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40
고난 뒤에 있는 축복 (벧전 5:7-11)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
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
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권능이 세세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베드로전서 5장 7절-11절)
1. 모든 사람들은 힘든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을 바다를 항해하는 것에 비유했고, 그것도 고해(苦海), 고통의 바다를 항해하는 것에 비유했습니
다.
힘들게 살아가는 것은 우리나라 뿐만은 아닙니다.
세계 어느 곳에 가도 힘들게 사는 사람들은 다 있습니다.
그렇게 풍요로운 나라라는 미국에서도 보면, 어렵고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실 따져보면 편하게 사는 사람들 보다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이 세상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찬송가에도‘이 세상 험하고 나 비록 약하나 늘 기도 힘쓰면 큰 권능 얻겠네’라는 찬송을 부릅니다.
이 세상은 험하고 나는 약한 존재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힘들게 살아가는 것은 우리의 삶의 터전이 흔들리는 터전이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어디를 가 보아도 안전한 삶의 터전은 없습니다.
<흔들리는 터전>이라고 하면 실감이 나지 않을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한번 <지진>이 날 때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진이 날 때 보면 땅의 기초가 흔들립니다.
아무리 높은 건물도 터가 흔들리니 무너져 내립니다.
우리의 삶의 터는 어디에 가 살아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요즘 탈북자들을 일컬어 <새터민>이라고 부릅니다.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한 사람이란 뜻일 것입니다.
저들이 천신만고 악몽과 같은 생활의 터전에서 탈출하여 <새터민>이 되었지만, 정작 남한에 와 보니 역시 세
상이 그렇게 살기가 쉽지만은 않음을 절감할 것입니다.
이것은 미국에 새 터를 마련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민 가서 고생하지 않고 자리를 잡은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성공한 사람들 뒷이야기를
들어보면 모두 눈물날 정도로 고생한 분들입니다.
그렇게 보면 어딜 가나 모두 힘든 세상임이 분명합니다.
그러기에 신앙생활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신앙인과 신앙이 없는 사람의 차이는 이 세상 안에서도 구별됩니다.
신앙인은 터가 흔들릴 때도 이겨 낼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위에 찬송가처럼, 이 세상 험하고 나 비록 약하지만 늘 기도 힘쓰면 큰 능력을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도 비유적으로 말씀한 적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집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무너지지 않을 반석위에 지은 집이 있고, 다른 하나는 모래위에 짓는 집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반석이 바로 믿음을 의미합니다.
신앙이 왜 필요한가?
잔잔할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이 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파도가 일어나 몰려오기 시작하면 닻이 필요합니다.
<닻>을 내리면 파도를 이겨낼 수 있습니다.
똑같은 힘든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떤 가정은 무너지지 않는데, 어떤 가정은 무너져 내립니다.
믿음이란 닻줄이 없거나 끊어졌거나 하기 때문입니다.
2. 믿음의 터가 견고해 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믿음의 터는 <고난>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육체도 튼튼해지려면 단련해야 튼튼해집니다.
팔뚝의 힘도, 다리의 힘도, 반복된 운동을 통하여 견고해집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왜 기성세대에 비하여 약해졌습니까?
고난의 연단이 없이 자랐기 때문입니다.
6.25 세대들을 보면 모두 삶의 연단을 통해 단련된 사람들이었기에 지금 세대들 보다 강하게 현실을 극복해 낼 수 있었습니다.
왜 군대에서 해병대가 강하다고 합니까?
훈련을 강하게 시키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한계 상황까지 이르도록 훈련을 시키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일어나는 고난은 삶의 터를 견고케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 우리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고난 중에 있을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 근신하라고 했습니다.
둘째, 깨어 있으라고 했습니다.
셋째, 마귀를 대적하라고 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고난 중에 근신하지 못하고, 깨어있지 못하고, 마귀를 대적하지 못하고 마귀가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술 취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낙심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방탕하는 일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남들이 낙심할 환경에서 일어난 사람들입니다.
남들이 포기하는 환경에서 정면으로 대결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낙심케 하고, 부정적인 생각으로 이끄는 마귀를 대적하여 일어나야 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낙심하면 들어 누워 버립니다.
술 취해서 비틀거립니다.
제대로 걸음걸이를 못합니다.
그리고 남의 얼굴을 그어 버립니다.
폭력을 씁니다.
주먹을 휘두릅니다.
그래서 다시 감옥으로 갑니다.
그러다 나오면 다시 반복해 그런 길을 걷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흔들리는 터전에서 <닻줄>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붙들어 맬 수 있는 믿음이란 닻줄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닻줄이 있는 사람에게는 고난 뒤에 올 축복을 바라보게 됩니다.
폭풍이 지난 후에 떠오를 태양을 바라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반드시 신앙의 눈으로만 보여 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이 눈을 통하여 <미래>를 바라보았습니다.
요셉도 이 눈을 통하여 고난 뒤에 올 <축복>을 보았습니다.
에스더도 이 눈을 통하여 담력과 힘이 생겼습니다.
신앙의 사람들은 현재의 고난을 보면서 낙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고난 뒤에 오는 축
복을 바라보는 영안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3. 고난 뒤에 있는 축복을 바라보는 영안이 열려야 합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고 하였습니다.
고난 중에서도 주님이 함께 하심을 영적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와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자들에게는 현세에서도 100배나 얻고 영생을 얻지 못할 자가 하나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고난을 당하면서도 주님과 복음을 위한다는 고리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의 고리입니다.
그 고리에 닻줄을 매어 놓으면 어떤 세상의 어떤 풍랑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복음 성가 중에 이런 노랫말이 있습니다.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하지 마세요.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실 축복 미리 보면서 감사 하세요. 너무 견디기 힘든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이 일하고 계시잖아요, 남들은 지쳐 앉아 있을지라도 당신만은 일어서세요.
<후렴> 힘을 내세요, 힘을 내세요 주님이 손잡고 계시잖아요, 주님이 나와 함께 함을 믿는다면 어떤 역경도 이길 수 있잖아요’
“주님이 나와 함께 함을 믿는다면 어떤 역경도 이길 수 있잖아요”참으로 가사에 은혜가 되는 복음성가입니다.
저는 이 노래를 우연하게 들으면서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면서 눈물이 왈칵 났었습니다.
참으로 돌아보면 험한 세월을 살아왔다고 봅니다.
우리 세대가 다 그런 험한 세상을 만난 세대들이었지만, 전쟁, 죽음, 배고픔, 가난의 험한 세월을 지내왔습니다.
그런 중에도 힘들고 어려운 목회의 길에서 이제까지, 이 자리까지 인도해 주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실 축복
미리 보면서 감사 하세요”라는 말은 자꾸만 가슴에 와 닿는 말입니다.
고난 중에 있을 때 고난만 보지 말고,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실 축복을 바라보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영안이 열려지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벌써 우리 보다 앞서간 성도들의 걸어간 길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고난 뒤에 있는 축복을 바라보면서 승리합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 가운데 지금 고난 중에 있는 분들이 있습니까?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실 축복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미리 감사 하십시요.
우리의 믿음의 터는 이 고난을 통하여 더욱 더 견고해 질 것입니다.
모쪼록 남들은 지쳐 앉아 있을지라도 당신만은 일어 서십시요.
일어서는 자들에게 주님은 그의 팔로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출처/김이봉목사 설교 중에서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
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
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권능이 세세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베드로전서 5장 7절-11절)
1. 모든 사람들은 힘든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을 바다를 항해하는 것에 비유했고, 그것도 고해(苦海), 고통의 바다를 항해하는 것에 비유했습니
다.
힘들게 살아가는 것은 우리나라 뿐만은 아닙니다.
세계 어느 곳에 가도 힘들게 사는 사람들은 다 있습니다.
그렇게 풍요로운 나라라는 미국에서도 보면, 어렵고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실 따져보면 편하게 사는 사람들 보다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이 세상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찬송가에도‘이 세상 험하고 나 비록 약하나 늘 기도 힘쓰면 큰 권능 얻겠네’라는 찬송을 부릅니다.
이 세상은 험하고 나는 약한 존재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힘들게 살아가는 것은 우리의 삶의 터전이 흔들리는 터전이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어디를 가 보아도 안전한 삶의 터전은 없습니다.
<흔들리는 터전>이라고 하면 실감이 나지 않을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한번 <지진>이 날 때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진이 날 때 보면 땅의 기초가 흔들립니다.
아무리 높은 건물도 터가 흔들리니 무너져 내립니다.
우리의 삶의 터는 어디에 가 살아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요즘 탈북자들을 일컬어 <새터민>이라고 부릅니다.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한 사람이란 뜻일 것입니다.
저들이 천신만고 악몽과 같은 생활의 터전에서 탈출하여 <새터민>이 되었지만, 정작 남한에 와 보니 역시 세
상이 그렇게 살기가 쉽지만은 않음을 절감할 것입니다.
이것은 미국에 새 터를 마련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민 가서 고생하지 않고 자리를 잡은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성공한 사람들 뒷이야기를
들어보면 모두 눈물날 정도로 고생한 분들입니다.
그렇게 보면 어딜 가나 모두 힘든 세상임이 분명합니다.
그러기에 신앙생활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신앙인과 신앙이 없는 사람의 차이는 이 세상 안에서도 구별됩니다.
신앙인은 터가 흔들릴 때도 이겨 낼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위에 찬송가처럼, 이 세상 험하고 나 비록 약하지만 늘 기도 힘쓰면 큰 능력을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도 비유적으로 말씀한 적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집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무너지지 않을 반석위에 지은 집이 있고, 다른 하나는 모래위에 짓는 집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반석이 바로 믿음을 의미합니다.
신앙이 왜 필요한가?
잔잔할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이 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파도가 일어나 몰려오기 시작하면 닻이 필요합니다.
<닻>을 내리면 파도를 이겨낼 수 있습니다.
똑같은 힘든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떤 가정은 무너지지 않는데, 어떤 가정은 무너져 내립니다.
믿음이란 닻줄이 없거나 끊어졌거나 하기 때문입니다.
2. 믿음의 터가 견고해 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믿음의 터는 <고난>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육체도 튼튼해지려면 단련해야 튼튼해집니다.
팔뚝의 힘도, 다리의 힘도, 반복된 운동을 통하여 견고해집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왜 기성세대에 비하여 약해졌습니까?
고난의 연단이 없이 자랐기 때문입니다.
6.25 세대들을 보면 모두 삶의 연단을 통해 단련된 사람들이었기에 지금 세대들 보다 강하게 현실을 극복해 낼 수 있었습니다.
왜 군대에서 해병대가 강하다고 합니까?
훈련을 강하게 시키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한계 상황까지 이르도록 훈련을 시키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일어나는 고난은 삶의 터를 견고케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 우리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고난 중에 있을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 근신하라고 했습니다.
둘째, 깨어 있으라고 했습니다.
셋째, 마귀를 대적하라고 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고난 중에 근신하지 못하고, 깨어있지 못하고, 마귀를 대적하지 못하고 마귀가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술 취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낙심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방탕하는 일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남들이 낙심할 환경에서 일어난 사람들입니다.
남들이 포기하는 환경에서 정면으로 대결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낙심케 하고, 부정적인 생각으로 이끄는 마귀를 대적하여 일어나야 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낙심하면 들어 누워 버립니다.
술 취해서 비틀거립니다.
제대로 걸음걸이를 못합니다.
그리고 남의 얼굴을 그어 버립니다.
폭력을 씁니다.
주먹을 휘두릅니다.
그래서 다시 감옥으로 갑니다.
그러다 나오면 다시 반복해 그런 길을 걷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흔들리는 터전에서 <닻줄>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붙들어 맬 수 있는 믿음이란 닻줄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닻줄이 있는 사람에게는 고난 뒤에 올 축복을 바라보게 됩니다.
폭풍이 지난 후에 떠오를 태양을 바라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반드시 신앙의 눈으로만 보여 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이 눈을 통하여 <미래>를 바라보았습니다.
요셉도 이 눈을 통하여 고난 뒤에 올 <축복>을 보았습니다.
에스더도 이 눈을 통하여 담력과 힘이 생겼습니다.
신앙의 사람들은 현재의 고난을 보면서 낙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고난 뒤에 오는 축
복을 바라보는 영안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3. 고난 뒤에 있는 축복을 바라보는 영안이 열려야 합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고 하였습니다.
고난 중에서도 주님이 함께 하심을 영적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와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자들에게는 현세에서도 100배나 얻고 영생을 얻지 못할 자가 하나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고난을 당하면서도 주님과 복음을 위한다는 고리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의 고리입니다.
그 고리에 닻줄을 매어 놓으면 어떤 세상의 어떤 풍랑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복음 성가 중에 이런 노랫말이 있습니다.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하지 마세요.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실 축복 미리 보면서 감사 하세요. 너무 견디기 힘든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이 일하고 계시잖아요, 남들은 지쳐 앉아 있을지라도 당신만은 일어서세요.
<후렴> 힘을 내세요, 힘을 내세요 주님이 손잡고 계시잖아요, 주님이 나와 함께 함을 믿는다면 어떤 역경도 이길 수 있잖아요’
“주님이 나와 함께 함을 믿는다면 어떤 역경도 이길 수 있잖아요”참으로 가사에 은혜가 되는 복음성가입니다.
저는 이 노래를 우연하게 들으면서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면서 눈물이 왈칵 났었습니다.
참으로 돌아보면 험한 세월을 살아왔다고 봅니다.
우리 세대가 다 그런 험한 세상을 만난 세대들이었지만, 전쟁, 죽음, 배고픔, 가난의 험한 세월을 지내왔습니다.
그런 중에도 힘들고 어려운 목회의 길에서 이제까지, 이 자리까지 인도해 주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실 축복
미리 보면서 감사 하세요”라는 말은 자꾸만 가슴에 와 닿는 말입니다.
고난 중에 있을 때 고난만 보지 말고,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실 축복을 바라보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영안이 열려지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벌써 우리 보다 앞서간 성도들의 걸어간 길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고난 뒤에 있는 축복을 바라보면서 승리합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 가운데 지금 고난 중에 있는 분들이 있습니까?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실 축복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미리 감사 하십시요.
우리의 믿음의 터는 이 고난을 통하여 더욱 더 견고해 질 것입니다.
모쪼록 남들은 지쳐 앉아 있을지라도 당신만은 일어 서십시요.
일어서는 자들에게 주님은 그의 팔로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출처/김이봉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