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50
잘못된 열심 (본문 롬10:1-15)
사도 바울에게는 자기 동족 이스라엘에 대해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근심과 고통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는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라" (롬9:1)
사도 바울의 고통은 자기 동족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열심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어느 종교에서나 신도들에게 열심을 강요합니다. 열심히 헌물도 바치고, 작정 기도도 하고, 가정이나 직장일보다 자기 종교에 더욱더 헌신적이기를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 종교에서 요구하는 규례를 엄격히 지킬 것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의 동족 이스라엘이 너무 열심인 것에 대해 근심과 고통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들이 믿는 하나님에 대해 열심인 것은 어느 종파의 신도들도 따라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우선 안식일 문제에만 있어서도 그들이 엄격하게 준수해가는 안식일 법이나 일상적인 삶에서 그들이 지켜가는 성결법에 대한 조항들은 어느 종파의 신도들이 따라갈 수 없는 것들입니다.
아마도 우리나라 어느 교회 신도들이 신앙생활에서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들과 같은 '열심'이 알려졌을 때 하나의 모델 교회로 매스컴에 많이 오르내릴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어느 종파 종교에서나 자기 종파의 부흥, 쇠퇴의 외적 척도는 '열심'입니다. 그래서 종교 지도자들이 갖는 관심은 어떻게 하면 신도들을 열정적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 목회하는 목회자들에게도 자기가 목회하는 교회의 신도들을 어떻게 열심있는 신도들로 만들 것인가에 대해 고심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제기하는 문제는 그 열심이 무엇에 대한 것인가 입니다. 바울의 자기 동족에 대한 근심과 고통은 그들의 열심이 "하나님의 의"가 아닌 "자기의 의"를 세우려 한다는데 있습니다. 바울 자신이 지난 날 한때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해 매우 열심인 때가 있었습니다. 그의 열심은 기독교의 박해로 예루살렘에서 여러 곳으로 흩어지는 그리스도인들을 추격해서 잡아 옥에 가두는 일에 앞장 설 정도로 거의 광적인 열심이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자기 의'와 '하나님의 의'는 표면적으로 구원을 지향해 간다는데 차이점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동기면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갖습니다.
먼저 '자기 의'란 사람이 자신의 종교적 덕행을 쌓아서 자신의 구원의 문제를 해결해 가려는 일종의 자기 중심적인 구원의 길입니다. 이러한 구원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일수록 종교적 규례를 엄격하게 지킵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것으로 구원을 성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종교 생활에는 기쁨이나 사랑, 자유가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 '자기 의'로 자신의 구원의 문제를 해결해 가려는 사람일수록 더 열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이라는 생의 궁극적인 문제를 인간의 지혜와 능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일까? 질문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의'는 '자기 의'와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마련해 놓으신 구원의 길입니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서 빵만으로 만족하며 살다가 죽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어느 정도 자신의 문제를 생각하는 사람의 경우 평생 자기 실현을 위해 정열을 바칠 수 있습니다. 좀더 종교적인 사람은 자신의 영혼의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종교적 수련을 쌓는데 열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에 나타난 인간의 궁극적인 구원의 문제는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어떻게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어, 하나님과 교제 가운데서 살아갈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해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빵만으로 만족하며 살도록 창조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 없이 자기 실현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으며 살도록 만드시지 않았습니다. 물론 자신의 영혼만이 구원 얻기 위해 종교적 덕행에 몰두하도록 세상에 보내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그의 창조의 파트너로, 그와의 대화의 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의 진정한 자기 실현, 영혼의 구원은 하나님과 화해 가운데 있습니다. 그 화해의 길이 '하나님의 의'에 나타나 있는 구원의 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편에서 이룰 수 없는 이 구원의 길을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심으로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한 구원의 길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4)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에는 사람의 덕행이나 희생이 요구되지 않고, 믿음이 요구됩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그 일을 받아드리고 믿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의'에서는 인간의 의는 불신앙의 행위입니다.
어떤 병든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병은 매우 중증입니다. 그대로 놓아두면 생명이 위독합니다. 그를 잘 알고 있는 유능한 의사가 그를 세심하게 진찰한 후 그가 병에서 나음을 얻어 건강하게 살수 있는 의학적인 처방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환자는 그것을 받아드리지 않고 나름대로 자신의 처방을 만들어 실천해 갑니다. 그의 병세는 더욱더 악화되어 갑니다. 드디어 그는 죽음 직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그는 깨닫고 의사를 신뢰하고 그가 제시하는 처방을 받아드리고 순종하기로 했습니다. 그의 병세는 나날이 좋아져 드디어 건강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사에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위해 마련하신 구원의 길입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믿고, 받아드리고, 시인하는 것입니다.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의 구원이 인간에 의해서 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구약 신명기의 말씀을 인용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 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다." (6∼7)
사도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인간이 그리스도를 세상으로 모셔오거나, 죽음으로부터 살아나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의 길을 조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길을 인정하고, 받아드리면 됩니다.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자기 의'는 인간의 노력으로 율법을 준수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고자 하는 자아 중심의 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는 오직 하나님 은혜로 살아가는 은혜의 길입니다. 이 은혜의 길에 하나님의 용서, 치유, 해방, 거듭남, 자유, 영생이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의 길을 발견한 사람만이 이 세상에서 희망의 미래를 내다보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은혜의 길에는 "만물을 새롭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에는 인간이 자아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는 일대 전환이 있습니다.
이 은혜의 길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그 구원은 자기 실현, 영혼 구원을 다 포괄하면서도 그것을 훨씬 넘어섭니다.
새로운 운명이 시작되는 새로운 시간입니다. 이 새로운 시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이 역사 속에서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후부터 이 '하나님의 의'를 알리는 소식이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사람들에 의해 여기저기서 메아리쳐 오고 있습니다. 그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이 이미 한 세기 전에 우리 한반도에도 상륙하였었습니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의'에 관해 올바르게 전해 들을 때 생깁니다.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고,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복종과 섬김이 그들의 삶의 특성으로 나타납니다. 그들은 자기 의를 이루기 위해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열심입니다. 종교개혁의 참된 의미와 목적은 인간의 의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은혜, 오직 하나님의 말씀, 오직 믿음이라는 '하나님의 의'를 다시 본래의 자리매김하는 신앙 바로잡기 운동입니다.
유대교가 아닌 기독교 신앙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의'가 아닌 '자기 의'에 안주 하려는 유혹이 뒤따르고 있습니다. 지난 기독교 역사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인간의 의 가운데서 몸부림치며 살아가는 어둠의 시기들이 있었습니다. 역시 오늘 우리 시대에서도 우리의 싸움은 '하나님의 의'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하나님의 의가 아닌 인간의 의를 위해 열심을 낼 때가 많습니다.
특별히 오늘과 같이 과학이 발전한 시대에서는 또 다른 유형의 인간의 의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하나님의 의' 대신에 심리학적 자아실현, 심신수련, 하나님 없는 영성이 많이 강조되기도 합니다.
켄 가이어는 고독한 인생의 여정길을 걸어가고 있는 영혼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자아 추구야말로 우리들 대부분이 한평생 해온 일이다. 심지어 신앙 생활을 통해서도. 그러나 자아란 막다른 골목이어서, 결국 우리는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어 있다. 부르튼 발로 좌절과 불만에 젖은 채, 남는 것은 패배감, 심하면 인생을 헛 산 기분. 우리의 추구가 영혼 자체로 끝난다면, 영혼의 추구도 크게 다를 바 없다. 쉬운 내리막길이 더 많겠지만 이 길 역시 막다른 골목이어서, 아무리 열심히 걸어도 결국 자기 존재의 언저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언저리와 매번 거기서 맴도는 걸음에 조금씩 지쳐있다. 우리가 갈구하는 것은 종교적 반경을 맴도는 진부한 걸음 이상의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친밀한 동행을 원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가 머무는 이 자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함을 받고, 치유, 해방, 거듭남으로 나아가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이 자리에서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우리의 미래는 형벌과 지옥이 아닌 희망의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우리는 이 은혜와 희망 가운데서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서로 복종하며, 서로 섬기며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 주님의 식탁에 둘러앉아 이러한 현실과 미래를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감사하게 됩니다. 이 '성만찬의 창'을 통해 비춰진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아픔, 하나님의 희생,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깊이 감사하며 그 은혜에 대해 깊이 응답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응답은 우리 자신의 의를 알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위해 어떤 일을 하셨다는 것을 알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의로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서 이루신 그 구원의 길을 믿고 받아드림으로 구원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를 세우는 일에 열심인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출처/임영수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