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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공교회 (엡4:1-6)
사람들은 누구나 그가 몸담고 살아갈 참된 공동체에 대한 목마름이 있습니다. 특별히 기독교인의 경우 이상적인 교회에 대한 목마름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이상적인 교회 공동체를 찾기 위해 방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서 찾고 있는 이상적인 공동체나 교회를 발견하기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마도 평생 그러한 공동체를 만나지 못할 지도 모릅니다.
오랜 기간 스위스 보세이 인스티튜트에서 성서연구원으로 일했던 수잔 데 디트리히(Suzanne De Dietrich) 여사는 그의 "증거하는 공동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현대인은 웅성거리며 복잡한 세계에서 살고 있지만 이보다 더 고독한 삶도 일찍이 없었다. 가족이나 사회 공동체 모두가 구심력을 잃고 원심력에 의해 각자 뿔뿔이 흩어져 정신생활이 날로 공허해가고 있다. 오늘날 어디서든지 사람들은 '공동체'에 굶주리고 목말라 있다.
그러나 과연 공동체란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치 않다. 오늘날 교회의 사명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 전정한 공동체가 어떤 것인지를 사회에 보여주는 일이라 하겠다.
지금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소명과 책임을 끊임없이 요청받고 있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선발된 공동체요 증거의 공동체로서 이 세상으로 다시 파송 받는 하나님의 사람들인 것이다."
사도신경의 교회에 대한 명제는 바로 공동체와 관련된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우리가 찾고 있는 그러한 이상적인 공동체가 바로 이 세상에 있는 교회이니 교회를 믿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도신경에서 말하는 것은 참된 공동체로서 지향해야할 방향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에서 제시하는 참된 교회 공동체는 "거룩한 공교회-거룩한 보편적 교회"입니다. 거룩하고, 보편적이란 교회의 본질을 규정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대한 고백을 할 때에는 현재 세속화 되어있고, 분열이 극심한 현실의 교회를 바라보며 충성을 다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고백은 하나님의 구원사에서 성령의 능력 가운데 있는 거룩하고, 보편적 교회를 희망 가운데서 바라보며 고백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신경의 교회에 대한 고백을 할 때마다 하나님의 부르심 가운데 있는 교회로 나아가고자 하는 새로운 다짐이 있게 됩니다. 이 고백은 우리가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사교 집단과 같은 수준에 안주하려는 유혹을 뿌리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적극적으로 응답해 가고자 하는 결의를 새롭게 하게 됩니다.
교회의 본질은 거룩성과 보편성에 있습니다. 교회가 이것을 망각해 버린다면 그 때 교회의 생명은 끝나게 됩니다. 거룩이라 할 때 그 의미를 교인들의 삶의 질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의 문화적 전통에서 이 거룩은 점잖음, 윤리적 완전성으로 이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신경에서 거룩은 그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거룩한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에 의해서 부름 받았고, 현재 부름 받고 있는, 하나님께 속해 있는 무리들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한 무리들에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존재 과제가 있습니다. 교회에는 이 세상에서 그를 부르신 분의 부름에 어떻게 반영하며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존재 과제가 있습니다. 얼마만큼 이 과제를 신실하게 바르게 파악해서 자기 자신을 표현하느냐에 따라 거룩한 교회로 되어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 과제가 수행되기 위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부름 받은 자들 가운데는 그의 삶을 거룩하게 하기 위한 끊임없는 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 운동은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거룩한 교회 공동체가 지향해 나아가야 할 방향은 보편성입니다. 보편성은 종족, 계급, 지역을 초월해서 전 세계적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그리고 인간의 모든 이기적인 분리주의를 타파하고 일치를 추구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존재 방식이 교회의 보편성입니다.
16세기 종교개혁 후에 카톨릭 교회를 '기독교 교회'(Christian Church)로 바꾸지 않고 계속해서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교회가 가지고 있는 본질인 보편성 때문입니다. 카톨릭이란 말 자체가 '보편적' 이라는 뜻입니다. 사도들의 사명 자체가 보편성을 갖고 있습니다. 사도를 세상에 보내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시며,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교회가 가지고 있는 사도적 특성은 시대에 따라서 그 본질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계속 계승되어야 합니다.
기독교 전 역사를 통해 교회가 지금까지 몸부림 치면서 고민해온 문제는 보편성의 문제입니다. 그것은 자기 형체와 일치의 문제 였습니다. 자기 시대에서 어떻게 자신의 존재 방식을 표현하며, 어떻게 서로 다른 존재 방식 가운데서도 분열하지 않고 일치를 이룰 수 있는가 라는 문제는 교회가 갖고 있는 가장 큰 과제입니다.
교회의 거룩성과 보편성에 관련된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주일에 남아공화국에 있는 어떤 교회에 오직 백인만 예배에 참석할 수 있는 교회에 흑인이 들어갈려고 했습니다. 그 때 흑인이란 이유로 거절당했습니다. 그는 교회 뜰 한 구석에 앉아 있었습니다.
얼마 있다가 어떤 사람이 교회 마당에서 서성대고 있었습니다. 흑인이 그 사람을 자세히 보니 예수님이었습니다.
'아니 예수님, 왜 예배에 참석하지 않고 밖에 서 계십니까?' 라고 흑인이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나도 백인이 아니어서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고 했습니다.
교회가 거룩성과 보편성을 포기해 버릴 때 거기에는 예수님도 역시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경고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이 진실되고 참된 것이 되려면, 교회는 자기 시대에서 언제나 인간의 이기심, 분열과 맞서 싸우고, 정의와 평화를 인류 전체의 목표로 지향해 갈 때입니다.
그러면 거룩하고 보편적인 교회가 되게 하는 그 본질적 요소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배입니다. 여기서 예배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물은 종의 삶으로 표현되는 디아코니아(diakonia),즉 봉사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길입니다. 거룩한 교회의 길은 그리스도와 일치 이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언제나 잊지 않아야 할 것은 우리의 "산 제사"는 "영적인 예배" 가운데서 드려져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회개, 묵상을 통한 의식과 가치 및 행동의 철저한 변화와 영감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봉사의 삶에는 영적 고갈과 자신의 의를 드러내고자 하는 육적인 욕망이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언제인가 여러분들에게 소개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불란서에 장 바니에라는 사람에 의해 설립된 "악슈"라는 정신 장애인을 위한 공동체 마을이 있습니다. 그 곳은 장애인을 집단적으로 수용하는 시설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헌신자들과 장애인들이 몇 명씩 가정을 이루어 살아가는 공동체 마을입니다. 헌신자들은 그러한 삶을 동해서 그리스도를 섬기고 따르는 삶을 배우고, 장애인들은 그들을 통해 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알아가게 됩니다. 그 곳에는 신분의 차별이나 종족의 차별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공동체 한 가운데에는 조그마한 채플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헌신자들이나 장애자들이 무시로 들어가서 조용히 말씀을 묵상하며 영적 재충전을 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헌신의 삶에 파고드는 무의미성과 영적 고갈, 인간적인 욕망을 극복하기 위해서 입니다. 저는 그러한 모형의 공동체를 보면서 거룩한, 보편적인 교회 공동체 상을 상상해볼 수 있었습니다.
로흐만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도신경의 의미에서 교회는 자기 목적이 아니다. 교회는 자신에 만족하고, 자신에게만 관심을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는 예배의 프락시스 (praxis)에서 존재한다. 예배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봉사를 하나님과 세계를 위한 기독교의 봉사를 의미한다. 이 두 의미에서 교회는 결코 교회 중심적으로 떨어질 수 없는 포괄적인 지평으로 내세워진다. 교회는 처음부터 외향적인 공동체이다. 그렇지 않으면 참된 교회일 수 없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의 예배는 지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 가장 절실한 것, 가장 영광스러운 것이다. 예배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인간의 업적이 아니다. 성령의 일이고 신앙의 행위이다."라고 했습니다.
거룩하고 보편적인 교회가 지향해 가는 목표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그가 선포하신 것도 역시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보다 위에 있습니다. 교회 그 자체가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교회가 잘못을 범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을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 할 때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기독교인들의 나라가 아닙니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전망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행동하고 고난을 받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의 미래며 교회의 미래는 세상의 미래이기 때문에 교회는 이 세상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 안에서 새로운 인류의 시작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미래에서 그 운명이 규정지어진 무리들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자들의 공동체로서 시간과 공간의 제한 가운데 있습니다.
이러한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교회는 세상에 있는 동안 어떤 제도나 규칙을 절대화 해서는 안됩니다. 이 세상에서 교회의 표준은 언제나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빛 가운데서 자신을 비춰봐야 합니다. 그 가운데서 교회는 모든 세상적이며, 인간적인 얽매임과 굴레를 벗어버리고 자유의 영역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지평에 서 있는 교회는 그 어느 순간도 이만하면 되었다고 자족할 수 있는 순간은 없습니다. 언제나 최선을 다한 후 "무익한 종"이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자주 파선 사고가 일어나고 있는 어느 위험한 해안에 한때 볼품없는 작은 인명 구조대가 있었습니다. 건물이라곤 오두막 한 채뿐이었고 보트도 작은 것이 하나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헌신적인 몇 명의 회원들이 끊임없이 바다를 지켰고, 그들은 자신에 대한 생각은 전혀 하지 않은 채 밤낮으로 바다에 나가 유실된 자들을 찾아 다녔습니다. 많은 생명들이 이 훌륭한 작은 구조대에 의해 구조되었으며 그래서 이 본부는 유명해졌습니다.
구조된 자들 중 몇 사람과 또한 인근지역에 사는 여러 사람들은 이 구조대와 연관을 맺고 이 사업을 뒷받침하기 위해 그들의 시간과 돈을 제공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보트들을 더 구입했고 새로운 승무원들을 더 훈련시켰습니다. 작은 구조대가 점점 더 커지게 되었습니다.
인명 구조대에 가입한 새 회원들 중 어떤 사람들은 건물이 너무 볼품없고 시설이 빈약하다고 불만을 토로하였습니다. 그들은 바다로부터 구조된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기 위해서라도 좀더 편안한 장소가 마련돼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비상용 간이 침대를 훌륭한 침대로 갈아치우고 확장된 건물 안에 좀더 훌륭한 가구들을 갖다 놓았습니다. 이제 그 구조대는 그 회원들을 위한 대중적인 회합 장소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곳을 일종의 클럽처럼 사용했기 때문에 그곳을 아름답게 다시 치장했고 멋있게 꾸며 놓았습니다. 이제 회원들은 인명을 구조하는 임무를 위해 바다에 나가는 일에는 점점 관심을 잃게 되었고, 그래서 그들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인명 구조원들을 새로 채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인명 구조의 주제는 여전히 클럽 장식들 가운데서 돋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클럽 가입식이 거행되는 방에는 여전히 예식을 위한 구조선이 있었습니다.
---그 다음 회합 때, 클럽 회원들 가운데서 불화가 생겼습니다. 대부분의 회원들은 클럽의 인명구조 활동이 별로 즐거운 일이 아닌데다가 클럽의 정상적인 생활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여 구조 활동을 그만두기를 원했습니다. 어떤 회원들은 인명 구조야말로 그들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라고 하면서 계속 인명 구조대라고 불리워야 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들은 투표 결과 결국 패배했으며, 만일 그들이 그 지역에서 조난 당한 사람들의 생명을 구조하기 원한다면 아래편 해안에서 그들 나름의 인명 구조대를 새로 세울 수 있다고 통보 받았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하였습니다.
여러 해가 지나면서, 새로 생긴 이 인명 구조대는 옛날 구조대가 겪었던 똑같은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 구조대는 일종의 클럽으로 발전해 버렸고 그래서 또 다른 인명 구조대가 새로 생기게 되었습니다. 역사는 계속 반복되었으며, 만약 우리가 오늘날 그 해안을 방문한다면, 우리는 그 해안에 서로 배타적인 수많은 클럽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 바다에서는 여전히 파선 사고가 자주 일어나고 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대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데오도레 위델(Theodore Wedel)이 현대 교회의 실상을 비유로 설명한 것입니다. 이 비유의 요점은 봉사가 없는 교회의 모순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교회는 봉사를 위해 부름받았습니다. 그것이 교회의 "거룩"이며 축복의 근원이 되기 위해 축복 받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성령의 첫 걸음 지며, 성령의 종착지점은 아닙니다." "우리는 교회를 믿는다고 계속해서 말하지 않고서는 성령에 관해서 말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교회를 성령의 역사로서 전적으로 정립하려 하지 않고서는 교회에 대해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교회는 거룩한, 보편적인 교회입니다. 그 교회를 움직이는 힘의 원동력은 성령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 가운데 있는 교회를 믿습니다. 성령의 능력 가운데 있는 교회는 세상에서 하나님과 세상을 위해 봉사하는 교회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대해 희망을 갖습니다. 우리의 희망은 교회의 크기, 재정의 풍부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희망은 거룩한, 보편적인 교회에 대한 희망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교회가 세상에서 그의 거룩성과 보편성을 지켜갈 것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오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 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아-멘
출처/임영수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