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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고후8:1-2)
감사의 제목을 찾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육적인 필요를 채우신 하나님의 은혜를 먼저 떠올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최고의 이유는 바로 우리 영혼에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눈으로 측정하고 가늠할 수 없기에 우리는 자주 영혼의 필요를 채우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감사하는 것을 잊지만, 신실한 성도들에게는 늘 이 것이 어려운 환경과 고난을 능가하는 감사의 제목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이것이 잘 드러납니다. 본문의 내용은 예루살렘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 바울이 각 교회와 성도들로 하여금 예루살렘 교회를 돕도록 헌신시켰던 것을 배경으로 합니다.
이 마게도냐 교회는 매우 가난한 교회였고 이 편지를 받고 있는 고린도 교회는 아주 부유한 축에 속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아마도 그 때, 이 마게도냐 교회는 넘치도록 헌신하였고, 반대로 고린도 교회는 그러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이 편지 속에서 마게도냐 교회를 칭찬하며 고린도 교회에 다시금 이 헌금에 대한 것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마게도냐 교인들은 거액의 연보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도 바울과 그 일행들에게 적잖은 충격과 감동을 던져주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성도가 거액의 헌금을 하였을 때 ‘감춰둔 돈이 많았구나’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성도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 찼으면 그렇게 넘치게 헌신했을까’하고 생각하게 마련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마게도냐 교회로부터 그러한 감격을 선사받았습니다. 그는 마게도냐 교회의 헌금 속에서, 그렇게 헌금을 드리기 전에 먼저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 앞에 철저히 헌신하는 영적 헌신의 과정을 읽어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환난의 많은 시련
하나님을 깊이 사랑해 본 사람은 압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느끼는 고통보다 주님을 많이 사랑하는데 주님 앞에 아무것도 드릴 것이 없을 때 느끼는 고통이 더 크다는 것을 말입니다.
주님을 섬길 수 있는 그 무엇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시간이 있는 사람은 그 시간을 드릴 수 있어서 기쁘고, 젊음이 있는 사람은 젊음을 드릴 수 있어서 기쁘고, 물질이 있는 사람은 물질을 드릴 수 있어서 기쁘고, 남다른 재능을 가진 사람은 그 재능 때문에 하나님을 섬길 수 있어서 기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리석어서 섬길 수 있는 무엇인가를 누리고 있을 때는 그것이 얼마나 좋고 귀한 것인지 잘 모르다가, 늙고 병들고 가난해져 정말 몸밖에 드릴 것이 없어져야 비로소 자신이 아무렇지도 않게 낭비해버린 그것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마게도냐 교회의 교인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마게도냐 교인들은 극심한 시련과 환난을 많이 당하였고, 매우 가난한 사람들이었지만,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일의 기쁨과 소중함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실 바울의 마음속에 “고린도 교회” 하면 많은 은사를 받은 교회, “에베소 교회” 하면 뜨거운 사랑이 불붙은 교회, “골로새 교회” 하면 그리스도의 놀라운 영광을 알았던 교회로 기억이 되지만, “마게도냐 교회” 하면 환난과 시련이 할퀴고 간 교회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습니다.
마게도냐 교회는 이처럼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는 극도로 가난 가운데에서 환난의 비바람과 시련의 폭풍을 한 몸으로 받은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마게도냐 교회가 부자인 고린도 교회를 부끄럽게 할 정도의 넘치는 헌신으로 구제 헌금에 참여하였던 것입니다.
넘치는 기쁨
사도 바울은 환난의 비바람, 시련의 눈보라가 그치지 않는 마게도냐 교회가 하나님 앞에 넘치도록 헌신할 수 있었던 이유가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넘치는 기쁨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주시는 그 놀라운 기쁨이 시련을 이기고 환난도 물리치고 극한 가난 속에서도 소망을 가지고 살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마게도냐 교회는 환난을 많이 받은 가련한 교회였지만, 정작 마게도냐 교인들 자신은 아무도 스스로를 가련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외적?물질적인 풍요를 주시지는 않으셨지만, 그들의 영혼에 커다란 은혜와 넘치는 기쁨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마게도냐 교회는 은혜를 받은 교회였기에 기쁨을 누릴 수 있었고 나아가 넘치는 헌신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었습니다.
이 마게도냐 교회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넘치도록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헌신에 참여한 것이 전혀 예상을 깬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놀라운 기쁨이 있었고 그 놀라운 기쁨은 그들로 하여금 좋으신 하나님을 넘치도록 섬기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사랑, 보이는 헌신
성도의 주님을 향한 보이지 않는 사랑은 늘 이렇게 보이는 아름다운 헌신에 의해서 고백되어질 때, 비로소 완전해 집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당신 자신만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줄을 왜 모르셨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이삭의 목에 칼을 댈 때에 이르러셔야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을 알았노라”고 말씀하시면서 아브라함의 행동을 멈추게 하셨습니다.(창22:1-12)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심으로서 아브라함 마음속에 당신을 향한 경외의 마음을 알아보고자 하신 것이라고만 이해한다면 그것은 매우 짧은 해석입니다.
이 일은 아브라함 마음속에서 하나님만을 사랑하던 순전한 사랑이, 사랑하는 아들 이삭에 대한 사랑 때문에 위협받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신 하나님이 아브라함 속의 잠재적인 위험들을 순종의 과정들을 통하여 제거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실행의 과정을 통해서 다시 한번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자기가 진정으로 사랑해야 할 분이 하나님 한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만드신 것입니다.
요한 웨슬레는 자기의 설교 속에서 은혜를 받았다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들의 지갑이 회개하지 않는 한 그대들의 회심을 믿지 아니하겠소”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재물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사랑이 공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안 데에서 비롯된 통찰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만일 그들의 영혼 속에 진정으로 위대한 일을 행하셨고, 정말 그들의 영혼을 어루만지고 지나가셨다면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소중한 것들을 드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내 모든 것, 주의 소유
여러분은 이제껏 어떻게 사셨습니까? 주님이 베풀어주시고 공급해 주신 물질들을 누리며 살지 않았습니까? 그중 대부분의 것들은 우리가 기도하지 않았는데도 하나님이 우리가 필요한 것들을 미리 아시고 공급해주신 것들이었습니다.
그것을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빚진 자된 부채 의식을 지녀야 합니다. 나의 소유, 나의 건강과 나의 모든 것이 주님께서 주신 것이고 따라서 내가 가지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은 내 것이 아니고 우리 주님의 것이라는 고백이 우리 삶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주님을 위해서 베풀며 선용하는데 어찌 아까울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는 여기에서 멈출 수 없습니다. 성도에게 있어 하나님 앞에 먹고 산 것보다 더 감사한 것은 영혼에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강퍅한 마음을 녹이기도 하시고, 완고한 마음을 말씀으로 깨트리기도 하셨으며, 교만한 마음을 한없이 낮추셔서 주님 앞에 부복하는 자세를 배우게도 하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 무너지고 소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 힘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놀라운 변화를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이방 신에게 복을 빌던 사람들이 회심을 경험하기도 했으며, 술주정뱅이로 이름을 날리던 사람이 단정한 사람으로 바뀌기도 하였고, 오래된 악습을 끊어버리지 못하고 살던 죄인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빛 앞에서 자유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 생활로 어떠한 생명의 기운도 느끼지 못하던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의 생수가 흘러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다양한 변화 한복판에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있었습니다. 죄와 허물이 많고, 너무나 오랜 세월을 아집 속에 살아온 죄인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그들을 만지고 지나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이 모든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고치지 못할 정도로 망가진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그 분과 교제하며 살게 하셨고 영적인 성장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우리 가운데는 미끄러진 영혼들, 실족한 영혼들, 아직도 마음의 문을 굳게 닫고 있는 영혼들이 있습니다. 사실, 주님의 은혜가 역사하는 곳에도 늘 완고한 죄인들은 존재해 왔습니다.
신실한 성도로만 가득 찬 땅은 없습니다. 그 축복된 가나안의 땅에서도 여전히 산꼭대기에는 가나안의 이방신을 섬기는 원주민들이 남아있었습니다.
이러한 형편을 돌아보는 일이 성도들로 하여금 아무리 은혜 받은 성도들이 많고 교회에 하나님의 사랑이 넘쳐도 자만하지 않고 겸손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교회 구석구석에는 아직까지도 어두움이 있고,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이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눈물어린 기도로 간구하는 것이야말로 먼저 은혜받은 사람들이 행해야 할 마땅한 본분입니다.
맺음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는 은혜 속에서 성장되어 왔고 여러분들도 영적으로 자라왔습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오늘 우리가 주님을 향해 올려들려야 할 말할 수 없이 기쁜 감사의 제목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33년 동안을 우리들을 섬기기 위해 사시다가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자기를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주님의 보좌 우편에서 여러분들의 신앙을 위해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런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베풀어주신 그 영혼의 은혜를 가슴에 새기십시오. 지금 뒤로 미끄러지려고 하는 마음이 있다면 뉘우치고 다잡아 주님의 은혜의 줄로 여러분들을 다시 한번 붙들어 매십시오.
어떻게 만난 하나님인데 뒤로 미끄러지려고 하십니까? 어떻게 되찾은 생명, 어떻게 다시 발견한 하나님의 사랑인데 다시 뒤로 물어가려고 합니까?
우리는 우리께서 주신 이 은혜를 기억하고, 이 베푸신 은혜를 깊이 감사하면서 괴로운 날이나 즐거운 날이나 언제든지 우리 주님만 사모하고 우리 주님 때문에 감사하고 일평생을 사는 그런 아름다운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출처/김남준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