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50
항상 기뻐하라 (본문 빌4:4-7)
신학자 하비 콕스는 "현대인은 실용적이며 합리적인 계산으로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지만 황홀한 축제의 기쁨은 잊어버렸다."고 했습니다.
기쁨은 우리에게 심령의 강건함을 가져다 줍니다. 그래서 지혜자는 말씀하기를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 (잠 17:22) 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기쁨이 없을 때 거짓된 모조품으로 기쁨을 소유해가게 됩니다. 그러한 모조품은 우리에게 일시적 쾌락을 느끼게 하지만 심령을 강건하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러한 모조품의 기쁨은 우리에게 중독 증상을 가져다 줍니다.
진정한 기쁨은 많은 것을 소유하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는데서 오지 않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오히려 더 많은 정신적 부담과 염려를 가져다 줍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물질적 풍요와 자신의 욕구 충족을 통해 기쁨을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생각은 우리를 유혹하는 사탄의 속삭임입니다. 소유나 삶의 경쟁에서 쟁취한 기쁨의 결과는 공허 그 자체입니다.
복음의 본질적 의미는 기쁨과 감사입니다. 복음을 전해들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기쁨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쁨은 세상이 주는 기쁨과는 다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진정한 기쁨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진정한 기쁨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으로 부터 옵니다. 본문 5절에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고 했습니다. 여기서 주께서 가까이 오신다는 것을 "의역하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 선지자 하박국은 그가 처한 상황을 볼 때 결코 기뻐하거나 힘을 얻을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앞으로 임하게 될 어두운 시간을 내다보며 그의 창자가 흔들리고 입술이 떨리며 뼈가 썩는 것 같다고 했고, 다가오는 하나님의 심판, 곧 닥쳐올 바벨론 사람의 침략을 생각하며 두려워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거둘 소출과 식물과 우양이 없게 될 것을 생각하며 두려워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3:18)고 했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 안전의 담보물을 구합니다. 그것으로 인해 보호를 받고, 평안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선지자 하박국은 위기 속에서 구해야 할 것은 담보물이 아닌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주 하나님은 그의 산성, 요새, 방패, 환난 날 피할 바위시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도 이 사실에 대해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마6:31, 33)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외에 다른 것들을 구하느라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고 하나님을 구하는 데는 충분한 시간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완벽한 배우자, 행복한 가정, 직업, 사역의 성공등을 구하는데 우리의 시간을 다 사용하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보다 먼저 하나님 자신을 구하라고 하십니다. 배우자, 가정, 직업 그 자체 만으로 기쁨이 될 수 없습니다. 거기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기쁨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 가운데 그 어떤 것들도 그 자체만으로 기쁨이 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 곳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우리의 삶의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환경이 좋다고 해도 그것 자체가 기쁨이 되지는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곳에 기쁨이 있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를 쓴 곳이 로마 감옥입니다. 우리의 생각으로 감옥은 우리에게 기쁨이 될 만한 것이 전혀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 가운데서 기쁨을 말씀하게 됩니다. 그 기쁨은 세상이 주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거듭거듭 빌립보 교우들에게 기뻐하라 권면합니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감옥이나 광야나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될 때 그곳이 기쁨의 곳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상하고 바라는 그 어떤 목표점에 도달할 때 기쁨과 만족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목표점으로 향해 가는 과정에서 경험할 수 있는 기쁨을 다 놓쳐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삶의 과정에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단계적인 기쁨을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의 과정에서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의 여정의 모든 과정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고통스러운 과정을 없애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의 생의 고통스러운 모든 과정에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꿈을 꾸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바닷가를 거니는 장면이었습니다. 하얀 모래가 끝없이 펼쳐있고 그 모래 위에는 두 사람의 발자국이 찍혀 있었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것이었고, 또 하나는 주님의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이제까지 살아온 고생의 발자국이었습니다. 그는 유심히 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나란히 찍혀 있던 발자국이 어느 순간에는 한 짝만 찍혀 있었습니다. 한 두번이 아니고 자주 그러했습니다. 그는 발자국이 한 짝만 찍혀있는 순간들을 돌이켜 보았습니다. 그때는 인생에서 가장 비참하고 슬픈 순간들이었습니다. 그는 주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께 제 삶을 바치고 주님을 따르기로 했을 때, 항상 저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지요?
그런데 왜 제가 가장 비참하고 슬플 때, 주님을 가장 필요로 했을 때는 한 짝의 발자국밖에 없습니까? 함께 계시겠다고 하신 주님은 저를 떠나 계셨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나는 널 사랑했고, 너를 떠난 적은 한번도 없었단다. 너의 비참한 때, 고통의 때, 시련의 때, 슬픔의 때에도 네가 본 한 짝의 발자국은 바로 내 발자국이니라. 그때 내가 너를 등에 없고 걸었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그 다음 기쁨은 염려로부터 벗어나는데서 옵니다.
그런데 염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뢸 때 이루어 집니다. 그리스도인은 인생의 고난으로부터 면제받기 위해 부름을 받지 않고, 그 염려로부터 자유롭게 되기 위해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어도 생의 문제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염려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늘 염려와 근심 가운데서 인생을 허비하며 산다면 그러한 경우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인생의 무거운 짐으로 인해 염려와 근심 때문에 현재의 시간을 마음으로 다 포기하고, 미래에 그 어느 때에 하나님께서 그 문제를 다 없애주실 것이라 기대합니다. 그리고 하루 하루 근심과 한숨 가운데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미래의 일은 하나님께 맡기고 다만 오늘의 생의 짐을 하나님과 함께 감당하며 살아가자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분은 염려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했습니다.
"당신이 현재 있는 곳을 정신적으로 떠나서 과거나 미래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 우리는 너무 자주 과거나 미래에 시간을 소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현재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이러한 말씀들을 성경 여러 곳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고후 6:2)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히3:7, 25)
"오늘날 너희가 믿는다면 너희가 나의 안식에 들어가리라." (히4:7∼9)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기도와 간구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것은 과거의 짐, 미래의 염려를 하나님께 모두 아뢰고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병들었을 때 빨리 병을 낫게 해 달라고 기도는 하지만, 병으로 인한 하루하루의 삶을 희망과 기쁨으로 살아가게 해 달라고 기도는 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직장을 잃었을 때 하루 속히 직장을 달라고 기도는 하지만, 그 기간동안 하루하루 하나님께서 기대하시고 소망하시는 그 날로 살아갈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못합니다.
저 역시 지난 날 어려운 생의 시기에 빨리 그 짐을 벗겨 달라고 기도는 했지만 그 짐을 감사와 기쁨으로 지고 갈 수 있는 능력을 구하지는 못했습니다. 저는 그 짐을 통해서 미래를 내다 보았기 때문에 저의 미래는 언제나 회색 빛이었습니다. 결국 그러한 생의 염려와 불안은 저를 신경쇠약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는 말씀은 우리의 잘못된 정신적 태도와 삶의 방식에 대해 획기적인 수정을 요구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질병가운데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죽음의 시간은 내다보며 염려와 공포에 사로잡힐 줄은 알지만, 그 미래를 하나님께 맡기고 현재 그 시간에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과 함께 하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퇴직이나, 실직 후 은행에 예금한 현금이 매월 주어가는 액수를 바라보며 불안해 하며, 염려는 하지만, 우리의 미래를 하나님께 맡기고 현재 아주 작고 미미한 하나님의 창조의 사역에 참여하며 하루하루를 생명력 있게 살아가는 법을 배우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퇴직, 실직 후 염려와 근심 때문에 그 값진 기간을 우리는 너무 낭비할 수 있고,. 무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한국 신학대학 구약학 교수였던 고 김정준 박사는 젊은 시절 폐결핵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마산 요양소 침대에 누워서 죽음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문득 그 무기력과 자포자기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게 하는 섬광과 같이 번득 그의 잠자는 영혼을 깨우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죽을 때 죽더라도, 오늘 보람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내면의 음성이었습니다. 그 순간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결핵 마지막 단계에 이른 환자들의 요양실을 찾아가서 그곳 담당 간호원에게 "이제부터 이 방 청소는 자기가 맡겠다."고 했습니다.
그 시간부터 그 병실에 있는 환자들이 버린 휴지, 침구를 정리해 주며 그들을 돌보는 일에 열중했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병세는 점점 좋아져서 그는 요양소를 나와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염려와 근심으로 죽어가고 있는 청년 김정준을 일으켜 세워 하나님과 함께 그 날 그 날 생명적인 일에 동참시키셨습니다.
우리는 "내일의 염려는 내일에 맡기고,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현실적으로 받아드리지 못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는 말씀은 하루 하루를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라는 말씀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지킨다.'는 군사적 용어입니다. 군인이 적군의 침입을 막기 위해 초소에서 보초를 선다는 뜻입니다. 염려와 불안은 도전해 오는 외부의 힘에 대해 우리 자신이 약하거나 무방비 상태임을 깨닫게 될 때 발생되는 심리적 현상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심리적 현상으로 인해 많은 고통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실재하지도 않는 일로, 또는 무서운 어두움의 세력 앞에서 두려워 떨때가 있습니다.
마음의 평강은 비유로 말하면 바다를 항해하는 배의 '돛과 키'와 같습니다. 아무리 풍랑이 일어도 돛과 키가 부서지지 않으면 풍랑을 거슬러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이 부서져버릴 때 배는 표류하게 됩니다. 마음의 평강은 우리 마음속 깊은 곳의 '고요한 중심'입니다. 고요한 중심을 상실하지 않을 때 우리는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게 되고 모든 문제를 바르게 처리해 갈 수 있습니다.
고요한 중심을 상실할 때, 흥분, 두려움, 초조, 불안이 우리를 사로잡게 됩니다. 그러한 것들에 사로잡힘 가운데서는 아무 일도 해결해 갈 수 없습니다. 이러한 중심을 상실하게 될 때 우리는 안달하게 됩니다.
1736년 찰스 웨슬리가 미국 조지아 식민지 밑에서 2년간 전속 부관으로 있다가 영국으로 돌아올 때였습니다. 한 배에 타고 있던 모라비아 교도들이 시편을 읽으며 막 예배를 시작하려는 순간이었습니다. 갑자기 바다에 풍랑이 일어나 사람들은 놀라 비명을 지르며 아우성을 쳤습니다. 그러나 모라비아 교도들은 조용히 찬송을 부르며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폭풍이 지난 후, 찰스는 그중 한사람에게 "무섭지 않았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하나님께서 온 천지의 주인이신데 무섭기는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크게 깨달은 찰스는 후에 그의 경험을 찬송가로 지었습니다.
"비바람이 칠 때와 물결 높이 일 때에
사랑하는 우리 주 나를 품어 주소서.
풍파 지나가도록 나를 숨겨 주시고
안식 얻는 곳으로 주여 인도 하소서.
나의 영혼 피할 데 예수밖에 없으니
혼자 있게 마시고 위로하여 주소서.
구주 의지 하옵고 도와 주심 비오니
할수 없는 죄인을 주여 보호 하소서." (찬송 441장 1, 2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고 구원을 받는다 해서 우리 삶에서 모든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문제에 부딪히고, 인생의 어떤 단계에서는 원하는 대로 일이 잘 풀리지 않기도 합니다. 그러나 평화의 왕이신 그리스도는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출처/임영수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