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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에 대한 성경적 견해 (본문 고전10:31,11:1)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갈등들이 있습니다.
가정에는 가정대로 부부간의 갈등, 부모와 자식간의 갈등, 고부간의 갈등들이 있고, 직장에는 직장대로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갈등, 상사와 부하직원간의 갈등, 동료와의 갈등이 있는가 하면, 사회에는 사회대로 계층간의 갈등, 지역간의 갈등들이 있고, 정계에는 여야간의 갈등들이 있습니다.
그 밖에도 국가간의 갈등, 민족간의 갈등, 특별히 우리 나라의 경우 남북간의 갈등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갈등이 교회라고 없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는 교회대로 여러 종류의 갈등이 있습니다.
교역자와 평신도간의 갈등, 성도와 성도간의 갈등, 부서와 부서간의 갈등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이번 감람원에도 썼습니다만, 미국 노쓰캐롤라이나주 애쉬빌에 있는 빌리그래함 훈련쎈터에서 개최된 피스메이커 미니스트리의 연례모임에 참석하여 이런 갈등의 문제들을 성경적으로 해결하려는 사람들과 교제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미국 전역에서 모인 사람들과 세계 각 곳에서 모인 사람들이 함께 세미나를 갖고 심포지움을 면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피스메이킹을 교회 안에서 또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이룰 수 있을까 하는 것을 연구하고 발표도 하면서 진지한 시간들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하나님은 저에게는 한국교회를 향한 간절한 기도를 하게 하셨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에도 이런 운동이 일어나게 하옵소서!
우리 남서울교회로부터 이런 일을 하게 하옵소서! 하는 기도였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어떤 면에서 그동안 양적 부흥에만 매달려 왔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많은 수의 교회와 인구 25%에 달하는 교인 수를 만들어 내기는 했지만 우리들 가운데 해결해야 할 많은 화평의 문제는 덮어둔 채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마다 상처가 있습니다. 믿는 성도들 간에도 보이지 않는 담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 어떤 변호사와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요즈음 법정의 소송 건 가운데 교회나 교인들이 관계된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런 것은 어떻게 교회에서 해결이 되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성경에 보면 교회의 문제는 교회 안에서 해결하라고 했습니다.
교인들간의 문제도 사회 법정으로 가지고 가지 말고 교회 안에서 해결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이 세상사람들을 판단할 것인데, 왜 우리들이 우리 문제를 세상사람들에게 가지고 가서 해결을 원하느냐고 고린도전서 6장에서 강력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마땅히 갈등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교회가 교회답고 성도가 성도다운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그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세상 법정에 가지고 가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교회는 문제를 해결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것보다 화평의 문제만큼은 우리들이 해결해야 합니다.
그것을 세상에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정말 교회다운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앞으로 기회 있는 때마다 이번에 제가 배운 것을, 또 깨달은 것을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저와 여러분이 화평을 세우는 사람, 곧 피스메이커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정말 이 시대에는 화평을 이루는 피스메이커들이 필요한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러지 않으셨습니까?
"화평케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그렇습니다! 누가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겠습니까? 화평케 하는 자가 아니겠습니까?
또 히 12:14에 보면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크게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교회에서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세우고 일을 하는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아무리 크고 많은 일을 한다 한들 우리 안에 화평함과 거룩함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가 화평케 하는 사람, Peacemaker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남서울교회가 화평을 좇는 교회, Peacemaking Church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동안 우리 남서울교회는 한국교회에 전도폭발을 소개함으로 교회가 영혼구원의 사명에 충실하도록 일깨워 주는 일을 해왔습니다. 이제는 이러한 일과 함께 한편의 축이 될 수 있는 Peacemaker Ministry를 소개함으로써 교회의 진정한 모습이 무엇인가를 일깨워주는 데도 앞장서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앞으로 여기에 대해서 세미나도 개최하고 훈련 프로그램도 열어서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만, 오늘은 이런 Peacemaking에 있어서 늘 문제가 되는 갈등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올바른 Peacemaking이 이루어지려면 무엇보다 먼저 갈등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어야 하겠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갈등에 대해서 무어라고 말하는가?
성경은 모든 갈등을 다 나쁘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떤 차이점들은 자연스럽고 유익하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를 독특한 개성을 지닌 인간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인간은 종종 의견이나 신념, 욕구나 전망, 그리고 우선 순위가 다르기 마련입니다.
이런 차이점들은 본질적으로 옳거나 그른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단지 하나님이 부여하신 다양성과 개인적 취향의 결과입니다.
이런 차이점들은, 적절하게 다루어질 때 생산적인 대화를 자극하고 창조를 북돋워 주며 유용한 변화를 촉진시키고 생활을 흥미롭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간관계에 있어서 통일성을 추구한다 할지라도 획일성을 주장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모든 갈등을 회피하거나 혹은 다른 사람들이 항상 우리에게 동의하기를 기대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의 다양성을 기뻐하고 우리와 달리 사물을 보는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함께 일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갈등이 중립적이거나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많은 불화가 죄 된 동기와 행동의 결과라고 가르칩니다.
약 4:1-2에 보면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고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했습니다.
만일 갈등이 도저히 간과할 수 없는 죄스러운 욕구나 행동의 결과일 때, 우리는 그것을 정면으로 다루어 나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마 18:15상)고 하신 이유입니다.
사랑으로 직면하는 것이 종종 회개의 실마리가 되어 분쟁의 원인이 되는 뿌리를 제거하고 진정한 평화에로의 길을 열어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우리가 갈등을 불편함으로 보거나 이기적인 이익을 얻는 기회로 보아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임재와 권능을 보여주는 기회로 여겨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바로 고린도 교회가 신앙, 법률, 음식물에 관한 갈등으로 분열된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 바울이 권면한 내용입니다. 다시 한번 본문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31)그런즉 너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32)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33)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11:1)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이 말씀은 갈등에 대한 혁신적인 견해를 제시합니다.
곧 갈등을 좋은 기회로 삼으라는 말씀입니다.
먼저는, 갈등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기회로 삼으라고 합니다.
(31) "그런즉 너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여기 '무엇을 하든지' 라는 말에는 갈등이 일어나는 경우까지 포함됩니다.
그 당시 고린도교회를 보면 여러 가지 갈등을 안고 있었습니다.
그런 갈등까지 포함해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기회로 삼으라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갈등은 이런 기회를 제공합니다.
우리는 갈등이 있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갈등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더 기도하게 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게 됩니다.
저는 처음 예수 믿었을 때 교회는 문제가 없는 곳인 줄 알았습니다.
교회에 나온 사람들은 다 천사 같은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 되서 교회에도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믿는 사람들도 완전한 사람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 후에 목회를 해 오면서 저는 그런 사실을 더욱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이 땅에 완전한 교회란 없고 또 완전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완전한 교회를 찾아서 아무리 이리 저리 찾아다녀도 그곳에는 불완전한 것이 항상 존재합니다.
그래서 누군가 스펄젼 목사님께 와서 물었다고 합니다.
"목사님, 완전한 교회가 있으면 소개시켜주십시오". 그러자 스펄젼 목사님이 말씀하시길 "당신이 찾아보고 그런 교회가 있으면 나에게도 알려주십시오. 그러나 아마 그런 교회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그곳에 가는 동안에 또 완전치 못한 교회가 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멀리서 볼 때는 존경스러운 사람이지만 가깝게 보면 부족함이 있고, 흠과 티가 있는 것이 우리 인간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이런 것을 볼 때마다 이로 인해 신앙을 잃어버리지 않은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오히려 저는 교회생활과 목회를 하면서 이런 것을 많이 보고는 이 세상에서 완벽한 것을 추구하기 보다 완전하신 하나님을 의지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불완전한 가운데서 완전한 하나님을 의지하기 위해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갈등이라는 것은 우리를 더 하나님께 가까이 하게 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는 기회가 됩니다.
또 갈등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게도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순종인데, 갈등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우리는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야 하고 이 갈등 때문에 순종의 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갈등이 생길 때 하나님이 왜 이런 갈등을 주셨는지, 이 갈등을 통해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고, 갈등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그 갈등이 내게 무거운 짐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의 도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갈등을 해결하려고 애쓰고 순종하다보면 혹 그 갈등의 결과가 내가 원하는대로 되지 않았다 해도, 그 동안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였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그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갈등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기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갈등은 우리로 하여금 남을 섬기게도 합니다.
"(32)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33)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갈등이 생겼을 때, 성경대로 대처해서 잘 해결하면 우리는 교회에 거치는 것을 제거하게 됨으로 교회에 큰 유익을 줄 수 있을 뿐 아니라,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을 구원받게 하는 데도 크게 기여하게 됩니다.
교회마다 갈등거리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갈등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성도가 있다면 교회에 얼마나 큰 유익이 될까요?
저는 여러분들이 교회를 위해서 그런 일들을 좀 많이 하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교회를 위해서 할 일이 많습니다. 전도를 해서 많은 사람을 교회에 인도하는 일도 해야 하고, 주일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 성가대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도 해야 하며, 남이 알아주지 않는 구석진 일의 봉사도 해야 하고, 그밖에 예배안내를 하는 일, 주차하는 일, 등등. 교회를 위해서 할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 남이 알아주지 않는 일을 해야 할 많은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정말 필요하고 요긴한 일이 무엇인고 하니, 여러분들이 목회자를 돕고 교회를 유익하게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고 하니, 성도들 간에 화평을 이루는 일, 곧 여러 가지 갈등을 해결해 주는 일입니다.
만일 누가 교회에서 이런 일을 한다면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도 그동안 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어떤 분들이 가장 고마운가 하면 여러 가지 일을 해주시는 분들이 다 고맙지만 그 중에도 교회 안에서 피스메이킹의 일을 감당하는 사람, 화평케 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참 고맙습니다.
이제 새해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교회에서도 새해의 계획을 세우고 예산을 짜며 새해에 일할 사람들을 세우는 일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을 하다가도 보면 갈등이 생깁니다. 그런데 이런 가운데서도 갈등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화평하게 모든 일을 할 수 있도록 여러분들이 힘써준다면 얼마나 목회자의 짐이 가벼워지고 교회가 얼마나 힘있게 나갈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일은 전도와 기도, 교육이 다 필요하지만 우리 안에서 화평케 하는 사역, 갈등을 해결해가는 일을 하는 사람이 정말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이런 일을 해결해나갈 때에 다른 사람들에게 교회가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들의
모임이며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임이라는 것을 보여주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가 이렇게 전도를 열심히 함에도 불구하고 전도하는 데에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화평한 길을 걷지 못하는 이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번에 KBS TV에서 김용옥씨가 공자에 대한 '논어 이야기'를 해나가면서 기독교에 대한 비판과 기독교를 비웃는 묘한 말을 함으로써 기독교가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제가 인터넷을 통해 지금 당장의 문제가 무엇인가 하고 보니, 그가 자신이 했던 말에 대한 해명이 나와 있었습니다.
그는 말하길, 자신은 모태신앙으로 기독교를 믿는 신자이며, 가장 먼저 공부했던 학문도 신학일정도로 기독교에 대해 애정과 믿음이 크다고 했습니다. 그가 정말 기독교인인지, 기독교에 대해 애정과 믿음이 있는지는 좀더 지켜봐야 할 일이고, 그 자신이 한 말에 대해서는 할 말이 참 많습니다. 이번 감람원에도 방동섭 목사님이 아브라함의 이야기와 공자의 이야기를 쓴 것이 있는데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가 왜 이렇게 기독교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하게 되었는지, 해명을 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신이 신학을 공부하던 시기 은사였던 안병무 목사님의 일화를 들었습니다. 안병무 교수님이 대대로 유학을 공부하는 선비 집안의 학자였는데, 당시 일부 유학자들이 부패하고 타락하는 모습에 실망해서 근대사회에서 우리민족에게 유일한 희망은 기독교라는 생각에서 신학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김용옥씨가 말하기를 자신이 기독교에 그런 입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근대사회에 그처럼 큰 희망을 한몸에 받았던 기독교가 현대에 이르러 그런 희망과 바램을 충족해 주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다시 일어서라는 격려와 각성에서 그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이 분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원래 말을 잘 하는 사람이라 이렇게 곤경을 빠져나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기독교에 대한 김용옥씨의 생각이 어찌 이 한 사람만의 것이겠는가?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기독교가 그렇게 비춰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 기독교에 대해 기대를 걸어왔는데, 그동안 한국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준 것은 끝없는 분열과 갈등과 기독교인들이 주장하는 사랑을 자기들끼리 행하지 못하고, 예수님이 이 땅의 평화를 위해 왔다고 하면서 자신들끼는 화평하지 못한 것이 아무리 전도하고 아무리 큰 소리로 외쳐도 듣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갈등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우리는 스스로 교회의 힘을 잃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비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비추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가운데 어떤 사람이 갈등의 문제를 해결하고 남의 문제를 도와 줌으로 진정한 화평이 이루어졌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섬김은 없습니다.
교회를 위해서도 그렇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그러며, 안 믿는 사람들에게도 그보다 더 좋은 전도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종종 갈등을 허락해 주시는 것은 이렇게 우리로 하여금 남을 섬길 수 있는 기회를 가지라고 그러시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마지막으로, 갈등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게 됩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로 그 아들의 형상을 본 받게 하려고 쓰시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우리에게 갈등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1:1에도 보면, 바울은 갈등이 많았던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를 본 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바울도 많은 갈등을 경험하면서 그리스도를 본 받게 되었는데, 고린도교회 성도들도 그런 자기 자신을 본 받으라는 말이었습니다.
우리는 갈등을 경험해 보면서 내가 얼마나 부족하고 불완전한 존재인 것을 깨닫습니다.
내 속에도 얼마나 완고한 교만이 존재하고 내게도 얼마나 분노하고 용서치 못하는 것들이 있으며 나도 얼마나 말과 행동에 실수가 많은 사람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과 부딛쳐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나의 약점들과 결점들을, 갈등을 통해서 발견하면서 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주님을 본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갈등이란 우리에게 해 되는 것만 아닙니다.
만일 그럴 것 같으면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갈등을 허락하셨을 때에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갈등을 통하여 하나님께 더욱 영광을 돌리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또 갈등을 통해서 더욱 남을 섬기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갈등을 통해 더욱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니 갈등이라는 것이 결코 우리에게 손해만 되는 것이 아니라 유익한 기회도 된다는 말입니다. 물론 갈등을 잘 처리해야 그렇게 되는 것이지요.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갈등이 없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갈등이 있습니다.
가정에는 가정대로, 사회는 사회대로, 교회는 교회대로 갈등이 있습니다.
이런 갈등이 생길 때, 그런 갈등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 보면서, 그 갈등을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는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또 그 갈등 속에서 내가 남을 어떻게 섬길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런 갈등을 통해서 나 자신을 바로 발견하고 내가 주님을 닮아가는 소중한 기회로 삼는다면 우리 가운데 일어나는 갈등까지도 하나님의 은혜가 될 것입니다.
이런 '갈등에 대한 성경적인 견해'를 바로 깨달으면서, 우리 모두가 갈등을 잘 해결하고 화평을 이루는 데에 앞장서는 Peacemaker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이철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