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딛고 일어선 거목 호암 이병철 회장♡

흐르는 물처럼 시련을 딛고 일어선 거목 호암 100년전 '어둠의 시대'에 태어나 빛이 된 경영의 달인 고 호암이병철 삼성 창업자의 탄생 100년이다. 호암은 삼성을 비롯해 분가한 한솔, CJ, 신세계 등 한국 대표 기업의 토대를 마련한 한국 경제계의 거목이다.

그의 탄생 100년이 우리 사회에 던져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호암은 대한제국이 일본의 군화 발에 짓밟혀 강제 병합을 당하던 1910년 '어둠의 시대'에 태어났다. 방황과 절망을 벗으로 삼아 살던 그는 1938년 삼성상회를 시작으로 해방과 한국전쟁, 산업화의 과정을 지나며 두 번의 암 선고에도 굴하지 않는 기업가 정신을 보였고 1987년 폐암으로 영면하기까지 그 누구보다도 치열한 삶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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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호암 이병철 삼성 창업주.

삼성을 일구는 과정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일부 있지만, 그 누가 그와 같은 삶을 살 수 있었을까. 100년전 태어난 그가 우리 젊은이에게 줄 수 있는 메시지를 그의 삶을 통해 되짚어봤다.

◇평범한 학생..졸업장 없는 인생
졸업장은 하나의 과정을 마무리했다는 증명서다. 호암은 졸업장을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다.
1910년 2월 12일 경남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에서 이찬우 공과 안동 권씨의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호암은 6살 때 초등학교(구 국민학교)에 가지 않고, 서당 '문산정'에서 한문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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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17살 청년 호암 이병철(왼쪽)의 모습.

학문에 있어서 첫 과제는 천자문. 보통 친구들은 두 세 달 만에 통독했지만 그는 일 년이나 걸렸다. 서당에 5년 다니는 동안 그는 '논어'와 '자치통감'을 뗐지만 다른 친구들에 비해 빠른 편이 아니었다. 그의 스승은 "문산 선생님의 손자가 이래가지고서야"라며 종종 매를 들기도 했다.

그의 조부인 문산 이홍석은 당대 영남의 최고 유학자 중 한 명인 허성재의 문하생으로 시문과 성리학에 두각을 나타냈고, '문산문집'을 펴낼 정도로 학문이 높았다. 그런 조부에게서 공부에는 시원치 않은 손자가 난 셈이었다.

11살이 되던 해인 1921년 처음으로 집을 떠나 시집간 둘째누나가 있는 진주시 지수보통학교에서 짧은 첫 유학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호암은 중교리의 좁은 세상이 아닌 더 넓은 세상을 봤고, 몇 개월 후 서울에서 사는 사촌형을 따라 외갓집이 있는 서울 가회동에서 수송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서울에서의 성적도 서당에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석차는 전체 50명중 35~40등에 머물렀다. 보통학교 4학년을 마친 호암은 5, 6학교 과정을 거치지 않고 중학부로 진학했다. 중학부를 다니던 어느 날 부친으로부터 "네 혼담이 이뤄져 12월 5일 혼례를 올리게 됐으니 내려오라"는 말을 듣는다. 그의 나이 16살인 1926년 두 살 위인 박두을 여사와 가정을 꾸리게 됐다.

호암은 결혼 후 일본 유학을 결심했다. 중학부를 마치지 않고 그는 1929년 일본으로 건너가 이듬해 와세다대 전문부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하지만 1년여간의 일본 유학 생활은 각기병(티아민 결핍에 따른 근육, 관절 이상)으로 접게 된다.

호암이 받은 졸업장이나 학위는 72세 때인 1982년 미국 보스턴대학에서 명예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은 게 유일하다. 호암은 아산 정주영 현대 창업자와 함께 반드시 졸업장만이 미래를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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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의 나이 72세였던 1982년 보스턴대학에서 명예경영학박사 학위를 받고 있는 호암(사진 중앙).


호암은 정규 교육과정에서 졸업장을 한번도 받지 못했다.

◇실패에서 배운 호암
호암의 성공학에는 반드시 실패라는 씨앗이 앞선다.
호암은 각기병으로 일본에서의 유학을 중도 포기하고 귀향한 후 술과 노름으로 시간을 보냈다. 일본으로 유학 가던 길 3000톤급의 부관연락선에서 일본인들로부터 받은 치욕(멀미가 심해 1등실로 옮기려다가 일보 순사로부터 조선인은 1등실에 탈 수 없다며 쫓겨났던 일)도 뇌리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식민 치하에서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야겠다는 의지도 꺾였던 시절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세 자녀였다. 나이 스물다섯에 세 아이의 아버지로서 부끄러운 나날을 보내던 그는 골패 노름에 빠졌다가 귀가하는 어느 날 저녁 문득 잠든 세 아이를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한다.

"세 아이의 아버지로서 지금껏 허송세월을 보냈구나. 이제라도 뜻을 세우고 인생과 직면해야 돼"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호암의 첫 사업의 씨앗은 부친으로부터 받은 300석 정도 (당시 화폐로 3만원)의 재산이다. 그 재산 중 일부로 그는 정현용, 박정원 등 두 친구와 각각 1만원씩 투자해 협동정미소를 1936년 설립하지만 그해에만 자본금의 3분의2를 날렸다.

시장의 흐름을 잘못 판단했기 때문이다. 인천곡물시장에서 쌀 가격이 오르면 사고 내리면 파는 패턴으로 순식간에 손실을 보자 호암은 오를 때 팔고, 내릴 때 사는 '역발상'으로 큰돈을 벌게 됐다.

실패를 성공의 씨앗으로 삼은 첫 사례였다. 이어 곡물을 운송하는 운수업에서도 성공을 거뒀다. 일본인이 차량 10대로 운영하던 '히노데 자동차'를 인수한 뒤 10대를 추가로 구입해 운수업을 시작했다. 그는 김해평야에 200만평의 토지를 소유할 정도로 많은 돈을 벌었다.

그는 식산은행(현 산업은행)으로부터 대출을 해 땅을 사 모으기 시작했고 금세 만석꾼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그가 기방을 다니며 풍류에 빠져 있을 때 위기는 또 다시 닥쳐왔다. 1937년 중일 전쟁의 군비조달을 위해 식산은행이 모든 대출을 회수키로 한 것.

그는 대출을 갚기 위해 보유한 토지를 싼 값에 처분했고 만석꾼이던 그의 손에는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만이 남게 됐다. 2년 사이에 거부가 됐다가 다시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오는 '천당과 지옥'을 경험했다.

그는 마산에서의 사업을 접고 여행을 떠났다. 서울을 거쳐 평양, 신의주, 원산, 흥남에 이어 만주, 북경, 청도를 거치며 더 넓은 세상을 보고 1938년 3월 삼성의 모태가 되는 삼성상회의 꿈을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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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양조주식회사를 경영하던 젊은 시절의 호암 이병철.

빈손으로 다시 대구시 수동(현 인교동)에서 꿈의 터전을 세웠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숫자이자 '강력하고 큰 것'이라는 의미를 담은 '삼'(三)과, '높고 밝고 영원히 빛난다'는 뜻의 '성'(星)을 합쳐 '삼성상회'라는 무역회사를 설립했다. 중국을 돌면서 청과물이나 건어물 등을 수출하는 시장의 성공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예상은 적중했고, 이듬해에 사업을 넓혀 양조장 사업에 뛰어들었다. 일본인 무네이로부터 '조선양조'를 사들였고, 연간 막걸리 생산량이 8000섬 정도인 조선양조를 통해 다시 '만석꾼'의 반열에 올랐다. 사업을 일으켜도 일본 식민지 하에서의 기쁨은 크지 않았던지 호암은 와세다대 재학시절 친구였던 이수근에게 회사를 맡기고 술집만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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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그룹의 모태가 된 1938년 대구에 설립한 삼성상회 전경.

◇불굴의 의지로 일군 삼성
그러던 중 해방을 맞았다. 대구에서 일하던 호암은 아들 셋, 딸 다섯 등 가족과 함께 1947년 서울로 향했다. 그리고 1948년 삼성물산공사를 설립했으나 2년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또 다시 거의 전 재산을 잃었다. 그를 다시 재기할 수 있도록 한 것은 대구에 두고 온 '조선양조'였다. 전쟁통에서 견뎌낸 조선양조에서 김재소 사장과 이창업 지배인은 그동안 모아 놓은 '3억원'을 호암에게 전했다.

이를 밑천으로 호암은 부산 대교로 2가에 '삼성물산주식회사'를 설립, 1년만에 자본금의 20배인 60억원으로 회사 규모를 키웠다. 그는 전후 한국경제를 위해서는 제조업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제당업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제일 강한 의지로 일하자는 뜻에서 '제일제당' 으로 이름을 지었다. 1953년의 일이다. 이듬해에는 의식주 중 가장 앞 에 나오는 '옷'감을 만들기로 했다. 이것이 '제일모직'이다.

2개의 제조업체 설립 이후 호암은 전후 한국사회에서 본격적인 기업 인수를 통해 규모를 키웠다. 1957년 한일은행, 천일증권을 인수했고, 58년에는 삼척시멘트, 안국화 재, 상업은행, 동일방직, 권영물산, 한국타이어를 인수했다. 이듬해에는 조흥은행까지 인수하면서 몸집을 불렸다.

하지만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들어선 혁명정부에 한일은행, 상업은행, 조흥은행 등 3개 은행을 헌납하게 됐다. 뒤이어 정치권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은 대가로 한국비료를 빼앗기고, 1980년에 들어선 군사정권에는 TBS를 빼앗기는 등 총 5개의 회사를 국가에 헌납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호암이 불굴의 기업가 정신으로 1960년대말부터는 시작한 전자 업종과 중공업, 석유화학 등은 오늘날 글로벌 기업 삼성의 씨앗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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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한 모임에서 고 정주영 현대 창업주(오른쪽)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고 호암 이병철 삼성 창업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