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7
축복받은 결혼의 조건
인간은 외로움을 느끼는 존재다. 왜냐하면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로 최초의 가정을 만드셨다. 하나님은 세 가지의 목적, 협력의 삶, 삶의 즐거움, 재창조의 원리로 부부를 탄생시키셨다.
내 뼈 중의 빼요, 내 살 중의 살이라. 남성은 흙으로 만들고 여성은 그 갈비뼈로 만들어서인지는 몰라도 여성은 남성보다 훨씬 예쁘고 그 생명의 연수도 더 길다.
“행복의 문 열리어라. 행복을 누릴 자 들어온다”라는 노래 소리와 함께 하얀 웨딩드레스에 면사포를 쓰고 들어오는 신부의 모습은 일생에 있어서 가장 환희에 찬 승리의 모습이다.
옛날 희랍에서는 혼인하는 날, 신랑 신부의 머리 위에 월계관을 씌워주었다. 이 황홀한 낭만, 파란 잔지 위에 두 마리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달려가는 희망의 팡파르. 호반의 벤치에서 저녁 노을을 바라보는 환상의 꿈을 그려본다. 그 행복이 전부요, 진실이라면 우리가 사는 인간의 삶이 비극이나 불행의 갈등은 전연 들어올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의 삶이 현장은 그리고 결혼의 비극성을 인지한 현대인들은 이제는 그런 달콤한 생각만 가지고 결혼하는 것은 아니다.
현대인들은 결혼의 이유로 ‘서로의 행복을 위하여’라고 말한다. 정말 아름다운 말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자리잡고 있다. ‘서로의 행복을 위하여’라는 말을 바꾸어 말하면 ‘상대를 자기 행복의 도구로 삼는다’는 말이 되기 싶다. 남성은 상대 여성을 자기의 행복을 도구로, 여자는 남자를 행복의 도구로 삼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 상대가 내 행복의 도구로써 손상이 올 때는 이를 지체 없이 파기하고 마는 현상이 온다. 이런 결혼은 극단적 개인주의의 사고에서 나오는 것이다.
개인주의자들도 사랑을 노래한다. 그러나 참된 의미에서의 사랑은 존재할 수 없다. 참사랑은 다른 사람과의 참된 결합에서 인간 본래의 존재 양식과 그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데서 발견하고 창조하는 데 있는 것이다.
여자를 갈비뼈로 만들었다는 것은 머리뼈로 만들어서 떠받들고 우러러 모시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도 아니요, 발목뼈나 손목뼈로 만들어 남성의 명예와 지위의 수단가지로 여겨야 된다는 것도 아니다. 심장이 뛰는 옆구리의 갈비뼈로 만들었다는 것은 서로 돕고 아끼는 인격 대 인격의 만남, 주체 대 주체의 대화, 즉 동반자요 반려자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하다. 결혼과 함께 두 사람은 내 뼈 중의 뼈가 아니라 그 여자 혹은 그 남자로 불려지게 되었다. 서로 원망하면서도 헤어질 수 없는 이중구조 속에서 믿음으로 승리하는 가정이 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 전통 사회에서는 결혼을 ‘시집간다, 장가간다’고 한다. 영어의 Wed는 약속이나 서약을 뜻하고 시집이란 말은 남편이 아니라 남편의고 집을 뜻한다.
한 남자와 함께 살려고 가는 곳이 아니라 그 집 가족과 함께 살려고 간다는 말이 된다. 장가간다는 것도 장가는 장인 장모가 있는 처가를 의미하며 고구려 때는 남자가 아내와 결혼하기 위해서 장인 장모의 집에서 살다가 첫 자녀를 낳으면 그때야 색시를 자기 집으로 데려왔다.
이제 오늘을 사는 기독교인의 결혼은 하나님의 구속사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십자가 없이 경건하고 복된 가정을 이룰 수 없다. 섬김과 사랑과 헌신 없이 기독교의 결혼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것이 없으면 결혼은 기독교의 결혼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것이 없으면 결혼은 서양풍의 경박한 향락주의로 전락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