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써 하나님을 알아가는 사람들  (호 6:1~6)


먼저 여러분에게 한 가지의 질문을 하겠습니다.“여러분은 하루하루의 삶에 만족하십니까? 아니면 불만입니까?”하루하루가 즐겁고 만족하다면 그 사람은 삶을 누리는 것이지만 혹시라도 하루하루가 불만인 사람에게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생존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생존이냐? 삶이냐?>하는 것은 인간 실존의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 둘은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합니다. 참 인간다운 생이란 이 세상에 단순히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여자 분들이 이런 불평을 합니다.“나는 내 시간이란 걸 가져 본적이 없다. 아이들과 남편 뒤치다꺼리하느라고 아무리 일해도 항상 손이 모자라 그리고 한 푼이라도 더 모으려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돈버는 기계로 살아가는 것이 지겨워 때때로 도망치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야”이런 불평을 듣고 있노라면 달리 해줄 말이 궁색합니다. 그래서 기껏 해 줄 수 있는 말이라고는“사는 것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죽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으로 살아라.”는 대답을 합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들이 살아가는 현실의 대표적이고도 솔직한 모습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대화를 가만히 분석해 보면 우리의 일상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무하고 무의미한 것인가를 발견하게 되는데 슬프게도 여기에는 생존만 있지 인간으로서의 삶의 모습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은 시간들을 허락하십니다. 그 주어진 시간이 곧 인생이요, 삶입니다. 그런데 그 시간을 잘 관리하는 사람은<삶을 살아나가는 사람>이지만 잘못 관리하는 사람은<생존하는데 급급한 사람들>입니다. 인생은 시간 관리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삶에 대한  철학은 오직하나입니다. 무엇인지 아십니까?<젊었을 때 열심히 일해서 벌고 늙어서 즐기자>입니다. 보편적이고도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젊어서 일할 때든지 늙어서 즐길 때든지 그때마다에 맞는 시간 관리가 있어야합니다. 그런데 이것은<생존을 위한 프로그램>이 아니라<인간다운 삶을 위한 프로그램>이어야합니다. 그런데 젊었을 때는 열심히 일만하자는 철학 속에는 오직<생존의 프로그램>만 있습니다. 그래서 젊어서 예수를 믿고 신앙 생활하는데 것은 배부르고 편한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치부합니다. 주일날 한가하게 교회나 나가는 일은 나중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입으로는 교인이라고 하면서도 한 살이라도 젊고 힘이 있을 때 일해야한다고 신앙생활을 등한시 하는 교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젊을 때 돈벌어놓고 늘그막에 예수 믿고 신앙생활해도 괜찮다고 스스로 묵인합니다. 그리고 더 심각한 문제는 주위에서 부모도, 형제도 다 그 일에 동의합니다만 보세요, 젊은 날 아무것도 돌아보지 않고 열심히 일합니다. 주일도 쉬지 않고 하루라도 더 벌어서 좀 있다가 잘 믿겠노라합니다만 그런데 젊음이 채 가기도 전에, 즐기리라고 기다리던 그 나중이 오기도 전에 덜컥 죽을병이 걸려 누웠습니다. 젊었을 때부터 예수라도 잘 믿었더라면 아무리 바쁜 일상이지만 삶의 가치나 알았겠고, 신앙생활 하는 동안 거저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삶이라도 살았으련만 나중에나중에 하다가 이제야말로 가치 있는 삶은 차치하고라도 생존이라도 하는 것 이상 소원이 없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시겠습니까? 목숨이라도 연명하는 것이 생존이요, 사람답게 살아보는 것이 삶이라고 한다면<생존이냐? 삶이냐?>하는 것을 미리 생각했어야 했단 말입니다. 생존이 계속 이 땅에 머물러 있는 것을 의미한다면 삶이라고 하는 것은 힘과 에너지가 충만한 것을 의미합니다.<생존하는 것>이 내가 무언가를 할 수없어 거저 받아만 들이는 수동적인 것이라면<삶을 사는 것>은 내가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능동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단지 생존할 뿐인 사람은 아무 일이라도 자기에게 일어나 주기를 바라는 사람이지만 삶을 사는 사람은 자신을 위하여 일이 일어나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생존이냐? 삶이냐?>의 차이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 시간을 내가 어떻게 관리하느냐 입니다.

[조 베리(Jo Berry)]라는 사람이 쓴<그리스도인의 삶과 시간관리>라는 책에 이 주제를 다루어 놓았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우리가 숨쉬고 있다는 것이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삶의 관리에 대한 중요한 요소들을 8가지로 정리하고 있는데

그 첫 번째 요소가<선택>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늘 하던 대로 하고자하는 습관이 있다고 합니다. 늘 하던 일, 늘 가던 곳, 시장 보던 곳에서 시장보고... 항상 해왔던 것 외에 다른 것에 대한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택의 자유를 묻어 두지 말고 잘 사용하는 것이 삶을 관리하는 방법이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 요소는<변화>라고 했습니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고 변화를 즐기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자라서 성인 되고 씨앗은 자라서 열매가 됩니다. 이런 변화에 대해 민감하지 못하고 수용하지 못한다면 삶은 관리 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삶의 관리에 있어서 세 번째 중요한 면은<통제>입니다. 자신의 삶을 자신이 책임지고 자신이 내린 결정은 스스로 다룰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는<경영>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놓고 되는 대로 살지 말고 분석하고, 조직하고, 감독하는 경영적 차원에서 삶을 관리하라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요소는<유연성>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융통성이라는 말로 대신할 수도 있습니다. 스케줄이라고 하는 것은 매일 매 순간마다 정확히 지켜져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항상 일부분은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서 충분한 탄력성을 가지고 살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 삶을 관리하는 여섯 번째 활력적인 요소는<즐거움>이라고 말합니다. 특히 양반문화에 오랫동안 젖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매사를 너무 심각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신앙생활도 아주 심각하게 합니다. 너무 무거워요. 너무 실실 웃는 것도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만 그러나 웃음은 본능적인 것입니다. 사람은 울고 싶을 때는 울어야하고 우스울 때는 웃어야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서를 읽으면서 한 가지 불만이 있습니다. 왜 예수님이 우신 일은 기록하면서 예수님이 웃으셨다는 기록은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웃음은 눈물만큼 본능적인 것이기에 분명히 예수님께서 기뻐하신 적도 있고 웃기도 하셨을 텐데‘그 좀 적어서 기록으로 남겨 놓으면 안 되나?’하는 개인적인 불만입니다. 아무튼 웃음과 즐거움은 삶의 활력소가 됩니다.

삶을 잘 관리하는 일곱 번째 요소는<자기 자신에 대한 지식>입니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 정직하고 균형 있는 이해가 있고서야 행복해 질수도 있고 온전해 질수도 있는 것입니다. 강함이 있으면 약함이 있고, 장점이 있으면 단점이 있다는 이 둘 다 아는데 실패하면 곧 삶에 실패하는 것입니다.

자, 삶의 관리에서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을[조 베리]는<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밝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더 우리를 잘 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육체적, 정서적 능력과 한계와 감정과 성품까지도 완벽하게 알고 계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 내 인생의 삶을 관리하는 최고의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곧 나를 아는 길이며 세상을 아는 길이 되고 따라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아는 길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특히 나를 알고 내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문제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성경의 말씀도 결론적인 삶의 목적을 말합니다.“힘써 여호와를 알자”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존 칼빈(John Calvin)]은“자기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고 또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자기에 대한 지식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곧 자기를 아는 것이요 자기를 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안다는 것, 이 두 가지 지식은 결코 따로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지식은 근심을 더해 갈 것이며 하나님 없이 얻은 물질은 자신을 멸망케 할 것이고 하나님 없이 가진 권력은 자기와 백성을 다 절망의 수렁으로 몰아넣는 요인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아야합니다. 여기에 내 문제의 해결도 있고, 다른 사람의 문제에 대한 해결도 있고, 세계문제에 대한 해결도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어떠한 분으로 알아야합니까? 여러 가지 면에서 알아야 할 것이지만 오늘 본문 속에 나타나는 결론적인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가 힘써 알아야 할 하나님은 무서운 하나님인 동시에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입니다. 본문을 보시면 하나님은 두려운 하나님입니다. 무섭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때리시며 찢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이유 없이 두렵거나 무서운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불의를 미워하시며 거짓을 싫어하셔서 벌하시는 분입니다. 불의하고 가증한 자의 제사를 거절하시며 외식하는 자의 예배를 물리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앞에 불 신앙적으로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힘써 알아야 할 하나님은 이런 것을 아주 싫어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젊었을 때는 일만하고 늙어서야 잘 믿어보리라는 생각이 있으면 버리시기 바랍니다. 내 이웃이, 내 가족이, 내 자녀가 이런 불신앙에 빠져 있다면 속히 돌이켜 힘써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아는 것, 경외 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입니다. 즉 경건이 하나님을 아는 지름길입니다.
동시에 우리가 힘써 알아야 할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오늘 말씀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찢으시는 분이시지만 다시 낫게 하시는 분이요, 우리를 치시지만 싸매어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바로 아는 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총을 이른 비와 늦은 비로 나타내고 있습니다.<이른 비>라고 하면 내 뜻대로 되며 내가 계획한 시간 앞에 내가 기대하는 대로 형통케 되는 은총을 말합니다. 가끔씩은 감사하게도 생각한 대로 이루어지고 원하는 것이 되어질 때가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이른 비의 은총이 뜻하는 바입니다. 그러나<늦은 비>라고 하는 것은 나의 뜻과는 달리 내가 생각하는 계획이나 내가 원하는 시간 안에서 되어지지 않는 은총을 뜻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내가 이제는 끝났다고 손을 들 때에 하나님은 역사하시고 내가 할 수 없다고 포기하는 바로 그때에 늦은 비의 은혜를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들이 내 뜻대로 되어야만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하나님은 이 세상을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사랑하십니다. 이 사랑 안에서 세상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얼마나 오랫동안 신앙생활 하셨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을 얼마나 압니까? 주어진 시간들에 만족하고 행복해야할 우리가 결코 행복하지 못하는 문제의 근본은 없어서도 아닙니다. 몰라서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힘써서 여호와를 알 때 생명의 길, 소망의 길, 행복의 길이 열릴 것입니다

출처/김철현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