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27
하나님이 기뻐하는 3가지 (베드로전서 3장 8-12절)
미국 미네소타에 사는 11살 소년이 몇 블록 떨어진 곳에 사는 친구 생일파티에 초대되었습니다. 그런데 파티가 열리던 날, 엄청난 폭설이 내렸습니다. 아빠는 아들이 파티에 가는 것을 말렸지만 아들은 혼자 걸어서 가겠다고 했습니다. 아빠가 계속 말려도 아들이 혼자 충분히 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결국 아빠는 허락했습니다.
아들은 기뻐하며 옷을 두껍게 차려입고 집을 나섰습니다. 눈보라 때문에 한 치 앞도 잘 보이지 않았지만 눈을 헤치고 조금씩 가면서 마침내 30분 만에 친구 집에 도착했습니다. 아이는 현관 계단에 올라서서 벨을 눌렀습니다. 그리고 기다리면서 잠깐 뒤를 돌아보는데 아이의 눈에 누군가 언뜻 사라지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아이의 아빠였습니다. 아빠는 아이가 안전하게 잘 도착하는지 확인하려고 숨어서 따라온 것이었습니다.
아빠는 아이에게 어려운 상황을 혼자 지나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위급할 때 돕기 위해 숨어서 따라가며 아이에게 한 시도 시선을 떼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대개 그렇게 펼쳐집니다. 가끔 힘든 일이 있으면 마치 하나님이 떠난 것 같지만 그때 하나님은 더욱 우리를 은밀히 지켜보시고 말없이 성원해주십니다.
저는 집에서는 아이들에게 목사보다는 그냥 아빠로 보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아이들과 장난을 칠 때가 많습니다. 가끔 숨는 장난도 합니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아이들이 한눈을 팔면 가끔 아내와 함께 건물이나 나무 뒤에 숨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아이들을 잃어버리지 않게 오히려 더 아이들에게 시선을 떼지 않습니다.
은혜가 4살 때였습니다. 인천 구월동 재래시장에 갔습니다. 사람이 많고 신기한 것이 많으니까 자꾸 한눈을 팔았습니다. 그래서 한눈팔지 말고 엄마 아빠를 잘 따라다니라는 의미로 은혜가 한눈팔고 있을 때 재빨리 건물 뒤로 숨었습니다.
조금 후 은혜가 엄마 아빠가 없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얼굴에 불안과 공포가 어렸습니다. 그리고 불쌍한 사슴 눈을 하며 엄마 아빠를 찾겠다고 4살짜리가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좌우도 살피지 않고 앞으로 40미터쯤 갔습니다. 그래도 엄마 아빠가 보이지 않으니까 한 곳에 서서 좌우를 둘러보며 멍한 표정으로 있었습니다.
우리는 숨어서 따라가다가 더 이상 장난하면 두려움의 영이 틈탈 것 같아서 은혜 뒤로 가서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은혜를 불렀습니다. “은혜야!” 은혜가 우리를 쳐다보았습니다. 은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얼굴이 너무 애처롭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꼭 품에 안아주었습니다. 그러자 곧 은혜 얼굴에 불안의 그림자가 사라지고 표정이 환해졌습니다. 그 뒤 몇 시간 동안은 은혜가 우리를 잘 따라다녔습니다.
가끔 우리가 한눈을 팔면 하나님께서 숨으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한눈팔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대개 자기성찰은 못하고 탄식부터 합니다. “하나님! 저의 이런 어려움을 왜 외면하시나요? 왜 저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세요? 하나님은 정말 저를 사랑하시나요?” 그러나 하나님은 숨으실 때도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때는 더욱 깊은 관심을 가지고 우리를 지켜보십니다.
살면서 힘든 일을 당할 때는 영적인 눈을 떠서 더욱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을 뚜렷하게 보십시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깊은 관심을 기울여주고, 기쁠 때는 함께 기뻐해주고, 슬플 때는 울 수 있는 품을 제공해주십니다. 누가 뭐래도, 어떤 환경이 펼쳐져도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퇴색되지 않습니다. 그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생각하고 항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려고 해야 합니다.
< 하나님이 기뻐하는 3가지 >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기뻐하실까요?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 3가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선한 마음
본문 8절 말씀을 보십시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이 구절은 한 마디로 “선한 마음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선한 마음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마음일까요? 본문 8절을 통해 선한 마음을 4가지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1) 마음을 같이 하는 것
마음을 같이 하라는 말은 의견을 일치시키라는 말이 아닙니다. 의견은 달라도 얼마든지 마음은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본질적인 면이 일치하면 비본질적인 면에서는 관용을 베풀고, 누가 내 의견을 반대한다고 상처받지 마십시오. 내 의견을 반대하는 것이지 내 인격을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는 것을 인정하고,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자유를 주면서 하나 되기를 힘써야 능력 있는 삶이 나옵니다.
어느 날, 한 기자가 정신병자 수용소를 방문했는데 수많은 정신병자들을 관리인 한 명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기자가 관리인에게 “혼자 이곳을 지키는데 두렵지 않느냐?”고 묻자 관리인은 “전혀 두렵지 않다.”고 했습니다. 기자가 다시 말했습니다. “관리인님! 만약 미친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당신을 공격하고 수용소를 탈출하면 어떻게 하죠?” 그때 관리인이 태연하게 말했습니다. “기자님! 그건 불가능해요. 미친 사람들은 결코 하나 되지 못해요.”
살면서 하나 되지 못하게 되는 무수한 상황과 논리를 만나게 됩니다. 그래도 우리는 하나 되는 훈련을 열심히 해야 합니다. 내 생각과 주장과 논리를 양보하고, 말도 부드럽게 하고, 남의 약점을 이해하려고 하면 하나 될 수 있습니다. 그처럼 하나 되기를 힘쓰면 마음의 상처도 아물고, 비로소 “행복한 삶이란 이런 삶이구나!”라는 것을 깨닫고 될 것입니다.
2) 체휼하는 것
체휼이란 “몸으로 긍휼함을 느끼라!”는 말로, “깊은 동정심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요새 현대인들은 동정심을 가지기보다는 아주 냉정합니다. 그래서 우는 자를 보면 같이 울어주지는 않고 무시합니다. 반면에 웃는 자를 보면 같이 웃어주지는 않고 질투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감정 이입을 잘해서 우는 자와 같이 울어주고 웃는 자와 같이 웃어주어야 합니다.
미국 로스엔젤레스 열린 장애인 체육대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때 50미터 달리기 경주에서 장애인 선수들은 출발 총소리를 듣고 모두 뛰어나갔습니다. 그런데 조금 후에 한 장애인 소년이 트랙을 이탈해 운동장 안의 친구에게 달려갔습니다. 심판이 그 소년에게 돌아오라고 휘슬을 불었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때 골인 지점으로 앞서 달려가던 한 다운증후군 소녀가 골인 지점을 앞두고 휘슬 소리를 듣고 멈춰서 뒤를 돌아봤습니다. 그리고 소년에게 소리쳤습니다. “야! 멈춰! 거기는 길이 아니야.” 그러면서 동시에 골인 지점을 바로 눈앞에 두고 트랙을 벗어나 그 소년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소년의 팔을 잡고 다시 트랙으로 돌아와 레이스를 마쳤습니다. 결국 그 소녀는 경기에서는 꼴등을 했지만 관중들의 우레와 같은 기립 박수를 받았습니다.
삶에서 목표를 향해 달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제 길을 찾도록 돕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합니다. 로마서 15장 1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는 항상 체휼하는 마음을 가지고 모든 사람과 특히 약자를 섬겨주어야 합니다.
3) 형제를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것
성도는 세상 사람도 사랑해야 하지만 무엇보다 내 곁의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때로는 밉고 싫게 느껴질 때도 사랑해야 합니다. 누군가를 미워할 때는 분명히 미운 구석이 있기에 미워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그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생각을 하면 한편으로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런 불쌍한 마음을 가지면 미운 형제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도 남 앞에 내세울 것이 별로 없고 허물과 약점이 많습니다. 그 약점 때문에 누군가 나를 미워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가 나의 약점을 이해해주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렇게 남이 나를 이해해주기를 원하는 것처럼 나도 남을 이해해주어야 합니다. 우리를 형제를 사랑하고 불쌍히 여길 때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사랑하고 불쌍히 여겨 부족하고 못난 우리에게도 축복의 문을 활짝 열어주실 것입니다.
4) 겸손한 것
요새처럼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실력을 길러야 합니다. 능력도 갖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공도 하고, 높은 지위도 추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능력이 커지고 지위가 높아질수록 겸손한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능력은 높이고 태도는 낮출 때 영적인 키가 커질 것이고, 남을 감동시키는 영향력은 더욱 커질 것입니다.
노벨평화상을 받은 남아공의 데스몬드 투투(Desmond Tutu) 주교는, 그가 성공회 주교가 된 사연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가 어렸을 때 남아공에서 인종 차별 정책이 심했습니다. 그래서 길거리에서 흑인과 백인이 만나면 흑인은 백인이 지나가도록 길가 도랑으로 비켜서서 존경하는 표시로 고개를 숙여야 했습니다.
어느 날, 어린 투투가 엄마와 함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때 검은 옷을 입은 한 키 큰 백인이 그들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투투와 어머니는 재빨리 길가로 비켜서려고 하는데 그 백인이 먼저 자기들이 지나가도록 비켜섰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에게 존경의 표시로 그의 모자에 손을 대고 인사했습니다.
그 장면을 보고 깜짝 놀란 투투는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저 백인이 왜 저런 행동을 해요?” 엄마가 설명해주었습니다. “저분은 성공회 신부인데 하나님의 사람이야. 그래서 저렇게 행동하는 거야.” 엄마가 그 설명을 해줄 때 투투는 바로 거기에서 자기도 성공회 신부가 되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겠다는 소원을 가졌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이 선한 마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본문 8절 말씀에 나오는 4가지 원리대로 어디에 가든지 하나 되기를 힘쓰고, 동정하는 마음, 형제를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 그리고 겸손한 마음을 준비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축복을 얻어 누리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2. 선한 입술
본문 9절 말씀을 보십시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입술로 사랑하는 사람은 물론 원수조차도 복 빌어주는 훈련을 많이 해야 합니다. 내게 악한 행동을 하고 나를 욕한 사람을 위해 복을 빌어준다는 것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니지만 하나님은 그런 삶을 살라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어떻게 원수를 축복합니까? 원수 때문에 당한 피해를 잘 잊는 거룩한 건망증이 있어야 합니다. 오히려 원수 때문에 내가 더 성숙해졌고, 더 하나님께 매달리게 되었다고 믿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이 합력해 선을 이루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원수를 용서하고, 더 나아가 복까지 빌어주면 몸과 마음의 상처는 급속히 치유될 것입니다.
원수에게 복을 빌어주라는 명령은 결국 내 영혼을 소생시키고, 내 육신을 건강하게 만들고, 내게 더욱 큰 축복을 주려는 하나님의 다목적 축복카드입니다. 대대손손 축복받는 최상의 길은 원수를 축복하는 길에 있습니다. 원수를 미워하면 내가 도리어 손해이고, 원수를 축복하면 내가 도리어 이익입니다. 원수를 미워하면 누구보다 자신이 비참해지고, 원수를 축복하면 누구보다 자신이 위대해집니다.
원수를 미워하면 소화부터 안 되고, 몸의 장기도 원활하게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위나 장기가 음식물과 부딪쳐 상처가 나서 체기나 통증이 생깁니다. 그래도 계속 미워하면 그런 상처들이 커지다가 결국 암으로 발전합니다. 그런 식으로 계속되면 2-3년 후에 “암 말기입니다!”라는 소리를 듣고 죽도록 고생하다가 죽습니다. 그런 불행이 없도록 하나님은 원수에게 복을 빌어주라고 명령하십니다.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는 사람을 축복하면 급속히 마음의 평안이 찾아옵니다. 얼굴도 편해지고, 위와 장기도 편해집니다. 또한 혈액과 백혈구도 건강해지고, 상처도 급속히 아물게 됩니다. 그처럼 원수를 내 생각의 끈에서 풀어주고 축복해주면 그때부터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우리를 묶고 있는 모든 병과 저주의 사슬을 풀어주실 것입니다.
본문 10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쉽게 말하면 혀를 절제하고 욕과 비판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해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은 미래에 좋은 날을 보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상 축복의 전조는 입술에서 이미 거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축복을 원하면 무엇보다 입술을 선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3. 선한 행동
본문 11절 말씀을 보십시오.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이 구절에서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는 명령은 너무 광범위한 명령입니다. 도대체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그 다음에 중요한 선한 행동의 지침이 나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화평을 구하고 화평을 좇는 것 ’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는 세세한 목록을 작성하고 그 목록대로 살지는 못해도 한 가지만은 꼭 실천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어디에 가든지 화평을 전하고, 화평을 추구하고, 웃음과 기쁨을 주려는 태도입니다. 그런 태도를 가진 사람이 선을 행하는 의인이고, 하나님은 그런 의인에게 깊은 관심과 사랑을 베풀어주십니다.
본문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이 구절에서 “주의 눈이 의인을 향한다.”는 말은 “하나님이 의인에게 깊은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보신다.”는 말입니다. 즉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깊은 관심을 보여주시고, 그런 사람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시편 139편 1-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시고 우리보다 우리에 대해서 더 잘 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좌절감을 아시고, 회의적인 상황에서 품고 있는 우리의 찬란한 꿈도 알고 계십니다. 또한 우리의 두려움과 고통도 아십니다. 그러므로 힘들 때마다 본문 12절 말씀처럼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신다.”는 말씀을 항상 기억하며 결코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마십시오.
현존하는 가장 탁월한 설교가인 찰스 스윈돌(Charles Swindoll) 목사님 얘기입니다. 한번은 그분이 너무 많은 일에 매여 신경이 날카롭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내와 아이들에게 짜증을 내고, 식사 시간에도 넉넉한 마음으로 식사하지 못했습니다. 그럴수록 예기치 못한 잘못된 일이 더 생기면서 짜증이 심해졌습니다. 얼마 후 가정 분위기가 자신의 ‘빨리 빨리 스타일’로 변하며 가정의 평화가 깨졌습니다.
어느 날 저녁에 있었던 일입니다. 식사 후에 막내 딸 콜린(Colleen)이 우울한 모습을 했습니다. 아마 학교에서 벌어진 어떤 일로 마음이 상한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 말을 아빠에게 할까 주저하다가 마침내 말을 하면서 급히 말했습니다. “아빠! 할 말이 있는데요. 진짜 빨리 말할게요.”
스윈돌 목사님은 딸이 가진 마음의 상처와 좌절감을 피부로 느끼며 말했습니다. “콜린! 무슨 일인지 말해봐. 천천해 말해도 돼..” 그때 딸이 말했습니다. “그래요? 정말 천천히 제 말을 들어줄 거예요?” 그때 그 딸의 말을 듣고 스윈돌 목사님은 자신이 가족과 딸에게 아주 못난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도 부모님이 LA에 계실 때, 샌디에고에 있는 저희 교단 교회를 방문했었습니다. 주일에 예배를 마치고 씨월드(Sea World)를 방문하는데 얼마나 사람이 많은지 교통이 막혀 씨월드 앞에서 1시간 이상 허비했습니다. 그 일로 짜증이 난 상태였는데 둘째 딸 한나가 솜사탕을 먹다가 손이 끈적거리는 것을 보고 더 짜증을 냈습니다. 평소에 짜증내는 것을 본 적이 없는 한나가 그때 무지하게 저의 눈치를 보았고, 아직도 몇 년 전 그 얘기를 가끔 하며 “아빠! 그때 왜 그랬어요?”라고 놀립니다. 그러면 저는 말합니다. “미안해! 사람은 다 약하잖아!”
사람은 스트레스가 쌓이면 못난 모습도 보이고, 남의 말도 잘 들어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눈은 우리를 향하시고 우리의 말을 다 들어주십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성도에게 매일 펼쳐지는 사랑의 축제와 같습니다. 그런 축제의 장을 매일 펼치시는 사랑의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꿈과 비전도 말씀드리고, 우리의 두려움과 연약함도 마음껏 토로해야 합니다.
< 하나님은 죽지 않았습니다 >
사무엘상 7장을 보면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스바에 모여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데 그때 오히려 위기가 닥쳐 블레셋이 쳐들어옵니다. 그처럼 하나님을 잘 섬겨도 어려움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은 큰 우뢰를 통해 기적적으로 블레셋을 물리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역사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어려움을 면제하는 것’보다는 ‘어려움을 극복하게 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어떤 때 마음의 감동이 있어서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때 문제가 터지고 어려움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때일수록 흔들리지 말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또한 그럴수록 더욱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죽으면 죽으리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 헌신하십시오. 그러면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으신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실 것입니다.
저는 미국 기독교 선교연맹(The Christian & Missionary Alliance) 소속으로 한국에 처음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저희 교단은 120여 년 전에 시작된 건전한 복음주의 신학을 가진 선교를 중시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교단이고,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에서는 한국의 장로교나 감리교처럼 메인 교단인데 한국에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저희 교단의 4중 복음을 받아들인 성결교단이 한국에 있는 것을 알고 한국으로 선교사를 파송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교단 배경도 없이 한국에서 교회를 개척하니까 시련이 많았습니다. 사실 교단 때문에 이단에 대한 경계가 심한 한국에서 얼마나 오해도 많이 받았는지 모릅니다. 또한 부천에서 목회하는 구원파 목사 중에는 저와 이름이 똑같은 사람도 있어서 구원파가 아닌가 하는 오해도 받았습니다. 몇몇 중형교회에서는 담임목사 청빙할 의사를 전해오기도 했습니다. 교단만 바꾸면 얼마든지 큰 교회에서 편하게 목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C&MA 소속으로 계속 있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사명을 따라 흔들리지 않고 나가니까 지금 곳곳에서 많은 열매가 소리 없이 맺히고 있습니다. 큰 교회 담임은 되지 못했지만 사도 바울을 위대한 선교사로 키워냈던 루디아와 같은 후원자가 저에게도 조금씩 늘어났습니다. 어떤 분은 말씀에 은혜를 받았다고 굳이 저희 선교회로 십일조를 보내기도 합니다. 어떤 분은 저희가 돕는 선교사님을 위해 매월 선교헌금을 보냅니다.
어떤 분은 필요한 기도제목에 응답해서 한꺼번에 목돈을 헌금하기도 합니다. 그런 분들 때문에 저희 문서선교사역과 선교사 후원사역이 지속될 수 있었고, 흔들리는 저의 마음도 붙잡을 수 있었습니다. 지난 한국에서의 목회기간을 돌아보면 고독과 시련은 나를 성숙시키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더욱 체험하는 축복의 기회였습니다.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한 그림이 있었습니다. 그 그림에는 불로 다 타버린 산자락의 오두막집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 집에 남은 것은 굴뚝밖에 없고 그 외의 모든 가재도구들은 다 타버렸습니다. 그 불탄 집 앞에서 한 늙게 보이는 남자가 거의 속옷 차림으로 서 있었고, 그 옆에서는 어린아이가 울고 있었습니다. 그 그림 밑에는 그 남자가 아이에게 말하는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런 글귀였습니다. “얘야! 그만 울어라! 하나님은 죽지 않았다.”
단순하지만 얼마나 심오한 말입니까? 하나님은 죽지 않았습니다. 그 사실을 항상 기억하며 결코 절망하지 말고, 항상 넘치는 희망을 가지고 복음의 증인으로 희망을 전하며 사십시오. 힘든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 있고, 여전히 세상을 통제하시고, 심은 대로 갚아주신다는 사실을 굳건히 믿고, 선한 마음, 선한 입술, 선한 행동을 가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출처/이한규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