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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지식 (빌립보서 3:4-12)
얼마 전에 국민일보에서 감동적인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한 방송사의 아나운서요, 보도국장을 하던 사람이 미국 특파원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신학 공부를 시작하여 한인교회 전도사로 일하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보통 뒤늦게 신학교에 들어가는 사람들 중에는 세상에서 실패한 이들이 많습니다. 소위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이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주의 길을 가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현재 우리 나라에서 신문사 기자나, 방송국 PD라고 하면 젊은이들이 가장 선호하는 직업 가운데 하나입니다. 게다가 보도국장이라는 자리는 '방송사의 꽃'이라고도 불립니다. 그런데 이처럼 안정적이고 인정받는 자리를 버리고, 한인 교회 전도사로부터 출발하였다는 것은 가히 파격적인 일입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 보기엔 어리석은 일인지도 모르집니다. 그러나 분명 그는 예전보다 더 값진 것을 찾았다는 설레임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이러한 파격적인 변화와 설레임을 고백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바로 바울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빌립보 교회 교인들은 인간적인 자랑거리를 가지고 다른 이들을 업신여기며 갈등을 빚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빌립보 교인들을 향하여 편지를 쓰면서, 세상의 자랑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 자신도 그러한 경험을 했기 때문에, 빌립보 교인들의 그러한 처사가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향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라고 힘주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우리가 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누구나 성공하고 싶어합니다. 사업에도 성공하고, 결혼에도 성공하고, 자녀교육도 성공하고,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성공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나, 자기 자신으로부터 '성공했다'는 평가를 듣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무엇을 성공으로 여기는가 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많이 가지고, 많이 누리는 것을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성공여부를 판단할 때, 안정된 직장을 갖고 있는지, 집은 몇 평인지, 승용차 배기량은 몇 cc 인지를 따집니다.
우리나라에서 그러한 성공을 얻기 위해서는 좋은 대학을 나와야 합니다. 좋은 대학에 가려면 공부를 잘해야 하는 건 당연합니다. 그래서 많은 부모들이 자녀의 성공적인 삶을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습니다. 통계에 따르면 우리 나라 초등학생 10명 중 9명은 학원과외를 받고 있으며, 하루 3시간도 못쉬는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한국 청소년 운동 연합회와 한길리서치 연구소가 서울과 수도권 지역 초등학교 4-6학년 생 871명을 대상으로 "어린이 의식 및 실태 조사"를 실시했습니다. 그 결과 대상자의 88.1%가 학원에서 공부하고 있으며, 평균 3.54개를 수학하고 있으며, 평균 2.82개 과목의 학습지를 공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어려서부터 공부에 시달리는 것은 학문적 성과를 기대해서가 아니라, 다만 좋은 대학에 들어가 성공하겠다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은 물질적주의적이고 세속주의적인 가치관을 반영할 뿐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처럼 왜곡되고 편향된 성공을 갈망하고 그 길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 길에서 강조되는 것은 생산성과 효율성입니다. 남들보다 얼마나 더 높은 점수를 받아서, 더 좋은 대학에 들어가느냐 하는 것이 관심의 초점입니다. 인간관계도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수단일 뿐이지 진정한 만남이나 대화는 오히려 성가신 일이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신앙은 귀찮은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모두들 남들보다 성공해서 행복한 삶을 누리려고 인간관계도, 신앙생활도 희생해 왔습니다. 성공하기 위한 경쟁만 강조되고, 신뢰와 배려는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진정한 대화도 단절되어 버렸습니다. 결국 이로 인해 개인과 가정이 위기에 몰리게 되었고 이혼가정과 불륜가정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울 또한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스스로에 대해 고백하기를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5절)라고 했습니다.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라고 한 것은, 유아세례를 받았다는 말인데, 자기 집안이 그만큼 뿌리깊은 유대교 신앙을 간직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족속"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선민의식을 대변하는 말입니다. "베냐민 지파"는 사울왕의 후손으로써, 비롯 작은 지파였지만 대단한 가문이었습니다.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란 이방인의 피가 전혀 섞이지 않은 순수한 히브리인을 일컫는 말입니다. 혈통은 물론 히브리말과 히브리 관습을 그대로 보존한 순수한 히브리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또한 그는 바리새인으로써 엄격하게 율법을 준수하였고, 그 당시 가장 존경받는 가말리엘의 제자로써 최고의 학문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뿐만아니라 그는 관원이기도 했습니다. 세상 적인 눈으로 봤을 때, 바울은 완전히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추구하는 성공이 혹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이러한 '사울'의 모습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새롭게 변화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바울이 배설물 같다고 버린 것을 찾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일 세상적인 성공을 가치있는 것으로 여기고,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고 하면 아직 우리는 바울이 아닌 사울의 모습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변화된 바울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러고 여러분의 신앙이 그런 바울과 같은 신앙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우리가 꼭 찾을 것이 있습니다.
바울로 변화되기 전 '사울'은 자신을 뒷받침해주고 있는 유대교적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그 가치체계 속에서 자신은 성공한 자요, 인정받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가치체계를 흔들고 있는 예수 믿는 이들을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바울은 대제사장으로부터 예수 믿는 자들을 체포할 권세를 가지고 다메섹까지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그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일은 바울에게 있어서 큰 충격이었습니다. 자신이 그동안 핍박하던 '예수'가 죽음에서 부활하셨고, 진정한 구주가 되신다는 사실은, 그가 추구하던 가치를 완전히 뒤집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확실한 체험을 통해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진리를 발견한 바울은, 예전에 그가 가졌던 세상적인 가치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 3:8-9)
우리가 바울처럼 돈과 명예와 권력을 다 버릴 수가 있습니까? 그것 때문에 부모자식 간에도, 형제지간에도, 친구 간에도 다툼이 끊이지 않고 있는데, 그것을 배설물로 버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것을 단행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세상의 좋은 것들 보다 고상하고 가치 있는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세상적인 것은 거추장스럽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것을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긴다고 한 것입니다.
영국 왕립연구소 교수이며 전기분해의 탁월한 이론가인 험프리 데이 비 박사(1778-1829)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정신력, 천재성, 권력, 재물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나에게 가장 귀한 것을 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택할 것이다. 믿음은 인생의 선을 훈련시키며, 희망이 쇠할 때 새로운 희망을 주고, 삶과 죽음을 일깨워주며, 굴욕과 수치를 천국으로 향하는 사다리가 되게 하고, 영원한 기쁨을 준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이 세상의 자랑이나 명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곧 우리의 구원입니다. 그것은 시험성적이나 돈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얻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
3. 우리는 하늘의 상급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과거 러시아의 수도인 페체르부르크에 한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그 노인에게 “당신의 평생 소원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면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매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 인생의 목표는 아주 좋은 고급 외투를 갖는 것이오.” 그 노인은 인생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평생 동안 일하고 저축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80 루블의 돈을 저축하여 꿈에 그리던 그 외투를 샀습니다. 그 날은 그 노인에게 성공한 날이자 목적을 이룬 날이었기에 큰 기대감과 흥분된 마음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외투를 사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그만 강도를 만나서 비싼 고급 외투를 강탈당했습니다. 그 노인은 매우 절망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고급 외투를 강탈당해서가 아니라, 그의 성공을 강탈당하고, 그의 행복을 강탈당했기 때문입니다. 그 날 이후 그 노인은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고골리'라는 러시아 작가가 쓴 「외투」라는 단편소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노인의 목표로 삼은 '고급 외투'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목표로 삼는 좋은 아파트, 고급 승용차, 사회에서의 높은 자리 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유에 대한 갈망에 대해, 필립 존슨의 시는 이렇게 말합니다.
"돈으로 옷을 살 수 있어도 인격을 살 수는 없으며
돈으로 집은 살 수 있어도 가정은 살 수 없다.
돈으로 약은 살 수 있어도 건강과 생명은 살 수 없다.
돈으로 사람을 살 수 있어도 사랑과 우정을 살 수 없다.
돈으로 오락은 살 수 있어도 기쁨과 행복은 살 수 없다.
돈으로 침대는 살 수 있어도 단잠을 살 수 없다."
우리가 잘 아는 에리히 프롬이라는 심리학자는 "행복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소유가 결코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계속 속으며 살고 있습니다. 만일 이대로 살다가,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면, 우리는 바울이 말한 '배설물'만 가지고 서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도저히 하나님 앞에 얼굴을 들고 서 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보다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로므로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면서 주의 일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하늘의 상급을 목표로 삼고 달려가야 합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 가노라"(빌 3:14). 마라톤 선수들이 극한 고통을 참고 인내하면서 끝까지 목적점을 향해서 달리는 것도 바로 경기 후에 있을 상급을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금메달은 그가 죽으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하늘의 상급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 영원한 상을 위해 우리는 끝까지 참고 나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같은 항아리라도 거기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고추장 항아리가 되기도 하고, 된장 항아리가 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사람은 무엇을 바라보고 사느냐에 따라 땅에 속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하늘에 속한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분의 가르침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적인 성공을 좇아 살아가지 않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을 어리석다고 할지 모르지만, 여기에 참된 성공의 길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그 길을 걸어가는 자는,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고후 6:10)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모두 이 성공의 길로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출처/전병금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얼마 전에 국민일보에서 감동적인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한 방송사의 아나운서요, 보도국장을 하던 사람이 미국 특파원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신학 공부를 시작하여 한인교회 전도사로 일하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보통 뒤늦게 신학교에 들어가는 사람들 중에는 세상에서 실패한 이들이 많습니다. 소위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이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주의 길을 가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현재 우리 나라에서 신문사 기자나, 방송국 PD라고 하면 젊은이들이 가장 선호하는 직업 가운데 하나입니다. 게다가 보도국장이라는 자리는 '방송사의 꽃'이라고도 불립니다. 그런데 이처럼 안정적이고 인정받는 자리를 버리고, 한인 교회 전도사로부터 출발하였다는 것은 가히 파격적인 일입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 보기엔 어리석은 일인지도 모르집니다. 그러나 분명 그는 예전보다 더 값진 것을 찾았다는 설레임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이러한 파격적인 변화와 설레임을 고백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바로 바울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빌립보 교회 교인들은 인간적인 자랑거리를 가지고 다른 이들을 업신여기며 갈등을 빚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빌립보 교인들을 향하여 편지를 쓰면서, 세상의 자랑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 자신도 그러한 경험을 했기 때문에, 빌립보 교인들의 그러한 처사가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향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라고 힘주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우리가 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누구나 성공하고 싶어합니다. 사업에도 성공하고, 결혼에도 성공하고, 자녀교육도 성공하고,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성공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나, 자기 자신으로부터 '성공했다'는 평가를 듣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무엇을 성공으로 여기는가 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많이 가지고, 많이 누리는 것을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성공여부를 판단할 때, 안정된 직장을 갖고 있는지, 집은 몇 평인지, 승용차 배기량은 몇 cc 인지를 따집니다.
우리나라에서 그러한 성공을 얻기 위해서는 좋은 대학을 나와야 합니다. 좋은 대학에 가려면 공부를 잘해야 하는 건 당연합니다. 그래서 많은 부모들이 자녀의 성공적인 삶을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습니다. 통계에 따르면 우리 나라 초등학생 10명 중 9명은 학원과외를 받고 있으며, 하루 3시간도 못쉬는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한국 청소년 운동 연합회와 한길리서치 연구소가 서울과 수도권 지역 초등학교 4-6학년 생 871명을 대상으로 "어린이 의식 및 실태 조사"를 실시했습니다. 그 결과 대상자의 88.1%가 학원에서 공부하고 있으며, 평균 3.54개를 수학하고 있으며, 평균 2.82개 과목의 학습지를 공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어려서부터 공부에 시달리는 것은 학문적 성과를 기대해서가 아니라, 다만 좋은 대학에 들어가 성공하겠다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은 물질적주의적이고 세속주의적인 가치관을 반영할 뿐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처럼 왜곡되고 편향된 성공을 갈망하고 그 길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 길에서 강조되는 것은 생산성과 효율성입니다. 남들보다 얼마나 더 높은 점수를 받아서, 더 좋은 대학에 들어가느냐 하는 것이 관심의 초점입니다. 인간관계도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수단일 뿐이지 진정한 만남이나 대화는 오히려 성가신 일이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신앙은 귀찮은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모두들 남들보다 성공해서 행복한 삶을 누리려고 인간관계도, 신앙생활도 희생해 왔습니다. 성공하기 위한 경쟁만 강조되고, 신뢰와 배려는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진정한 대화도 단절되어 버렸습니다. 결국 이로 인해 개인과 가정이 위기에 몰리게 되었고 이혼가정과 불륜가정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울 또한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스스로에 대해 고백하기를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5절)라고 했습니다.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라고 한 것은, 유아세례를 받았다는 말인데, 자기 집안이 그만큼 뿌리깊은 유대교 신앙을 간직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족속"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선민의식을 대변하는 말입니다. "베냐민 지파"는 사울왕의 후손으로써, 비롯 작은 지파였지만 대단한 가문이었습니다.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란 이방인의 피가 전혀 섞이지 않은 순수한 히브리인을 일컫는 말입니다. 혈통은 물론 히브리말과 히브리 관습을 그대로 보존한 순수한 히브리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또한 그는 바리새인으로써 엄격하게 율법을 준수하였고, 그 당시 가장 존경받는 가말리엘의 제자로써 최고의 학문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뿐만아니라 그는 관원이기도 했습니다. 세상 적인 눈으로 봤을 때, 바울은 완전히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추구하는 성공이 혹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이러한 '사울'의 모습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새롭게 변화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바울이 배설물 같다고 버린 것을 찾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일 세상적인 성공을 가치있는 것으로 여기고,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고 하면 아직 우리는 바울이 아닌 사울의 모습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변화된 바울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러고 여러분의 신앙이 그런 바울과 같은 신앙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우리가 꼭 찾을 것이 있습니다.
바울로 변화되기 전 '사울'은 자신을 뒷받침해주고 있는 유대교적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그 가치체계 속에서 자신은 성공한 자요, 인정받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가치체계를 흔들고 있는 예수 믿는 이들을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바울은 대제사장으로부터 예수 믿는 자들을 체포할 권세를 가지고 다메섹까지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그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일은 바울에게 있어서 큰 충격이었습니다. 자신이 그동안 핍박하던 '예수'가 죽음에서 부활하셨고, 진정한 구주가 되신다는 사실은, 그가 추구하던 가치를 완전히 뒤집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확실한 체험을 통해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진리를 발견한 바울은, 예전에 그가 가졌던 세상적인 가치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 3:8-9)
우리가 바울처럼 돈과 명예와 권력을 다 버릴 수가 있습니까? 그것 때문에 부모자식 간에도, 형제지간에도, 친구 간에도 다툼이 끊이지 않고 있는데, 그것을 배설물로 버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것을 단행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세상의 좋은 것들 보다 고상하고 가치 있는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세상적인 것은 거추장스럽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것을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긴다고 한 것입니다.
영국 왕립연구소 교수이며 전기분해의 탁월한 이론가인 험프리 데이 비 박사(1778-1829)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정신력, 천재성, 권력, 재물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나에게 가장 귀한 것을 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택할 것이다. 믿음은 인생의 선을 훈련시키며, 희망이 쇠할 때 새로운 희망을 주고, 삶과 죽음을 일깨워주며, 굴욕과 수치를 천국으로 향하는 사다리가 되게 하고, 영원한 기쁨을 준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이 세상의 자랑이나 명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곧 우리의 구원입니다. 그것은 시험성적이나 돈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얻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
3. 우리는 하늘의 상급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과거 러시아의 수도인 페체르부르크에 한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그 노인에게 “당신의 평생 소원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면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매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 인생의 목표는 아주 좋은 고급 외투를 갖는 것이오.” 그 노인은 인생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평생 동안 일하고 저축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80 루블의 돈을 저축하여 꿈에 그리던 그 외투를 샀습니다. 그 날은 그 노인에게 성공한 날이자 목적을 이룬 날이었기에 큰 기대감과 흥분된 마음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외투를 사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그만 강도를 만나서 비싼 고급 외투를 강탈당했습니다. 그 노인은 매우 절망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고급 외투를 강탈당해서가 아니라, 그의 성공을 강탈당하고, 그의 행복을 강탈당했기 때문입니다. 그 날 이후 그 노인은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고골리'라는 러시아 작가가 쓴 「외투」라는 단편소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노인의 목표로 삼은 '고급 외투'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목표로 삼는 좋은 아파트, 고급 승용차, 사회에서의 높은 자리 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유에 대한 갈망에 대해, 필립 존슨의 시는 이렇게 말합니다.
"돈으로 옷을 살 수 있어도 인격을 살 수는 없으며
돈으로 집은 살 수 있어도 가정은 살 수 없다.
돈으로 약은 살 수 있어도 건강과 생명은 살 수 없다.
돈으로 사람을 살 수 있어도 사랑과 우정을 살 수 없다.
돈으로 오락은 살 수 있어도 기쁨과 행복은 살 수 없다.
돈으로 침대는 살 수 있어도 단잠을 살 수 없다."
우리가 잘 아는 에리히 프롬이라는 심리학자는 "행복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소유가 결코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계속 속으며 살고 있습니다. 만일 이대로 살다가,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면, 우리는 바울이 말한 '배설물'만 가지고 서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도저히 하나님 앞에 얼굴을 들고 서 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보다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로므로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면서 주의 일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하늘의 상급을 목표로 삼고 달려가야 합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 가노라"(빌 3:14). 마라톤 선수들이 극한 고통을 참고 인내하면서 끝까지 목적점을 향해서 달리는 것도 바로 경기 후에 있을 상급을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금메달은 그가 죽으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하늘의 상급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 영원한 상을 위해 우리는 끝까지 참고 나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같은 항아리라도 거기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고추장 항아리가 되기도 하고, 된장 항아리가 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사람은 무엇을 바라보고 사느냐에 따라 땅에 속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하늘에 속한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분의 가르침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적인 성공을 좇아 살아가지 않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을 어리석다고 할지 모르지만, 여기에 참된 성공의 길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그 길을 걸어가는 자는,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고후 6:10)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모두 이 성공의 길로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출처/전병금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