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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를 위해 핍박받으면 (마태 5:10~12)
지금 북한에는 예수를 믿는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철저하게 인권을 유린당하면서 혹독한 핍박을 받고 있는 성도들이 통상적인 추측보다 훨씬 많이 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수만 명, 어떤 사람은 최소한 만 명은 있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흘러 들어온 것인지 모르지만 저는 최근에 편지 한 통을 받았습니다. 북한에 있는 지하 교회 성도들이 오늘 21일을 특별히 금식 기도일로 정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기로 작정했으니 그들의 기도에 남한 교회가 동참해 달라고 요청하는 내용 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너무 촉박해서 이 요청 이 전국 교회에 제대로 전달이 안되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 편지를 읽으면서 사랑의교회 만이라도 오늘 하루는 다른 모든 기도를 제쳐 놓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또 북한에서 예수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고통을 당한 어느 형제의 간증문을 직접 읽은 일이 있습니다.
무슨 글자인지 알아보기 힘든 편지였지만 거기에 그는 이런 말을 썼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보위부에 끌려가 여러 달 동안 독방에서 온갖 고초와 고문을 당하며 고통을 받았다고 합니다. 놀란 것은 그곳에 가서 보니 거기 끌려 온 사람들의 80%가 다 예수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와서 고생을 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는 80대의 노인도 끼어 있었고, 너무나 심하게 고문을 당하고 매를 맞아서 정상적으로 걸을 수 없을 만큼 장애자가 된 사람도 한 두 명이 아니고, 전기 고문을 받아서 정신이 돌아 버린 사람들 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독방에 갇혀 하도 배가 고파 '하나님 좀 주세요.'라고 기도했더니 쥐가 몇 마리 튀어 나오길래 그 가운데 두 마리를 잡아서 껍질을 벗겨 날 것으로 먹으 면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것이라도 주시니 고맙습니다.' 하며 감사했다는 글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당하는 핍박에 직접 동참할 수는 없지만, 그들을 위한 기도만은 해야 합니다. 모였을 때도 기도하고 가정에 돌아가서도 기도하되 오늘은 특별히 그들을 마음에 두고 북녘 하늘을 바라보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다니엘이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난 창문을 열어 놓고 하루 세 번씩 기도하듯이 우리 모두가 기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루살렘 성도들이 핍박을 받았을 때 그들은 밤 중에 다락방에 모여서 이렇게 소리 높여 기도했습니다. 사도행전 4장을 보면 그 내용을 읽을 수 있습니다.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 하옵시고' 즉 '주여, 저희가 핍박 당하는 것을 굽어 보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이렇게 그들은 소리 높여 기도했습니다. 핍박을 물리쳐 달라고 기도하기 전에 핍박 중에서도 복음을 더 담대하게 전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했고, 핍박 당하는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가 나타나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가 끝나자마자 성령이 그 자리에 임하셔서 모인 곳을 진동하시고 모든 성도들로 하여금 성령 충만하게 하시어 복음을 더 담대하게 전하도록 했습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 이 십자가 앞에 굴복했습니다. 온 유다와 사마리아가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도 북한 동포를 위하여 기도하면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북한에 있는 모든 어두움의 장막이 물러가고 하나님의 나라, 자유와 평화의 나라가 임할 줄을 분명히 믿습니다. 이렇게 북한에 있는 우리 형제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주일을 맞아서 매주마다 은혜 받던 팔복 가운데서 몇 개를 뛰어 넘어 제일 마지막에 있는 말씀을 함께 생각하고 묵상하는 것은 대단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하면 이것은 과거형 같지만 원문대로 하면 현재형입니다.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 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니라. 너희 전에 있던 모든 선지자들을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 핍박하였느 니라.' 우리가 이 말씀을 조용히 마음에 담고 성령의 깨우치심을 통해서 깨닫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에서 의를 위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11절의 말씀이 보충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나를 인하여' 즉 '예수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의를 위하여 핍박 받는다는 말은 예수님 때문에 핍박 받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핍박'이라는 말이 굉장히 대단한 말로 들리지 않습니까? 그러나 감옥에 끌려 가서 고생을 해야 되고 순교를 해야 만이 핍박을 받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10절, 11절에서 보충적인 설명과 적용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것이 핍박 받는 것입니까? 예수 때문에 욕 먹는 것, 예수 때문에 모욕 당하는 것은 핍박 받는 것입니다.
예수 때문에 중상모략을 당하고 손해를 당하는 것도 핍박 당하는 것이라고 주님이 설명합니다. 이 핍박은 가정에서도 일어날 수 있고, 평화와 자유가 보장되는 민주 사회에서도 일어날 수 있고 직장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또 북녘 땅에 있는 백성들처럼 정치가 잘못 되어서, 사상이 잘못 되어서도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디서나 이런 핍박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가 어떤 자세를 가지고 이 핍박을 감수해야 됩니까? 어떤 자세입니까? 불평입니까? 탄식입니까? 원망입니까? 아닙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마음으로 핍박을 받으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약속한 엄청난 은혜가 있습니다.
먼저 천국이 저희 것이 되고 또 하나는 하늘에서 상이 큽니다.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설교를 준비하면서 묵상하는 중에 '나는 이 설교할 자격이 없어.' 하는 자주 생각을 했습니다. 평생 핍박을 받아 보지를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자유와 평화가 보장되는 나라에서 살면서 목사가 되어 지금까지 설교해 왔지만 아무도 내 멱살을 잡고 '너 이 설교 왜 했냐?'고 모욕한 사람이 없었 습니다. 지금까지 예수 믿고 이것 저것 얻을 것만 잔뜩 누리고 살았지 내가 핍박 받은 것이 뭐가 있습니까? 그러니 '난 이 설교할 자격이 없다.' 하는 생각을 계속 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뻐하고 즐거워 하면서 핍박을 받으라고 했지만, 저는 가끔 전도를 나가서 예수 믿으 라고 하는데 날 째려 보면서 모욕하거나 좋지 않은 소리를 한 마디라도 할 때는 기뻐하고 즐거워하기는커녕 그것이 기분 나빠 하루 종일 우울하게 지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저 자신이 볼 때 전혀 자격이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말씀을 설교해야 된다고 확신했습니다. 그것은 저를 위해서입니다. 이 말씀을 설교 함으로써 저 자신이 받을 은혜가 있기 때문 입니다. 또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은 이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자유와 평화가 보장되는 세상에 무슨 핍박 이야기를 하느냐? 그러지 않아도 머리 아픈데.'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듣지 않으면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려고 하는 은혜를 다 놓쳐 버립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들으면서 핍박 당하고 있는 지구상의 많은 성도들에게 뒤지지 않도록 신앙생활을 해야 되겠다고 각오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도 언젠가는 핍박을 당할지 모릅니다. 그 때를 위해서 우리는 준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핍박 당할 때만 즐거워하고 기뻐할 것이 아니라 핍박 없는 사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모습을 좀 더 밝고 좀 더 기쁘게 간직하고, 다시 한번 신앙생활을 시작해야 된다는 각오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말씀을 조용히 들으면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첫째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 핍박은 정상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서를 읽다 보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을 쭉 읽으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한 마디, 한 마디 살펴 보면 예수님은 대단히 솔직하시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나를 믿으면 너희들도 핍박 받을 것이다.' 하는 말을 듣고 예수 믿을 사람이 몇 명이나 될 것 같습니까? '너희들이 생명을 내 놓고 죽을 각오를 하지 아니하면 나를 좇아 올 수 없다. 너희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아 와야 된다. 이 길은 좁은 길이다. 이 길은 고난의 길이다.' 이런 말을 듣고서도 예수 믿고 주님 따라 갈 사람이 있겠어요?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아무도 예수 믿을 사람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드러내놓고 이야기 하십니다. '나를 따르려거든 네 십자가를 져라. 나의 가는 길은 고난의 길이다. 자기 목숨을 아끼려고 하는 사람은 나를 따를 수 없느니라.' 대놓고 주님께서는 예수를 믿으면 핍박 당한다는 것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얼마나 솔직하신지 모릅니다. 주님은 사람들의 눈치를 보아 가면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물러갈까 싶어 겁이 나서 하나님의 진리를 적당하게 포장해서 말씀하신 일이 없습니다.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말씀하셨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요한복음 15장 19,20절에 나옵니다. 그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다시 말하면 이렇습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해 있으면 세상이 너희를 절대 핍박하지 않는다. 제 새끼 미워하는 부모가 없듯이 세상이 너희를 사랑할 것이지만'. '너희는 세상에 속한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 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주님은 숨기지 않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제자들은 주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한평생 복음을 전하다가 다 순교했습니다. 예수 믿으면 이 세상에서 핍박당한다는 것을 다 알면서도 초대 교회 성도들은 모두가 예수 믿고 주님을 따라 갔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가족을 잃었습니다. 직업을 잃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핍박 받아 나중에는 산 속에서 유리하고 사막에서 방황하다가 굶어 죽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끌려 가서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결국은 형장에서, 아무도 보지 않는 외로운 그 자리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순교 했습니다. 알면서 다 따라갔습니다. 가장 어려웠을 때가 '로마 황제가 신이다. 예수를 배반하고 로마 황제를 믿어라. 그렇게 하겠다면 너를 용서해 주겠다.'는 유혹을 받을 때였습니다.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말 한 마디로만 예수 안 믿겠다고 하면 풀려 나서 다시 정상적인 생활로 회복이 되는데 이 한 마디 말을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 한 마디 말을 못해서 세상이 볼 때는 가장 바보 같은 인생의 종말을 고한 사람들이 초대 교회 안에 수십만이 있었습니다. 사자굴에 던져지고, 십자가에 못 박힘을 당하고, 화형을 당하고, 자식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고아 신세가 되어 어떻게 됐는지 알 수도 없는, 부모로서는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을 당하면서도 예수 모른다는 말 한 마디를 할 수가 없어서 주님이 가신 그 길을 따라간 성도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공산주의 그 어두운 그림자가 지구 한 모퉁이를 덮을 때 시베리아, 소련, 동구권, 북한, 중공에서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생명을 걸고 싸우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는지 모릅니다. 시베리아 형무소에 끌려가 수십 년 동안 고통 당하면서도 '예수 모른다, 나는 예수 안 믿겠다.'는 그 말 한 마디를 못해서 한 생을 수용소에서 늙어 버린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닙니다. 저 북한에는 아오지 탄광과 같은 죽음의 탄광에 끌려 가서 그 곳에서 하루 종일 석탄을 캐다가 나중에는 피를 토하고 한 생을 마친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지금도 예수 모른다는 말 한 마디를 못해서 너무나 고통스러운 한 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북한에는 많이 있습니다. 일제 시대 일본은 우리에게 간교한 유혹을 했습니다. '천황에게 절하라. 천황이 신이다.' 주기철 목사님과 같은 분들은 생명을 걸고 싸웠습니다. 그가 구속 당하기 얼마 전에 한 유명한 설교를 아직도 저는 기억합니다. 여러분도 이 설교를 들으셨을 겁니다. '못합니다.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다른 신에게 정절을 깨뜨리지 못합니다. 못합니다.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일본 신사에게 절하지 못합니다. 나는 어렸을 때 주 안에서 자랐고 예수 그리스도 에게 충성을 열번 백번 맹세했습니다. 드리리다. 드리리다. 이 목숨 하나만이라도 주님께 드리리다.' 결국 감옥에 들어간 그는 시체가 되어서 나왔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 핍박은 정상입니다. 핍박 받는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그저 살아 보겠다고 베드로처럼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해 버리면, 그 상처가 얼마나 큰지 평생 거기서 헤어나지 못한다고 합니다. 물론 나중에 회개하고 예수님 앞에 다시 돌아온 사람들이 많지요. 그러나 '나는 한 때 예수님 모른다고 부인했는데. 나 살겠다고 예수님 버렸는데.' 하는 가책 때문에 그 상처에서 헤어나지를 못한다고 합니다. 이미 세상을 떠나신 한경직 목사님이 기독교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템플턴 상을 수상하고 그 경사스러운 일을 축하하기 위해서 모여 예배를 드린 후 식사를 할 때였습니다. 인사를 하기 위해서 나온 한경직 목사님의 입에서 갑자기 엄청나게 충격적인 말이 나왔습니다. 나오시자 마자 대뜸 하시는 말이 '여러분, 저는 죄인입니다. 저는 일본 신사 앞에 절한 죄인입니다.' 그 자리에 있던 제가 얼마나 충격을 받고 놀랐는지 모릅니다. 그 전에는 그런 사실을 제가 몰랐거든요. 절을 했다는 그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그 사실을 반 세기가 지난 다음에 새삼스럽게, 또 그 경사스러운 자리에서 고백을 하는 그의 용기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느낀 것이 있습니다. '얼마나 그 동안 가슴에 가책을 많이 받았으면 또 저런 말씀을 하실까?' 그러므로 할 수 있으면 핍박 당할 때 성도들은 주님을 모른다는 말을 안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생명을 빼앗기는 한이 있더라도 주님 만날 때 부끄럽지 않도록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북한에 있는 많은 성도들이 피를 흘리고 있어요.
지금도 전세계적으로는 많은 핍박이 있습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라는 잡지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것은 기독교 잡지가 아닙니다. 그 잡지 97년도 10월 호에는 오늘날처럼 기독교가 신앙 때문에 박해 받은 일이 역사상 별로 없었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제가 읽으면서 보았더니 사실이었습니다. 1900년대 20세기에 전세계적으로 2억에서 2억5천만이 넘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혹독한 핍박을 당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니까 그 말이 과장된 것이 아닙니다. 공산치하에서 고통 당한 사람들의 수가 얼마인지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그리고 지금도 회교권에서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종교적인 핍박을 당해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저 수단이라는 나라는 인구의 1/5이 크리스챤입니다. 그런데 인구의 4/5에 해당하는 회교도들에게 핍박을 받아 누바라고 하는 지방에 있는 사람들은 지난 10년 동안 청장년 남자들만 50만 명이 끌려가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북한에는 지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 때문에 순교를 당했는지 우리는 그 수치조차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고문을 당했습니다. 노예처럼 인권 유린을 당했습니다. 강간 당했습니다. 투옥 당했습니다.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서 다 격리 당했습니다. 평생동안 중노동을 하다가 그 자리에서 죽어갔습니다. 여러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라 가는 길은 어떤 길입니까? 그저 내 소원 다 이루어서 편안하게 사는 것이 예수님을 따라 가는 길입니까?
성경을 보면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핍박을 받을 각오를 하고 예수 믿는 것이 주님을 따라가는 길입니다. 이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핍박 당하는 성도에게 가장 최고의 상을 약속하시고, 축복을 약속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나오지 않습니까? '천국이 저희 것임이니라.' 그 다음 또 하나는 '하늘에서 상이 큼이니라.'입니다. 적당한 상이 아닙니다. 엄청나게 큰 상을 하나님이 준비하고 계신다고 합니다. 여기서 천국이라고 하는 말은 예수 믿고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고 저는 보지 않습니다. 만일 큰 상이 단순히 구원받아 천국 가는 것이라면 이 팔복에서 하필 천국을 반복적으로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믿으면 다 들어가는 것인데, 그것을 특별히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으로 따로 말씀할 필요가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천국은 무엇 입니까? 우리의 마음에 임하는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주님의 다스리시는 세계가 내 마음에, 내 심령에 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내 안에 임하시는 것을 직접 체험하는 데서 오는 신비스러운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게 천국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핍박 받는다고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핍박을 혹독하게 받기 시작하고, 막다른 골목까지 가면 오직 한 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나머지는 전부 버려야 합니다. 오직 한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놓치지 않고 끝까지 붙들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희생하는 것입니다. 마치 바울이 타고 가던 배가 조난을 당하자마자 살아 남기 위해서 배 안에 있는 것을 자꾸 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나중에는 양식까지도 마지막으로 먹고 남은 것은 다 버렸습니다.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해서 다 버리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몸과 배만 남습니다. 마찬가지로 핍박을 당하면 예수님 한 분 끝까지 따라가기 위해서 부모도 버립니다. 처자도 버립니다. 나중에는 재산도 뺏깁니다. 다 버리는 것입니다. 자, 그렇게 되면 마음이 텅텅 비어 빈 마음이 됩니다. 그 빈 마음에 무엇이 임하는지 압니까? 천국이 임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예수 외에는 남아 있는 것이 없으면 그 자리가 바로 천국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임하시는 거룩한 천국입니다. 팔복의 제일 첫번째가 무엇입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첫번째 하나님이 약속한 행복과 마지막에 약속한 행복은 똑같습니다. 저는 이 둘이 서로 맥이 통한다고 봅니다. 언제 우리가 심령이 가장 가난한 자가 될 수 있습니까? 평안할 때입니까? 환경이 좋을 때입니까? 아닙니다. 언제 가장 내 심령이 가난해 질 수 있으며 내 심령이 빌 수가 있습니까? 핍박 당할 때입니다. 그럴 때 천국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령이 가난할 때 하나님이 약속한 축복과 핍박을 받을 때 하나님이 약속한 축복은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찬송이 하나 있습니다. 102장입니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 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이 찬송 부르는 사람의 심령은 천국입니다. 예수 외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찬송을 사랑하고 부르기는 하지만 사실 우리의 삶을 보면 엉터리가 많지요. 예수 보다 귀한 것이 없다고 했습니까?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아서 양손에 잔뜩 쥔 채로 입으로만 '예수 밖에는 없네'라고 찬송하면 다 되는 겁니까? 저나 여러분이나 다 그렇잖습니까? 평안할 때, 모든 일이 잘 될 때, 예수 믿고 복만 받았다고 생각할 때는 너무 마음에 드는 것이 많기 때문에 입으로는 예수 밖에 없다고 하면서도 이것 저것 다 마음에다 집어 넣고 살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사실 평화로운 때에는 우리 마음을 비운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핍박을 당하면 타의든 자의든 간에 다 퍼내게 돼 있습니다. 다 포기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심령에 주님만이 남는 것입니다. 그곳이 무엇입니까? 천국입니다. 좀더 보충적인 설명이 필요합니다.
천국이 임하는 곳은 하나님의 임재가 체험 되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는 것을 너무 강하게 체험하기 때문에 거기에 기쁨이 터집니다. 핍박 당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이것을 약속 하셨습니다. 막크 갈리(Mark Galli)라고 하는 사람은 기독교 2천년사에서 순교를 당한 사람들의 사적을 연구하는 학자입니다. 그분이 많은 순교자들을 연구한 다음 결론적으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순교자들 하나하나를 뜯어 보고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면 한 가지 분명히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였다." 그리고 더 놀라운 말씀을 했습니다. "그 순교자들은 죽음의 순간까지 하나님의 임재를 즐기는 사람들이었다." 순교의 순간까지 하나님의 임재를 즐기는 사람들이었다는 말이 이해 됩니까? 캐롤라인 콕스(Caroline Cox)라고 하는 사람은 현재 영국 상원의 부대변인으로 일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믿음이 좋은 사람입니다. 수단에서 핍박 당하고 있는 성도들을 위해서 지난 10년 동안 그곳을 17번이나 방문한 사람인데, 그 사람이 다녀와서 쓴 글을 보니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핍박 받는 교회 현장에 가면 항상 겸손하지 아니하면 안 되는 현상을 봅니다. 나로 하여금 한 없이 낮아지게 만드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핍박 당하는 그들이 누리는 엄청난 영적 자원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살아 움직이는 믿음이요, 기쁨이 었습니다. 설명할 수 없는 기쁨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약이 없어서 병들어 약도 쓰지 못하고 죽어 가면서도, 먹지 못해 뼈만 남아 있으면서도 그들의 가슴에는 기쁨이 있었 습니다. 그 기쁨 앞에 나는 한없이 겸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천국이 그들에 심령에 임하여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가장 먼저 순교한 사람이 평신도 스데반이었지 않습니까? 그가 돌멩이가 날아 오는 현장에서 무엇을 보았습니까?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있음을 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에게 있음을 봤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심령에 임한 천국을 환상으로 정확하게 보는 것입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서신 것을 보노라.' (행7:56) 자기 마음에 임한 천국을 환상으로 역력하게 보면서 그것 때문에 황홀해서 견디지를 못해 소리를 지른 것입니다. 북한에서 굶주려 죽어가는 우리 성도들, 고문 당하다 죽어가는 성도들, 정치범 수용소에서 개 취급 당하면서 죽어가는 우리 성도들이 비록 육신적으로는 고통 당하고 굶주리고 추위에 떨고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의 심령에 약속하신 천국을 주실 줄 믿습니다. 분명히 주실 줄 믿습니다. 그것이 없으면 어떻게 굶으면서 예수 사랑하겠습니까? 그런 은혜가 없이 어떻게 고문 당하면서 주님을 부인하지 않고 버티겠습니까? 그런 은혜가 없이 어떻게 처자식 다 내버리고 주님 따라 갈 수 있겠습니까? 천국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핍박 당하는 자에게 약속하신 상급이 있습니다.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니라.' 저는 모릅니다. 그 상급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전혀 설명도 할 수 없고, 상상도 할 수가 없어요. 그러나 성경을 보면 핍박 당하는 자를 위해서 특별히 두 가지를 하나님께서 상급으로 약속하셨습니다. 계시록 2장에 보면 '너희 앞에 다가오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고난이 올 때 너희는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너희에게 주리라.' 생명의 면류관을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20장에 보면 이 세상에서 복음 전하고 말씀 전하다가 목 베임을 당한 사람들, 사탄의 앞잡이가 되었던 짐승과 우상 앞에 절하지 않다가 핍박 당해 희생 당한 사람들이 그 자리에 있는데,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 동안 왕노릇할 것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주님과 함께 천년동안 왕노릇 하는 것, 저는 그 영광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잘 모릅니다. 생명의 면류관, 주님과 함께 천년동안 왕노릇 하는 영광, 이것은 우리처럼 편안하게 예수 믿다가 천국 오는 사람에게는 약속된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핍박 당하고 주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약속한 축복입니다. 이런 것들이 있기에 주님은 '너희들이 핍박 당할 때 기뻐하고 즐거워 하라.'고 하셨습니다.
심령의 천국이 임하여서 그들의 심령이 기뻐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주지 않습니까? 그리고 눈을 열고 보면 주님이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 주님과 더불어 왕노릇 할 영광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핍박 받아도 즐거워 하면서 받아라.'고 우리 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루마니아의 살아 있는 순교자라고 하는 범브란트씨의 책을 오래 전에 읽었는데 한 구절이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설교 중에도 여러 번 말씀 드린 일이 있습니다. 그분의 말을 또 한번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체험적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진리인가를 증명하는 사람입니다. 핍박 당할 때, 그는 즐거워 하면서 당했습니다. 그 마음에 천국이 임하여 즐거워 하면서 핍박을 당할 수 있었다는 것을 자기의 경험을 통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제가 감옥에서 보낸 14년의 햇수가 길게 여겨지지 않았던 것은 홀로 독방에 갇혀 있으면서 믿음이나 사랑을 넘어선 어떤 기쁨을 하나님 안에서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기쁨이란 이 세상 어느 것에도 견줄 수 없는 아주 깊고도 아주 독특한 황홀경 같은 기쁨이 었습니다.' 그 기쁨 가지고 살다 보니 14년을 그저 몇 년처럼 보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해가 되십니까? 바로 그 감옥이 천국이 었습니다. 드디어 그가 출옥을 하게 되었습니다.
감옥을 나올 때 그가 느낀 심정을 이렇게 거짓말 하는 것처럼 표현하고 있습니다. '제가 감옥문을 열고 나오자 저는 마치 수십 리에 뻗쳐 있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시골 전경이 환히 내려다 보이는 아름다운 높은 산정에 살다가 갑자기 아무 것도 안 보이는 평지로 내려오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천국에서 살다가 갑자기 나온 사람 같이 말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예수 믿고 절대 손해 보는 법은 없습니다. 우리 중에 핍박 당하는 형제 자매가 있습니까? 여러분, 절대 손해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는 엄청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예수 믿어서 욕을 먹었다. 예수 믿어서 모욕을 당했다. 예수 믿어서 가족에게 쫓겨 나왔다.'고 한다면 일시적으로 고통스럽고 어렵지만 기뻐하고 즐거워 하면서 그 핍박을 받아야 됩니다. 아멘! 이것이 우리의 자세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핍박이 폭풍처럼 몰아치는 세상을 살고 있지 않습니다. 앞으로도 우리는 핍박 받을 확률이 거의 없습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몇 십년 살지 모르지만 지금 상황을 봐서는 어떤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예수 믿는 것 때문에 핍박 당할 확률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면 '핍박을 받는 것이 정상이요, 핍박 받을 때 즐거워하라.'는 말씀은 나하고 관계 없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까? '그러지 않아도 스트레스 때문에 죽겠는데 오늘따라 왜 이런 말씀을 하시나? 아무 관계도 없는 이야기.' 이렇게 생각하실 지도 모르지만 만약 그런 식으로 넘어가면 큰 일 납니다. 성경 전체를 보십시오.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핍박 받아야 될 이야기를 20% 이상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핍박이 없는 세상을 살지라도 자세만은 똑바로 가져야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서는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된다고 하는 로마서 8장17절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몇 가지 꼭 마음에 담아 두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첫째는 핍박 당하는 자들의 고통을 같이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나눌 수 있느냐? 매일 그들을 위해서 기도함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다시 부탁 드립니다. 북녘에 있는 성도들을 하루도 잊지 말고 위하여 기도 하십시오. 이것이 그들의 핍박에 내가 함께 동참하는 것이요, 그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기도만 할 뿐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어떻게 도와 주어야 할지 우리는 날마다 생각해야 합니다. 굶주린 그들에게 양식을 보내야 합니다. 헐벗은 그들에게 옷을 보내야 합니다. 인권을 유린 당하고 있는 그들이 인권을 유린 당하지 않도록 국제적인 채널을 통해서 압력을 가해야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는 비전헌금도 합니다. 비전헌금의 1/10은 북한 난민들을 위해서 씁니다. 우리는 이것을 위해서 북한 난민을 위한 구좌도 마련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생각할 때마다 단 천원이라도 여러분이 언제든지 마음을 표현할 수 있도록 우리가 길을 열어 놓고 있습니다. 지난 수요일날 우리가 모여서 북한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수요일 저녁 예배도 그들을 위한 특별한 예배였습니다. 그때 예배를 드리고 간 형제 하나가 마음의 가책을 받았습니다. 너무나 그들을 생각하지 못하고 신앙 생활을 했다는 가책 받았는지 이틀 전에 저를 찾아와 거금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면서 "목사님, 이것을 북한에 보낼 수 있으면 보내 주세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남의 일처럼 생각하면 안됩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핍박에 내가 동참하는 자세요,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세입니다. 두 번째로는 핍박 받는 성도의 심정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비록 우리는 핍박을 모르고 살지만 지금 내가 예수 때문에 핍박 당하고 있다는 그런 심정을 가지고 신앙 생활을 하자는 말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신앙 생활을 하면 내 마음에 잡동사니가 쌓이지를 않습니다. 예수 외에 내가 마음을 자꾸 주는 우상이 우리 마음에 조금이라도 자리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핍박 당하는 자의 심정을 가지고 살면 내 마음에는 항상 천국이 임할 수 있습니다. 비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죽으면 죽으리라고 하는 자세를 가지고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 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도록 하기 위하여 사람이 나를 욕해도, 모욕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는 담대하게 전할 수 있습니다. 이럴 때에 우리는 핍박 당한 성도들과 함께 하늘에서 상급을 받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핍박 당하는 자의 심정을 가지고 신앙 생활을 합시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임재를 날마다 체험하며 천국을 마음에 소유한 것 때문에 세상 사람이 모르는 기쁨을 보여 주면서 살면 우리의 모습은 작은 예수가 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무언가 있다 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통해서 그들이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릴 수 있습니다. 핍박 받는 자의 심정을 가지고 신앙 생활 합시다.
우리 다같이 본문 말씀 생각하면서 읽어 봅니다. 외울 수 있는 분들은 외워도 좋습니다.'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 이니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아멘
출처/옥한흠 목사 설교 중에서
지금 북한에는 예수를 믿는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철저하게 인권을 유린당하면서 혹독한 핍박을 받고 있는 성도들이 통상적인 추측보다 훨씬 많이 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수만 명, 어떤 사람은 최소한 만 명은 있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흘러 들어온 것인지 모르지만 저는 최근에 편지 한 통을 받았습니다. 북한에 있는 지하 교회 성도들이 오늘 21일을 특별히 금식 기도일로 정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기로 작정했으니 그들의 기도에 남한 교회가 동참해 달라고 요청하는 내용 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너무 촉박해서 이 요청 이 전국 교회에 제대로 전달이 안되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 편지를 읽으면서 사랑의교회 만이라도 오늘 하루는 다른 모든 기도를 제쳐 놓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또 북한에서 예수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고통을 당한 어느 형제의 간증문을 직접 읽은 일이 있습니다.
무슨 글자인지 알아보기 힘든 편지였지만 거기에 그는 이런 말을 썼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보위부에 끌려가 여러 달 동안 독방에서 온갖 고초와 고문을 당하며 고통을 받았다고 합니다. 놀란 것은 그곳에 가서 보니 거기 끌려 온 사람들의 80%가 다 예수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와서 고생을 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는 80대의 노인도 끼어 있었고, 너무나 심하게 고문을 당하고 매를 맞아서 정상적으로 걸을 수 없을 만큼 장애자가 된 사람도 한 두 명이 아니고, 전기 고문을 받아서 정신이 돌아 버린 사람들 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독방에 갇혀 하도 배가 고파 '하나님 좀 주세요.'라고 기도했더니 쥐가 몇 마리 튀어 나오길래 그 가운데 두 마리를 잡아서 껍질을 벗겨 날 것으로 먹으 면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것이라도 주시니 고맙습니다.' 하며 감사했다는 글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당하는 핍박에 직접 동참할 수는 없지만, 그들을 위한 기도만은 해야 합니다. 모였을 때도 기도하고 가정에 돌아가서도 기도하되 오늘은 특별히 그들을 마음에 두고 북녘 하늘을 바라보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다니엘이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난 창문을 열어 놓고 하루 세 번씩 기도하듯이 우리 모두가 기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루살렘 성도들이 핍박을 받았을 때 그들은 밤 중에 다락방에 모여서 이렇게 소리 높여 기도했습니다. 사도행전 4장을 보면 그 내용을 읽을 수 있습니다.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 하옵시고' 즉 '주여, 저희가 핍박 당하는 것을 굽어 보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이렇게 그들은 소리 높여 기도했습니다. 핍박을 물리쳐 달라고 기도하기 전에 핍박 중에서도 복음을 더 담대하게 전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했고, 핍박 당하는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가 나타나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가 끝나자마자 성령이 그 자리에 임하셔서 모인 곳을 진동하시고 모든 성도들로 하여금 성령 충만하게 하시어 복음을 더 담대하게 전하도록 했습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 이 십자가 앞에 굴복했습니다. 온 유다와 사마리아가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도 북한 동포를 위하여 기도하면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북한에 있는 모든 어두움의 장막이 물러가고 하나님의 나라, 자유와 평화의 나라가 임할 줄을 분명히 믿습니다. 이렇게 북한에 있는 우리 형제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주일을 맞아서 매주마다 은혜 받던 팔복 가운데서 몇 개를 뛰어 넘어 제일 마지막에 있는 말씀을 함께 생각하고 묵상하는 것은 대단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하면 이것은 과거형 같지만 원문대로 하면 현재형입니다.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 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니라. 너희 전에 있던 모든 선지자들을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 핍박하였느 니라.' 우리가 이 말씀을 조용히 마음에 담고 성령의 깨우치심을 통해서 깨닫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에서 의를 위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11절의 말씀이 보충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나를 인하여' 즉 '예수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의를 위하여 핍박 받는다는 말은 예수님 때문에 핍박 받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핍박'이라는 말이 굉장히 대단한 말로 들리지 않습니까? 그러나 감옥에 끌려 가서 고생을 해야 되고 순교를 해야 만이 핍박을 받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10절, 11절에서 보충적인 설명과 적용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것이 핍박 받는 것입니까? 예수 때문에 욕 먹는 것, 예수 때문에 모욕 당하는 것은 핍박 받는 것입니다.
예수 때문에 중상모략을 당하고 손해를 당하는 것도 핍박 당하는 것이라고 주님이 설명합니다. 이 핍박은 가정에서도 일어날 수 있고, 평화와 자유가 보장되는 민주 사회에서도 일어날 수 있고 직장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또 북녘 땅에 있는 백성들처럼 정치가 잘못 되어서, 사상이 잘못 되어서도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디서나 이런 핍박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가 어떤 자세를 가지고 이 핍박을 감수해야 됩니까? 어떤 자세입니까? 불평입니까? 탄식입니까? 원망입니까? 아닙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마음으로 핍박을 받으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약속한 엄청난 은혜가 있습니다.
먼저 천국이 저희 것이 되고 또 하나는 하늘에서 상이 큽니다.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설교를 준비하면서 묵상하는 중에 '나는 이 설교할 자격이 없어.' 하는 자주 생각을 했습니다. 평생 핍박을 받아 보지를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자유와 평화가 보장되는 나라에서 살면서 목사가 되어 지금까지 설교해 왔지만 아무도 내 멱살을 잡고 '너 이 설교 왜 했냐?'고 모욕한 사람이 없었 습니다. 지금까지 예수 믿고 이것 저것 얻을 것만 잔뜩 누리고 살았지 내가 핍박 받은 것이 뭐가 있습니까? 그러니 '난 이 설교할 자격이 없다.' 하는 생각을 계속 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뻐하고 즐거워 하면서 핍박을 받으라고 했지만, 저는 가끔 전도를 나가서 예수 믿으 라고 하는데 날 째려 보면서 모욕하거나 좋지 않은 소리를 한 마디라도 할 때는 기뻐하고 즐거워하기는커녕 그것이 기분 나빠 하루 종일 우울하게 지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저 자신이 볼 때 전혀 자격이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말씀을 설교해야 된다고 확신했습니다. 그것은 저를 위해서입니다. 이 말씀을 설교 함으로써 저 자신이 받을 은혜가 있기 때문 입니다. 또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은 이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자유와 평화가 보장되는 세상에 무슨 핍박 이야기를 하느냐? 그러지 않아도 머리 아픈데.'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듣지 않으면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려고 하는 은혜를 다 놓쳐 버립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들으면서 핍박 당하고 있는 지구상의 많은 성도들에게 뒤지지 않도록 신앙생활을 해야 되겠다고 각오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도 언젠가는 핍박을 당할지 모릅니다. 그 때를 위해서 우리는 준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핍박 당할 때만 즐거워하고 기뻐할 것이 아니라 핍박 없는 사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모습을 좀 더 밝고 좀 더 기쁘게 간직하고, 다시 한번 신앙생활을 시작해야 된다는 각오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말씀을 조용히 들으면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첫째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 핍박은 정상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서를 읽다 보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을 쭉 읽으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한 마디, 한 마디 살펴 보면 예수님은 대단히 솔직하시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나를 믿으면 너희들도 핍박 받을 것이다.' 하는 말을 듣고 예수 믿을 사람이 몇 명이나 될 것 같습니까? '너희들이 생명을 내 놓고 죽을 각오를 하지 아니하면 나를 좇아 올 수 없다. 너희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아 와야 된다. 이 길은 좁은 길이다. 이 길은 고난의 길이다.' 이런 말을 듣고서도 예수 믿고 주님 따라 갈 사람이 있겠어요?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아무도 예수 믿을 사람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드러내놓고 이야기 하십니다. '나를 따르려거든 네 십자가를 져라. 나의 가는 길은 고난의 길이다. 자기 목숨을 아끼려고 하는 사람은 나를 따를 수 없느니라.' 대놓고 주님께서는 예수를 믿으면 핍박 당한다는 것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얼마나 솔직하신지 모릅니다. 주님은 사람들의 눈치를 보아 가면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물러갈까 싶어 겁이 나서 하나님의 진리를 적당하게 포장해서 말씀하신 일이 없습니다.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말씀하셨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요한복음 15장 19,20절에 나옵니다. 그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다시 말하면 이렇습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해 있으면 세상이 너희를 절대 핍박하지 않는다. 제 새끼 미워하는 부모가 없듯이 세상이 너희를 사랑할 것이지만'. '너희는 세상에 속한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 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주님은 숨기지 않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제자들은 주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한평생 복음을 전하다가 다 순교했습니다. 예수 믿으면 이 세상에서 핍박당한다는 것을 다 알면서도 초대 교회 성도들은 모두가 예수 믿고 주님을 따라 갔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가족을 잃었습니다. 직업을 잃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핍박 받아 나중에는 산 속에서 유리하고 사막에서 방황하다가 굶어 죽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끌려 가서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결국은 형장에서, 아무도 보지 않는 외로운 그 자리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순교 했습니다. 알면서 다 따라갔습니다. 가장 어려웠을 때가 '로마 황제가 신이다. 예수를 배반하고 로마 황제를 믿어라. 그렇게 하겠다면 너를 용서해 주겠다.'는 유혹을 받을 때였습니다.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말 한 마디로만 예수 안 믿겠다고 하면 풀려 나서 다시 정상적인 생활로 회복이 되는데 이 한 마디 말을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 한 마디 말을 못해서 세상이 볼 때는 가장 바보 같은 인생의 종말을 고한 사람들이 초대 교회 안에 수십만이 있었습니다. 사자굴에 던져지고, 십자가에 못 박힘을 당하고, 화형을 당하고, 자식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고아 신세가 되어 어떻게 됐는지 알 수도 없는, 부모로서는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을 당하면서도 예수 모른다는 말 한 마디를 할 수가 없어서 주님이 가신 그 길을 따라간 성도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공산주의 그 어두운 그림자가 지구 한 모퉁이를 덮을 때 시베리아, 소련, 동구권, 북한, 중공에서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생명을 걸고 싸우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는지 모릅니다. 시베리아 형무소에 끌려가 수십 년 동안 고통 당하면서도 '예수 모른다, 나는 예수 안 믿겠다.'는 그 말 한 마디를 못해서 한 생을 수용소에서 늙어 버린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닙니다. 저 북한에는 아오지 탄광과 같은 죽음의 탄광에 끌려 가서 그 곳에서 하루 종일 석탄을 캐다가 나중에는 피를 토하고 한 생을 마친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지금도 예수 모른다는 말 한 마디를 못해서 너무나 고통스러운 한 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북한에는 많이 있습니다. 일제 시대 일본은 우리에게 간교한 유혹을 했습니다. '천황에게 절하라. 천황이 신이다.' 주기철 목사님과 같은 분들은 생명을 걸고 싸웠습니다. 그가 구속 당하기 얼마 전에 한 유명한 설교를 아직도 저는 기억합니다. 여러분도 이 설교를 들으셨을 겁니다. '못합니다.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다른 신에게 정절을 깨뜨리지 못합니다. 못합니다.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일본 신사에게 절하지 못합니다. 나는 어렸을 때 주 안에서 자랐고 예수 그리스도 에게 충성을 열번 백번 맹세했습니다. 드리리다. 드리리다. 이 목숨 하나만이라도 주님께 드리리다.' 결국 감옥에 들어간 그는 시체가 되어서 나왔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 핍박은 정상입니다. 핍박 받는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그저 살아 보겠다고 베드로처럼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해 버리면, 그 상처가 얼마나 큰지 평생 거기서 헤어나지 못한다고 합니다. 물론 나중에 회개하고 예수님 앞에 다시 돌아온 사람들이 많지요. 그러나 '나는 한 때 예수님 모른다고 부인했는데. 나 살겠다고 예수님 버렸는데.' 하는 가책 때문에 그 상처에서 헤어나지를 못한다고 합니다. 이미 세상을 떠나신 한경직 목사님이 기독교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템플턴 상을 수상하고 그 경사스러운 일을 축하하기 위해서 모여 예배를 드린 후 식사를 할 때였습니다. 인사를 하기 위해서 나온 한경직 목사님의 입에서 갑자기 엄청나게 충격적인 말이 나왔습니다. 나오시자 마자 대뜸 하시는 말이 '여러분, 저는 죄인입니다. 저는 일본 신사 앞에 절한 죄인입니다.' 그 자리에 있던 제가 얼마나 충격을 받고 놀랐는지 모릅니다. 그 전에는 그런 사실을 제가 몰랐거든요. 절을 했다는 그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그 사실을 반 세기가 지난 다음에 새삼스럽게, 또 그 경사스러운 자리에서 고백을 하는 그의 용기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느낀 것이 있습니다. '얼마나 그 동안 가슴에 가책을 많이 받았으면 또 저런 말씀을 하실까?' 그러므로 할 수 있으면 핍박 당할 때 성도들은 주님을 모른다는 말을 안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생명을 빼앗기는 한이 있더라도 주님 만날 때 부끄럽지 않도록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북한에 있는 많은 성도들이 피를 흘리고 있어요.
지금도 전세계적으로는 많은 핍박이 있습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라는 잡지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것은 기독교 잡지가 아닙니다. 그 잡지 97년도 10월 호에는 오늘날처럼 기독교가 신앙 때문에 박해 받은 일이 역사상 별로 없었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제가 읽으면서 보았더니 사실이었습니다. 1900년대 20세기에 전세계적으로 2억에서 2억5천만이 넘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혹독한 핍박을 당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니까 그 말이 과장된 것이 아닙니다. 공산치하에서 고통 당한 사람들의 수가 얼마인지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그리고 지금도 회교권에서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종교적인 핍박을 당해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저 수단이라는 나라는 인구의 1/5이 크리스챤입니다. 그런데 인구의 4/5에 해당하는 회교도들에게 핍박을 받아 누바라고 하는 지방에 있는 사람들은 지난 10년 동안 청장년 남자들만 50만 명이 끌려가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북한에는 지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 때문에 순교를 당했는지 우리는 그 수치조차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고문을 당했습니다. 노예처럼 인권 유린을 당했습니다. 강간 당했습니다. 투옥 당했습니다.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서 다 격리 당했습니다. 평생동안 중노동을 하다가 그 자리에서 죽어갔습니다. 여러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라 가는 길은 어떤 길입니까? 그저 내 소원 다 이루어서 편안하게 사는 것이 예수님을 따라 가는 길입니까?
성경을 보면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핍박을 받을 각오를 하고 예수 믿는 것이 주님을 따라가는 길입니다. 이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핍박 당하는 성도에게 가장 최고의 상을 약속하시고, 축복을 약속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나오지 않습니까? '천국이 저희 것임이니라.' 그 다음 또 하나는 '하늘에서 상이 큼이니라.'입니다. 적당한 상이 아닙니다. 엄청나게 큰 상을 하나님이 준비하고 계신다고 합니다. 여기서 천국이라고 하는 말은 예수 믿고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고 저는 보지 않습니다. 만일 큰 상이 단순히 구원받아 천국 가는 것이라면 이 팔복에서 하필 천국을 반복적으로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믿으면 다 들어가는 것인데, 그것을 특별히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으로 따로 말씀할 필요가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천국은 무엇 입니까? 우리의 마음에 임하는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주님의 다스리시는 세계가 내 마음에, 내 심령에 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내 안에 임하시는 것을 직접 체험하는 데서 오는 신비스러운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게 천국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핍박 받는다고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핍박을 혹독하게 받기 시작하고, 막다른 골목까지 가면 오직 한 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나머지는 전부 버려야 합니다. 오직 한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놓치지 않고 끝까지 붙들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희생하는 것입니다. 마치 바울이 타고 가던 배가 조난을 당하자마자 살아 남기 위해서 배 안에 있는 것을 자꾸 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나중에는 양식까지도 마지막으로 먹고 남은 것은 다 버렸습니다.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해서 다 버리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몸과 배만 남습니다. 마찬가지로 핍박을 당하면 예수님 한 분 끝까지 따라가기 위해서 부모도 버립니다. 처자도 버립니다. 나중에는 재산도 뺏깁니다. 다 버리는 것입니다. 자, 그렇게 되면 마음이 텅텅 비어 빈 마음이 됩니다. 그 빈 마음에 무엇이 임하는지 압니까? 천국이 임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예수 외에는 남아 있는 것이 없으면 그 자리가 바로 천국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임하시는 거룩한 천국입니다. 팔복의 제일 첫번째가 무엇입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첫번째 하나님이 약속한 행복과 마지막에 약속한 행복은 똑같습니다. 저는 이 둘이 서로 맥이 통한다고 봅니다. 언제 우리가 심령이 가장 가난한 자가 될 수 있습니까? 평안할 때입니까? 환경이 좋을 때입니까? 아닙니다. 언제 가장 내 심령이 가난해 질 수 있으며 내 심령이 빌 수가 있습니까? 핍박 당할 때입니다. 그럴 때 천국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령이 가난할 때 하나님이 약속한 축복과 핍박을 받을 때 하나님이 약속한 축복은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찬송이 하나 있습니다. 102장입니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 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이 찬송 부르는 사람의 심령은 천국입니다. 예수 외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찬송을 사랑하고 부르기는 하지만 사실 우리의 삶을 보면 엉터리가 많지요. 예수 보다 귀한 것이 없다고 했습니까?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아서 양손에 잔뜩 쥔 채로 입으로만 '예수 밖에는 없네'라고 찬송하면 다 되는 겁니까? 저나 여러분이나 다 그렇잖습니까? 평안할 때, 모든 일이 잘 될 때, 예수 믿고 복만 받았다고 생각할 때는 너무 마음에 드는 것이 많기 때문에 입으로는 예수 밖에 없다고 하면서도 이것 저것 다 마음에다 집어 넣고 살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사실 평화로운 때에는 우리 마음을 비운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핍박을 당하면 타의든 자의든 간에 다 퍼내게 돼 있습니다. 다 포기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심령에 주님만이 남는 것입니다. 그곳이 무엇입니까? 천국입니다. 좀더 보충적인 설명이 필요합니다.
천국이 임하는 곳은 하나님의 임재가 체험 되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는 것을 너무 강하게 체험하기 때문에 거기에 기쁨이 터집니다. 핍박 당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이것을 약속 하셨습니다. 막크 갈리(Mark Galli)라고 하는 사람은 기독교 2천년사에서 순교를 당한 사람들의 사적을 연구하는 학자입니다. 그분이 많은 순교자들을 연구한 다음 결론적으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순교자들 하나하나를 뜯어 보고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면 한 가지 분명히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였다." 그리고 더 놀라운 말씀을 했습니다. "그 순교자들은 죽음의 순간까지 하나님의 임재를 즐기는 사람들이었다." 순교의 순간까지 하나님의 임재를 즐기는 사람들이었다는 말이 이해 됩니까? 캐롤라인 콕스(Caroline Cox)라고 하는 사람은 현재 영국 상원의 부대변인으로 일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믿음이 좋은 사람입니다. 수단에서 핍박 당하고 있는 성도들을 위해서 지난 10년 동안 그곳을 17번이나 방문한 사람인데, 그 사람이 다녀와서 쓴 글을 보니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핍박 받는 교회 현장에 가면 항상 겸손하지 아니하면 안 되는 현상을 봅니다. 나로 하여금 한 없이 낮아지게 만드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핍박 당하는 그들이 누리는 엄청난 영적 자원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살아 움직이는 믿음이요, 기쁨이 었습니다. 설명할 수 없는 기쁨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약이 없어서 병들어 약도 쓰지 못하고 죽어 가면서도, 먹지 못해 뼈만 남아 있으면서도 그들의 가슴에는 기쁨이 있었 습니다. 그 기쁨 앞에 나는 한없이 겸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천국이 그들에 심령에 임하여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가장 먼저 순교한 사람이 평신도 스데반이었지 않습니까? 그가 돌멩이가 날아 오는 현장에서 무엇을 보았습니까?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있음을 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에게 있음을 봤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심령에 임한 천국을 환상으로 정확하게 보는 것입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서신 것을 보노라.' (행7:56) 자기 마음에 임한 천국을 환상으로 역력하게 보면서 그것 때문에 황홀해서 견디지를 못해 소리를 지른 것입니다. 북한에서 굶주려 죽어가는 우리 성도들, 고문 당하다 죽어가는 성도들, 정치범 수용소에서 개 취급 당하면서 죽어가는 우리 성도들이 비록 육신적으로는 고통 당하고 굶주리고 추위에 떨고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의 심령에 약속하신 천국을 주실 줄 믿습니다. 분명히 주실 줄 믿습니다. 그것이 없으면 어떻게 굶으면서 예수 사랑하겠습니까? 그런 은혜가 없이 어떻게 고문 당하면서 주님을 부인하지 않고 버티겠습니까? 그런 은혜가 없이 어떻게 처자식 다 내버리고 주님 따라 갈 수 있겠습니까? 천국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핍박 당하는 자에게 약속하신 상급이 있습니다.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니라.' 저는 모릅니다. 그 상급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전혀 설명도 할 수 없고, 상상도 할 수가 없어요. 그러나 성경을 보면 핍박 당하는 자를 위해서 특별히 두 가지를 하나님께서 상급으로 약속하셨습니다. 계시록 2장에 보면 '너희 앞에 다가오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고난이 올 때 너희는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너희에게 주리라.' 생명의 면류관을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20장에 보면 이 세상에서 복음 전하고 말씀 전하다가 목 베임을 당한 사람들, 사탄의 앞잡이가 되었던 짐승과 우상 앞에 절하지 않다가 핍박 당해 희생 당한 사람들이 그 자리에 있는데,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 동안 왕노릇할 것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주님과 함께 천년동안 왕노릇 하는 것, 저는 그 영광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잘 모릅니다. 생명의 면류관, 주님과 함께 천년동안 왕노릇 하는 영광, 이것은 우리처럼 편안하게 예수 믿다가 천국 오는 사람에게는 약속된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핍박 당하고 주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약속한 축복입니다. 이런 것들이 있기에 주님은 '너희들이 핍박 당할 때 기뻐하고 즐거워 하라.'고 하셨습니다.
심령의 천국이 임하여서 그들의 심령이 기뻐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주지 않습니까? 그리고 눈을 열고 보면 주님이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 주님과 더불어 왕노릇 할 영광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핍박 받아도 즐거워 하면서 받아라.'고 우리 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루마니아의 살아 있는 순교자라고 하는 범브란트씨의 책을 오래 전에 읽었는데 한 구절이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설교 중에도 여러 번 말씀 드린 일이 있습니다. 그분의 말을 또 한번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체험적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진리인가를 증명하는 사람입니다. 핍박 당할 때, 그는 즐거워 하면서 당했습니다. 그 마음에 천국이 임하여 즐거워 하면서 핍박을 당할 수 있었다는 것을 자기의 경험을 통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제가 감옥에서 보낸 14년의 햇수가 길게 여겨지지 않았던 것은 홀로 독방에 갇혀 있으면서 믿음이나 사랑을 넘어선 어떤 기쁨을 하나님 안에서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기쁨이란 이 세상 어느 것에도 견줄 수 없는 아주 깊고도 아주 독특한 황홀경 같은 기쁨이 었습니다.' 그 기쁨 가지고 살다 보니 14년을 그저 몇 년처럼 보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해가 되십니까? 바로 그 감옥이 천국이 었습니다. 드디어 그가 출옥을 하게 되었습니다.
감옥을 나올 때 그가 느낀 심정을 이렇게 거짓말 하는 것처럼 표현하고 있습니다. '제가 감옥문을 열고 나오자 저는 마치 수십 리에 뻗쳐 있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시골 전경이 환히 내려다 보이는 아름다운 높은 산정에 살다가 갑자기 아무 것도 안 보이는 평지로 내려오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천국에서 살다가 갑자기 나온 사람 같이 말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예수 믿고 절대 손해 보는 법은 없습니다. 우리 중에 핍박 당하는 형제 자매가 있습니까? 여러분, 절대 손해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는 엄청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예수 믿어서 욕을 먹었다. 예수 믿어서 모욕을 당했다. 예수 믿어서 가족에게 쫓겨 나왔다.'고 한다면 일시적으로 고통스럽고 어렵지만 기뻐하고 즐거워 하면서 그 핍박을 받아야 됩니다. 아멘! 이것이 우리의 자세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핍박이 폭풍처럼 몰아치는 세상을 살고 있지 않습니다. 앞으로도 우리는 핍박 받을 확률이 거의 없습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몇 십년 살지 모르지만 지금 상황을 봐서는 어떤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예수 믿는 것 때문에 핍박 당할 확률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면 '핍박을 받는 것이 정상이요, 핍박 받을 때 즐거워하라.'는 말씀은 나하고 관계 없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까? '그러지 않아도 스트레스 때문에 죽겠는데 오늘따라 왜 이런 말씀을 하시나? 아무 관계도 없는 이야기.' 이렇게 생각하실 지도 모르지만 만약 그런 식으로 넘어가면 큰 일 납니다. 성경 전체를 보십시오.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핍박 받아야 될 이야기를 20% 이상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핍박이 없는 세상을 살지라도 자세만은 똑바로 가져야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서는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된다고 하는 로마서 8장17절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몇 가지 꼭 마음에 담아 두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첫째는 핍박 당하는 자들의 고통을 같이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나눌 수 있느냐? 매일 그들을 위해서 기도함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다시 부탁 드립니다. 북녘에 있는 성도들을 하루도 잊지 말고 위하여 기도 하십시오. 이것이 그들의 핍박에 내가 함께 동참하는 것이요, 그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기도만 할 뿐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어떻게 도와 주어야 할지 우리는 날마다 생각해야 합니다. 굶주린 그들에게 양식을 보내야 합니다. 헐벗은 그들에게 옷을 보내야 합니다. 인권을 유린 당하고 있는 그들이 인권을 유린 당하지 않도록 국제적인 채널을 통해서 압력을 가해야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는 비전헌금도 합니다. 비전헌금의 1/10은 북한 난민들을 위해서 씁니다. 우리는 이것을 위해서 북한 난민을 위한 구좌도 마련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생각할 때마다 단 천원이라도 여러분이 언제든지 마음을 표현할 수 있도록 우리가 길을 열어 놓고 있습니다. 지난 수요일날 우리가 모여서 북한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수요일 저녁 예배도 그들을 위한 특별한 예배였습니다. 그때 예배를 드리고 간 형제 하나가 마음의 가책을 받았습니다. 너무나 그들을 생각하지 못하고 신앙 생활을 했다는 가책 받았는지 이틀 전에 저를 찾아와 거금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면서 "목사님, 이것을 북한에 보낼 수 있으면 보내 주세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남의 일처럼 생각하면 안됩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핍박에 내가 동참하는 자세요,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세입니다. 두 번째로는 핍박 받는 성도의 심정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비록 우리는 핍박을 모르고 살지만 지금 내가 예수 때문에 핍박 당하고 있다는 그런 심정을 가지고 신앙 생활을 하자는 말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신앙 생활을 하면 내 마음에 잡동사니가 쌓이지를 않습니다. 예수 외에 내가 마음을 자꾸 주는 우상이 우리 마음에 조금이라도 자리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핍박 당하는 자의 심정을 가지고 살면 내 마음에는 항상 천국이 임할 수 있습니다. 비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죽으면 죽으리라고 하는 자세를 가지고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 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도록 하기 위하여 사람이 나를 욕해도, 모욕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는 담대하게 전할 수 있습니다. 이럴 때에 우리는 핍박 당한 성도들과 함께 하늘에서 상급을 받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핍박 당하는 자의 심정을 가지고 신앙 생활을 합시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임재를 날마다 체험하며 천국을 마음에 소유한 것 때문에 세상 사람이 모르는 기쁨을 보여 주면서 살면 우리의 모습은 작은 예수가 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무언가 있다 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통해서 그들이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릴 수 있습니다. 핍박 받는 자의 심정을 가지고 신앙 생활 합시다.
우리 다같이 본문 말씀 생각하면서 읽어 봅니다. 외울 수 있는 분들은 외워도 좋습니다.'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 이니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아멘
출처/옥한흠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