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을 건너기 전에 (본문 창32:21-31,호12:3-5)

그 예물은 그의 앞서 행하고 그는 무리 가운데서 경야하다가,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 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 새,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네며 그 소유도 건네고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되었더라.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 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야곱이 청하여 가로되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 그 사람이 가로되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 환도뼈로 인하여 절었더라. <창 32:21∼31>

야곱은 태에서 그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저를 만나셨고 거기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저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여호와는 그의 기념 칭호니라. <호 12:3∼5>

야곱은 그의 고향 브엘세바를 떠나 저 밧단아람 삼촌집으로 도망간지 20년만에 크게 성공을 하고 금의 환향을 합니다. 거부가 되어서 돌아옵니다. 그가 밧단아람으로 도망가게된 동기를 우리는 잘 압니다. 자기 부친 이삭을 속이고 형 에서를 속이는 그로 인해서 에서가 악한 감정을 가지고 그를 죽이려 하기 때문에 살기 위해서 도망가게 된 것입니다. 그때 자기 모친 리브가가 하는 말이 있습니다. 네 형 에서의 분노가 누그러지게 되면 너에게 기별할테니 그때에는 고향으로 돌아오라는 약속을 했습니다. 그러나 2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좋은 기별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에서는 마음속에 여전히 야곱에 대한 적개심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성공하고 돌아와서 얍복강이라는 강가에 이르러서 몇 명의 종들을 강건너편에 있는 에서에게로 사람들을 보냈는데 들려오는 소식은 큰일났습니다. 에서라고 하는 사람이 칼을 손에 빼들고 400명의 군사에게 무장을 시켜서 당신이 건너오기를 지금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말에 야곱은 기가 질렸습니다. 온 몸이 떨렸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크게 성공을 한 것같은데 생명의 위험을 느끼게 되니 나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창세기 32장 24절 말씀에 보면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그랬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타났는데 그가 야곱과 씨름을 하다가 라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습을 하고 지금 야곱에게 나타났던 것입니다. 야곱은 그 사람을 붙들고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매달려 살려달라고 간구를 합니다. 그때 그가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간구했다는 말이 호세아서 12장 4절에 나오지 않습니까? 2절에서 4절까지 보면 여호와께서 유다와 쟁변하시고 에서의 소행대로 벌을 주시며, 그 소위대로 보응하시리라. 야곱은 태에서 그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다는 말이 4절에 나옵니다. 호세아선지자는 얍복강 나루터에서 홀로 남아 하나님과 씨름했던 야곱, 그때 그는 울었다. 그리고 간구했다 라고 보충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강을 건너야만 고향에 갈 수 있는데 지금 고향에 갈 수 없는 장애물이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전진할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지금 그가 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얍복강이 아닙니다. 그가 지금 강을 건널 수 없도록 막고 있는 것은 불안입니다. 두려움입니다. 죄의식입니다. 사람은 죄를 짓게 되면 가까운 사이가 멀어집니다. 하나님과 멀어지고 형제와도 멀어지고, 친한 친구와도 멀어지게 하는 것이 죄입니다. 죄는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고 두렵게 만듭니다. 어떻게 해야만 될 것인가? 울어서 눈물로 해결할 것인가? 참아서 기다려서 해결할 것인가? 여러분,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내는 죄, 그것이 우리를 사망에 처하게 했는데 그것은 우리가 울어서 눈물로 해결될 것이 아닙니다. 지금 야곱은 하나님을 잊고 살았다가 어떤 한계상황이 나타나자 그때서야 잃었던 하나님을 다시 찾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속성을 둘로 나눈다면 그 분은 사랑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그분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어떤 죄인 괴수라도 그 죄로 인하여 망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죄는 반드시 벌을 받아야 된다라고 공의를 외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택한 백성이 죄를 범하면 육신의 병으로 치든지, 경제적 파탄으로 치든지, 정신적 갈등으로 치든지 어느 하나도 편안함을 주는 게 아닙니다. 죄의 결과는 망하는 것이고 지옥 형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만 하나님 앞에 지은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그것은 사람의 방법으로 불가능하고 하나님의 방법으로만 가능한데 하나님의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조건 없는 사랑으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신 일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죄는 사람이 지었는데 죗값은 그 아들 예수님이 담당하게 하셨습니다. 이사야 53장 6절에 우리는 각기 양처럼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무슨 공로나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보배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없고 점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서 한 것이라고 베드로전서 1장 18절 이하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원죄, 유전 죄를 금식기도한다고 없어지겠습니까? 우리가 죽는다고 없어지겠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뤄놓은 대속을 통해서만 가능한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 구원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죄문제 해결은 첫째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는 일입니다. 어떤 죄를 범한 사람이라도 빈 손 들고 나와 십자가를 붙드는 사람은 주님이 버리지 않고 구원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이 말씀 지키지 않는 범죄는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그것은 회개를 통해서만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요한1서 1장9절 말씀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의롭고 미쁘시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신다 했습니다. 회개해야만 우리가 천국 갑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첫 번째 외친 복음의 내용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회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바로 되지 못한 생각, 마음가짐, 언행을 하나님 기뻐하는 대로 고쳐 놓는 것입니다. 돌려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인격적으로 해야 합니다. 인격적인 회개란 삼단계를 거치는 것인데 첫째, 무슨 죄를 지었나 죄를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회개할 수 있겠습니까? 두 번째는 내가 어떤 죄를 범했는지 깨달은 것을 자백하는 단계입니다. 하나님 앞에 지은 죄는 하나님께 내놓아야 합니다. 사람에게 잘못한 것은 사람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다시는 그렇게 좋지 못한 죄를 짓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회개에 합당한 열매라 하였습니다.

여리고성의 세무서장 삭개오가 토색해서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 삭개오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회개할 때 주님, 나의 재산을 다 팔아서 절반은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남의 물건 토색한 일에 대해서는 사배를 갚겠습니다 하고 삶을 정리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죄를 깨닫고 뉘우치고 자백은 하는데 삶을 고쳐놓지 않는다면 열매없는 나무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4장 22절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서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새사람을 입으라 그랬습니다. 새 옷을 입기 위해서는 헌 옷을 벗어야 합니다.
오늘 교회 다니는 신자들 가운데 가장 회개하기 어려운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목사님, 장로님, 오래된 사람들이 참으로 회개하기 어렵습니다.

제가 한 책을 보니까 병원에 입원한 환자들 가운데 제일 골치 아픈 환자가 누군지 아십니까? 의사, 의사가 입원했을 때 제일 골치가 아프다고 합니다. 아는 게 많아서 왜 이렇게 하냐, 저렇게 하지? 자기가 환자인줄 잊어버리고 의사인줄 알고 자기가 처방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의사가 입원하면 제일 골치 아프다고 합니다. 그 속에 독선이 있고, 오만이 있습니다. 저는 2001년도를 설계하면서 나는 어떠한 목사가 되어야 하는가 많이 고민을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 마음에 꼭 드는 목사가 되어야 하겠는데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을까 그것 때문에 날마다 고민을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고민은 우리를 회개하게 합니다. 우리를 주께로 더 가까이 가게 합니다. 세상 근심은 사망에 이르지만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복된 자리로 우리를 끌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교회 안에서 자존심 강하고, 자기 판단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누구입니까? 오래된 사람들 중에 많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많이 알고 있는데 삶을 바르게 고쳐놓지 못하는 사람들,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소경된 인도자라 그렇게 책망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개혁이 위에서부터 일어나야 됩니다. 그래야 되는 것입니다. 지도자들은 변하지 않는데 어떻게 백성이 변화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 모두는 어떤 대표성을 가진 분들, 어떤 부서를 담당한 책임자들 우리들이 새로워지면 전체가 새로워지게 될 줄 믿습니다.

강을 건너기 전 야곱은 해결할 문제가 몇 가지 있었는데 그것은 지난날의 삶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그는 강을 건너기 전에 눈물로 자기 죄를 회개합니다. 그는 마음이 강퍅한 에서의 마음을 녹여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내 힘과 수단방법을 의지해서 살아온 내 고집을 꺾어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우리는 2000년도라고 하는 강을 건너서 2001년도라고 하는 새로운 역사에 들어가기 전에 오늘 이 역사적 시점에서 무엇을 할 것이냐? 누군가의 마음에 한을 심어주었거나 상처를 주었거나 누군가로부터 원망을 받을만한 잘못된 일들이 생각나거든 이 강을 건너기 전에 오늘 우리가 해결하고 나아간다면 새로운 역사는 전개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 때문에 우는 사람입니다.
1840년 영국의 선교사 리빙스턴이 아프리카 선교를 갔습니다. 전도를 갔습니다. 그리고 의료선교를 계속 하는데 그는 일기장에 이런 일들을 써놨습니다. 토인들은 수술할 때에 잘 참는다. 지름 2.5cm 되는 커다란 종기를 칼로 찢을 때에도 태평스럽게 이야기를 나눈다. 어른들은 아이들처럼 울면 안된다고 그들은 믿고 있다. 그러나 복음이 그들에게 들어가고 성령의 역사가 그들에게 나타나는 순간부터 그들은 울기 시작했다. 우는 것을 수치로 알았던 그들은 어린아이처럼 크게 소리내어 울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남자가 운다는 것은 약한 것을 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남자 어른이 운다는 것은 수치로 알고 있던 토인들, 그러나 복음이 그 속에 들어가고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니까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교회와서 울어본 일이 있습니까? 더욱이 복음을 접할 때 십자가의 사건이 나의 사건이며, 그의 죽음이 바로 나의 죽음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죄는 내가 지었는데 벌은 주님이 받으셨다. 그래서 가슴을 치고 통곡하며 울어본 일이 있습니까? 어린아이가 세상에 태어나면서 웁니다. 우리가 거듭날 때도 죄때문에 우는 것입니다. 복음을 접할 때 울 수 있는 사람, 사람이 울 때 가장 순수해지고, 가장 착해집니다. 그래서 천국은 이 땅에서 많이 우는 사람들이 들어가기 때문에 그곳에 가면 눈물을 닦아준다는 말이 그래서 있는 것입니다. 죄 때문에 우는 자, 죄 사함을 받은 증거입니다.
눅 7:48절 보면, 죄 많은 여인이 예수님께 찾아와서 향유를 예수님 발에 발라드리고 눈물을 흘립니다.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었습니다. 그때에 딸아, 네 죄사함을 받았다 라고 말씀했습니다.
다윗왕은 나단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얼마나 많이 울었든지 침상이 썩기까지 울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야의 아내를 범하고 우리야 장군을 전선에서 죽게 했던 야비했던 다윗,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고 울 때 하나님은 그를 버리지 않고 다시 붙잡아 주셨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완전한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지 않아도 될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과거의 잘못이 있어도 진심으로 뉘우쳐 회개하는 사람에게 소생의 은혜를 주실 줄로 믿습니다.
베드로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외칩니다. 너희가 각각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야곱은 강을 건너기 전에 회개했습니다. 우리도 지난 날 바로 살지 못한 부분을 오늘 회개하고 새해를 시작한다면 좋은 일들이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 야곱은 강을 건너기 전에 환도뼈가 위골되었습니다.
천사와 씨름할 때 천사가 환도뼈를 치니 환도뼈가 위골되었습니다. 이 환도뼈는 엉덩이 아래쪽 넓적다리를 받들고 있는 좌골입니다. 그래서 좌우의 한 쌍의 뼈를 환도뼈라고 하는데 환도뼈는 몸의 중심으로 힘과 생명을 상징합니다. 고대 군인들은 이 환도에 칼을 찼기 때문에 그래서 환도뼈라는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위골이 되었다는 말은 뼈가 부러졌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신체 중심, 한 부분을 위골시켜서 더 이상은 힘을 못 쓰게 만들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야곱으로 하여금 환도뼈가 위골되게 하셨을까, 그것은 바로 지금까지 야곱이 믿고 살아온 자신을 더 이상은 믿고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야곱은 어떤 사람입니까? 남보다 영리한 사람입니다. 신체가 건강한 사람입니다. 뜻을 한번 정하면 반드시 성취하고야 마는 적극적인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수성가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보다 뛰어난 부분이 많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남보다 머리가 좀 더 영리하고 지식이 꽤 많고 신체적으로 결함이 없고 사회적으로 지위, 명예와 권세가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무릎 꿇습니까? 하나님보다는 자기 생각이 더 옳다고 생각합니다. 야곱은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사람이 자아의식을 갖는 다는 것은 자아실현을 목표로 살기 때문에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너무 자아의식이 강한 나머지 하나님이 들어갈 틈이 없으면 하나님은 그 사람이 가장 믿고 의지하는 것을 쳐서 더 이상 못 믿게 만듭니다. 우리는 하나님보다 더 나를 의지한다든지, 하나님보다 더 아들, 딸을 의지한다든지, 하나님보다 더 명예나 권세와 재물을 의지하면 그것을 뺏어 가시고 하나님을 믿게 만듭니다. 이유는 육신보다는 영혼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환도뼈가 위골되어야 하나님 의지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왜 우리는 편안할 때 건강할 때, 잘 될 때 하나님 찾지 않을까? 왜 깨어지고 망가지고 병들고 망해야만 하나님을 찾을까? 이것이 바로 죄로 인하여 타락한 인간의 부패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는 어젯밤 이 말씀을 묵상하다가 삼십년 전에 어느 부흥강사로부터 들었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독립문 성결교회를 담임했던 임영재 목사님 부흥회에 참석했다 제가 들었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 어른께서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여러분, 제가 전도사 시절에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시골교회에서 겨울에 부흥회를 할 때인데 밤집회를 마치고 숙소에 누워있는데 갑자기 온 동네가 떠들썩했습니다. 알고 보니 동네 공동우물속에서 도깨비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무슨 도깨비인가 해서 가봤더니 이상한 것은 우물 안에 파란 불이 켜졌다 꺼졌다 해서 이게 무엇인가? 그래서 기다란 대나무 가지를 가져다가 쿡 찌르니까 야옹 그러더랍니다. 고양이가 쥐사냥에 나섰다가 그만 빠진 것입니다. 고양이같은 짐승들은 밤에 눈을 뜨면 파란 불이 켜진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고양이눈을 보고 도깨비가 나타났다고 야단법석을 떤 것입니다. 그래서 후레쉬를 비취 보니까 추운 겨울에 우물벽이 너무 미끄러워 올라오지 못하고 빠져있으니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래서 저 고양이를 구원해 주어야겠다 하고 기다란 대나무 가지 끝에 갈고리를 달아서 얘야, 타라 하고 내밀었더니 고양이가 비명을 지르면서 탁 쳐버리더라는 것입니다. 아니 자기를 구원해 주겠다고 내미는 갈고리를 자꾸 치는 것입니다. 아니야, 이것은 너를 해치는 갈고리가 아니고 너를 구원하는 갈고리이니 빨리 올라타! 하고 내밀면 치고 내밀면 치고 해서 가만히 생각하다가 이 고양이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반쯤 죽여야 되겠다 생각해서 거꾸로 막대기를 쥐고 탁 때리니까 깩 하고 죽었습니다. 기절을 해 버린 것입니다. 기절을 하니 이제는 덤벼들지 않더랍니다. 그래서 갈고리로 건져서 수건으로 싸서 아랫목에 갖다 놓았더니 나중에 야옹 하고 살아나더랍니다. 자기는 그 사건을 통해서 깨달은 것이 있답니다. 우리 인간은 자기를 구원하겠다고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전해주면 꼭 고양이처럼 할퀸다는 것입니다. 나 들으라고 설교했지? 하며 대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구 들으라고 설교하겠습니까? 결국 시험만 잔뜩 든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탁 쳐서 반 죽여놓으면 그때서야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하고 손을 든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지금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이 눈앞에 나타나지 않으면 기도 할 사람이 아닙니다. 머리가 얼마나 영리하고 신체가 얼마나 건강한데 네 명의 여자를 거느릴 정도면 보통 남자가 아닙니다. 이 사람이 기도합니까? 하나님 찾습니까? 그러니 하나님이 환도뼈를 확 꺾어놓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힘을 못 쓰니 하나님, 나 좀 살려주세요 한 것입니다. 남보다 뛰어난 사람들은 조심하십시오. 환도뼈가 위골될 염려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위골을 시켜 놓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고난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고난이 도리어 유익되는 때가 있는 줄 믿습니다. 시편119:67절 말씀에 보면,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내가 주의 율례를 지키나이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욥이라고 하는 동방의 의인이 많은 시련을 당합니다. 10남매의 자녀를 잃었습니다. 많은 재산을 잃었습니다. 몸에 악창이 나서 병들어 쓰러집니다. 그의 아내가 악담을 합니다.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말합니다. 그때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을 받는 것도 마땅하니라. 그대의 하는 말이 어리석도다 하고 끝까지 하나님을 시인하더니 그가 그 시련을 이길 수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욥기서 23장 10절 말씀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이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복이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자연적인 것, 신체적인 것이고, 하나는 영적인 것인데 지금 야곱은 신체적으로 자연적으로 육신적으로 필요한 것은 다 갖추었어도 하나님과의 교제가 그동안 끊어져 있었습니다. 영적인 신령한 은혜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모든 복을 누가 준 것이냐? 하나님이 준 것이 아니냐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름다운 멋있는 자녀가 있고 많은 재물이 있어도 생명의 위협 앞에 놓이게 되면 그게 나에게 무슨 유익입니까?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환도뼈가 위골된 상태에서 무슨 기도를 하느냐면 당신이 내게 축복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을 보내지 아니하겠나이다 하고 붙들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구하는 축복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위골된 환도뼈를 정상으로 돌아오게 해주십시오. 위골된 환도뼈를 고쳐주십시오. 그런 기도가 아닙니다. 환도뼈 고쳐달라는 말은 절대 하지 않았습니다. 내 환도뼈 부러진 대로 내버려두고 날 좀 살려달라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죽음의 위기에 있으니 살려달라는 것입니다. 생명의 주인이 에서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을 그는 믿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허락없이 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이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것을 믿었던 그는 강을 건너기 전에 내 생명의 보장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내야 되겠다는 생각 때문에 매달렸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축복하기 전에 그의 이름을 물었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제 이름이 야곱입니다. 야곱이란 뜻은 발뒤꿈치를 잡은 자, 속이는 자, 빼앗는 자란 뜻입니다. 야, 그런 이름을 가지고 무슨 복을 받겠느냐? 그런데 그는 솔직하게 제 이름을 속이는 자, 빼앗는 자입니다 하고 말합니다. 사람은 자기 속에 있는 부정적인 면을 공개적으로 내놓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나의 부정한 것을 다 내놓아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치료의 은총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할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이기었음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야곱을 용납하고 그의 믿음을 인정해 준 것입니다. 이스라엘, 그 말은 모든 악으로부터 구원과 승리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되어야 합니다. 죄와 싸워 이기는 승리자,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 이 이스라엘은 궁극적으로 예수 안에서 거듭난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47절 말씀 보면, 예수님은 그 마음속에 간사함이 없는 나다나엘을 만났을 때, 너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칭찬했습니다. 오늘 우리 마음속에 거짓이 없고 진실할 때 바르게 살 때 참 이스라엘 사람인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2000년의 강을 건너기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는 야곱이란 이름을 버리고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바꾸라는 명령을 따라서 우리가 좀 새로워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사람이 새로워져야 새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새 달력 갖다 걸고, 무슨 계획을 세우고, 새 결심만 했다고 새 역사가 나타나는 게 아니고, 사람이 변해야 세상이 변하는 것입니다.
강을 건너기 전에 새 이름을 받자는 것입니다. 야곱은 새 이름을 받아서 새 아침을 맞이하는데 브니엘에서 해가 돋았는데 그 날 아침의 해는 유난히도 밝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매일 떠오르는 태양이지만 은혜 받고 맞이하는 새 아침은 별난 날로 우리에게 다가설 수 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새 이름을 가지고 믿음을 가지고 강을 건넜습니다. 그때 에서가 달려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에서의 손에 칼이 없습니다. 400명의 군사도 눈에 보이질 않습니다. 반가운 표정으로 에서가 달려와서 야곱을 끌어안더니 엉엉 울었습니다. 왜 울었겠습니까?
너를 미워했던 내 마음을 용서해라. 야곱이 왜 울었겠습니까? 20년전에 잘못했던 내 잘못을 용서해 주십시오. 피차 울었습니다. 야곱이 변화를 받으니 에서가 변화를 받습니다. 야곱의 환도뼈가 위골되고 자아가 깨지니 강퍅했던 에서의 마음도 함께 무너져 내렸습니다. 문제는 상대방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회개하면 다른 사람도 회개하게 되고 내가 새로워지면 우리 주위의 많은 사람도 함께 새로워질 줄 믿습니다.
누가 이런 역사를 이루십니까? 배후에서 조종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우리 모두 강을 건너기 전에 지금까지 잘못 믿고 잘못 살아온 우리의 과거를 얍복강 가에 묻어버리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해야 합니다. 더 이상 환도뼈를 의지하고 살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더 믿는 것이 있으면 하나님은 그것을 거두어 가거나 그것을 깨뜨려 주십니다. 우리 모두 강을 건너기 전에 야곱처럼 회개하고 강을 건너기 전에 울며 기도하고 강을 건너기 전에 환도뼈를 의지하지 말고 강을 건너기 전에 새 이름을 받고 강을 건너기 전에 축복을 받고 강을 건넌다면 장애물은 오히려 우리의 길잡이로 바뀌어 질 줄로 믿습니다. 에서가 말합니다. 동생 야곱이여, 이곳은 광야라 가시 엉겅퀴가 많고 길이 험난하니 이 유약한 어린아이와 함께 가기에 적합지 않도다. 내가 이 길을 잘 아노니 내가 너의 길잡이가 되리라. 놀라운 일 아닙니까? 가지 못하도록 버티고 섰던 사람이 길 잡이로 바뀌어 졌으니 원수가 친구로 미워했던 사람이 사랑의 관계로 바뀌어 질 수 있었던 것은 강을 건너기 전에 야곱이 기도했고 야곱이 변하여 새사람 된 결과였습니다. 우리 모두 2000년도의 강을 건너기 전에 오늘 이 시간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새 마음, 새 이름 가지고 출발한다면 우리를 해치던 사람도 도움을 주는 사람으로 변하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최낙중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