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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사에 감사하라 (본문 살전5:16-18)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원래 추수감사절은 미국 사람들의 명절입니다.
그들의 조상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건너와 첫해에 추위와 질병, 인디언과 맹수들의 습격을 견뎌 가면서 얻은 첫 수확을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던 것이 유래가 되어서, 지금까지 미국 사람들은 자기 조상들의 이런 신앙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서 매해 11월 셋째 주일 지난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지킵니다.
우리 나라에도 추수감사절과 같은 명절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추석입니다.
그러나 그 추석은 너무 우상숭배와 밀접히 관계가 있기 때문에 주로 미국에서 건너왔던 초기 선교사들이 그들이 지켜왔던 추수감사절을 우리 나라 교회에 소개해서 지금까지 우리들도 11월 셋째 주일을 추수감사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어쨋든 이 추수감사절은 우리에게 감사의 정신을 가르쳐 줍니다.
기독교는 감사의 종교입니다. 감사를 하되 좋을 때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괴로울 때도, 편할 때만 아니라 어려울 때도 감사를 하는 그야말로 범사에 감사를 강조하는 종교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이 그것을 가르쳐 줍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여기 '범사에 감사한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영어로 말하면, 'In everything give thanks' 또는 'Give thanks in all circumstances', 그러니 모든 일에, 좋은 일에나 안 좋은 일에나, 기쁜 일이나 슬픈 일에나, 모든 일에, 모든 환경에 감사하라는 말씀입니다.
얼른 들으면 억지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성경적인 그리스도인들은 다 그렇게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박국 3장에 보면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17-18)
하박국에게는 감사할 만한 일이 없습니다.
무화과나무도 무성치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도 없고 감람나무에 소출도 없고 밭에 식물도 없고 우리에 양도 없고 외양간에 소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욥기에 보면 욥이 형통할 때에도 감사했지만 시험이 닥치고 고난이 왔을 때도 감사했습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라" (욥1:21)
또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냐"(욥2:10)
빌립보서 4장에 보아도 사도 바울에게는 감사할 만한 일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지금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가진 것도 별로 없는 데다 몸에 병까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말하기를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합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합니다.
이것이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
성도는 감사하는 사람들입니다. 감사하되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성도가 왜 이렇게 범사에 감사할까요?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성도는 이미 받은 은혜가 크기 때문에 범사에 감사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습니까?
우리는 이미 영혼 구원을 받은 자들입니다.
엡 2:4,5을 보십시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우리는 벌써 큰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큰 사랑을 받은 자들입니다.
어느 정도로 은혜를 입은 것인가 하면, 우리는 허물로 죽은 사람들인데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입은 것입니다. 우리가 잘나서 어떤 공로나 조건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그런 엄청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해야 하겠습니까?
돈 좀 잃었다고 불평할 수 있습니까?
건강 좀 여의치 못하다고 원망하겠습니까?
일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고 짜증내겠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아주 큰 은혜를 이미 받은 자들, 그렇기 때문에 범사에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배은망덕한 자입니다.
그런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물에 빠진 사람 건져 주었더니 보따리 내놓으라 한다는 말입니다.
물에서 건져 준 것이 얼마나 큽니까? 그런데 보따리 가지고 무어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함을 입었는데, 다른 것 때문에 불평한다면 그 사람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찬송가 434장 "나의 갈길 다 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를 비롯하여 수천 곡의 찬송가를 작시한 화니 크로스비가 있습니다. 그녀는 평생을 소경으로 살았습니다.
한번은 어느 성도가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의 얼굴은 늘 밝고 감사의 빛으로 차 있는데 당신의 처지를 보면 감사할 것이 없을 것 같으니 무엇이 당신으로 하여금 그렇게 늘 감사하게 합니까?"
그 때 그녀는 말했습니다. "감사의 조건들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단 한가지 이유만으로도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에게는 감사할 만한 많은 이유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말할 수 없는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까지 우리를 위해 내어주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로마서 8장 32절 말씀처럼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이런 하나님의 사랑과 선물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 죽을 수밖에 없는 자리에서 구원해주셔서 우리가 다른 것을 받지 못했다할지라도 이것 한 가지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범사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두 번 째로,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범사에 감사합니다.
롬 8:28을 봅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가 지금 당장의 일만 보면 감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일의 결말을 생각하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일을 합력하여 결국 선으로 만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탈무드에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랍비가 나귀를 타고 한 마리 닭과 등불과 천막을 싣고 여행을 떠났습니다.
해가 저물어 천막을 치고 나귀와 닭은 천막에 묶어 두었습니다.
닭을 가지고 다니는 이유는 꼬끼오 하고 아침을 알려주는 시계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해가 저물어 천막을 치고 나귀와 닭을 천막 밖에 묶어두었습니다.
천막 안에서 등불을 켜고 성경을 보는데 갑자기 강한 바람에 등잔의 불이 그만 꺼지고 말았습니다. 한참 성경을 읽으려고 했는데 등잔이 꺼짐으로 화가 났지만 할 수 없어서 성경을 덮고 감사의 기도를 하고 잤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밤사이에 맹수가 와서 밖에 있던 나귀와 닭을 잡아 간 것이었습니다.
그는 찢어진 천막을 챙기면서 속이 상할 대로 상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주위를 보니 바로 동네 가까이서 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동네에 무언가 이상한 점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가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여기 저기 사람들의 시체가 늘려 있었고 물건들도 흩어져 있었습니다.
어젯밤에 강도들이 습격해서 사람들을 죽이고 물건들을 약탈해 갔던 것입니다.
그 때 생각해 보았습니다. 만일 어제 밤에 자기 천막에 등불이 켜져 있었거나 닭이나 나귀가 살아서 소리라도 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자기도 틀림없이 죽었을 것인데 생각해 보니 그 때 바람에 등불이 꺼진 것도, 맹수가 와서 자기 나귀와 닭을 잡아 간 것도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감사의 예배를 드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에게 닥친 일들을 당장에 생각하면 불평하고 원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일 뒤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고, 하나님은 그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것을 알면 감사하지 않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에게 해가 되고 고통이 되는 것까지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느 곤충학자가 여러 해 동안 누에고치를 연구하였습니다
일정기간이 지나면 누에고치가 터지면서 나비가 되어 날아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어느 날 누에고치가 나비가 될 수 있는 환경을 갖추어 놓고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누에고치의 한 끝에 구멍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그 구멍으로 아주 힘들게 애를 쓰며 나비가 빠져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한동안 날개 짓을 해대며 나는 연습을 하더니 하늘을 날아가더라는 것입니다.
이 곤충학자가 또 다시 누에고치가 나비가 되는 것을 보다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누에고치야 그 작은 구멍을 빠져 나오느라고 얼마나 힘이 드느냐. 내가 좀 편하게 해주마"
그래서 그는 누에고치가 나올 때 구멍을 크게 뚫어주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나비가 쉽게 나오기는 했지만 날지를 못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이유가 무엇인가를 다시 연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서야 곤충학자는 더욱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나비가 그 누에고치를 뚫고 나오기까지 여러 날 동안 고통을 당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고통을 당하지 않고는 나비구실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비가 누에고치를 빠져 나오면서 몸부림을 칠 때에 몸 속에 있는 영양분이 이동한다는 것입니다. 그 영양분이 나비의 날개 쪽으로 모아져서 날개에 힘이 생겨 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은 심지어 만물에 있어 고난까지도 유익하게 사용하십니다.
곤충계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이라는 것을 주셔서 고난 때문에 몸부림을 치게 하지만 몸부림 속에서 나도 모르는 힘이 생기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능력과 하늘나라를 소망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요즘 여자들이 제왕절개 수술을 많이 합니다. 이것이 의술이 발전한 덕분이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고통을 통해 자녀를 생산하게 한 것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고난과 내 일이 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 심지어 요즈음 우리 사회에 불황이 닥친 것까지도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감사할 조건이 됩니다.
이것을 우리 자녀들도 깨달아야 합니다.
요즘 우리들의 문제는 부모들이 아이를 너무 편하게 키우고 어려움을 미연에 막아주는 것에 있습니다. 특히 요즘 우리의 입시제도가 아이들이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모든 일을 편하게 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것이 결코 자녀들 장래에 좋은 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형통한 일도 주지만 때로 곤고한 일도 주셔서 형통할 때는 찬송하게 하고 곤고할 때는 기도하게 하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인생을 좀더 의미있게 살도록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이기에 우리는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우리가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심으로 감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할 때 얻는 상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범사에 감사합니다.
시편 50:14,15에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를 하나님이 환난에서 건져 주시겠다고 약속합니다.
또 잠언 3:9-10에 보면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 틀에 포도즙이 넘치리라" 했습니다.
감사의 예물을 드리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넘치게 채워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또 빌 4:6,7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감사할 때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스펄젼 목사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촛불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 전등불을 주시고, 전등불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 햇빛을 주시고, 햇빛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 햇빛도 필요 없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영광스러운 빛을 주신다"
이렇게 감사하는 자에게는 여러 가지 하나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삶을 보면 그렇게 감사하지 못하고 사는 것을 봅니다.
일이 잘 될 때는 감사하지만 잘 안 될 때는 감사하지 못하고, 좋을 때는 감사하지만 좋지 않은 것 같을 때는 감사하지 못하는 우리를 봅니다. 왜 그럴까요?
크게 두 가지인 줄 압니다.
하나는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16절에 항상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또 17절에 보면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이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조건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런 말씀에 순종하기를 더디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범사에 감사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으면 그대로 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 말씀이 얼마나 진실된지 알게 될 것입니다.
또 한가지,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범사에 감사하지 못합니다.
여기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 전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의 순서는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항상 기뻐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범사에 감사하게 됩니다.
우리 한국교회 초기에 사랑의 원자탄으로 알려진 손양원목사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는 여수 반란 사건 때에 공산당에게 두 아들을 잃었습니다.
그랬는데 그 후에 두 아들의 장례식을 거행할 때에 열 가지의 감사를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어떻게 보면 미친 사람이지요. 울어야 정상인데 감사를 했습니다.
나 같은 죄의 혈통에서 순교자 자식 둘이 나게 되었으니 감사하고, 많은 성도들 중에서 이 귀중한 보배를 특히 내게 주셨으니 감사하고, 3남 3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장자와 차남을 바칠 수 있게 주셨으니 감사하고,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거든 하물며 두 아들이 순교하게 되었으니 감사하고, 미국 보내려고 준비했던 아들을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에 갔으니 감사하고, 두 아들 죽인 원수를 회개시켜 아들을 삼고자 하는 사랑을 주셨으니 감사하고... 등등을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그가 어떻게 이런 감사를 할 수 있었는지 압니까?
처음부터 그런 것 아닙니다.
그 때 그 목사님을 유심히 살핀 사람이 전한 말에 의하면 두 아들의 참사 소식을 듣고 손 목사님은 이불을 덮고 누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깊이 신음하기를 "하나님, 하셔도 너무 하십니다"는 말만 계속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식음을 전폐하더니 그 후에는 엎드려 기도하시더랍니다. 무어라고 기도하셨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가를 묻지 않았겠습니까? 그리고 나와서 장례식 때 한 말이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힘으로는 범사에 감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힘 주셔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절대로 범사에 감사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와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점이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그것이 범사에 감사하는 데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그러러면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감사하라고 하셨으니 우리가 의지적으로라도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그 누구도 범사에 감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생각해 보면 참 감사하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내년 초가 우리나라 경제의 위기라고들 말합니다.
기업들이 도산하고, 실업자들이 또다시 급증하고 있으며 경기가 메마르고 있습니다.
성도라고 예외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성도는 이 때에 진정한 성도의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이런 때에도 감사를 잃지 않고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감사해야 할 많은 이유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말할 수 없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또 하나님은 감사하는 자를 축복하십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이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기도함으로써 범사에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 하나밖에 없는 아들까지 주신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고, 또 이 세상 사람들에게도 참 크리스챤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며, 우리 자신이 복을 받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보여주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이철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원래 추수감사절은 미국 사람들의 명절입니다.
그들의 조상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건너와 첫해에 추위와 질병, 인디언과 맹수들의 습격을 견뎌 가면서 얻은 첫 수확을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던 것이 유래가 되어서, 지금까지 미국 사람들은 자기 조상들의 이런 신앙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서 매해 11월 셋째 주일 지난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지킵니다.
우리 나라에도 추수감사절과 같은 명절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추석입니다.
그러나 그 추석은 너무 우상숭배와 밀접히 관계가 있기 때문에 주로 미국에서 건너왔던 초기 선교사들이 그들이 지켜왔던 추수감사절을 우리 나라 교회에 소개해서 지금까지 우리들도 11월 셋째 주일을 추수감사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어쨋든 이 추수감사절은 우리에게 감사의 정신을 가르쳐 줍니다.
기독교는 감사의 종교입니다. 감사를 하되 좋을 때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괴로울 때도, 편할 때만 아니라 어려울 때도 감사를 하는 그야말로 범사에 감사를 강조하는 종교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이 그것을 가르쳐 줍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여기 '범사에 감사한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영어로 말하면, 'In everything give thanks' 또는 'Give thanks in all circumstances', 그러니 모든 일에, 좋은 일에나 안 좋은 일에나, 기쁜 일이나 슬픈 일에나, 모든 일에, 모든 환경에 감사하라는 말씀입니다.
얼른 들으면 억지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성경적인 그리스도인들은 다 그렇게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박국 3장에 보면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17-18)
하박국에게는 감사할 만한 일이 없습니다.
무화과나무도 무성치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도 없고 감람나무에 소출도 없고 밭에 식물도 없고 우리에 양도 없고 외양간에 소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욥기에 보면 욥이 형통할 때에도 감사했지만 시험이 닥치고 고난이 왔을 때도 감사했습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라" (욥1:21)
또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냐"(욥2:10)
빌립보서 4장에 보아도 사도 바울에게는 감사할 만한 일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지금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가진 것도 별로 없는 데다 몸에 병까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말하기를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합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합니다.
이것이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
성도는 감사하는 사람들입니다. 감사하되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성도가 왜 이렇게 범사에 감사할까요?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성도는 이미 받은 은혜가 크기 때문에 범사에 감사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습니까?
우리는 이미 영혼 구원을 받은 자들입니다.
엡 2:4,5을 보십시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우리는 벌써 큰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큰 사랑을 받은 자들입니다.
어느 정도로 은혜를 입은 것인가 하면, 우리는 허물로 죽은 사람들인데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입은 것입니다. 우리가 잘나서 어떤 공로나 조건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그런 엄청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해야 하겠습니까?
돈 좀 잃었다고 불평할 수 있습니까?
건강 좀 여의치 못하다고 원망하겠습니까?
일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고 짜증내겠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아주 큰 은혜를 이미 받은 자들, 그렇기 때문에 범사에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배은망덕한 자입니다.
그런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물에 빠진 사람 건져 주었더니 보따리 내놓으라 한다는 말입니다.
물에서 건져 준 것이 얼마나 큽니까? 그런데 보따리 가지고 무어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함을 입었는데, 다른 것 때문에 불평한다면 그 사람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찬송가 434장 "나의 갈길 다 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를 비롯하여 수천 곡의 찬송가를 작시한 화니 크로스비가 있습니다. 그녀는 평생을 소경으로 살았습니다.
한번은 어느 성도가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의 얼굴은 늘 밝고 감사의 빛으로 차 있는데 당신의 처지를 보면 감사할 것이 없을 것 같으니 무엇이 당신으로 하여금 그렇게 늘 감사하게 합니까?"
그 때 그녀는 말했습니다. "감사의 조건들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단 한가지 이유만으로도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에게는 감사할 만한 많은 이유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말할 수 없는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까지 우리를 위해 내어주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로마서 8장 32절 말씀처럼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이런 하나님의 사랑과 선물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 죽을 수밖에 없는 자리에서 구원해주셔서 우리가 다른 것을 받지 못했다할지라도 이것 한 가지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범사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두 번 째로,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범사에 감사합니다.
롬 8:28을 봅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가 지금 당장의 일만 보면 감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일의 결말을 생각하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일을 합력하여 결국 선으로 만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탈무드에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랍비가 나귀를 타고 한 마리 닭과 등불과 천막을 싣고 여행을 떠났습니다.
해가 저물어 천막을 치고 나귀와 닭은 천막에 묶어 두었습니다.
닭을 가지고 다니는 이유는 꼬끼오 하고 아침을 알려주는 시계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해가 저물어 천막을 치고 나귀와 닭을 천막 밖에 묶어두었습니다.
천막 안에서 등불을 켜고 성경을 보는데 갑자기 강한 바람에 등잔의 불이 그만 꺼지고 말았습니다. 한참 성경을 읽으려고 했는데 등잔이 꺼짐으로 화가 났지만 할 수 없어서 성경을 덮고 감사의 기도를 하고 잤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밤사이에 맹수가 와서 밖에 있던 나귀와 닭을 잡아 간 것이었습니다.
그는 찢어진 천막을 챙기면서 속이 상할 대로 상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주위를 보니 바로 동네 가까이서 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동네에 무언가 이상한 점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가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여기 저기 사람들의 시체가 늘려 있었고 물건들도 흩어져 있었습니다.
어젯밤에 강도들이 습격해서 사람들을 죽이고 물건들을 약탈해 갔던 것입니다.
그 때 생각해 보았습니다. 만일 어제 밤에 자기 천막에 등불이 켜져 있었거나 닭이나 나귀가 살아서 소리라도 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자기도 틀림없이 죽었을 것인데 생각해 보니 그 때 바람에 등불이 꺼진 것도, 맹수가 와서 자기 나귀와 닭을 잡아 간 것도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감사의 예배를 드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에게 닥친 일들을 당장에 생각하면 불평하고 원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일 뒤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고, 하나님은 그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것을 알면 감사하지 않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에게 해가 되고 고통이 되는 것까지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느 곤충학자가 여러 해 동안 누에고치를 연구하였습니다
일정기간이 지나면 누에고치가 터지면서 나비가 되어 날아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어느 날 누에고치가 나비가 될 수 있는 환경을 갖추어 놓고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누에고치의 한 끝에 구멍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그 구멍으로 아주 힘들게 애를 쓰며 나비가 빠져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한동안 날개 짓을 해대며 나는 연습을 하더니 하늘을 날아가더라는 것입니다.
이 곤충학자가 또 다시 누에고치가 나비가 되는 것을 보다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누에고치야 그 작은 구멍을 빠져 나오느라고 얼마나 힘이 드느냐. 내가 좀 편하게 해주마"
그래서 그는 누에고치가 나올 때 구멍을 크게 뚫어주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나비가 쉽게 나오기는 했지만 날지를 못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이유가 무엇인가를 다시 연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서야 곤충학자는 더욱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나비가 그 누에고치를 뚫고 나오기까지 여러 날 동안 고통을 당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고통을 당하지 않고는 나비구실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비가 누에고치를 빠져 나오면서 몸부림을 칠 때에 몸 속에 있는 영양분이 이동한다는 것입니다. 그 영양분이 나비의 날개 쪽으로 모아져서 날개에 힘이 생겨 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은 심지어 만물에 있어 고난까지도 유익하게 사용하십니다.
곤충계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이라는 것을 주셔서 고난 때문에 몸부림을 치게 하지만 몸부림 속에서 나도 모르는 힘이 생기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능력과 하늘나라를 소망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요즘 여자들이 제왕절개 수술을 많이 합니다. 이것이 의술이 발전한 덕분이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고통을 통해 자녀를 생산하게 한 것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고난과 내 일이 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 심지어 요즈음 우리 사회에 불황이 닥친 것까지도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감사할 조건이 됩니다.
이것을 우리 자녀들도 깨달아야 합니다.
요즘 우리들의 문제는 부모들이 아이를 너무 편하게 키우고 어려움을 미연에 막아주는 것에 있습니다. 특히 요즘 우리의 입시제도가 아이들이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모든 일을 편하게 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것이 결코 자녀들 장래에 좋은 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형통한 일도 주지만 때로 곤고한 일도 주셔서 형통할 때는 찬송하게 하고 곤고할 때는 기도하게 하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인생을 좀더 의미있게 살도록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이기에 우리는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우리가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심으로 감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할 때 얻는 상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범사에 감사합니다.
시편 50:14,15에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를 하나님이 환난에서 건져 주시겠다고 약속합니다.
또 잠언 3:9-10에 보면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 틀에 포도즙이 넘치리라" 했습니다.
감사의 예물을 드리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넘치게 채워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또 빌 4:6,7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감사할 때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스펄젼 목사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촛불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 전등불을 주시고, 전등불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 햇빛을 주시고, 햇빛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 햇빛도 필요 없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영광스러운 빛을 주신다"
이렇게 감사하는 자에게는 여러 가지 하나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삶을 보면 그렇게 감사하지 못하고 사는 것을 봅니다.
일이 잘 될 때는 감사하지만 잘 안 될 때는 감사하지 못하고, 좋을 때는 감사하지만 좋지 않은 것 같을 때는 감사하지 못하는 우리를 봅니다. 왜 그럴까요?
크게 두 가지인 줄 압니다.
하나는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16절에 항상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또 17절에 보면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이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조건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런 말씀에 순종하기를 더디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범사에 감사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으면 그대로 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 말씀이 얼마나 진실된지 알게 될 것입니다.
또 한가지,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범사에 감사하지 못합니다.
여기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 전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의 순서는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항상 기뻐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범사에 감사하게 됩니다.
우리 한국교회 초기에 사랑의 원자탄으로 알려진 손양원목사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는 여수 반란 사건 때에 공산당에게 두 아들을 잃었습니다.
그랬는데 그 후에 두 아들의 장례식을 거행할 때에 열 가지의 감사를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어떻게 보면 미친 사람이지요. 울어야 정상인데 감사를 했습니다.
나 같은 죄의 혈통에서 순교자 자식 둘이 나게 되었으니 감사하고, 많은 성도들 중에서 이 귀중한 보배를 특히 내게 주셨으니 감사하고, 3남 3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장자와 차남을 바칠 수 있게 주셨으니 감사하고,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거든 하물며 두 아들이 순교하게 되었으니 감사하고, 미국 보내려고 준비했던 아들을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에 갔으니 감사하고, 두 아들 죽인 원수를 회개시켜 아들을 삼고자 하는 사랑을 주셨으니 감사하고... 등등을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그가 어떻게 이런 감사를 할 수 있었는지 압니까?
처음부터 그런 것 아닙니다.
그 때 그 목사님을 유심히 살핀 사람이 전한 말에 의하면 두 아들의 참사 소식을 듣고 손 목사님은 이불을 덮고 누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깊이 신음하기를 "하나님, 하셔도 너무 하십니다"는 말만 계속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식음을 전폐하더니 그 후에는 엎드려 기도하시더랍니다. 무어라고 기도하셨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가를 묻지 않았겠습니까? 그리고 나와서 장례식 때 한 말이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힘으로는 범사에 감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힘 주셔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절대로 범사에 감사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와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점이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그것이 범사에 감사하는 데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그러러면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감사하라고 하셨으니 우리가 의지적으로라도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그 누구도 범사에 감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생각해 보면 참 감사하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내년 초가 우리나라 경제의 위기라고들 말합니다.
기업들이 도산하고, 실업자들이 또다시 급증하고 있으며 경기가 메마르고 있습니다.
성도라고 예외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성도는 이 때에 진정한 성도의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이런 때에도 감사를 잃지 않고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감사해야 할 많은 이유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말할 수 없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또 하나님은 감사하는 자를 축복하십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이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기도함으로써 범사에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 하나밖에 없는 아들까지 주신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고, 또 이 세상 사람들에게도 참 크리스챤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며, 우리 자신이 복을 받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보여주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이철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