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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을 곳이 없는 예수 (본문 눅2:1-7)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이 보름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성탄절이 되면 교회에서는 물론 밖에서도 아기 예수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아기 예수가 태어나서 구유에 누인 이야기일 것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이 바로 그 소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때는 당시 로마의 황제로 있던 가이사 아구스도, 말하자면 시저 아우구스투스가 있던 시대입니다.
그가 온 천하로 호적하라는 영을 내렸습니다.
일반적으로는 14년에 한번씩 하는 것인데, 이 가이사 아구스도는 어쩐 일인지 10년만에 이런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이유는 정확한 인구를 조사하고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여 자신의 통치 기반을 다지려는 데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자기들의 고향으로 내려가서 호적을 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도 정혼한 부부로서 자기들의 고향인 유대 땅 베들레헴에 호적하러 내려가게 된 것입니다.
그 때는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여 만삭으로 해산할 때가 가까웠습니다.
웬만하면 집에서 해산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는 때였지만 지엄한 황제의 엄명이기 때문에 피정복국가의 백성으로서 어길 수가 없어서 무거운 몸을 끌고 거기까지 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거기서 갑자기 해산할 날을 맞게 되었습니다.
아기를 낳으신 분은 알겠지만 해산끼란 갑자기 오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사관을 찾았습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여관이나 모텔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는 곳곳마다 방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여행 중에 빈방을 얻지 못해서 고생해 보신 적 있습니까?
우리 한국 같은 데선 좁은 땅덩어리니까 어디서든지 방이 없으면 그냥 운전해서 집에 갈 수 있는 거리지만 미국같이 넓은 곳은 여관을 찾지 못하면 아주 고생을 합니다.
저도 한 번 목사님들과 여행을 하다가 제가 운전을 했는데, 저녁 때 놓치고 방을 찾다가 방이 없어 수십군데를 들려보고 또 방이 없어 12시를 넘겨 새벽 4시에 겨우 방을 찾아 잠을 잔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제가 운전을 하면서 이 마리아와 요셉의 상황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처음에는 방이 없다고 하니 다른 데 가면 되지, 하고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가 가는 곳곳마다 방이 없으니 나중에는 당황되고 마음이 초조해졌습니다.
그래서 당시 요셉과 마리아의 마음이 이렇게 당황스럽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특히 남편인 요셉으로서는 아내가 해산할 때가 됐는데 방이 없으니 결국 못찾고 어느 집 허간 같은 데, 그러니 당시 짐승들이나 먹이를 먹는 곳을 간신히 찾아 들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아기를 낳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아기를 눕힐 침대가 어디 있습니까?
가만히 보니 짐승들이 여물을 먹는 구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를 받아 강보에 싸서 눕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기가 막힌 이야기입니까?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의 아들이고 만왕의 왕이십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그 분이 막상 오실 때, 우리 인간들이 드린 것은 고작 구유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가 말하길, "우리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의 아들에게 우리 인류가 최초로 준 선물은 구유였으며 마지막으로 준 선물은 십자가였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2천년 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있을 곳이 없어서 구유에 나셨습니다.
그 때만 그런 것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은 비록 육신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계시지만 영적으로는 우리들의 마음에 들어오시기를 원하십니다.
계 3:20에 보면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했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성령으로 우리 마음을 두드리십니다. 그래서 문을 열면 우리 마음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영적인 교제를 누리면서 지내길 원하십니다. 그런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마음 문을 열지 않습니다. 방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 마음 밖에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당시의 예수님에게는 왜 있을 곳이 없었습니까?
오늘날 우리들의 마음에도 왜 예수님이 계실 곳이 없습니까?
성탄절을 앞두고 이러한 것을 생각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첫째로, 그 당시 예수님에게 방이 없었던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곳의 방들이 이미 다른 사람들로 다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황제의 영이 내려서 다 고향에 내려가는 때입니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추석처럼 많은 사람들이 고향으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방이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먼저 온 사람들이 방들을 다 차지해 버려서 마리아 요셉에게까지 차례가 오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 마음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더불어 먹고 마시듯이, 영적으로 교제하고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영생을 주시기를 원하시지만 우리들 마음에는 세상의 것들로 이미 가득 차 있습니다.
이미 마음의 방을 다 차지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 속에 세상 것이 너무 많이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한번 들여 다 보십시오.
과연 여러분 마음에 예수님이 들어갈 자리가 있습니까? 요즘 우리들 보면 얼마나 바쁘게 삽니까? 얼마나 분주한 생각들이 많습니까?
아마 여기 앉은 분들도 귀로는 설교를 듣지만 생각은 오늘 오후에 뭘 할까, 내일부터 뭘 해야할지 하는 생각들로 꽉 차 있을 것입니다. '내가 이 건수를 통해 어떻게 돈을 좀 벌 수 없을까? 이번 기회에 어떻게 승진을 할까?, 다른 사람과의 거래를 어떻게 성사를 시킬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좋아하는 그 사람과 결혼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인생을 좀 재미있게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친구 사이에서 따돌림 받지 않고 내가 주장하면서 멋있게 살 수 있을까?"
여러 가지 생각들이 우리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우리 속에 들어오시지 못하게 하는 첫 번째 이유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성탄절에 가장 먼저 할 일은 우리 마음의 정리라고 생각합니다.
2천년 전, 아기 예수가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집집마다 다른 사람들이 꽉 차서 아기 예수가 머무를 것이 없었던 것처럼, 우리들 마음에도 세상적인 것들이 가득해서 나를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모시지 못하는 것 아닌가 생각하고, 우리들의 마음을 정리하고 항상 주님 모실 방을 준비하고 살아야 합니다.
무엇이 더 중요한가? 아무리 할 일이 많고 바빠도 내 마음은 예수님이 거할 수 있는 마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생활의 한부분은 언제든지 주님을 위해서 드릴 수 있는 공간을 준비하고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모든 마음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세상의 생각으로 가득 채워놓고, 육체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으로 내 맘을 가득 채워놓고서야 어떻게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금년 성탄절은 내 마음을 정리하는 성탄절, 내 마음을 돌아보고 예수님을 위한 마음의 공간을 마련하는 성탄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그 당시에 예수님에게 있을 곳이 없었던 이유는 그 당시 사람들의 영적 무지 때문이었습니다.
비록 방이 다 차 있었던 상황이었다고 해도 마리아에게 잉태된 아이가 누구인지 바로 알기만 했다면 절대로 그런 일이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가 한 번은 비행기를 타려고 하는데 자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그런 말을 하더군요.
비행기 자리가 다 차도 VIP 곧 귀빈들을 위한 자리는 언제나 남겨놓는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내가 그 귀빈에 속하지 않은 것이 것이지 내가 귀빈이면 자리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호텔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다 찼다고 말해도 VIP를 위해서는 언제나 방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귀빈이 올 때는 언제나 모실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당시 베들레헴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첫 번 성탄절에도 아무리 사람들이 많이 여행을 다니고 방이 부족했다해도 VIP들을 위해서는 방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모들을 VIP로 보지 않은데 있습니다.
마리아의 몸에 잉태된 분이 누군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바로 안다고 하면 아무리 바빠도 예수님을 위해 시간을 마련하고 아무리 중요한 일이 있어도 다 희생하고라도 예수님을 만나고 영접하며, 예수님을 예배하는 룸을 만들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누군지 모릅니다. 심지어 교회 나오는 사람들조차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합니다. 듣기는 많이 들어 이론적으로는 알지만 진정 마음으로 알고 내 생애 전체를 바치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 마음 바깥에서 울고 계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박대하고 하나님의 아들로 영접하지 않기 때문에 늘 섭섭한 가운데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아닙니까?
만유의 주시며 만 왕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이 온 이후에도 사람들은 그분을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디를 가든지 귀빈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날 만큼은 예루살렘 성에 그냥 들어가지 않고 누구라는 것을 보이고 싶어 짐승을 타고 들어가셨습니다. 그러나 짐승을 타도 말을 타지 않고 나귀를 타고 들어가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그 나귀를 타고 들어가실 때만 해도 탈 나귀가 없어 건너편 마을로 가서 아직 멍에를메지 않은 나귀를 풀어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이 이유를 묻거든 다만 주가 쓰시겠다 하라고만 하라셨습니다. 제자들이 가보니 정말 나귀가 있어 사람들이 물을 때 주가 쓰시겠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 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을 안다고 하지만 진심으로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문밖에 내어쫒고 푸대접하면서 예수님을 슬프게 만들고 예수님을 모독하고 우리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과 같은 신앙의 배신을 할 때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바로 알면 그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성탄절에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분명히 아는 계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물론 우리가 일년 내내 성경공부하고 말씀을 들으면서 예수님에 대해 공부를 했지만 그래도 아직 내가 예수님에 대해 모릅니다. 우리는 평생 예수님에 대해 배워도 지극히 적은 부분만 아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우리 교회가 추천도서로 선정한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라는 책이 많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필립 얀시 라는 사람이 쓴 이 책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알지 못하고 지냈던 예수님의 여러 가지 면들을 또 그의 가르침의 여러 가지 부분들을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예수 연구서적으로 가장 탁월한 것으로 평하고 있는 이 책을 여러분들에게 추천하는데, 우리가 이 성탄의 계절에 이런 책을 읽으면서 예수님을 바로 알려고 노력한다면 얼마나 귀하겠는가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을 더 알기 원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읽고 책도 읽으면서 영적인 지식을 갖기를 원합니다. 그래야만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모셔들일 수가 있습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알던 그런 정도에서 한단계 올라가는 수준,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그 당시 예수님에게 있을 곳이 없었던 이유는 사람들의 무정함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방들이 다른 사람들로 다 채워졌다고 하십시다.
또 그 당시 사람들이 아기 예수의 부모를 잘 알아보지 못했다고 합시다.
그렇다고 해도 그들이 핑계할 수 없는 한 가지사실은, 지금 만삭이 되어 아이를 해산하려는 여인을 문밖으로 내쳐버린 것입니다.
요셉이 얼마나 다급했으면, '지금 제 아내가 해산을 하려고 합니다. 제발 방이 있으면 좀 내 주십시오. 돈은 얼마든지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외면했습니다. 방이 없다고. 모른다고 합니다.
그것은 그들의 방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숨겨진 방이 있고 그들이 쓰는 방도 있을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문제입니다. 조금만 이 가련한 여행객 부부, 아이를 낳으려는 부부의 안타까운 마음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얼마든지 따뜻한 방에서 해산할 수 있을 것이지만 너무 무정한 사람들에 의해 그 귀하신 몸이 구유에 낳게 되신 것입니다.
그것은 그 때만 그런 것 아닙니다. 지금도 얼마나 무정한 사회입니까?
이 성탄의 계절에 아기 예수의 탄생을 노래하고 축하하고 기뻐하지만 정작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은 외롭습니다. 배고픕니다.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언젠가 크리스마스 때에 어느 술 취한 사람이 거리에 쓰러져 얼어죽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이었지만 어느 누구 하나 그 사람을 돌보아 준 사람이 없었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외치며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겠지만 쓰러진 사람 하나 일으켜 주는 사람이 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 사람은 얼어죽은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적나라한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날의 징조를 말씀하시면서 사랑이 식어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딤후 3장에 보면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를 것이라고 하면서 그 때의 증상 가운데 하나가 '무정하며' 라는 말이 나옵니다. 감각이 없습니다.
남이야 어떻게 되든 나만 살면 된다는 사고방식이 얼마나 팽배해 있는지 모릅니다. 남이야 죽든, 살든 나만 안전하면 되는 것입니다. 남이야 굶든 말든 나만 따뜻하고 행복하면 됩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전혀 감각이 없습니다. 내 위주로만 삽니다.
이런 마음 속에 어떻게 예수님이 오실 수 있습니까?
그래서 이번 성탄절은 다른 사람을 돌아보는 계절이 되길 바랍니다. 우리도 인간이기 때문에 나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내 주변의 일에 몰두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지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구유에 누이신 일을 생각하는 계절만큼은 혹시 내 주위에 나의 무정함 때문에 버려지는 사람은 없는지 생각해봅시다.
나의 가족들가운데, 이웃과 성도들 가운데 사회의 소외된 이웃들을 생각하는 마음에 성탄의 의미가 깃드는 것입니다.
때마침 우리 교회에서 은평천사원의 크리스마스 카드를 판매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판매가 아니라 하나의 모금의 방법입니다. 은평천사원은 우리 사회봉사위원회에서 항상 돕고 있는 단체입니다. 지체장애자, 정서장애자 아이들을 돌보는 사회봉사기관입니다. 그들 중에 입으로 붓을 잡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있어서 크리스마스 카드를 만들어 이렇게 모금을 하는 것입니다.
카드를 산다기 보다는 그동안 우리가 무심했던 사람들을 생각하고 돌본다는 의미를 가지기 바랍니다.
이 사람들 뿐 아니라 우리 주위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많은 이웃을 향해 우리의 마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아기 예수를 영접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수도자가 예수님이 사랑이 너무 감사해서 예수님께 사랑과 은혜를 드리고 싶다고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그러면 네 모든 소유를 가지고 나를 만나러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수도자가 자기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가지고 예수님을 만나러 길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어디를 가도 예수님이 나타나질 않습니다.
결국 가진 것 다 쓰고 이제는 외투 한 벌에 의지하고 다니는 거지가 되었습니다.
어느날은 해가 다 저물어 거리를 지나가는데 추워서 떠는 다른 거지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입고 있던 마지막 재산 외투를 벗어 주면서 그를 꼭 안아 주었습니다.
그랬는데 그 날 밤 예수님이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어젯 밤 나에게 옷을 입혀주어 네 덕분이 따뜻하게 잘 잤다"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거지가 바로 예수님이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자기가 만난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예수님이 계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은 교훈을 주기 위한 하나의 전설이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은 오늘날 예수님이 우릴 만나기 원하시고 우리 맘에 들어오시기 원하는데, 지극히 작은 한 사람의 모습으로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가족이나 이웃, 친구를 대할 때, 예수님을 만나는 것처럼 대하면 그것이 곧 예수님께 하는 행위가 됩니다.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 한 일이 곧 나에게 한 일이라"고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성탄의 계절에 예수님을 모시는 방법은, 예수님의 초상화를 본다든지, 신비한 방법으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위에 있는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을 찾아 나의 작은 사랑이나마 전달해주는 것이 예수님을 만나고 영접하는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성탄절이 되면 엉뚱한 일로 바쁘고 많은 행사나 프로그램으로 지치기 쉽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성탄절의 의미는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를 우리 마음에 영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마음을 정리하면서, 너무 분주하여 자칫 예수님이 머무를 수 없는 삶을 살아가지는 않는지 돌아보고 예수님이 거하실 공간을 준비해야 합니다. 또한 그동안 예수님에 대해서 희미하게 알았고 잘못 알았던 것을 보다 정확하게 알아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넓혀가며 미처 알지 못했던 예수님을 깨닫고 발견하는 시간, 그리고 우리의 이웃을 통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우리 주님의 사랑을 전함으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진정한 성탄의 계절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 교회 청년들이 연극을 한 적 있는데 실제는 Guide Post지에 실린 실화입니다.
한 작은 동리에 Wally라는 9살된 아이가 있었습니다. 본래는 4학년이어야 했지만, 지적 능력이 떨어져서 2학년인데 나이가 많았습니다. 키가 커서 게임을 하면 언제나 이기기 때문에, 2학년 꼬마들은 항상 그를 빼놓곤 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뒷전에서 꼬마들을 쫓아 다녔습니다.
그 해에도 성탄절이 가까워지자, 교회에서 성극을 하는데, Wally는 피리를 부는 목동이 되는 것이 소원이었지만, 선생님은 그에게 더 중요한 역인, 여관집 주인역을 맡겼습니다.
베들레헴의 여관집을 전전하던 요셉과 마리아에게 퉁명스럽게 '빈방 없소.'라고 말하면, 연극효과가 크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연극준비가 끝나고 성탄절이 되어 교회에서는 수많은 관객이 모여들었습니다.
드디어 무대가 오르고 마리아와 요셉이 지친 몸으로 여관 문에 다가가서 두드렸습니다.
여관집 주인인 Wally가 나와 퉁명스럽게 물었습니다..
'뭘 원하오?' 요셉이 물었습니다. '빈 방 없습니까?' 여관주인 월리가 대본 그대로 말합니다.
'없소. 딴 데 가 보시오.'
그러자 요셉이 사정합니다. '주인, 우리는 멀리서 왔고, 아내는 막 출산하려 합니다. 제발 도와 주십시오.' 그 때, 월리는 나귀 위에 엎드려 있는 피곤에 지친 듯한 마리아를 쳐다보았습니다. 말도 없이 오래 올려다보고 있었습니다. 무대 뒤에서 대사를 읽어주던 선생님이 긴장을 하고, 대본을 잊은 줄 알고 소리내서 읽어 주었습니다. '월리야. 이렇게 말해. 안돼요. 가 버려요.'
그러나, 월리는 꼼짝도 않고 슬픈 마리아의 얼굴을 올려다보고만 있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어깨 쳐진 모습을 하면서, 뒤를 돌아서 무대 뒤편으로 사라지려고 했습니다.
그때, 요셉과 마리아가 가는 뒷모습을 오랜 동안 바라보고 있던 월리는 대본에도 없는 말을 소리쳐 외쳤습니다. "요셉, 마리아. 가지 말아요. 우리 집에 내 방이 있어요." 물론, 연극은 엉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연극을 보던 많은 관객들은 큰 감동을 받았고 뜻깊은 성탄절이 되었다고 합니다.
2000년의 성탄절이 2주 밖에는 남지 않았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에는 주님을 위한 방이 있습니까? 주님을 위해 비어둔 방이 있습니까?
이것을 생각하면서 금년 성탄절을 의미있게 보내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출처/이철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