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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골로새서 1:24~25)
오늘은 예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날을 기념하는 종려 주일입니다. 베다니에서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연도에 모인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하례하며 찬송했던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마 21:1-11).
그 후부터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까지 마지막 한주간의 일들을 생각하면서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신앙을 가지고자 합니다. 본문 24절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하신 말씀은 오늘날 교회와 성도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게 하는 요긴한 말씀입니다. 이 시대에 우리의 몸으로 채워야 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그리스도의 고난
예수님의 지상 생활은 고난으로 일관된 것이지만 그 고난은 오직 예수님만이 감당할 수 있는 고난입니다. 본문 말씀 중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의 육체에 채운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먼저 그리스도의 고난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의 아들이 겪은 고난
사도 요한은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가리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였습니다(요 1:14).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동등 되는 분이라고 하였습니다(빌 2:6). 성경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실상 하나님과 같은 분이요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요 1:1-3).
창조의 근본 되시며 인류와 역사를 주장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것도 지음 받은 인간의 손에 의하여 고난을 당하셨다는 것은 전혀 설명이 안 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는 하나님께서 목적을 가지고 스스로 인간세계에 오셨다는 것과 또 그가 자원해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다는 것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습니다(막 10:45).
2) 속죄를 위한 고난입니다.
구약의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에게 사람의 몸을 입혀 세상에 보내실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사 7:14).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그분으로 하여금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죽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사야 53:4에 “그가 우리의 질고를 지고 슬픔을 당하였다”고 하였습니다. 5절에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범죄한 인간은 스스로 죽음의 형벌에서 벗어날 수 없었지만 오직 하나님께서 인간이 받을 죽음과 형벌을 그의 아들이 대신 받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약의 제사 제도에서 보여주는 속죄 원리 입니다(레 16:15-16).
3) 영광을 위한 고난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이 임박했을 때 대제사장적인 기도를 드리시면서 그의 고난으로 인하여 받게 되는 영광을 감사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7:1에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의 죽음을 당하시게 되는 것을 가리켜 아들을 영화롭게 하시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영광을 받으신다고 하였습니다. 비록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인 취급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그 일로 인하여 아버지와 아들에게 영광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로마서 3:23-24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2. 몸 된 교회가 당하는 고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예수님께서 담당하지 못하여 남겨 놓은 고난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지상에 있는 교회가 당해야할 몫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1) 머리와 몸은 일체입니다.
예수님과 교회와의 관계는 인체의 조직처럼 유기적(有機的)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의 조직이 머리와 몸과 지체로 연합되어 있는 것처럼 교회도 예수님과 불가분리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22에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요 교회는 그의 몸이라고 하였습니다. 머리에 이상이 생겨 고통을 받게 되면 몸도 그 아픔을 같이 겪어야 되는 것처럼 예수께서 당하시는 고난은 교회에도 그대로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몸 된 교회가 당하게 되는 고난의 경우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대속하시기 위하여 당하신 십자가 죽음과는 성격이 같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는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인하여 탄생된 교회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하여야 될 역할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머리가 하는 역할이 있고 몸이 하는 역할이 따로 있는 것처럼 교회도 세상에 존속하는 그날까지 수행하여야 될 역할이 있고 그것 때문에 겪어야 될 고난의 과정이 있는 것입니다.
2) 거룩을 보존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의 몸 된 교회도 거룩한 기관입니다. 비록 죄와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에 있을지라도 교회는 세상과 구별된 기관입니다. 디모데전서 3:15에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고 하였습니다. 16절에는“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도 교회의 신비(비밀)는 거룩함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교회는 죄악된 세상과 맞서서 대결하고 또한 세상을 변화 시키는 사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자체가 거룩하고 깨끗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또는 “세상의 빛이니”라고 하신 말씀도 죄악된 세상을 변화 시켜야하는 교회의 사명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세상이 만만하게 교회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회를 향하여 도전하고 갖은 방법으로 핍박하고 훼방합니다. 요한복음 1:19에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에베소서 6:12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고 하였습니다.
3)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전개하시는 구원 운동을 이루기 위하여 자기 교회에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열 두 명의 제자를 부르시고 그들에게 훈련을 시키신 것도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사역을 계승하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언어나 종족이나 국경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전도의 대상입니다(행 1:8, 마 28:19).
이와 같은 사명은 교회가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계속해야 될 가장 중요한 사역인 것입니다. 교회가 복음 전파의 사명을 수행하는 데는 말할 수 없는 고난이 있고 엄청난 시련을 겪어야만 됩니다. 처음 제자들과 사도들은 주님의 이 분부를 따라서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소아시아와 마케도니아와 로마에까지 다니며 복음을 전파 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핍박을 받았고 그 일로 인하여 거의 다 순교를 하였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기 사명을 수행하였을 경우 예외 없이 시련을 겪어 나왔습니다. 환란시대에는 진리를 파수하기 위하여 수난을 당했고, 이교 사회에서는 복음을 전파 하던 사람들이 순교자로 희생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3.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고난입니다.
성도가 세상에 사는 날 동안 고난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셨습니다(요 16:33).
1) 예수님의 길을 가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평탄하고 쉬운 길로 가기를 원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사람은 힘들고 어려운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수를 믿고 영생을 얻은 사람의 가는 길은 험하고 힘든 길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7:12에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마 16:24). 곧 예수님의 길을 가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는 자요 또한 십자가의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 또는 주님의 이름 때문에 욕을 먹거나 시달리는 사람은 복이 있는 자라고 하였습니다(마 5:10-11). 사도 바울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딤후 3:12). 사도 베드로는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답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벧전 2:1-21).
2)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믿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라고 여기는 자입니다. 믿는 자에게 주어진 특권 곧 성령의 은사와 하나님의 능력, 그리고 천국 시민권의 확증과 같은 엄청난 은혜를 받은 것도 사실입니다.
이와 같은 특권은 우리가 자격이 있어 받은 것도 아니요 감당할만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 대하여 사도 바울은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고후 4:7). 그는 또 믿음의 축복을 받았기 때문에 사방으로부터 우겨쌈을 당하기도 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기도 하고 박해를 받기도 하고 거꾸러뜨림을 당하기도 하면서 오히려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살아간다고 하였습니다(고후 4:8-10).
내가 가진 것이 귀한 것일수록 이것을 빼앗으려는 세력이 많이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5:8에는 우리의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으며 덤벼든다고 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11:14에는 사탄이 광명한 천사처럼 과장하고 우리에게 접근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유형무형의 박해와 시험 가운데서도 성도가 믿음을 끝까지 지키려할 때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만 되는 것입니다.
3) 존귀한 축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천국 백성이 받게 되는 팔복을 선언하시면서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고 하였습니다(마 5:11-12).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속죄의 은혜에 감사하고 또 주 예수로부터 받은 사명의 막중함을 알아 거기에 보답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고난을 즐거움으로 여기며 달게 받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헌신하는데 최선을 다합니다. 바울은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자기 육체에다 채운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자세는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당연한 것이며 또한 영광스러운 축복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27절에 보면 이처럼 성도가 주와 복음을 위해서 고난을 당하는 것과 몸 된 교회를 위하여 헌신하는 것을 그는 “비밀의 영광이 풍성케 되는 것”이라 하였고 또 그 비밀은 그리스도인데 곧 “영광의 소망”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도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 하는 것은 말할 수 없는 영광의 축복과 소망을 이루는 과정인 것입니다(롬 8:18).
출처/손상률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오늘은 예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날을 기념하는 종려 주일입니다. 베다니에서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연도에 모인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하례하며 찬송했던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마 21:1-11).
그 후부터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까지 마지막 한주간의 일들을 생각하면서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신앙을 가지고자 합니다. 본문 24절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하신 말씀은 오늘날 교회와 성도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게 하는 요긴한 말씀입니다. 이 시대에 우리의 몸으로 채워야 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그리스도의 고난
예수님의 지상 생활은 고난으로 일관된 것이지만 그 고난은 오직 예수님만이 감당할 수 있는 고난입니다. 본문 말씀 중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의 육체에 채운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먼저 그리스도의 고난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의 아들이 겪은 고난
사도 요한은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가리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였습니다(요 1:14).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동등 되는 분이라고 하였습니다(빌 2:6). 성경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실상 하나님과 같은 분이요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요 1:1-3).
창조의 근본 되시며 인류와 역사를 주장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것도 지음 받은 인간의 손에 의하여 고난을 당하셨다는 것은 전혀 설명이 안 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는 하나님께서 목적을 가지고 스스로 인간세계에 오셨다는 것과 또 그가 자원해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다는 것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습니다(막 10:45).
2) 속죄를 위한 고난입니다.
구약의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에게 사람의 몸을 입혀 세상에 보내실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사 7:14).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그분으로 하여금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죽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사야 53:4에 “그가 우리의 질고를 지고 슬픔을 당하였다”고 하였습니다. 5절에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범죄한 인간은 스스로 죽음의 형벌에서 벗어날 수 없었지만 오직 하나님께서 인간이 받을 죽음과 형벌을 그의 아들이 대신 받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약의 제사 제도에서 보여주는 속죄 원리 입니다(레 16:15-16).
3) 영광을 위한 고난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이 임박했을 때 대제사장적인 기도를 드리시면서 그의 고난으로 인하여 받게 되는 영광을 감사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7:1에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의 죽음을 당하시게 되는 것을 가리켜 아들을 영화롭게 하시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영광을 받으신다고 하였습니다. 비록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인 취급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그 일로 인하여 아버지와 아들에게 영광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로마서 3:23-24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2. 몸 된 교회가 당하는 고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예수님께서 담당하지 못하여 남겨 놓은 고난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지상에 있는 교회가 당해야할 몫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1) 머리와 몸은 일체입니다.
예수님과 교회와의 관계는 인체의 조직처럼 유기적(有機的)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의 조직이 머리와 몸과 지체로 연합되어 있는 것처럼 교회도 예수님과 불가분리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22에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요 교회는 그의 몸이라고 하였습니다. 머리에 이상이 생겨 고통을 받게 되면 몸도 그 아픔을 같이 겪어야 되는 것처럼 예수께서 당하시는 고난은 교회에도 그대로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몸 된 교회가 당하게 되는 고난의 경우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대속하시기 위하여 당하신 십자가 죽음과는 성격이 같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는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인하여 탄생된 교회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하여야 될 역할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머리가 하는 역할이 있고 몸이 하는 역할이 따로 있는 것처럼 교회도 세상에 존속하는 그날까지 수행하여야 될 역할이 있고 그것 때문에 겪어야 될 고난의 과정이 있는 것입니다.
2) 거룩을 보존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의 몸 된 교회도 거룩한 기관입니다. 비록 죄와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에 있을지라도 교회는 세상과 구별된 기관입니다. 디모데전서 3:15에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고 하였습니다. 16절에는“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도 교회의 신비(비밀)는 거룩함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교회는 죄악된 세상과 맞서서 대결하고 또한 세상을 변화 시키는 사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자체가 거룩하고 깨끗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또는 “세상의 빛이니”라고 하신 말씀도 죄악된 세상을 변화 시켜야하는 교회의 사명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세상이 만만하게 교회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회를 향하여 도전하고 갖은 방법으로 핍박하고 훼방합니다. 요한복음 1:19에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에베소서 6:12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고 하였습니다.
3)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전개하시는 구원 운동을 이루기 위하여 자기 교회에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열 두 명의 제자를 부르시고 그들에게 훈련을 시키신 것도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사역을 계승하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언어나 종족이나 국경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전도의 대상입니다(행 1:8, 마 28:19).
이와 같은 사명은 교회가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계속해야 될 가장 중요한 사역인 것입니다. 교회가 복음 전파의 사명을 수행하는 데는 말할 수 없는 고난이 있고 엄청난 시련을 겪어야만 됩니다. 처음 제자들과 사도들은 주님의 이 분부를 따라서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소아시아와 마케도니아와 로마에까지 다니며 복음을 전파 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핍박을 받았고 그 일로 인하여 거의 다 순교를 하였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기 사명을 수행하였을 경우 예외 없이 시련을 겪어 나왔습니다. 환란시대에는 진리를 파수하기 위하여 수난을 당했고, 이교 사회에서는 복음을 전파 하던 사람들이 순교자로 희생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3.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고난입니다.
성도가 세상에 사는 날 동안 고난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셨습니다(요 16:33).
1) 예수님의 길을 가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평탄하고 쉬운 길로 가기를 원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사람은 힘들고 어려운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수를 믿고 영생을 얻은 사람의 가는 길은 험하고 힘든 길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7:12에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마 16:24). 곧 예수님의 길을 가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는 자요 또한 십자가의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 또는 주님의 이름 때문에 욕을 먹거나 시달리는 사람은 복이 있는 자라고 하였습니다(마 5:10-11). 사도 바울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딤후 3:12). 사도 베드로는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답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벧전 2:1-21).
2)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믿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라고 여기는 자입니다. 믿는 자에게 주어진 특권 곧 성령의 은사와 하나님의 능력, 그리고 천국 시민권의 확증과 같은 엄청난 은혜를 받은 것도 사실입니다.
이와 같은 특권은 우리가 자격이 있어 받은 것도 아니요 감당할만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 대하여 사도 바울은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고후 4:7). 그는 또 믿음의 축복을 받았기 때문에 사방으로부터 우겨쌈을 당하기도 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기도 하고 박해를 받기도 하고 거꾸러뜨림을 당하기도 하면서 오히려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살아간다고 하였습니다(고후 4:8-10).
내가 가진 것이 귀한 것일수록 이것을 빼앗으려는 세력이 많이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5:8에는 우리의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으며 덤벼든다고 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11:14에는 사탄이 광명한 천사처럼 과장하고 우리에게 접근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유형무형의 박해와 시험 가운데서도 성도가 믿음을 끝까지 지키려할 때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만 되는 것입니다.
3) 존귀한 축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천국 백성이 받게 되는 팔복을 선언하시면서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고 하였습니다(마 5:11-12).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속죄의 은혜에 감사하고 또 주 예수로부터 받은 사명의 막중함을 알아 거기에 보답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고난을 즐거움으로 여기며 달게 받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헌신하는데 최선을 다합니다. 바울은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자기 육체에다 채운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자세는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당연한 것이며 또한 영광스러운 축복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27절에 보면 이처럼 성도가 주와 복음을 위해서 고난을 당하는 것과 몸 된 교회를 위하여 헌신하는 것을 그는 “비밀의 영광이 풍성케 되는 것”이라 하였고 또 그 비밀은 그리스도인데 곧 “영광의 소망”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도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 하는 것은 말할 수 없는 영광의 축복과 소망을 이루는 과정인 것입니다(롬 8:18).
출처/손상률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