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18
기도할 때와 찬양할 때 (야고보서 5:13-18)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느 인생 노정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길에도 항상 햇빛만 비치지 않습니다. 때로는 비가 내리기도 합니다. 모든 일들이 순조롭게 풀려서 예상치 않는 보너스를 받기도 하고 파업을 해도 해결점을 찾기가 힘든 때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말해 주는 구절입니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찌니라.’
4장 1절부터 5장 6절까지는 엄한 질책의 연속입니다. 이제 5장 7절부터는 어조가 바뀌어 따뜻한 동정과 충고의 말로 시작합니다. 5장 7절 이하를 살펴보면 나그네 삶의 시련 가운데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우선 말합니다.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드러내지 않는 마음속의 불만까지 금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찌니’ 나그네 삶의 시련 가운데 상호 비난이나 성급한 막말을 금하라고 교훈 합니다.
상호 비난과 참지 못해 터뜨리는 막말보다는 기도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로서 본문은 말합니다. 기도 가운데서 ‘이 일이 하나님의 뜻이구나’라는 확신과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상호 원망과 성급한 맹세보다 기도와 찬양이 성도들의 마땅한 행위임을 오늘 본문 13절이 보여 줍니다. 앞부분에서는 ‘서로 원망하지 말라 맹세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 식으로 ‘막말을 말라’입니다. 그러나 ‘말라’ ‘말라’로 계속되는 충고는 사람들을 위축시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부터는 적극적인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 ‘하라’는 것입니다. ‘기도하라’ ‘찬양하라’ ‘죄를 고백하라’ 그 다음 더적극적으로 ‘진리를 떠난 자들을 돌이켜라’ ‘가서 그들을 권면하라’고 성경은 명령합니다.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사람을 구별짓게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불구하고 우리는 이 입을 가지고 잘 사용하기보다는 잘못 사용할 때가 많습니다. 상호 비난하고 정죄하고 막말을 하는 잘못에 빠집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부터는 입을 가지고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바른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가장 선한 입의 사용은 무엇인지를 말해 주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해서 기도하는 것이고 찬송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함께 기도하는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우냐? 남의 잘못을 들추어내는 것보다는 너희 죄를 고백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이냐? 뿐만 아니라 곁길로 가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대신 제자리로 돌이키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임을 본문은 보여줍니다.
그래서 본문 13절부터는 ‘하라’는 명령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 여기 ‘고난’ 당한다는 말씀은 앞에 10절의 말씀과 맥이 통합니다.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본문이 말하는 고난은 어떤 고난입니까? 그것은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이 당했던 그 고난과 오래 참음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말했기 때문에 당하던 고난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선지자가 끊일 때가 없었습니다. 예루살렘 제단에는 항상 제사가 드려지고 있었습니다. 제물을 태우는 연기가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시대마다 선지자들이 끊이지 아니했지만 유독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은 고난을 당했고 오래 참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어려움을 당했고, 오해를 받았고, 모욕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고난 중에 있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지니라’고 권면 합니다.
구약 선지자 뿐 아니라 신약 복음 전도자가 감내 해야 할 고통이기도 합니다. ‘복음을 인하여 내가 죄인과 같이 메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메이지 아니하니라.’ 5공 치하에서도 그런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가 담임했던 교회가 영향력이 있는 교회였기 때문에 표본적으로 한 번 당했습니다. ‘외화 반출’이라는 시나리오에 의해서 수감된 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여러분이 살아가기 위해서 때로는 어떤 고난이 찾아 들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본질상 세상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받은 고난은 세상으로부터 받은 고난이 아니었습니다. 이방으로부터 받은 고난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받은 고난은 신앙 공동체 안에서부터 주어진 고난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 받은 고난이었습니다. 교회가 어두워지면 그런 일들을 자행해 왔다는 것이 역사의 증거입니다.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며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딤후 4:5). 고난받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에게 놓여져 있는 일상적인 것입니다. 구약 선지자들이 그러했고 신약의 주의 이름으로 말한 사도들도 마찬가지 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며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때로는 불편한 물리적 환경이 우리를 자기 연민 속에 빠뜨립니다. 때로는 여러 가지 오해와 조롱 때문에 고통이 찾아 듭니다. 그러나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찌니라’ 여러 가지 어려움 가운데 승리하는 비결은 상대방을 향해 원망하고 해명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이런 갖가지 오해 속에 헤어나는 비결은 대좌하여 상호 입장을 밝히는 데에도 있지 않습니다. 그건 궁극적인 해결책이 아닙니다. 기도해야 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성급한 마음에, 분한 마음에 전화 다이얼을 돌린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할 것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릎 꿇기 앞서서 말하고 싶어하고, 무릎꿇기 앞서서 전화를 돌리고 싶어합니다.
이것만은 누구를 만나서 꼭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싶을 때 조용히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거기 개입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치유하심이 우리 가운데 나타나게 됩니다. 여러 가지 오해를 극복하는 것은 맹세와 막말을 내뱉는다고 되지 않습니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상처를 받아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사람으로 인해서 마음 아파하는 자가 있습니까? ‘저는 기도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체적인 욕구가 충족되지 못할 때는 괴롭습니다. 정신적인 욕구가 실현되지 못할 때도 괴롭습니다. 꿈과 이상이 좌절되는 순간에, 희망과 기대가 벽에 부딪칠 때 우리는 괴로워합니다. 본문이 말하는 고난이라는 말은 이런 모든 경우를 지칭합니다. 본문의 ‘고난’이라는 단어는 본서 맨 처음 나오는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할 때에 그 시험과 믿음의 시련과 서로 통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선생은 ‘시험’에서 서두를 떼고 ‘시험(고난)’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는 인생 행로가 어떤 것인지를 잘 알았습니다. 야곱이 구약 열두 지파의 어른 노릇을 했던 것처럼 야고보, 그는 예루살렘 모 교회에서 기둥과 같은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소위 예루살렘 교회의 실세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권력을 휘두르는 실세가 아니라 섬기는 자리에서 실세였습니다. 그는 세상에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의 처지를 생각하고 각양 각색의 시련에 시달리는 그들을 향해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권면합니다.
야고보 선생은 실낙원의 인생 행로의 첫걸음이 시험이요, 그 마지막 여정까지 이‘시험’이 우리를 흔들 것을 알았습니다. 시험의 바람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영광스런 입성을 하기까지는 천국 문 앞까지라도 우리를 따라오려고 시도할 것입니다. 세상에는 문제없는 교회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문제 때문에 고민하느냐는 것이 한 교회와 다른 교회를 구별짓습니다. 문제없는 교회가 있다고 하면 문제 있는 여러분은 거기 가담하지 말라고 누군가 충고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느냐는 것이 교회와 교회의 수준 차이를 만드는 것입니다.
때로는 문제가 있는 사람을 지목을 해서 그를 공동체에 남아 있지 못하게 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언제나 나와 생각을 달리할 사람은 있습니다. 그를 없이 함으로써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문제가 생길 때마다 기도의 부름이라고 생각합시다. 문제는 항상 우리를 기도로 부르는 초청장이라고 알면 됩니다. 이 고통스런 순간을 극복하는 길은 첫째 기도하는 길입니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너희 중에 고민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지니라’
주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당면한 고난이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 부족으로 가득한 핍절한 삶입니까? 몸을 가진 사람에게는 먹지 못하는 것, 입지 못하는 것도 고민 거리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고민의 전부가 아닙니다. 고기와 생선이 가득한 상에 둘러앉아도 서로 불화 하면 식은 밥 한 그릇 두고 화목한 것만 못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정신적인 고민이라고 하는 것은 먹지 못하는 고민을 능가하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육신적이든 정신적이든 우리에게 닥친 고민과 고통은 기도의 부름입니다.
시련은 인내를 만들어 내기 위한 기도의 기회입니다. 믿음의 시련이 만들어 내는 인내를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온전한 인내가 영글게 되면 원만한 신앙 인격이 갖추어질 것입니다. 여러분을 보고 저를 보는 사람들이 우리가 아무 말을 하지 않지만, 우리에게서, 하나님을 아는 사람에게서만 발견할 수 있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너희 중에 괴로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지니라’ ‘너희 중에 아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찌니라’ 고통과 고민은 기도의 처소로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손짓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과 다른 것을 나타낼 절호의 순간입니다. 기쁠 때는 드러나지 아니할 수 있습니다. 평안할 때에 누가 누구인지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나 고통의 순간, 고민의 순간에, 오해를 받는 괴로운 순간에 우리가 그리스도인인 특징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슴에 부은 바 된 것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분을 이기지 못하여 소리쳐 저주하는 것 보다, 도무지 참을 수 없어 맞닥드려 해명하는 것보다, 아니 다이얼을 돌려 성급히 해명을 요구하는 것보다 기도하는 모습, 그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을 입증하는 방법입니다.
그런 경우에 우리는 가끔 신분을 잊어버리고 세상 사람들처럼 처신하기도 합니다. 그저 나하고 뜻이 통하는 사람들을 만나 성토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시험을 받는 도화선이 될 수 있습니다. 기도하십시오. 우리는 종종 주님의 간곡한 기도에로의 초대를 팽개쳐 버립니다. 주님은 시험을 어떻게 맞이하셨습니까?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라고 합니다. 기도로 몰아넣는 것을 느끼면서도 끝까지 기도 안하고 버티어 보려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것이 여기 서 있는 저의 모습이고, 여러분의 모습입니다.
죄인은 웬만해서 무릎을 끓지 않습니다. 자기 할만큼 끝까지 가보고 벽에 부딪혔다고 생각해도 앉아서 다시 자기 머리로 궁리하고 있습니다. 또 가봅니다. 또 부딪힙니다. 그래서 상하고 상하여 더 이상 이젠 헤맬 기력마저 없을 그 때에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생명, 사랑, 나눔의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여러분과 저의 기도가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기에 우리는 있습니다.
불만스러운 일이 혹 있습니까? 그때는 기도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모든 불만스러운 것들을 기도의 제목으로 바꿔 보십시오. 기도의 골방으로 부르고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고통의 순간에 시험을 맞이할 때에 주님이 어떻게 하셨는지 주님의 삶은 우리에게서 언제나 모범이 되고 남습니다. 그는 자기 생애의 가장 고독한 순간에 기도했습니다. 따르던 모든 제자가 다 버리고 떠나갈 때에 기도했습니다. 3년 동안 한솥밥 먹고 한 이불 덮고 살던 사람들이 떠나가는 그 시련의 순간에 기도했습니다. 주님의 그 고통의 순간에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상황의 변화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울산 교회 성도 여러분, 억울하고 답답할 때 기도하는 것이야말로 여러분이 세상의 소금으로 빛으로 처신하는 순간입니다.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는 그런 때에 우릴 만나시길 원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초청은 그날 이후 항상 유효한 초청입니다. 어떤 삶의 정황 속에서도 계속 유효한 초청을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받았습니다.
어떤 고통이라도 좋습니다. 어떤 고민이라도 좋습니다. 하늘 아버지의 보좌로 나아가 아룁시다. 항상 그분의 보좌로 향하는 길은 열려 있습니다. 항상 그분의 눈은 자기를 찾는 자를향하고 있습니다. 항상 그 팔을 우리를 향해 벌리고 있습니다. ‘주님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간구에 기울이시되’ 지금 우리야말로 이 은혜로운 보좌로 나아갈 때에 서 있습니다. 주님이 흘리신 보혈이 마련한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갈길이 열려 있습니다.
고통의 순간은 우리에게 더 진한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며 고통 가운데서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합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를 찬송했던 성도는 자기의 세 딸을 수장시키고 가장 고통스런 그 해역을 지나면서 지었던 찬송 시입니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평안해’하는 것은 일들이 잘되는 가운데서 불렀던 노래가 아니라 역경에 처했을 때에 지었던 노래입니다. 모든 재산은 대 화재에 잿더미가 되어 버린 상황 속에서 생명처럼 아끼던 자녀까지 잃어버리고 지었던 찬양이 오늘 우리가 부르는 찬송입니다.
그러나 우리 본문은 역경 가운데의 기쁨보다 순탄한 가운데의 기쁨을 말하는 듯 합니다. ‘고통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찌니라.’ 한 교회 성도들이지만 너희 가운데서 혹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찌니라.’ 비는 항상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햇빛이 내려 비칠 것입니다. 계속 빗방울을 뿌리면 비가 언제 그치나 하고 초조해 하지만 비는 반드시 그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의 햇살이 온 누리를 채우실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수놓아 가시는 아버지께서 결코 암울한 단색으로 전체를 채우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슬프고 괴로운 것은 순간이요 훨씬 더 많은 날들을 기쁨과 만족으로 채우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성도는 그때 아름다운 감사와 찬송을 부르는 자입니다. 보십시오. 이것이 신자와 세상 사람을 구분하게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즐거우면 하나님을 망각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어려움과 재난을 만나면 잊고 살았던 하나님을 기억해 내고 원망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어려울 때 하나님께 기도 드립니다. 가장 즐거운 순간에도 하나님을 향해서 찬송하는 자입니다. 괴로운 순간 그 분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갑시다. 그뿐 아니라 감사와 만족으로 기뻐하는 그 순간에는 찬송으로 나아가는 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고통의 순간에 나아갈 하늘 아버지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자식이 이해해 줄 수 없고 부모가 보상해 줄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가장 힘드는 순간에도 아버지 하나님이 있습니다. 가슴이 터질 듯한 기쁨의 순간에도 역시 찬양 드릴 하나님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도는 원망과 막말 대신 그 입술을 기도와 찬양으로 채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 양심을 깨끗케 하심을 믿는 자마다 그 마음이 하늘을 향해 부끄러움 없이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엄청 기쁜 사실입니다. 함께 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임재를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속에서 샘솟는 즐거움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는 찬송하는 교회였습니다. 기도만큼이나 찬송은 기독교의 특징입니다. 자신을 성도로 아는 자들은 기쁜 순간에 찬양에 함께 하는 자이어야 합니다.
찬송할 이유를 저마다 분명히 알게 될 때 교회는 찬송하는 교회가 됩니다. 찬양 시간을 특별히 주일 프로그램에 할애해서가 아닙니다. 화려한 성가대로 갖추었기 때문에 초대 교회가 찬양하는 교회가 되지 아니했습니다. 국민 위화감을 낳을 만큼 수천, 수억을 들여 파이프 오르겐을 들여놓았기 때문에 찬양하는 교회로서 초대 교회가 남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기쁨이 생생한 가슴속은 찬송의 음률이 흘러나오는 원천입니다.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 나네 하늘 곡조가 언제나 흘러나와 내 영혼을 고이 싸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기쁨-그것이 찬송하는 교회를 만듭니다. 한 사람 한 사람 가슴속에 그리스도 예수가 얼마나 좋은 분인지 인식하게 될 때에 찬양하는 교회로 만들 수 있습니다. 마지못해 부르는 찬송만큼 하나님이 들으시기 역겨워 하는 찬송은 없습니다. 그 마음속에서 넘쳐 나는 주를 만난 기쁨 그것이 우리를 찬양하게 하는 도화선이 되어야 합니다. 혼자의 마음속에서도 흘러나오고 모이면 함께 찬양할 수 있는 그런 분위기 - 그것이 찬양하는 교회의 특징이어야 합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는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쓰는 사람들은 소위 말해서 제2 세대 크리스챤들입니다. 직접 주님을 눈으로 본적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 편지를 받는 사람들 대부분은 여러분이나 저처럼 예수를 눈으로 본적이 없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찬양케 했습니다.
그들의 삶에도 ‘잠깐 여러 가지 시험으로 인해서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던 순간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말 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성도의 삶에도 때로는 빗방울이 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온 가슴속에서 있는 말할 수 없는 즐거움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찬양하는 성도가 되게 합니다. 성도의 기쁨의 원천은 좋으신 예수 귀하신 그분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비록 육신의 눈으로 본적이 없으나 생생한 임재하심이 나를 얼싸 앉고 있다는 이 느낌이 그들로 하여금 찬양하게 하지 않으면 안되게 했습니다. “너희 중에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찌니라”
여기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이렇게 말하고 또 두 번째는 그냥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렇게 물었지요? 그러나 여기에 “너희 중에”라는 말을 넣어도 잘못이 없어요 문맥상 생략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상적일 것입니다. 이 충고는 어려울 때는 무릎 끓고 기쁠 때는 노래하라는 일반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너희 중에” 한정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