까? 그것은 아말렉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은 자신의 지혜와 자기들의 군대의 힘으로 된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사울 왕은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자신에게 돌렸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그는 결국 하나님께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자들의 특징 중에 하나가 자기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한다는 것입니다. 사울 왕에게도 이러한 모습이 아주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을 향하여 “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습니까?”라고 말하니 사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자 전쟁에서 얻은 좋은 소와 어린 양을 하나님께 가지고 왔습니다.”(삼상 15:22-23) 그러나 여러분이 분명히 아셔야 할 것은 이러한 변명을 하나님께서는 다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알게 모르게 범죄할 때가 있고, 혹은 실수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사울 왕처럼 구구하게 변명하지 말고 솔직하게 잘못된 것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끝까지 하나님께 돌려져야 할 영광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려는 행동은 어리석은 행동일 뿐만 아니라 그렇게 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이 자기 자신을 작은 자로 여길 때에는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지만, 사울이 자기 스스로가 크게 여기고 마땅히 돌려야 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고, 하나님의 말씀의 말씀을 불순종할 때에 그를 버리셨습니다. 사울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참으로 분명합니다. 참으로 심각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분명히 알고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기게 하시는 은혜의 복을 체험하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다윗처럼 겸손하게 하나님을 의지할 뿐만 아니라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그러한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같이 우리에게도 이기게 하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는 공의(公義)를 행하는 자에게 이기게 하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15절)
본문 15절에서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려 모든 백성에게 공과 의를 행할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다윗은 공의를 행하였습니다. 다윗은 수많은 정복 전쟁을 통하여 나라를 부흥시켰고 그리함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얼마든지 강화할 수 있었습니다. 그를 대항하거나 그에게 견줄만한 인물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적어도 이 정도가 되면 흔히 세상 통치자들이 그러하듯이 점차 교만해져서 백성들을 우습게 생각하고 자신의 욕심대로 나라를 치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다윗은 주변 나라의 침입으로부터 나라가 안정되자 공과 의를 가지고 나라를 다스려 평안 중에 거하게 하였습니다. 다윗은 공(公)과 의(義)를 모토(motto)로 삼아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여기에서 “공”이란 아무런 사심 없이 ‘미쉬파트’라는 말로 공정한 판단 곧 공평(公平)을 말하고, “의”란 “체다카”라는 말로 정의(正義)를 의미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다윗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규례 곧 율법의 명령 따라 나라를 통치하고 질서를 세워 나갔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시편 45:6,7)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된 언행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은 사사로운 편견(偏見)과 아집(我執)에 사로잡힌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공의로운 통치를 했습니다. 이로 인해서 백성들은 평안하고도 복된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는 지도자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가 선지자는 미가 6:6-8에서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 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공의를 행한다”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삶을 말합니까?
① 한 공동체 안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다른 사람의 권리를 보장해 주는 것까지를 포함합니다.
② 공동체 안에서 약자를 배려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연약한 부분을 먼저 살피는 것입니다.
③ 공의를 실천하는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위하지 않습니다. 공의를 행하는 사람은 자신의 편의를 위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위하지 않습니다. 공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동방향을 결정합니다.
④ 요즘 사회에서는 공의를 위해서 살면 손해를 본다고 생각합니다. 눈앞에 있는 물질과 눈 뒤에 있는 하나님을 맞바꾸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공의를 행하는 눈앞에 있는 물질을 위해서 살지 않고 뒤에서 계시는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⑤ 구원은 믿음으로 받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구원을 받았으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걸어가야 할 길을 걸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진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믿는 사람들에게서 공의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을 증거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복음을 증거 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공의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정말 아모스 선지자가 암 5:24에서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지로다”라고 탄식하며 슬퍼하였던 것처럼 그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지금은 어느 때보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공법과 정의 곧 공의를 드러내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이 땅에 많은 그리스도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있는 이 땅은 점점 썩어지고 있고, 타락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말세의 현상 중에 하나입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세상이 썩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라브리 선교회의 설립자인 프란시스 쉐이퍼 박사가 “어떤 종교이든지 그 사회에 10% 이상이 되면 그 사회를 책임져야 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이제 그리스도인이 이 사회를 책임져야 합니다. 이것을 말로만이 아니라, 이는 구호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영역 속에서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 하나님의 공의를 온전히 드러낼 때에 가능하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지금은 이 시대는 패역한 시대이지만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행하였던 예레미야를 찾으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렘5:1) 어쩌면 이 시대는 예레미야 시대를 방불할 정도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여기지 않고, 온갖 부도덕과 비리와 뇌물이 팽배해 있는 시대이고, 우리나라의 청소년 흡연율이 세계에서 1위라는 사실은 듣기만 해도 답답하고 어두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의 공의를 행하는 의인(義人) 열 사람만 있으면 결코 이 민족을 버리지 않을 줄 믿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이러한 의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공의를 밝히 드러내었던 칼빈과 루터와 같은 인물이 나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공의로운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공의로운 삶을 살지 아니하는 인생은 결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없음을 거듭 거듭 명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윗이 모든 백성을 통치함에 있어서 결코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이 공의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철저히 하나님의 중심의 삶을 살을 때에 가능했던 것처럼 만약 여러분 중에 공의를 실천하기 원하신다면 철저히 하나님 말씀 중심의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좇아 한점 부끄럼이 없이 살 때에 공의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단과의 영적 전쟁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님의 공의(公義)가 무기가 되지 않기 때문에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같이 공과 의를 따라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면 다윗에게 이기게 하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은혜를 베풀어 주실 줄 믿습니다.
잠 3:6에서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며 살되 이기게 하시는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시 121:1-2절과 시 124:8에서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라고 찬양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결코 승리할 수 없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시편 127:1-2에서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너희가 일찌기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라고 찬양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지키심을 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 앞에서 공의로운 삶을 살았던 원동력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성경은 이에 대해서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살았음을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삶이 하나님의 면전에서 사는 삶입니다. 삼하 5:23에서 계속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다윗은 기도 중심의 삶 곧 모든 범사를 하나님께 물어보았습니다. 삼하 6:15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다윗은 법궤 중심의 생활을 하였습니다. 삼하 7:18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성전 중심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러한 다윗이었기에 다윗은 모든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면서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삶이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인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의 성공과 번영의 관건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처세술이 뛰어나고, 수완이 좋거나, 머리가 남들보다 뛰어난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아니하면 우리는 결코 승리의 인생의 살 수 없습니다. 설혹 승리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일시적인 승리일 뿐이고, 그러한 승리를 가지고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으로 성공하고 영원히 번영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좇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눈속임이나 편법이 아닌 공과 의를 삶의 모토를 삼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삶의 목적을 우리 자신의 안일과 영예에 두지 않고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영광에 두고서 살아야 합니다. 모든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면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윗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공과 의를 행했던 것처럼 우리들도 공의를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모스 선지자의 탄식을 기억하면서 이 땅에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리게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베풀어 주신 이기게 하시는 은혜를 우리에게 부어 주실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약 여러분 중에 성공적인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여러분 중에 승리하는 삶을 살기 원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시고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공의로운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이기게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통하여 영육 간에 승리하는 인생을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한국교회 부흥설교 설교 정보수집 편집위원 협조와 추천 중에서
본문의 말씀은 우리에게 많은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인생의 모든 전쟁의 승패는 여호와 하나님께 있음을 확증하는 말씀으로서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교훈하시고 있습니다.
본문의 배경은 이러합니다. 다윗이 30세가 되던 해에 길보아 전투에서 사울이 전사함으로써(삼상 31장) 일단 유다 지파의 왕으로 추대되어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보셋의 정권]으로 인하여 통일 왕국을 이르지 못한 상황 속에 있었습니다. 당시 이스보셋은 이스라엘의 열 한 지파의 후원을 받고 있는 강력한 정권이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이스보셋]이 암살됨으로써(삼하 2:12-4:12) 마침내 7년 반 동안의 헤브론 시대를 마감하고 12지파 전체의 지지를 받아 통일된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통일왕국의 왕이 된 다윗은 그의 첫 과업으로 [여부스 사람]의 수중에 있었던 예루살렘을 빼앗아 그곳을 수도로 삼고, 그곳으로 법궤를 운반해 놓음으로써 명실상부(名實相符)한 ?신정적 왕정 국가?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6장) 그 후 다윗은 이스라엘을 괴롭혀오던 주변의 여러 나라들을 정복함으로써 국토를 확장해 나갔습니다. 본문은 이러한 과정 속에서 주변 나라와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다윗이 주변나라와 싸울 때에 막힘이 없이 승리를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다윗은 ①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서 승리했습니다.(1절) 본문 1절에 “...다윗은 블레셋 사람을 쳐서 항복을 받았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다윗은 블레셋과 싸워서 승리했습니다.
② 모압 사람들과 싸워서 승리했습니다.(2절) “다윗이 또 모압을 쳐서 저희로 땅에 엎드리게 하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다윗은 모압을 쳐서 이겼습니다. 그래서 모압을 이스라엘에 복속(服屬)시켰습니다. 이것은 예언 성취이기도 합니다(민24:17).
③ 소바 사람들과 싸워서 승리했습니다. 3절로 4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다윗은 소바 왕을 이겼습니다. 다윗은 소바왕 하닷셀이 자기 세력 확장을 꾀하러 가는 길을 다윗이 가로막아 이겼습니다.
④ 아람 사람들과 싸워서 승리했습니다. 5절로 8절 하반 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다윗은 아람과 싸워 이겼습니다. 다메섹의 아람 사람들이 소바 왕 하닷셀을 도우러 가는 사실을 알고, 저들을 처 물리침으로 하닷셀을 도우러 가는 사실을 알고, 저들을 쳐 물리침으로 이방의 세력들이 감히 동맹을 하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⑤ 에돔 사람들과 싸워서 승리했습니다. 본문 13-15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다윗은 다시 에돔과 싸워 이겼습니다. 다윗은 염곡에서 에돔을 쳐 물리치고 명예를 얻고 그들을 다윗의 종으로 삼았습니다.
이처럼 다윗은 블레셋 , 모압, 에돔, 소바, 에돔 사람들과 싸워서 승리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이처럼 막힘없이 주변 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다윗에게는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본문 6절과 14절을 주목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다메섹 아람에 수비대를 두매 아람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어 조공을 바치니라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 다윗이 에돔에 수비대를 두되 온 에돔에 수비대를 두니 에돔 사람이 다 다윗의 종이 되니라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
다윗이 주변의 나라들과 싸워서 승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하나님의 도우심에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실 때에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때에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이 전쟁했던 나라들은 모두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하나님의 대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저주의 대상들이었습니다. 저들은 선민의 원수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하여 전쟁을 하게 하셨고, 전쟁마다 승승장구(乘勝長驅)하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기억할 것은 다윗은 이러한 사실을 알고 살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결코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불레셋 사람 골리앗과 싸울 때에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삼상 17:47)라고 말하면서 그와 싸울 때에 승리의 은혜를 체험하였던 것입니다.
인생의 성공은 역시도 인간의 어떤 노력이나 재능이나 지혜나 아니면 우연이 아닙니다. 우리의 배후에서 간섭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실 때에 승리할 수 있습니다. 승리의 결정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생의 의 생사(生死)화복(禍福)을 주장하시고, 인생의 흥망성쇠(興亡盛衰)를 주장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모든 것이 달려 있음을 믿으셔야 합니다. 우리는 한나의 고백처럼 말로만이 아니라 분명한 신앙고백적인 삶이 있어야 합니다. 한나는 삼상 2장 6-8절에서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 위에 세우셨도다”라고 분명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높이기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고, 가난하게도 하시는 하나님을 믿으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면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승리할 수 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이길 수 있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승리의 비결입니다. 이것은 승리를 가져오는 감추진 비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기억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아무에게나 이기게 하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시기는 은혜를 베풀어 주실 만한 그릇이 준비된 사람에게 다윗과 같은 축복을 주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 다윗이 어떻게 하여 이기게 하시는 은혜를 받았는지를 함께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본문 4절에서 “그 마병 일천 칠백과 보병 이만을 사로잡고 병거 일백승의 말만 남기고 그 외의 병거의 말은 다 발의 힘줄을 끊었더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다윗은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순종할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다윗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전쟁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배경을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신 17:16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왕 된 자는 말을 많이 두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신 17:16,20) 만약 왕이 된 사람이 말을 많이 두게 되면 하나님보다 말을 더 의지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이를 알고 계신 하나님은 왕이 된 사람으로 하여금 말을 많이 두지 말 것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에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삼상 15장 2-3절을 보면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을 내가 추억하노니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 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 왕에게 아말렉을 진멸하되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을 다 없애버릴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 왕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얻은 전리품 가운데 좋은 아각, 양, 소, 기름진 것,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은 남기고 진멸하지 아니하고 좋지 아니한 것들은 다 진멸하여 없애버렸습니다.(삼상 15:7)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알고 계신 하나님께서는 사무엘 선지자를 통하여 사울에게 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는지를 물으니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을 남겼다”라고 구구한 변명을 하였습니다.(삼상 15:15) 이에 사무엘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났다”(삼상 15:22)라고 말씀하시면서 “....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라고 예언을 하였습니다. 결국 사울은 사무엘의 예언대로 블레셋 전투에서 크게 대패하였고 결국 스스로 자살하여 죽음으로 말미암아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삼상 31:6)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이방인과의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을 다 진멸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자의 최후는 참으로 비참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다윗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을 취하지 아니하고 다 진멸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손종하는 자는 버림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다시 기회를 주시지 않습니다. 기회가 박탈이 됩니다.
한 가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전리품을 취하지 말고 다 진멸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전리품을 의지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다윗이 전리품을 다 진멸하고 없애 버린 것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겠다는 단호한 행동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 20:7에서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을 많이 두지 말라고 하신 것을 하나님만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철저히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고, 하나님만을 의지하였습니다. 다윗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주변 지역을 정복하고, 틈을 내어 ?유브라데? 강과 ?레바논 산악? 지역가지 원정을 가서 그곳 땅을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전쟁을 수행하면서 상대국의 사람들을 무조건 학살하지 않고 어린아이와 노약자는 살려두되 이스라엘을 대항할 만한 체격을 소유한 자만을 죽이는 등(2절) 나름대로의 원칙을 가지고 정복해 나갔습니다. 특히 다윗은 전쟁을 통해 획득한 전리품 가운데 말(馬)은 최소한 숫자만 남기고 모두 그 발의 힘줄을 끊음으로써 쓸모없게 만들었습니다.(4절) 사실 당시 말은 전쟁을 신속히 수행하기 위해 매우 긴요한 군사력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당시 전쟁은 말의 많고 적음에 따라 승패가 좌우가 된다고 과언이 아닐 정도 말의 중요성은 대단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미련 없이 말들의 발 힘줄을 끊음으로써 말에 의지한 승리를 거부했습니다. 이와 같은 행위는 일찍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의 왕 된 자는 말을 많이 두지 말라”(신 17:16)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순종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은 전쟁의 승패는 말이 많음이나 군사력의 우세력을 달려 있지 않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전쟁은 여호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믿었고(삼상 17:47) 그렇기에 오직 여호와만을 의지하겠노라는 의지의 표시로 말의 힘줄을 끊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좋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자를 하나님은 세상이 흉내 낼 수 없는 풍성한 복과 은혜로 채워주신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신 28:1-68)
잠 3:6에서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범사에 우리로 하여금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인정한다고 말로만 한 것이 아니라 그의 삶 자체가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적인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인생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습니다. 그래서 시115:9-13에서 우리들을 향하여 세 번씩이나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너희 방패시로다" 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제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도 순종하지 않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서 아무리 예배를 드려도 그 예배는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대표적인 실례가 히스기야 왕입니다. 히스기야 왕은 전쟁에서 이기고 난 다음에 실패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함께 하셔서 십팔만 오천 명(185,000)을 하루아침에 멸하시는 은혜를 입었지만, 그가 병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그의 생명이 다시 15년을 연장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병들었을 때에 병문안을 왔던 블레셋 사신들에게 자기나라의 무기고를 열어 보이고 보석창고를 보여주었습니다.(사 39:3-7) 이것이 히스기야 왕의 실수였습니다. 그 모든 것은 나중에 다 바벨론에 뺏기고 맙니다.
시편의 기자는 시편 146편 기자가 3절로 5절에서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찌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사야는 2:22에서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數)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인생을 의지하는 자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승리합니다. 복을 받습니다. 어떠한 상황을 만날지라도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고후 4:8-9에서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 한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윗처럼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함으로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11-12절에서 “다윗왕이 그것도 여호와께 드리되 저가 정복한 모든 나라에서 얻은 은금 곧 아람과 모압과 암몬 자손과 블레셋 사람과 아말렉에게서 얻은것들과 소바 왕 르홉의 아들 하닷에셀에게서 노략한 것과 같이 드리니라 ”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다윗이 전리품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린 것은 승리의 영광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린 것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가는 곳마다 승리하고 수많은 전리품을 획득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사전에는 패배라는 말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처럼 전승 가도를 달리고 있던 다윗이었지만 결코 교만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다윗은 전쟁에서 얻은 수많은 전리품들을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인정하고 그 모두를 하나님께 바치기에 주저하지 않았습니다.(11절) 이 예물은 뒷날 솔로몬 성전 건축에 사용되었습니다.(왕상 6:1-7:51) 아무튼 다윗은 자신의 승리가 자신의 능력이 특출해서 이뤄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후원해 주셨기 때문에 감히 승리할 수 있었음을 고백하였습니다.
다윗은 모든 승리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자신은 단시 그분의 일꾼에 불과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승리했을 때에도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혹시라도 승리할 했을 때에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챘습니까? 우리는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고전 10:31에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정말 다윗과 같이 하나님 앞에 서는 삶을 사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오직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Soli Deo Gloria) 우리는 롬 11:36에서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모든 만물이 주님에게서 나오고(from God), 주로 말미암고(through God), 주에게로 (to God) 돌아간다는 것을 깨닫고 모든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 43:7에서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위하여 지음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마땅히 모든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만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하나님만이 홀로 선하신 분이시며(마 19:17), 또한 우리 안에서 선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착한 행실로 인한 영광은 당연히 사람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벧전 2:12). 사도 바울은 빌 4:20에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토록 영광을 돌릴지어다.”(빌 4:20) 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 삶의 모든 복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므로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자는 교만한 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자는 사단의 미혹을 받아 더 이상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없는 자리까지 떨어질 수 있습니다.
사울이 처음부터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챘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울에게 교만이 들어가자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는 하나님께서 멸하라고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고(삼상 15:18) 결국 하나님 앞에서 버림을 받은 왕으로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사울이 왕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습니까? 그것은 아말렉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은 자신의 지혜와 자기들의 군대의 힘으로 된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사울 왕은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자신에게 돌렸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그는 결국 하나님께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자들의 특징 중에 하나가 자기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한다는 것입니다. 사울 왕에게도 이러한 모습이 아주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을 향하여 “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습니까?”라고 말하니 사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자 전쟁에서 얻은 좋은 소와 어린 양을 하나님께 가지고 왔습니다.”(삼상 15:22-23) 그러나 여러분이 분명히 아셔야 할 것은 이러한 변명을 하나님께서는 다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알게 모르게 범죄할 때가 있고, 혹은 실수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사울 왕처럼 구구하게 변명하지 말고 솔직하게 잘못된 것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끝까지 하나님께 돌려져야 할 영광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려는 행동은 어리석은 행동일 뿐만 아니라 그렇게 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이 자기 자신을 작은 자로 여길 때에는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지만, 사울이 자기 스스로가 크게 여기고 마땅히 돌려야 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고, 하나님의 말씀의 말씀을 불순종할 때에 그를 버리셨습니다. 사울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참으로 분명합니다. 참으로 심각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분명히 알고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기게 하시는 은혜의 복을 체험하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다윗처럼 겸손하게 하나님을 의지할 뿐만 아니라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그러한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같이 우리에게도 이기게 하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는 공의(公義)를 행하는 자에게 이기게 하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15절)
본문 15절에서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려 모든 백성에게 공과 의를 행할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다윗은 공의를 행하였습니다. 다윗은 수많은 정복 전쟁을 통하여 나라를 부흥시켰고 그리함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얼마든지 강화할 수 있었습니다. 그를 대항하거나 그에게 견줄만한 인물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적어도 이 정도가 되면 흔히 세상 통치자들이 그러하듯이 점차 교만해져서 백성들을 우습게 생각하고 자신의 욕심대로 나라를 치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다윗은 주변 나라의 침입으로부터 나라가 안정되자 공과 의를 가지고 나라를 다스려 평안 중에 거하게 하였습니다. 다윗은 공(公)과 의(義)를 모토(motto)로 삼아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여기에서 “공”이란 아무런 사심 없이 ‘미쉬파트’라는 말로 공정한 판단 곧 공평(公平)을 말하고, “의”란 “체다카”라는 말로 정의(正義)를 의미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다윗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규례 곧 율법의 명령 따라 나라를 통치하고 질서를 세워 나갔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시편 45:6,7)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된 언행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은 사사로운 편견(偏見)과 아집(我執)에 사로잡힌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공의로운 통치를 했습니다. 이로 인해서 백성들은 평안하고도 복된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는 지도자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가 선지자는 미가 6:6-8에서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 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공의를 행한다”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삶을 말합니까?
① 한 공동체 안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다른 사람의 권리를 보장해 주는 것까지를 포함합니다.
② 공동체 안에서 약자를 배려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연약한 부분을 먼저 살피는 것입니다.
③ 공의를 실천하는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위하지 않습니다. 공의를 행하는 사람은 자신의 편의를 위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위하지 않습니다. 공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동방향을 결정합니다.
④ 요즘 사회에서는 공의를 위해서 살면 손해를 본다고 생각합니다. 눈앞에 있는 물질과 눈 뒤에 있는 하나님을 맞바꾸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공의를 행하는 눈앞에 있는 물질을 위해서 살지 않고 뒤에서 계시는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⑤ 구원은 믿음으로 받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구원을 받았으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걸어가야 할 길을 걸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진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믿는 사람들에게서 공의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을 증거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복음을 증거 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공의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정말 아모스 선지자가 암 5:24에서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지로다”라고 탄식하며 슬퍼하였던 것처럼 그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지금은 어느 때보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공법과 정의 곧 공의를 드러내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이 땅에 많은 그리스도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있는 이 땅은 점점 썩어지고 있고, 타락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말세의 현상 중에 하나입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세상이 썩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라브리 선교회의 설립자인 프란시스 쉐이퍼 박사가 “어떤 종교이든지 그 사회에 10% 이상이 되면 그 사회를 책임져야 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이제 그리스도인이 이 사회를 책임져야 합니다. 이것을 말로만이 아니라, 이는 구호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영역 속에서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 하나님의 공의를 온전히 드러낼 때에 가능하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지금은 이 시대는 패역한 시대이지만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행하였던 예레미야를 찾으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렘5:1) 어쩌면 이 시대는 예레미야 시대를 방불할 정도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여기지 않고, 온갖 부도덕과 비리와 뇌물이 팽배해 있는 시대이고, 우리나라의 청소년 흡연율이 세계에서 1위라는 사실은 듣기만 해도 답답하고 어두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의 공의를 행하는 의인(義人) 열 사람만 있으면 결코 이 민족을 버리지 않을 줄 믿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이러한 의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공의를 밝히 드러내었던 칼빈과 루터와 같은 인물이 나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공의로운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공의로운 삶을 살지 아니하는 인생은 결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없음을 거듭 거듭 명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윗이 모든 백성을 통치함에 있어서 결코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이 공의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철저히 하나님의 중심의 삶을 살을 때에 가능했던 것처럼 만약 여러분 중에 공의를 실천하기 원하신다면 철저히 하나님 말씀 중심의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좇아 한점 부끄럼이 없이 살 때에 공의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단과의 영적 전쟁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님의 공의(公義)가 무기가 되지 않기 때문에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같이 공과 의를 따라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면 다윗에게 이기게 하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은혜를 베풀어 주실 줄 믿습니다.
잠 3:6에서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며 살되 이기게 하시는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시 121:1-2절과 시 124:8에서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라고 찬양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결코 승리할 수 없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시편 127:1-2에서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너희가 일찌기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라고 찬양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지키심을 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 앞에서 공의로운 삶을 살았던 원동력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성경은 이에 대해서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살았음을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삶이 하나님의 면전에서 사는 삶입니다. 삼하 5:23에서 계속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다윗은 기도 중심의 삶 곧 모든 범사를 하나님께 물어보았습니다. 삼하 6:15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다윗은 법궤 중심의 생활을 하였습니다. 삼하 7:18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성전 중심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러한 다윗이었기에 다윗은 모든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면서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삶이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인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의 성공과 번영의 관건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처세술이 뛰어나고, 수완이 좋거나, 머리가 남들보다 뛰어난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아니하면 우리는 결코 승리의 인생의 살 수 없습니다. 설혹 승리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일시적인 승리일 뿐이고, 그러한 승리를 가지고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으로 성공하고 영원히 번영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좇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눈속임이나 편법이 아닌 공과 의를 삶의 모토를 삼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삶의 목적을 우리 자신의 안일과 영예에 두지 않고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영광에 두고서 살아야 합니다. 모든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면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윗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공과 의를 행했던 것처럼 우리들도 공의를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모스 선지자의 탄식을 기억하면서 이 땅에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리게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베풀어 주신 이기게 하시는 은혜를 우리에게 부어 주실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약 여러분 중에 성공적인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여러분 중에 승리하는 삶을 살기 원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시고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공의로운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이기게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통하여 영육 간에 승리하는 인생을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한국교회 부흥설교 설교 정보수집 편집위원 협조와 추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