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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 감사하라 (시편 136:1~26)
11월은 감사의 달입니다. 금년도 농사가 대풍년이라고 합니다. 논밭의 모든 곡식을 추수한 상태입니다. 우리가 감사의 달을 맞이해서 다른 조건들을 생각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일용할 양식이 넉넉하게 준비해주셨다는 이 한 가지만으로도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지금 우리나라는 먹는 식량보다 남는 식량을 보관하는 문제가 정부의 골칫거리가 되는 것을 볼 때, 이런 현실이 하나님 앞에 큰 감사의 조건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우리나라의 음식 문화가 많이 발달되어서 옛날 임금님도 잡수시지 못했을 만큼 보편화된 문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들어보지도 못하고 먹어보지도 못한 새로운 음식들이 어디를 가도 널려 있음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요즘 금갈비, 금커피가 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아마 고종황제도 그런 것을 못 드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부교역자들과 어떤 칼국수 집에 저녁을 먹으러 들어갔었는데 입구에 김영삼 대통령이 그 집 국수를 잡수시는 사진이 크게 걸려있었습니다. 그 집 국수가 김영삼 대통령의 단골집이었다고 합니다. 그 집 할머니는 김영삼 대통령 시절에 청와대에 국수 요리를 해서 드린 적이 있고 대통령 재임시절에도 두 번이나 오셔서 칼국수를 드셨다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대통령이 먹는 음식이나 서민이 먹는 음식이나 똑같아졌습니다. 우리 갈보리 교인이 경영하는 청와대 옆의 한정식 집은 노무현 대통령께서 잘 오셨던 집이라고 합니다. 저도 그 집에 가서 몇 번 식사를 한 적이 있는데 저나 대통령이나 먹는 것은 같아졌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현실은 지구상에 3분의 1 정도의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까운 북한도 그 중에 하나입니다. 북한의 해군 소위 이필은 씨가 부하 두 명을 죽이고 남한으로 귀순했습니다. 저는 그 친구와 대학원에서 한반에서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당신이 남한에 와서 제일 좋아 보인 것이 무엇이냐?" 쌀가게에 하얀 쌀이 산더미같이 쌓여있는 것을 매우 인상 깊게 봤다고, 평생 처음으로 본 광경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또다시 풍요의 추수감사 절기를 맞이했는데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어떻게 드릴 것인가를 생각하는 추수감사 주일을 맞이하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읽은 시편 136편의 말씀을 보시면 1절에서 26절까지 26가지 종류의 감사하라는 말로 문맥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기록의 의미는 내 주변에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조건들이 수없이 많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한 성경말씀입니다. 26가지만이 아니고 260가지도 된다는 의미를 이렇게 간략한 문맥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람은 누구나 자리 잡고 있는 생각의 방향이 있는데, 감사하는 것에는 매우 둔감하고 원망스러운 부분에 대해서는 민감합니다. 하나님의 관계나 인간관계에서 감사할 것이 훨씬 많습니다. 믿음이 좋다는 것은 감사가 풍성한 것을 말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유대민족은 그들의 생활권 안에서 큰 몫을 차지하는 부분이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순서였습니다. 아예 창세기에서부터 중요하게 나타납니다. 인류의 최초의 농사짓는 사람인 가인과 최초의 목축업자가 된 아벨은 각각 자신들에게 주어진 소유물로 감사제를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때 가인은 합당치 않게 그 일을 소홀히 취급을 했고 아벨은 매우 중요한 일로 취급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아벨의 제사는 기뻐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물리치셨다는 기록으로 제사에 대한 평가가 나와 있습니다. 이로 인해 형제간에 살인사건이 발생하는 비극의 역사가 시작되었고 가인에게는 하나님의 저주가 내려서 지금도 흉악범들을 향해서는 '가인의 후예'라고 하는 영원한 저주의 별명을 만들어버렸습니다. 이 히브리 민족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 제사를 제도화했습니다. 엄격한 율법의 명령으로 누구도 소홀히 취급하지 못하도록 했음이 성경에 나타납니다. "곡식의 처음 익은 열매는 반드시 여호와께 드리라!" 정성을 다해서 드리라는 것입니다. "우양의 첫 새끼는 얼마가 되었든지 반드시 여호와께 드릴지라."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제물은 구별하되 가장 좋은 것 점 없고 흠 없는 것으로 하라. 찌꺼기나 나머지를 가지고 드리지 말라." "레위인은 자식도 첫아들을 하나님께 드리라." 그리고 제사의 종류도 많았습니다. "번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소제, 요제 등 다양한 제목의 수없이 많은 제사를 율법화해서 하나님께는 이렇게 정성스럽게 하라!" 역대하 29장 31절에 보면 "너희가 이제 몸을 깨끗케 하여 여호와께 드렸으니 마땅히 나아와 제물과 감사제물을 여호와의 전으로 가져오라." 누구도 거역하지 못하는 율법의 제도적 장치로서의 제사의식을 누구든지 행하도록 하였습니다. 이것을 소홀히 하는 자는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는 영적 분위기로 백성들을 지도합니다.
우리나라 역사를 볼 때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나라에 천년만 일찍 들어왔어도 모든 우리나라의 제사 문화가 기독교적인 방법으로 문화화되었을 터인데, 우리나라의 모든 제사가 미신 문화로 발전한 것이 매우 안타깝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에는 신에게 감사드리는 제사가 많이 있었습니다. 고구려 시대 동맹이라고 하는 신에게 드리는 감사제가 있었는데 이때가 되면 마을의 모든 부족들이 한 곳에 모여서 주몽신과 그의 어머니 하백녀를 기리는 제사를 같이 드렸는데 이 제사의 뜻은 먹을 양식을 내려주시는 신에 대한 감사제로 드렸던 것입니다. 또, 부여에서는 영고라고 하는 제사 의식이 있었는데 먹을 양식 내려주신 신에 대한 감사제로 고대로부터 제사가 있어왔는데 다만 이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과 차이가 미신 문화로 발전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지키는 명절이 있습니다. 추석입니다. 이것은 신라 시대 가위에서 출발한 것으로 첫 곡식으로 떡을 빚어 추수의 기쁨을 신에게 드린다고 하는 문화에서 발전한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역사에 이렇게 많은 감사 제사의 문화를 가지고 있는데, 여호와 하나님과는 관계가 없이 미신 문화의 개념으로 발전해서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종교성이 많은 것이 특징입니다. 무엇이나 섬기기를 좋아합니다. 무엇이든지 섬기지 않으면 못사는 민족입니다. 다른 민족에 비해서 복음을 빨리 받아들인 것도 우리 민족의 종교성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시골에서 근래까지도 농부들이 들판 일을 열심히 하고 있으면 아낙네들이 점심 식사를 해옵니다. 이만한 함지박에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밥을 해서 위에다 헝겊을 물을 적셔 덮어서는 들판으로 내옵니다. 그러면 그냥 먹는 사람이 없습니다. 위에 보자기를 벗겨내고 맨 꼭대기에서 밥 한 숟가락을 떠서 논바닥에 집어던지면서 "고수레" 합니다. 먹을 식량을 주신 신에게 감사드리는 표현으로 그런 문화가 발전한 것입니다. 또, 술을 좋아하시는 시골 농부들은 대접에다 막걸리를 가득 담아오면 또 그냥 먹는 법이 없습니다. 한사발의 막걸리를 떠서 논 귀퉁이나 밭도랑에다가 뿌리면서 말합니다. "금년 농사 잘 되어 백석을 거두게 하소서." 이것이 다 신 개념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또, 추수가 끝나면 반드시 떡을 합니다. 그것을 고사떡이라고 합니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시루떡을 해놓으면 먼저 먹는 법이 없습니다. 제일 위에 있는 떡을 그대로 반짝 들어서 네모반듯하게 정성스럽게 자릅니다. 그리고 정성스럽게 몇 가지신의 이름으로 제사를 드리는데 마당 한 복판에다가 상을 놓고 거기에다 한 접시를 올려놓는 것은 집을 지키는 터주 신에게 드리는 제물이 됩니다. 또, 주부가 잠을 자는 안방에다 상에 받쳐서 갖다놓는데 그것은 아기를 잘 낳게 해달라고 삼신에게 드리는 제물입니다. 대청마루에 갖다 놓는 떡은 성주 신에게 드리는 제물이고, 사랑방에 갖다놓는 떡은 조상신에게 드리는 떡입니다. 장독대나 변소에 갖다놓는 떡은 잡신을 위한 것으로 "이거 먹고 꺼져라!" 하는 뜻이 있습니다. 이러한 신 개념을 가지고 제사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미신으로 발전했기 때문에 안타까운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의 공통적 소원이 있습니다. 인생을 풍성하게 윤택하게 살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렇게 하라고 도와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방법이 무엇인가? 인생을 풍성하게 살려면 감사하면서 살면 풍성합니다. 감사를 우리가 몇 가지로 구분할 수가 있습니다. 먼저, 오늘 성경말씀대로 여호와께 감사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감사를 잊어버리지 않으면 감사할 것이 점점 많아지지만 잊어버리면 감사할 조건이 적어진다는 것입니다. 자녀를 길러보신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내가 낳은 자식일지라도 생각이 다릅니다. 어떤 자녀는 부모가 그렇게 많은 고생하면서 베푼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자녀는 감사한 마음으로 부모를 생각합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힘드실 때 "우리들을 위해서 희생하시고 이렇게 많은 것을 우리들에게 베풀어주셨다." 그러면 어머니, 아버지의 마음은 자녀에게 더 많이 베풀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무한적으로 요청만 하는 자식은 자식이지만 좀 얄밉게 생각합니다. 누가복음 17장의 열 문둥이 사건에서 나옵니다. 문둥이라고 하는 병은 인간에게 주어지는 매우 흉악한 질병이라서 우리나라에 있는 나병환자들 공동체에서 성경을 다시 번역해달라고 대한성서공회에 요청했습니다. 문둥병이라고 쓰지 말고 한센병으로 바꿔달라고 말입니다. 이름조차도 듣기 싫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그런 곳에 가셔서 문둥병이라는 단어를 쓰시면 큰 실례가 됩니다. 그러한 질병의 사람 열 명이 자기 인생의 소원인 깨끗함을, 예수님을 만나서 받았으니 평생의 소원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감사를 말한 사람은 한 사람뿐이라고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아홉은 어디 갔느냐?" 즉, 우리 사회는 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지만 90퍼센트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10퍼센트의 사람만이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리면서 산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종류별로 수없이 많은 이야기들이 나왔습니다. "땅을 기업으로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대적에게서 건지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종류별로 성경구절이 같은 문맥으로 연결됩니다. 이것은 "너희 주변에 감사할 조건을 찾아보라. 수없이 많을 것이다."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 앞에 감사를 잊지 않는 사람은 삶이 풍성하여 집니다. 추수감사절은 미국이라고 하는 나라를 빼놓고는 얘기가 안 되는 절기입니다. 세계 기독교의 공통점으로 사회주의 국가, 공산주의 국가에서도 추수감사절 설교는 서구 사회와 똑같이 합니다. 평양 봉수교회 담임 목사도 추수감사절 예배는 "이것은 청교도의 신앙 때문에 된 일입니다."라고 역사적으로 밝히면서 설교하는 것을 제가 비디오를 통해서 본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감사를 모르고 사는 인생은 사막과 같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리면서 내 주변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면서 성경구절이 나와 있는 것과 똑같이 내 주변도 이러한 말로 감사하면서 살라는 뜻입니다.
두 번째는 사람에게 감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한번 계산해 보세요. 내가 그래도 무식하지 않고도 무엇을 좀 알고서 세상을 살아가는데 편리한 것은 나를 가르쳐준 사람들이 수없이 많았다는 증거입니다. 유치원 선생에서부터 대학교수에 이르기까지 그 많은 수고의 사람들이 가르쳐주었기 때문에 내가 이만큼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이만큼 신앙생활을 꽤 잘하는 신앙인이 된 것은 수없이 많은 사람이 나를 이렇게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많은 기도를 해주었고, 그렇게 많은 설교를 해주었고, 그렇게 많이 나를 좋은 길로 인도해 주었고, 그래서 우리가 그분들의 노력을 통해 이만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바울 선생은 뭐라고 말합니까? "그러므로 나는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빚진 자로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살아야 인생이 풍성한 것입니다.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다 나를 도와주기 위해서 내 곁에 보내주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해야 사람의 만남이 풍성해지고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상식적으로 우리 인생에서 잘 된 것만 감사할 것이 아닙니다. 소원대로 되지 아니한 부분에서도 감사가 많음을 생각할 수 있는 믿음의 여유가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줍니다. 우리 인간관계는 좁게는 부부관계에서부터 크게는 세계인과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을 향해 항상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저 같은 목회자들은 교인들을 볼 때마다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하고 교인들은 주의 종들을 볼 때마다 감사한 마음을 가져서 감사의 교류만이 삶을 풍성하게 인도하는 겁니다.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 큰 행복을 감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큰 행복이란 무엇입니까? 영원성이 있는 행복을 말합니다. 지상에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까지 연결되는 행복이 큰 행복입니다. 천국의 삶이 약속되어져 있어야 지상의 삶도 행복한 것이지 마지막에 영생, 생명 불멸 진리에 대한 어떤 약속도 있지 않더라는 불안감은 현재 삶에 아무리 좋은 것을 소유했다고 하여도 불행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다소 지상에서의 생활은 고난의 부분이 있다고 하여도 하나님 나라의 영생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풍성함이 있어야 행복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 선생은 뭐라고 말했습니까? "만약 우리의 바라는 것이 이생뿐이면 우리는 불쌍한 자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의 소망적 고백은 "내가 선한 싸움을 싸웠습니다. 나는 달려갈 길을 믿음으로 달렸습니다. 이제 후로는" 바로 "이제 후로는"라는 말이 큰 행복의 조건을 말합니다.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의로우신 재판장이 내게 주실 것이니" 영생에 대한 약속이 큰 행복입니다. 다소 지상의 삶이 고난스러워도 행복의 약속이 있는 자는 풍성하게 살 수 있는 조건이 있음을 발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큰 행복이 나에게 주어져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감사하면서 살아야 삶이 날마다 풍성합니다. 성경에는 영원한 행복을 기억하지 못하고 눈앞에 보이는 것만 추구하다가 행복은 고사하고 영원한 저주의 대상이 된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롯의 처는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의 자리에서 세상에 미련을 두지 말라고 경고를 받았으면서도 세상을 바라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어버린 역사가 있고, 가룟 유다는 돈 30냥이라고 하는 세상의 기준을 선택했다가 예수님께서 주신 12사도의 영원한 행복을 상실하고 저주의 배반자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불행자가 되었습니다. 에서는 팥죽 한 그릇의 가치 때문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장자의 명분을 집어던져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 족장의 자리를 야곱에게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큰 행복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하는 자리는 내가 생명을 걸고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많은 순교자들이 죽어간 것이 아닙니까? 큰 행복, 영원한 영생의 복을 놓치지 말아야 삶이 풍성합니다.
그 다음으로 작은 행복을 감사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한국 말 가운데 성경말씀 같은 격언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무슨 뜻입니까? "행복은 내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내가 하기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자, 여기 지금 음식 만드는 재료가 있습니다. 똑같은 자료를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주면서 요리를 만들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랬더니 다 각기 다른 맛의 요리를 가지고 왔습니다. 자기가 생각한 요리를 해온 것입니다. 신학교에서는 설교학 교수께서 학생들에게 똑같은 성경구절을 줍니다. 이 구절로 설교를 만들어오라고 합니다. 50명이 똑같은 성경구절을 받았는데 설교는 다 방향이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이라는 재료를 우리 각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네가 만들어라! 네 인생은 네가 만들어야 돼!" '인생'이라는 제목을 주고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숙제이며 우리의 책임입니다. 그러므로 만들어가는 작품의 주인은 나 자신입니다. 내가 만들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 중에 하나님 말고 누가 나를 제일 사랑하고 관심을 가져줍니까? 나 자신에 대해서 나 자신이 제일 관심이 많습니다. 내가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야 됩니다. 재료는 넉넉합니다. 작은 것을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은 큰 것도 감사를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작은 행복들이 얼마든지 있는데 그것을 누리지 못하고 불평만 늘어놓다가 더 큰 불행을 만나는 경우의 사람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재료는 똑같은데 남들은 그것을 가지고 아주 맛있는 요리를 만들 수 있는데 아무것도 못 만듭니다. 나는 불행하다고 생각하면 점점 더 괴로운 자리로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외롭다는 생각에 빠져들면 점점 더 깊은 수렁에 빠져 우울증이 되어버립니다. 내가 나를 도와주면 나의 삶을 빛나고 창조적으로 만들 사람은 나 자신입니다. 누구도 나에 대해서 나만큼 관심이 없습니다. 의존적인 행복은 언젠가는 실망합니다. 원망을 떠나 감사의 세계로 나를 발전시키는 것이 하나님 백성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 목회자들이 매주일 하는 일 가운데 환자 심방을 많이 가게 됩니다. 지난 주간에도 재활병동을 비롯해서 고난 중에 있는 형제들을 돌아봤습니다. 아직 젊은 나이인데도 쓰러져서 고통 중에 있는 형제를 심방하고 왔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건강한 몸으로 이렇게 교회에 오셨습니다. 그 하나의 조건만 가지고도 이 감사절에 감사를 풍부하게 해야 합니다. 원망을 생각하면 끝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주변에 감사한 방향을 더 많이 바라보고 인생을 풍성하게 만들어가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의 정치권을 바라보면 아주 흉년이 들어서 얻어먹을 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가을 들판을 바라보면 풍년입니다. 이럴 때는 우리가 들판만 바라봅시다. 갈보리 교인들은 금년에 좋은 일이 많았습니다. 제가 알게 된 것만 해도 고시에 합격한 교인도 많았고 금년이 무슨 쌍춘년이라서 그런지 결혼한 사람도 많아졌고 아기 안 생겼다가 아기 생긴 교우들도 여럿 있고 좋은 학교에 입학이 결정된 사람들도 많고 군에 간 아들이 건강하게 잘 마치고 제대한 형제들, 그동안에 개업하신 분들도 많았습니다. 또 요즘엔 판교에 당첨된 교인들도 계시고…. 저는 요즘에 감사한 일이 많습니다. 내 목회 인생 말년에 이렇게 갈보리교회 담임 목사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목회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갈보리교회에서 신앙생활 한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감사를 찾아가면서 살아야 인생이 풍성한 것이지 그것을 찾지 못하는 사람은 입에 원망만 붙어 무슨 불평이 그렇게 많은지 그런 사람은 평생 풍성하게 살지 못할 것입니다. 내 인생은 내가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이렇게 많은 감사의 조항들을 기록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너도 네 주변에서 찾아보라! 26가지! 아니면 260가지의 무한대의 감사 조건이 있을 것이다." 이런 뜻으로 똑같은 문맥의 감사 언어가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소 우리 주변에 고난스러운 문제들이 좀 있기는 해도 이렇게 풍성한 감사의 달이 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의 달을 맞이해서 우리 영혼이 열려서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감사의 조건들이 무엇이 있을까 오늘 말씀이 말하는 내용을 영적으로 살피면서, 내 마음이 감사로 풍성한 삶을 살아가는 아버지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다소 주변에서 여러 고난에 접한 형제들을 배나 더 사랑하여 주셔서 모든 문제가 아버지의 말씀 안에서 해결되고 아버지가 주신 약속 때문에 오늘의 고난을 잘 이겨가는 지혜로운 믿음의 자녀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또 한주간도 하나님이 약속해 주신 순례의 길의 축복을 믿으면서 힘있게 찬송을 부르며 세상을 이겨가는 주의 자녀들이 되게 해주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출처/이필재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