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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목표와 나의 목표 (본문 신33:24-29)
미국 템플 대학교를 창설한 러셀코넬 박사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미국의 백만장자 4443명을 대상으로 그들의 생애를 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들은 성공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사 결과 놀랍게도 이들은 중, 고졸 학력 이상을 가진 사람은 불과 69명 밖에 없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이하의 학력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크게 성공해서 백만장자가 되기 까지 그들 대부분은 물질과 교육과 정규 훈련 등에서 일반 사람들 보다 더 좋지 않은 여건 속에 있었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코넬 박사는 그들의 생애가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공통점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인생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성공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그 마음속에 뚜렷한 목표를 세워 놓고 그것을 위해 전력 투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분명한 목표가 없기 때문에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살아갑니다. 이와 같이 목표 없이 인생을 사는 사람은 어떤 일에도 성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항상 분명한 목표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명한 발명가 에디슨도 매 6개월 마다 큰 발명을 한가지씩 하고 매 열흘마다 작은 발명을 하겠다는 야망의 목표를 정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목표를 설정해 놓으면 그 목표를 향해 자신의 가진 힘을 크게 발휘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죽을 때에 1092개의 미국의 특허권과 2000개의 외국의 특허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에 따라 힘쓸 때 행복과 승리는 자연히 따라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수년전 스위스를 갔을 때 가이드가 말했습니다.
"스위스는 살기 좋은 나라지만 이 나라처럼 자살율이 높은 나라가 없습니다."
많은 청소년들이 산에서 죽고 아름다운 호수에 빠져 죽고 약을 먹고 죽는 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원인이 무엇인지 물었더니 가이드가 말했습니다.
"너무나 살기 좋기 때문에 죽는 것입니다."
이미 어른들이 모든 것을 해 놓았기 때문에 젊은이들이 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도전이 없고 목표가 없기 때문에 잘 해 놓은 세상에서 결국은 죽음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큰 아이러니 인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통계에 의하면 100명중 3%만이 자신의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적어 놓고 실천에 옮긴다는 것입니다. 100명 중에 10%의 사람만이 목표 와 계획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머리 속에만 있을 뿐 실천은 하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나머지 87%는 목표와 계획 없이 인생을 닥치는 대로 그럭저럭 표류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인간이 충성하고 헌신할 수 있는 대상이나 목표를 갖지 못하면 결국 허무주의자가 되고 생의 승리와 행복감을 느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의 생명과 정열을 바칠 수 있는 목표나 신념을 가질 때 우리는 생애 충실감과 삶의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신앙인들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입니까? 신앙인으로서 목표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 목표는 어디에서 얻어진 것입니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지는 목표는 크게 두 가지 입니다. 한가지는 신앙인이므로 하나님에게서 찾아야 겠다는 것이고 또 한가지는 신앙인이지만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혜로 목표를 삼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의 교사는 두 종류 가운데 하나라고 합니다. 그 한가지는 교사가 나에게 주는 대가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부류와 또 하나는 교사 그 자체가 주는 보람에 목표를 두는 부류입니다.
즉 첫번째는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가가 어느 정도냐에 따라 자신의 삶이 달라진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정치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치해서 무엇을 얻을 것인가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정치 그 자체, 나라를 다스리고 헌신하고 봉사하는 그 자체를 삶의 보람으로 느끼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목표를 두고 계십니까?
결혼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결혼해서 남편이 되고 아내가 된 것 자체에 만족과 보람을 느끼며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내가 저 사람 때문에 무엇을 얻었는지에 따라 그 사람에 대해 대우와 행동이 달라지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내가 남편이, 아내가 되었으니 내가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을 도울까를 생각하며 감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앙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생활을 할때 교회가 나에게 무엇을 줄까에 관심을 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내가 교회를 통해서 내 신앙을 지킬수 있음을 감사하고 교회의 존재를 귀하게 여기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목표를 두고 살아가십니까?
우리가 신앙인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이 내게 무엇을 주실까에 목표를 두고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 한 분을 모시고 사는 신앙의 삶에 감사하고 감격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전에 TV프로인 '코메디 전망대'에 출연했던 김경태 장로님을 아실 것입니다. 이 분이 PD시절 후배 연기자들에게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인생의 목표를 인기에 두지 마라, 인기를 삶의 목표로 삼으면 곧 실망한다. 최선의 노력만 하라. 인기를 얻었다고 교만하지 마라 인기는 물거품처럼 사라질 수 있다. 인기를 위해 갈지 말고 사명을 위해 노력하라 이 사회를 밝게 만든다는 사명, 웃음으로 사람들을 즐겁게 해 준다는 사명을 가져라 그 때 성공과 행복이 보장된다."
분명한 것은 세상은 인기를 따르고 그것이 주는 대가만 바라는 사람들은 이것 때문에 실망하는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내게 주는 위치와 사명을 귀하게 여기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행복과 성공이 보장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어디에 목표를 두고 살아야 겠습니까?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주시는 대가입니까? 우리는 대가보다도 마땅히 하나님을 귀하게 여기고 내가 하나님 안에 살아가는 것을 감사하게 여길 때에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속에서 승리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12지파를 축복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본문은 그 가운데 마지막 지파인 아셀 지파에 대한 축복입니다. 모세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일생동안 하나님께 헌신한 종입니다. 모세는 그의 평생을 통해 그의 영혼과 육체로 시간과 공간 속에서 하나님을 늘 체험하며 살아왔습니다. 이런 모세의 사명은 그의 백성을 구출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는 가나안 땅이 눈 앞에 보이는 지점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젖과 꿀이 흐르는 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쉽지만 모세의 사명을 거기까지 였습니다. 모세는 이제 그가 묻힐 비스가 산에 오르기 전 성령의 감동을 받아 백성들에게 축복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축복이 여러군데 나옵니다. 창세기 9장에 노아의 축복, 창세기 27장에 이삭의 축복, 창세기 49장에 야곱의 축복이 나옵니다. 이런 축복의 광경 속에서 발견되는 의미는 크게 두가지입니다. 한가지는 부모된 입장에서 자식을 향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들이 이렇게 되기를 원합니다.이러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이들에게 복을 주시옵소서"
아울러 자식들을 향한, 지파들을 향한 바램입니다. 그래서 축복은 하나님을 향한 기도이고 성도들을 향한 바램입니다. 두번째는 예언입니다. 하나님께서 백성에게 이렇게 축복하시겠다는 계시를 받아서 백성들에게주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축복은 단순한 기도만이 아니라 그 속에 하나님의 계획이 있고 목표가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입니다. 이 축복 속에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모세의 개인 기도와 바램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이런 계획을 가지고 있고 이렇게 도와주겠다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특징은 철저히 하나님의 계획을 믿고 의지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은 신의 뜻은 없고 늘 달라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그저 정성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의 계획과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언제하고 있습니까?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될런지 어떤 문제가 생기고 어떤 시련이 닥칠지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이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이 하실 일들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들이 가나안 땅에서 승리하려면,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려면 하나님의 계획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너희들의 신앙의 목표로 삼고 이러한 은혜를 받도록 힘쓰라"고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때 가나안 땅으로 주시고 그럴때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
성경에서 얘기하는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있음을 말해줍니다. 25절 말씀에 보면 "...네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 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할 수 있는 것도 있고 할 수 없는 것도 많이 있습니다. 모세는 이러한 인간의 유한성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그날그날 도와주신 하나님의 능력을 생각해 보면서 비록 자신은 떠나 가지만 이스라엘 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변함없이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더 믿고 있었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함께 하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게 하시고 반석의 물로 시원케 하시고 적군들을 쳐 부수게 하셔서 형통한 길을 가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능력이 이스라엘에게 함께 하고 이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순종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24절에 "아셀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아셀은 다자한 복을 받으며..." 라고 했습니다. 자식이 주어진다는 것은 사랑할 대상을 얻는 기쁨입니다. 또 "그 형제에게 기쁨이 되며 그 발이 기름에 잠길지로다" 라고 했습니다. 기름이 머리에 부어져서 이것이 땅으로 흘러 다시 올라오는 것처럼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문 빗장은 철과 놋이 될 것이니 네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 튼튼하고 안전하게 된다는 것이고 사는 날을 따라 능력이 있다고 합니다. 그저 하루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한달이나 일년도 아닙니다. 사는 날 끝까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능력이 되어 주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 일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능력으로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그날그날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납니까?
1.하나님의 능력은 돌보심의 능력입니다.
26-27절에 " 여수룬이여 하나님 같은 자 없도다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시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도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너의 처소가 되시니 그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 있도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라 하시도다" 말씀하십니다.
"하늘을 타시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 도다" 창조주 하나님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고 못하시는 것이 없으신 그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팔이 네 아래 있도다" 안전한 처소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적을 없애 주신다고 합니다.
어떤 자에게 말입니까? "여수룬아" 라고 명칭되는 자에게 말입니다. 여수룬이라는 뜻은 계약의 두가지 의미가 있는데 결국 의로운 백성이 된 사람,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은 약속을 믿고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하신 약속을 믿고 따를 때 그 은혜가 우리에게 돌보심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사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말씀대로 살면 형통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일주일에 하루를 선별해서 하나님께 드리면 복 주신다고 말씀했습니다. 주일을 지키는 자에게 하나님의 돌보심의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십일조를 드릴 때에 손해 나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책임 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한대로 나누어 주며 살 때 내가 없어지는 것 같지만 오히려 더 많은 것으로 채워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능력이 되십니다. 사는 날 동안 능력이 되시고 내 은혜가 되시고 나로 하여금 승리하는 삶을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은혜는 어떤 자에게 주시는가 하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약속대로 순종하는 자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목표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능력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에게, 실천하는 자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의 약속을 잘 실천하고 있습니까?
아무리 금이나 다이아몬드라고 해도 땅에 묻혀 있으면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결과가 없습니다. 그러나 자그마한 씨앗이라도 땅에 심으면 꼭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혀지게 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없는 것은 아무리 비싼 것을 심어도 열매가 없습니다. 생명이 있는 것은 아무리 작아도 그것이 심어져 썩어지고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는 예수 생명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속에 썩어지고 부서질 때 하나님은 싹이 되게 하시고 ,꽃이 되게 하시고 열매가 되게 하시는 놀라운 은혜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돌보심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약속을 믿고 순종하면 됩니다.
2.하나님의 능력은 구원의 역사로 나타납니다.
29절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하나님의 구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들이 어려움 속에 있음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좋은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어려움과 함정들, 험산 준령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넘어지고 쓰러질 때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조롱하고 비웃고 넘어지면 더 밟으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절대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구원하신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을 구원하시는가 하면 이스라엘을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
이스라엘은 애굽땅에서 구원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구원하신 하나님의 구원자들이 다 이스라엘입니다. 우리도 이세상 살면서 어려운 일 당할 수 있습니다. 병들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자가 되실 때 우리는 실패한 자리에서 일어나 승리하는 놀라운 삶의 역사를 이루게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약함을 드러내야 합니다. 우리는 할 수 없는 일들이 더 많이 있기 그렇습니다. 예측 불허의 일들이 얼마든지 우리 속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능력을 받습니다. 어떤 자가 받을 수 있습니까? 나의 약함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 그리고 나의 어려운 현실을 당연히 여기고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역사로 함께 하시고 도와 주실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고구마 전도왕 김기동 집사님의 간증 속에 이런 얘기가 있지 않습니까?
그의 사랑하는 자녀가 가와사키 병에 걸렸다고 합니다. 그 병은 심장의 박동이 약해지는 병입니다. 우리는 그냥 편하게 숨을 쉴 수 있지만 그 병에 걸리면 숨을 할딱 거리며 쉽니다. 쉽게 고쳐지지 않는 병입니다. 그런데 이 집사님은 자녀의 병을 놓고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하나님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낳게도 하시고 데려가시기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성공하게도 하시고 실패하게도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이 아이를 데려가셔도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통해 주신 기쁨들을 감사 드립니다.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 순간 아이를 고쳐 주실 것을 믿는 확신이 생겼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앞에 기도하는 가운데 아이의 병이 깨끗이 나았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할 수 없고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인정하고 그 앞에 순종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 주실줄로 믿습니다.
이와 비슷한 일이 미국 남침례교회 앙겔 목사님의 교회에서 있었습니다. 자신의 교회의 윌터라는 집사님의 일입니다. 그분은 아주 훌륭한 분이었습니다. 언제든지 교회일을 부탁하면 "예 목사님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해 보겠습니다"라고 힘껏 일하시는 분이었습니다.
한번은 교회에 중요한 일을 수행할 책임자가 필요했었는데 앙겔목사님이 이 일을 맡을 만한 다른 사람에게 부탁을 하니 네 사람이나 모두 못하겠다고 피했습니다. 목사님은 하는 수 없이 이미 여러 가지 일로 수고하고 있는 윌터 집사님에게 사정을 얘기하고 맡아 주십사 부탁을 했습니다. 그러나 윌터 집사님은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해 보겠습니다. 목사님, 그 일에 대해 설명해 주시오"라고 했습니다.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윌터 형제, 내가 궁금한 일이 한가지 있으니 거기에 대애 먼저 내게 말을 좀 해주십시오. 그동안 내가 이 교회를 섬겨 오면서 윌터 집사님에게 무슨 일을 부탁하여도 집사님은 한 번도 거절하지 않고 항상 웃는 얼굴로 그것을 응낙하고 힘껏 잘 해 주셨는데 혹시 거기에 어떤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이에 윌터 집사가 말했습니다.
"목사님 지난번 저의 딸 결혼식을 거행해 주셨지요. 그 아이가 12살이 되었을 때 심하게 앓은 적이 있습니다. 열이 40도나 올라갔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그 아이를 보고나서 방에서 나오면서 나에게 말하더군요, 윌터씨 따님의 목숨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혹시 윌터씨는 기도할 줄 아십니까? 이에 저는 네 할 줄 압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바르게 살기로 헌신했다고 말했습니다. 그 후 의사선생님이 떠나시고 나서 저와 제 아내는 베란다에 가서 함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우 리는 어린 딸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 드렸습니다. 우리는 그 외동딸로 인하여 우리가 누릴 12년간의 기쁨과 행복에 대해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 드렸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아뢰기를 하나님의 뜻으로 이 딸을 데려가셔도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아무런 원망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계속 기도하기를 하나님께서 저 딸을 우리에게 더 맡겨 주시다면 저는 앞으로 주님이 시키는 일은 무엇이나 다 하겠습니다. 목사님, 우리가 하나님께 조건을 걸고 흥정하는 것은 해서는 안될 일인 것을 저는 압니다. 제가 저도 모르게 그렇게 기도한 것은 어떤 흥정의 뜻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어떤 약속을 바친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저 언제나 그 때 하나님께 드린 약속을 지키면서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가정은 그렇게 살면서 대단한 기쁨과 보람을 누리고 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의 사는 날 동안 내가 능력이 되겠다"고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능력을 왜 받지 못하고 있습니까? 여수룬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가운데 이렇게 말씀하는 분이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도 중요하고 약속도 귀하지만 우리가 일을 해야 먹고 살 것이 아닙니까?"
물론 우리의 직장이 귀합니다. 자녀들의 공부도 귀합니다. 청년들은 아르바이트 하는 것도 귀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능력, 계획, 그것은 우리에게 점점 멀어져 간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사는 자에게 하나님의 도와주심의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다 이스라엘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우리를 죄 가운데서, 지옥에서 구원하여 주셨는데, 우리가 당하는 이 세상의 어려움에서 왜 우리를 구원해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오늘 우리들의 제일 큰 안타까움은 우리들을 죄 가운데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 너무나 적기 때문입니다. 지옥에서 구원하신 하나님, 이세상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승리하는 인생을 살게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축복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목표를 분명히 알고 이것을 너의 목표로 삼고 살아가라 하나님의 목표와 나의 목표가 일치될 때 가나안은 우리에게 더불어 주어지고 하나님은 승리하는 인생을 살게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목표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능력으로 우리들 속에 역사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그 사실을 믿고 순종하면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살아 있는 놀라운 역사가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할 줄로 믿습니다.
출처/오창우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