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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한교회 (살전1:5-7)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남에게 본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신자 중의 신자가 있고, 교회 중의 교회가 있고, 목사 중의 목사가 있고, 사도 중의 사도가 있습니다. 바울 사도에게 어떤 이는, 사도가 아니지 않느냐? 누가 그를 사도라고 명한 적이 있느냐고 말합니다만 그는 사도 중의 사도입니다. 이사야 같은 이는 선지자 중의 선지자입니다. 신자 중의 신자가 있습니다. 남에게 우대를 받는 것이 아니라 존경받는 자입니다. 물론 우대라고 하는 것은 어떤 권력을 가지고 우대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대 아닌 우대가 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는 멸시하면서 계급 때문에 면전에서는 굽신거립니다. 존경과는 좀 다릅니다.
10주년이 지난 우리의 교회가 정말 한국의 수많은 교회의 본이 되어야 될 줄 믿습니다. 본이 되는 교회, 본이 되는 신자, 직분을 가진다 해도 본이 되는 직분자가 된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학교 생활에서도 모범생이 있습니다. 또 교도소 안에도 모범수가 있습니다. 모범수는 감방에서 풀려 나와 같은 교도소 안에서 활동하는 기관 요원과 같이 행정을 맡아 일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본이 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본이 되는 교회는 성숙한 교회, 성숙한 성도라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10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그만큼 신자 수가 늘어났고 교회 수도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교회 역사가 100년이 되었다고 해서 성숙한 교회는 아닙니다. 수만 명의 성도가 모였다고 해서 성숙한 교회는 될 수 없습니다. 성장한 교회라는 말은 어울릴지도 모릅니다. 재정적인 면에서 넉넉하다고 해서 결코 성숙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성숙한 교회는 주는 교회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가 이제부터 성장된 교회로서 주는 교회가 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앞으로 선교하는 일과 교육하는 일을 해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자원으로 하나님을 전하는 일과 일군을 양성하는 일에 전력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자원을 돈으로 보지 않습니다. 믿음의 자원인 줄 믿습니다.
어떤 분이 말하기를 ‘그 교회는 부자가 많아서 헌금이 많이 나오겠다’고 합니다. 헌금이라는 감사의 표는 돈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믿음 속에서 나오는 것임을 믿기 바랍니다. 중요한 교회의 자원은 분명히 물질이 아닙니다. 교회의 자원은 하나님이요,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인 줄 믿습니다. 믿음이 있는 자가 얼마나 되느냐 하는 것이 교회 자원이지, 돈 많은 사장이 몇 명이나 되느냐 하는 것이 교회 자원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성숙한 신자, 성숙한 교회의 직분자는 누구입니까? 우리 사회에서는 직분이 올라갈수록 관료주의 생각에 사로잡혀서 아랫사람을 누르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 안에도 당회 문제가 있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장로나 안수 집사로 올라가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교회 위에서 군림하려고 합니다. 이런 관료적인 정신 상태가 교회 안에까지 들어왔기 때문에 수많은 문제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신앙의 성숙한 자리는 집사가 평신도를 섬길 줄 알고, 발을 씻기는 섬기는 자세가 되어야 하고, 대접받기보다는 대접해 줄 줄 아는 자세, 교만할 것이 아니라 겸손한 자리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성숙한 교회는 섬길 줄 아는 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섬김의 모습을 닮아가는 교회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마게도냐뿐 아니라 모든 성도에게 모범이 된 교회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모범 된 교회가 어떻게 외적으로 퍼져 나갔느냐 하면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지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살전 1:8)고 말씀하였습니다. 너희들의 본이 된 믿음이 각처에 퍼졌다고 하였습니다.
1.첫째로 생각할 것은 성숙한 교회는 역사(役事)가 있어야 합니다
믿음에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수년, 수십 년을 믿었어도 역사가 나타나지 않으면 그 믿음은 헛된 것입니다. 믿음의 역사란 은사나 외적 증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의 역사를 말합니다. 변화의 역사가 일어날 때 모든 사람이 스스로 본이 되려는 외적인 모형을 나타내려 하지 않아도 예수 믿는 믿음이 풍기게 될 줄 믿습니다. 그러면 자연적으로 본이 될 것입니다. 신문이나 매스컴을 통한 과대 선전보다 개개인의 속에서 정말로 일어나는 믿음의 소문이 되어야 될 줄 믿습니다.
그러면 왜 오늘날 교회를 다니며 신앙 생활을 해도 자신에게는 역사가 없느냐 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강단에서 외치는 말씀을 사람의 말로 듣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5에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고 했고, 2:13에는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사람의 말로, 학문으로, 이스라엘의 역사로, 재미난 이야기나 야담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몇 십 년 교회를 다녀도 역사가 안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면 치료의 역사, 능력의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신앙 생활을 하면서 나는 왜 축복을 받지 못하느냐? 나는 왜 응답받지 못하냐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감사해도 축복을 받기 위해서 감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응답을 받기 위해 기도하는 것도 잘못된 기도이고, 구원을 받기 위해서, 구원을 연장하기 위해서 회개하는 기도도 잘못된 것입니다. 회개라는 것은 우리가 교회에 와서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에, 그 말씀이 우리 마음에 부딪칠 때, “내가 과거에 영이 뭔지, 하나님이 뭔지 예수 그리스도와 나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천국의 여부, 인간 사후 세계의 존재 등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그냥 살다가 죽으면 끝나는 줄 알고 내 멋대로 살았는데, 하나님 앞에 와서 말씀에 부딪치고 보니 너무 억울하고 너무 분하다. 지금까지 헛되게 살았다. 이제부터 하나님 믿고 살아야겠다.”고 마음 속에 결심이 될 때, 찬송할 때나 기도할 때나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나는 것, 그것이 완전한 회개인 것을 믿기 바랍니다. 회개하고 마음을 비워둘 때 하나님의 말씀의 씨와 하나님의 생명이 심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로부터 인간이 살려면 사업을 해야 하고, 가정 생활을 해야 하고, 자녀를 양육해야 하며, 세상과 부딪쳐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인 우리는 짜증도 나고 부부간에 언쟁도 생깁니다. 그렇게 되면 "또 지옥 가게 되었구나. 오늘 밤새 회개해야 구원이 또 머무르겠구나" 하는 회개는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다시 말해서 이제부터 구원의 확신을 가졌으면 어떤 사소한 것을 회개해야 구원이 연장된다는 생각은 절대 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채찍을 받지 않기 위한 회개 기도만 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가 축복 받기 위해서, 이것을 바쳐야만 축복 받는다는 감사는 하지 않아야 합니다. '나는 이미 영혼이 구원을 받았으니 최고의 축복을 받은 자다' 라는 생각으로 축복을 받기 위한 감사보다 축복을 받았으니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또 응답을 받기 위한 기도란 무엇입니까? 기도는 응답 받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성도의 영적인 호흡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말하기를 기도를 하지 않다가 갑자기 일어나서 기도하라고 하지 않고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항상 쉬지 않고 생활화되어야 될 줄 믿습니다.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라고 하신 것처럼 예수님도 기도를 생활화하셨습니다.
성숙된-성장된 신앙이라는 것-믿음의 역사라는 것은 계속적으로 특별한 일이 있어서 금식하고 작정해서 할 때도 없진 않지만 이렇게 하는 것만이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 생활이 정상적인 신앙이 되게 해야 할 줄 믿습니다.
또 어떤 자에게 믿음의 역사가 일어납니까? 데살로니가전서 1:5에는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역사는 확신을 가져야 됩니다. 확신은 성령으로부터 옵니다. 그리고 성령으로부터 만이 능력이 나타납니다. 믿음의 역사는 어떻게 됩니까? 6절을 봅시다.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믿음의 역사는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오는 것입니다. 환난 가운데서 성령을 구하는 기쁨이 믿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신앙은 환난을 당하거나 우겨쌈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할 때 거기서 기쁨을 갖는 것, 그것이 신앙의 역사입니다. 기뻐할 조건에서 기뻐하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도 그렇게 합니다. 많은 환난 가운데서 기쁨의 도를 받아 성령으로 기뻐하는 역사가 있어야 될 줄 믿습니다.
2. 성숙한 교회와 신자는 누구입니까?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현실적인 대가를 받는 수고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와서 성가대, 교사, 구역장, 전도 등의 수고는 현실적인 물질적인 대가가 없습니다. 주를 위한 수고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이 내 마음속에 물밀 듯이 밀려오지 아니하면 수고할 수 없는 것임을 믿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그 수고를 가리켜 '사랑의 수고'라고 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그 어떤 교회보다도 많은 은혜를 받은 교회임이 사도행전 19장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를 요한계시록 2:1에 제일 먼저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고 한 것을 볼 때 에베소 교회가 주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수고를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주를 위해 수고해야 합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그것도 거저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볼 때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했고, 예수님은 “참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나를 위해서 생명을 희생한 자임을 믿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라고 고린도후서 5:14에 말했습니다. 로마서 8:35에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고린도후서 11:27에 바울은 “나는 또 수고하고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 하였습니다. 주를 위해서 애쓰고 헐벗고 자지 못하고 여러 교회를 위해서 염려한 바울 사도의 수고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세 차례의 전도 여행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수고를 알아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는 다만 그리스도의 사랑에 붙잡혀서 수고했던 것임을 믿기 바랍니다.
성숙한 교회는 사랑의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성숙한 신자는 사랑의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데살로니가전서 2:8에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늘 헤어지면 만나고 싶고 보고 싶은 마음이 늘 마음속에 살아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 사랑을 데살로니가전서 3:12에서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사랑이 많아서 넘친다고 했습니다.
성숙한 교회, 성숙한 신자가 되기 위해서 오늘부터 사랑이 넘칩시다.
하나님 안에서의 사랑은 데살로니가전서 4:9에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가 친히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고 하였습니다. ‘형제 사랑’이라고 한 것처럼 오늘날 우리는 남남이 아닙니다. 한 형제인 것을 믿기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인간적인 혈통적·혈연적 형제가 아니고, 사귐 속의 형제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인 것을 믿기 바랍니다. 이것은 끊을 수 없는 형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몸이요 너희는 지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한 피, 즉 영적인 피가 흐르는 것을 믿기 바랍니다. 이것은 끊을 수 없는 형제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족 중의 가족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형제 사랑에 대해서는 쓸 것이 없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왜 여기에 이 말을 했냐 하면 데살로니가전서 4:1-8의 내용에는 음란의 문제가 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고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이런 말은 너희에게 쓸 필요가 없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맺어진 우리에게 음란의 문제가 있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 색욕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 안에 사랑으로 뭉쳐진 우리가 형제를 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것에 대해 쓸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쓸 필요가 없다는 말은 10절에 근면의 생활을 말했는데 “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를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 많이 하고 또 너희에게 명한 것같이 종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이는 외인을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어떤 형제가 궁핍하고 어려우면 가서 도와주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형제애라는 것이 놀랍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으로 뭉쳐야 될 줄 믿습니다. 이것이 성장된 교회이며 모범된 교회인 것입니다. 이 사랑의 실천에 대해서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13에 “저희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고 했고 14절엔“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수고인 줄 믿습니다.
3. 성숙한 교회는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
세상도 ‘참았으면, 참았으며’이라는 말을 수없이 하고 있습니다. 인격자라야만 참고, 수양을 받아야만 참고, 교육을 받아야만 참고, 유식해야만 참을 수 있습니까? 이와 같은 것으로 우리가 참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참을 수 있을까요? 사람은 소망이 있어야 참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세상의 소망이 없어도 참고 참을 수 있는 것은 천국의 소망이 있기 때문임을 믿기 바랍니다. 그래서 심지어 죽음까지 두려워하지 말라고 데살로니가 전서 4:13에서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소망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땅의 소망과 하늘의 소망, 육신의 소망과 영적인 소망이 그것입니다. 우리 중 땅의 소망을 가진 자는 쓰러집니다. '자는 자'라는 말은 죽은 자를 말합니다. 죽음 앞에서도 참을 수 있는 것은 천국의 소망을 갖고 있을 때입니다. 이 소망이 있는 자는 고난을, 환난을 참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소망이 있는 자는 어려움이 와도 견디어 내는 것을 믿기 바랍니다.
우리가 고난과 능욕과 환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힘입고 하늘의 소망이 있게 될 때 능히 승리할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소망이 있어야 인내할 수 있게 됩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3:7은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그러므로 너희가 주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고 말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소망은 재림의 소망이었습니다. 주님의 만남의 소망이었습니다. 그것이 1:10에 있습니다. 2:19,20이 그들의 소망이었고, 3:15이 그들의 소망이었으며 , 4:16 또한 그들의 소망이었으며, 5:23이하 또한 그들의 소망이었습니다. 이것이 모두가 주님의 재림에 대한 것인데 주님과 만남의 소망입니다. 예수님과 의 만남은 회복을 말합니다. 부흥을 말합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부활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나사로는 예수님을 만났을 때 다시 살아났고, 나인 성 과부의 집의 아들이 살아났으며, 개인적으로 보면 삭개오, 바둘로매 소경이 예수를 만나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성령이 내 안에 거할 때 소망이 있습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참음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4:16에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리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미래는 재림의 주를 만나는 소망을 가지고 있지만 현재는 성령이 내게 와서 만나는 소망이 있습니다.
성숙한 교회로 향한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도록 마음과 뜻을 드립시다. 성숙한 교회는 성숙한 신앙 인격자가 많은 곳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섬길 줄 아는 지식을 얻습니다. 어느 한 부분도 부족함이 없이 온전한 지체로서 하나님께 드리는 교회입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지체로서의 긍지를 가지고 열심히 섬기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성숙한 교회를 통하여 그 나라를 확장시키고 계십니다.
출처/김충기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