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51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들 (본문 살전3:9-13)
1. 오늘부터 교회는 "대림절"이 시작된다. 대림절이란 하나님의 아들이 '오심'을 기억하는 시기이다. 기독교의 절기는 사실상 대림절로부터 새로운 해를 시작하는 것이다. 그동안 교회는 오랫동안 오순절 이후의 평범한 절기를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 예수의 승천하시던 날 약속하신 두 가지 사실 - 즉 하나는 예수님 대신 보내시리라 하신 성령을 기다리는 것과, 또 다른 하나는 다시 오시리라 하신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 -을 기억하여야 하는 때이다.
대림절은 12월 24일까지 4주간 동안 진행되고 25일 성탄절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 2천년 전에 유대 땅 베들레헴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인류의 역사는 새로운 기원을 시작했다. 그리스도 이전의 시대와 그 이후의 시대 즉 우리들이 오랫동안 단군 기원을 써 왔으나, 언제부터인가 소위 서력기원으로 옮겨 쓰고 있는 2000년 12월 3일 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점으로 시작된 새로운 시대이다.
그러나, 해마다 맞이하는 대림절을 통하여 예수님이 해마다 새롭게 이 땅위에 오시는 것은 아니다. 2천년 전에 이 땅 위에 오신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들 속에 계심을 다시 확인하며 감사하고, 아직도 그 분을 영접하지 못한 사람들이 그를 주와 그리스도로 영접하여 새 삶을 살 수 있도록 전하고 양육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이제 멀지 않은 장래에 다시 맞이하게 될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오랫동안 주님을 영접했다는 사실로 인하여 기뻐했고 감사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 속에, 새로운 존재로 신분이 변화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거저 감격스러웠다. 그러나 이제는 나를 새롭게 만드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온 열매를 맺어 드려야할 시점에 와 있는 것이다. 그 동안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얼마든지 기뻐하셨지마는 이제는 변화 받은 사람으로 살아온 삶의 열매를 맺어 드려야할 책임적인 시기에 와 있는 것이다.
2. 오늘 본문의 말씀은 바울 사도께서 전도하여 세워진 데살로니가 교회의 신앙의 상태를 전해주고 있다. 교회를 설립한 바울이 떠난 후에 교회가 여러 가지 박해와 시련 가운데서도 예수님의 재림의 소망으로 그 모든 시련을 잘도 견디어 왔으나 곧 오실 줄로만 알았던 예수님의 재림이 지연되는 가운데 먼저 죽은 동료들,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회의적인 생각 속에 신앙이 혼란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바울은 믿음의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보내어 신앙을 지도한 결과 대단히 고무적이고 긍정적인 보고를 접하게 되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교인들의 신앙은 정상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이것은 오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어,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소중한 교훈이 되고 있다.
3.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신앙이다.
데살로니가전서3;13의 말씀이다.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의 사람은 누구나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사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 날에 하나님 앞에 설 것을 생각하고 사는 것이다. 이것을 성경은 종말론적인 삶이라고 한다. 언젠가는 삶의 끝이 있다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고 산다는 말이다. 아니 하나님께서 오늘도 부르실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말한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留心)하리로다"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산다는 것은 무신론자에게는 허무주의나 염세주의에 빠져 산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어차피 죽을 인생 살아 있는 동안 좀더 쾌락을 즐기며 살자고 하든지 아니면 적당히 살다가 비참한 꼴을 보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설 것인가를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함부로 살 수 없는 것이다. 정신 차리고 살아야 한다. 깨어서 기도하며 살아야 한다. 그 날에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열매가 있기 위하여 오늘을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예비하신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흠 없는 그리스도의 신부로 설 수 있기를 위해서 오늘도 자신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
우리는 5년마다 대통령 선거를 치른다. 그 때마다, 출마자들의 삶은 대부분 바닥까지 들추어진다. 본인이 국방의 의무를 잘 감당했는지, 자녀들이 병력의 의무를 재대로 잘 감당했는지, 가정생활은 근실한지, 그 동안 재물관계는 문제가 없는지, 대부분 상대방에 의하여 비리를 캐는 방식으로 드러나는 것들이지만 반드시 검증되어야할 문제고 생각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외형적인 삶뿐만 아니라, 그 중심의 문제까지를 살피시기 때문에 정말 잘 살아야 한다.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몸으로부터 떠나 순식간에 어두운 터널과 같은 곳을 지나면서 자신의 일생이 한 순간 필름처럼 밝히 드러난 후에 믿음의 사람들은 빛이신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 그 날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 그래서 회개해야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긍휼과 자비를 덧입어야한다. 날마다 우리 육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아야한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그 날을 바라보며 믿음의 삶을 살았으므로 하나님 앞에 흠 없이 살았다. 이 아름다운 믿음의 본을 받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4. 피차간의 사랑이 넘치는 생활이다.
데살로니가전서3;12의 말씀이다.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에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너희 마음을 굳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함에 있다는 것을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없으리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태복음22;37-40) 예수를 잘 믿는다는 것은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됨의 표식을 "사랑함"으로 할 것이라 하셨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한복음13;35)만약에 우리가 믿는다 하면서 사랑이 없다면 그 믿음은 아무것도 아니다.(고전13장)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런 뜻에서 신앙의 본을 보이고 있었다. 그들은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가지고 있어 그 지역에서 소문이 난 교회였다. 박해 가운데서도 그들이 그렇게 믿음의 생활을 바르게 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보다 믿음의 좋은 본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늘 본문에서 보면 그들의 피차간의 사랑은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사랑한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은 배워서 하는 것이다. 본받는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1;6의 말씀이다.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 받는 자되었으니"
누구에게서 배웠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누구를 본 받았느냐 하는 것은 더욱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디모데후서3;14,15에는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라고 했다.
어제 밤에는 우리 한국교회의 어른이신 김선도 목사님의 고희 칠순 감사 예배에 참석했다. 목사님은 당신의 오늘이 있음을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고 전재하신 후에 나를 나되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배려하신 것은, 청교도적인 신앙의 가정에서 어머니의 훌륭한 신앙의 가르침을 받게 하셨으며, 평북 선천의 장로교회 김진수 목사님의 신앙적인 지도를 받으셨으며, 지혜로운 아내의 내조가 있었다고 하셨다.
당신은 진정한 사랑의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가? 예수 안에서 무엇보다 먼저 가족 형제,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한다. 바울 사도는 믿음의 사람이 제 부모를 돌보지 않는 것은 믿지 않는 이방인보다 더 악한자라고 했다. 그리고 예수 안에서 믿음의 한 형제 자매된 성도간의 사랑이 있어야한다. 사귄지 오래되는 사람뿐만 아니고 오늘 주께서 처음 우리에게 보내주신 새가족도 사랑해야한다. 역사가 오랜 뿌리깊은 교회는 좋은 점이 많지만 결정적인 약점이 있을 수도 있음을 알아야한다. 교회 성장학적 용어에 "동질성 응결증"이라는 말이 그것이다. 끼리끼리 똘똘 뭉친다는 말이다. 자칫 잘못하면 이것을 사랑으로 착각할 수 있다. 물론 사랑의 한 표현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교회는 새로운 사람들이 적응할 수 없다. 교회는 수용성이 많아야한다. 누가 와도 손을 잡아 줄 수 있어야 한다. 오늘 처음 온 교인이 따뜻한 사랑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어색하지 않는 자연스러운 어울림이 있어야 한다. 새 생명은 사랑 가운데서 자란다. 이 사랑은 마침내 온 세상으로 향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의 지배의 원리는 "사랑"이다.
사랑은 용납이다.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것이다. 탕자가 집으로 돌아올 때 아버지는 그 초라한 모습을 그대로 받아 주셨다. 사랑은 허물을 덮어주고 씻겨주고 세워주는 것이다. 탕자가 돌아 왔을 때 아버지는 그의 허물을 씻어 주시고 새 옷을 갈아 입히고 가락지를 끼워 주었다. 그러나 큰아들은 사랑이 부족했다. 동생의 과거를 잊지 못했다. 그의 지난날에 대한 책임을 따지고 있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신다. 회개한 죄는 묻지 아니하신다. 예수의 십자가로 우리를 의롭다 인정하신다. 우리를 자녀로 받아 주신다. 사랑은 함께 기뻐하는 것이다. 기쁨의 잔치에 동참시킨다. 모두 함께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게 하신다. 여기에는 소외되는 자가없다. 모두가 한 형제요 한 자매이다. 바로 이 사랑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있었다. 사랑은 믿는 자들에게 지워진 부담스런 짐이 아니다.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방식이다.
5.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은 거룩해야 한다.
데살로니가전서3;13 말씀이다.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거룩함은 세상과 구별된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사람은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에서 특별히 하나님의 은혜로 부름 받은 사람이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한 지체로 부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시다."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니라"(레위기 20;8)
1) 우리는 예수의 피로 거룩하여진다. 히브리서13;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2) 우리는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면 거룩하게 된다. 베드로전서3;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 예수님을 진정으로 내 마음에 주인으로 모신 사람은 에수의 다스리심을 받아 거룩하게 된다.
3)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는 거룩하게 된다. 요한복음17;17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4) 성령님의 임재하심 속에서 우리는 거룩하게 된다. 로마서15;16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비록 이방인이라 할찌라도 성령 안에서 거룩하여 진다.
세상은 죄악으로 가득 차 있다. 죄 가운데서 사는 우리는 허물과 죄 가운데 살아간다. 우리는 날마다 와이셔츠를 갈아입는다. 서울에서는 얼마입지 않으면 목둘레와 소매 안 끝이 더럽게 된다. 그만큼 오염된 환경 속에 살고 있다는 증거이다. 1985년 처음 미국을 갔을 때 안 것은 와이셔츠를 일주일을 입어도 여기처럼 더러워지지 않는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우리는 세상 가운데 살면서 예수 님을 구주로 모시고 살면서 날마다 십자가의 피로써 정결케 씻어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 날마다 진리의 말씀으로 인도를 받는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예수 님의 다시 오신다는 약속 속에 살아가는 성도들이여! 그날 그 앞에 흠 없이 설 수 있기 위하여 거룩하게 살자. 사랑하며 살자.
출처/이천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