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27
참된 기쁨을 주시는 예수님 (욥기 38장 4-7절)
사람이 기쁘게 살려면 돈이 얼마나 필요할까요? 이건희 회장은 항상 기쁠까요? 기뻤던 순간도 많았겠지만 슬펐던 순간도 그에 못지않게 많았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딸을 잃어버렸을 때는 죽고 싶었을 것입니다. 세계적인 경영인으로 평가될 때는 기쁨이 있었겠지만 노동계의 공격을 받을 때는 많이 괴로웠을 것입니다.
2002년에 미국 역사상 최대의 잭팟을 터뜨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당시 57세의 잭 휘태커(Jack Whittaker)로 상금으로 3억 1490만 달러(약 3천억 원)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인 쥬얼 휘태커(Jewel Whittaker)는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차라리 잭팟에 당첨되지 않았으면 좋았어요. 너무 힘들어요!”라고 말했습니다.
당첨 후, 그는 음주운전 혐의로 두 번 체포되었습니다. 술집에서는 매니저를 때려서 고소당했고, 나이트클럽과 경마장에서도 난동을 부려 고소당했습니다. 집과 사무실에서는 몇 번의 도둑을 맞았고, 차도 몇 번 도둑을 맞았습니다. 그런 수많은 문제들을 겪으면서 그의 아내는 이전처럼 살 때가 행복했다고 합니다. 돈은 기쁨을 주지 않습니다.
사실 현대인의 문제는 가난의 문제가 아니라 탐심의 문제입니다. 배고프면 먹는 것 때문에 고민하지만 조금 살만 하면 다른 사람 때문에 고민합니다. 셋방살이를 할 때는 작은 집이라도 내 집이 있으면 좋다고 생각하지만 집이 생기면 큰 집을 가진 사람 때문에 마음이 불편합니다. 왜 그런 불편한 마음과 정신적인 빈곤이 생깁니까? 탐심 때문입니다. 사실상 인간의 모든 문제는 바로 탐심에서 나옵니다.
어느 날, 시골에서 농사하는 아버지가 서울의 아들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아무개야! 내가 오늘 딸기를 보냈는데 너는 먹지 말라. 어젯밤에 농약을 많이 뿌려 빛깔을 좋게 하고 보냈다.” 그런 탐심 때문에 얼마나 많은 순수한 사람들이 피해를 입고, 사람 사이에 갈등과 불화가 생기고, 가정이 깨는지 모릅니다.
일전에 이런 신문보도가 있었습니다. 한 인턴 청년이 처갓집에서 몇 개 열쇠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열쇠가 적다고 싸움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한번은 처남이 놀러왔는데, 처남 보는데서 열쇠를 적게 가져왔다고 아내를 발로 차서 낙태가 되었습니다. 결국 고발되었는데 자초지종을 다 들은 판사가 “그런 남자하고 왜 사나?”고 해서 이혼했다고 합니다. 탐심이 문제입니다. 탐심이 있으면 영혼에 행복과 기쁨이 생길 수 없습니다.
< 우리로부터 기쁨을 빼앗는 것 >
우리가 행복과 기쁨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시간에는 우리로부터 기쁨을 빼앗는 것이 무엇인지를 밝힘으로 기쁨을 얻는 삶의 원리를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로부터 기쁨을 빼앗는 삶은 어떤 삶일까요?
1. 물질주의적인 삶((Living in Materialism)
오늘 본문 4-6절에서 하나님께서 욥에게 창조주를 기억하도록 질문을 하신 것은 그에게 물질세계 이면에 있는 영적인 세계를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물질은 언젠가 우리 손을 떠납니다. 우리가 죽으면 모든 소유는 다 사라지고 끝까지 남는 것은 영적인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물질도 소중히 여겨야 하지만 물질에 연연하면서 그것을 기쁨의 근거로 삼지 말아야 합니다.
2005년 초에 미국 하버드대 천문학자들이 다이아몬드처럼 탄소 결정체로 된 ‘루시(Lucy)’라고 이름 붙인 백색왜성(矮星)을 발견했습니다. 이 별은 별 전체가 10의 33제곱 캐럿의 다이아몬드라고 합니다. 지금 지구에서 가장 큰 다이아몬드는 530캐럿(106그램)인 ‘아프리카의 별’이라고 하는데, 그런 다이아몬드는 루시에서는 조약돌 하나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우주 안에는 루시와 같은 다이아몬드 별이 약 500억 개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황금을 돌처럼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참된 기쁨은 물질이 아닌 정신적인 것과 영적인 것에서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물질이 없어도 우리는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은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삶 전체가 기적이고 은혜라는 것을 모르는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기쁘게 살려면 물질에 유혹되지 말고 물질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돈은 잘 쓰고 잘 나누는데 그 가치가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부자가 그 재산을 어떻게 잘 쓰느냐를 파악하기 전까지는 그를 칭찬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돈을 잘 버는 지혜보다 돈을 잘 쓰는 지혜가 더 중요합니다.
물질은 사람의 영혼의 깊은 부분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질만을 위해 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진정한 기쁨을 얻을 수 없습니다. 물질은 ‘편안’은 주지만 ‘평안’은 주지 못합니다. 물질은 영혼 깊은 곳에 있는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일회용 대일밴드와 유사합니다.
2000년에 개봉된 짐 캐리(Jim Carey) 주연의 “어떻게 그린치가 성탄절을 훔쳤는가?(How the Grinch Stole Christmas?)”란 영화가 있습니다. 그린치는 털이 많은 초록색 심술쟁이 괴물입니다. 어느 날, 그린치는 높은 산에서 후빌(Whoville) 시내를 내려다봅니다. 후빌 사람들은 성탄절을 매우 사랑했습니다. 그들이 성탄절 준비에 바쁜 것을 보고 그린치는 성탄절의 기쁨을 빼앗으려고 성탄절 나무를 비롯해서 모든 선물을 훔칩니다.
그렇게 훔친 후에 그린치는 후빌 사람들이 통곡하고 슬퍼하며 눈물 흘리는 소리를 들으려고 잔뜩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통곡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고 기쁨이 넘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자세히 보니까 후빌 사람들은 어른은 물론 아이들까지 성탄절 선물이 없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기쁘게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그린치는 너무 화가 났습니다. “어떻게 성탄절 나무와 선물을 훔쳐도 사람들이 기쁨을 잃지 않는가?”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탄절의 기쁨을 막으려고 여러 다른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성탄절이 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그린치는 고백합니다. “성탄절은 선물이나 다른 어떤 물질이 없어도 오는구나! 아마 성탄절은 보다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해!”
초록색 괴물도 그 나쁜 머리를 가지고 물질과 기쁨은 관련이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데 아직도 그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우리는 물질이나 선물이 없어도 항상 기뻐하는 모습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2. 분리된 삶(Living in Isolation)
본문 7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때에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었느니라.” 하나님은 태초에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 엄청난 장면을 보고 새벽 별들도 함께 노래하고, 하나님의 아들들도 다 함께 기뻐했습니다. 영계에서나 인간 세계에서나 인격적인 존재는 함께 있어야 참된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홀로 살아가도록 설계되지 않았습니다. 왜 요새 많은 현대인들이 대형을 선호합니까? 소속감을 더 느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그 말은 역설적으로 현대인들이 소외감을 더 많이 느낀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그 소외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간단합니다. 공동체의 일원이 되면 됩니다. 바로 거기에 교회의 존재 의의가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과 이웃에게 헌신된 성도들의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사랑하고, 이해하고, 누군가의 옆에 서주도록 헌신된 삶을 살라고 구원받았습니다. 우리는 교회에 깊이 소속되어야 합니다. 가정만큼 깊은 소속감을 가져야 합니다. 그처럼 교회에 깊은 소속감을 가지면 때로는 상처도 있고, 갈등도 있지만 그래도 교회생활을 회피하지 말고 상처와 갈등을 겪으면서도 구원의 목적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고독하게 지내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을 영적인 삶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금욕주의자와 신비주의자들과 은둔자들인데, 그들은 세상의 부패에서 벗어나려고 수도원과 산과 광야와 동굴로 들어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수도원 안의 은밀한 개인 기도실에서 혼자 살았고,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교회의 벽 속에 가두고 조그만 구멍을 통해서 먹을 것을 받아먹으며 살았습니다.
언뜻 보면 그들은 영성이 탁월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많은 분들은 자기 최면과 이상한 환각에 빠졌고, 결국 정신병자가 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분리된 삶은 결코 건강한 삶이 아닙니다. 분리된 삶은 기쁨을 빼앗습니다.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수도원적인 삶에 있지 않고 교회적인 삶에 있습니다. 성도들은 교회에서 함께 지내면서 서로 힘을 주어야 합니다.
어떤 분은 “혼자 신앙생활을 잘하면 되지 않느냐?”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과 주님과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사랑’만 있고 ‘이웃 사랑’이 없는 신앙은 건강한 신앙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다니지 않아도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다는 믿음은 잘못된 믿음이고, 잘못된 환상입니다.
히브리서 10장 24-25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혼자 지내면 기쁨도 없습니다. 말세가 될수록 함께 사는 법을 더 실천해야 합니다. 그처럼 함께 지내면 상처도 생기고 고통도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도 홀로 지내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함께 살도록 설계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설계와 반대로 살면 참된 기쁨도 생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 균형 잡아주고(balance), 교정해주고(correct), 격려해주고(encourage), 훈련해주고(discipline) 도와주어야 합니다(help). 그처럼 공동체 안에서 함께 존재할 때 엄청난 유익과 기쁨을 얻습니다.
요새 인터넷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주소는 ‘닷컴(.com)’으로 이뤄진 주소입니다. 그런데 2000년 초, 자기 이름을 닷컴가이(DotComGuy)로 바꾼 26세의 미치 매덕스(Mitch Maddox)라는 컴퓨터 시스템 매니저가 노트북 컴퓨터와 옷만 가지고 빈집으로 이사했습니다. 그는 1년 동안 집을 떠나지 않으면서 음식, 옷, 가구, 책 등 모든 물품을 인터넷으로만 사면서 사람은 홀로 살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했습니다.
비디오카메라가 그의 집 주위에 설치되어, 그의 사는 모습을 모니터하고 방송했습니다. 신문은 말했습니다. “대단합니다. 그는 지금 홀로 살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 청년은 말했습니다. “사람은 홀로 살 수 있습니다. 저는 집을 전혀 나가지 않아도 잘 살고 있습니다. 책은 아마존(Amazon)에서 사고, 음식은 코즈모(Kozmo)에서 사고, 음악은 냅스터(Napster)에서 삽니다. 저는 채팅으로 친구를 사귀고, 돈도 온라인으로 입출하고, 일도 원거리통신으로 합니다. 제 주위의 대부분의 친구들은 그런 식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 소식을 접하고 시카고 트리뷴(Chicago Tribune)의 칼럼니스트였던 42세의 에릭 존(Eric Zorn)은 자신을 ‘낫컴가이(NotComGuy)’로 부르면서 이런 칼럼을 썼습니다. “사람이 과학기술만 의존하며 살면 삶이 얼마나 지루합니까? 저 ‘낫컴가이’는 일주일만이라도 컴퓨터를 멀리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조금 더 다가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요즘 우리 주변에는 ‘닷컴가이’가 너무 많습니다. 물론 컴퓨터를 통해서 채팅을 하고, 게임을 하고, 블로그 활동을 하는 것도 결국은 사람이 홀로 살 수 없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지금보다 더 ‘닷컴가이’에서 ‘낫컴가이’가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래야 참된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3. 예수님이 없는 삶((Living without Jesus)
본문 4-7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찌니라/ 누가 그 도량을 정하였었는지, 누가 그 준승을 그 위에 띄웠었는지 네가 아느냐/ 그 주초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이 돌은 누가 놓았었느냐/ 그 때에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었느니라.”
이 말씀은 결국 창조주 하나님이 있는 곳에 기쁨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기쁨을 체험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거절하는 것은 기쁨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영어에는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알면 기쁨을 압니다. 예수님이 없으면 기쁨도 없습니다(Know Jesus, Know Joy. No Jesus, No Joy).” 예수님은 모든 기쁨의 원천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요새 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다들 수고하고 무거운 짐들이 있습니다.
자녀 교육도 옛날보다 더 힘들어졌습니다. 사람들마다 사생결단을 하고 자식 교육을 시킵니다. 집 팔아 유학을 보내고, 인생의 황금기를 기러기 아빠로 보냅니다. 공부시킨 후에는 결혼시키면서 또 엄청난 돈이 듭니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손자를 낳으면 손자까지 봐주어야 합니다. 그처럼 평생을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삽니다.
요새는 아파트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한지 모릅니다. 있는 사람도 없는 사람도 다 스트레스입니다. 예전에는 노후 준비란 말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냥 늙어서 그럭저럭 가족들과 함께 지내다가 죽을 때가 되면 그냥 갔지만 가면 요즘은 30대부터 노후준비를 합니다. 나이가 들어서 돈이 없으면 마누라한테 쫓겨나서 쪽박을 차니까 한참 일할 나이에 벌써 노후 걱정을 하고 있으니 얼마나 서글픈 인생입니까?
예전에는 건강 걱정을 그렇게 많이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살다가 때가 되면 그냥 갔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악착같이 오래 살려고 합니다. 그래서 주일에는 산에 갑니다. 동네 아줌마들은 에어로빅 한다고 이상한 복장을 하고 한강에서 춤을 춥니다. 건강관리를 안 하면 다 죽을 것처럼 야단입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사람들의 걱정과 짐이 더 무거워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주님은 “내게 오면 쉼과 행복과 기쁨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땅에 기쁨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기쁨을 얻으려면 예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진심으로 영접하면 기쁨의 원천을 얻게 되고, 살면서 아무리 힘든 일을 만나도 주님은 그 일을 기쁨으로 만들어주십니다.
현대의 최고 기독교 작가인 필립 얀시의 멘토였던 프레데릭 뷔크너(Frederick Buechner) 이야기입니다. 그는 27세 때 뉴욕에서 혼자 살면서 소설을 쓰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근처의 유명한 한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집 옆에 있는 교회로 갔습니다. 그날 목사님은 설교 중에 엘리자베스 2세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대관식을 하던 상황을 묘사하며 예수님을 왕관을 쓴 분으로 묘사하고 있었습니다.
그 설교를 들을 때 그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예수님의 대관식이 행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예수님을 주로 고백을 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 바로 이어서 마음속에서 억제할 수 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날 뉴욕 메디슨 애비뉴 73번가에서 그는 예수님과 만나는 체험을 하면서 눈물을 펑펑 흘렸고 동시에 그의 표현에 따르면 ‘큰 웃음(great laughter)’이 나오면서 기쁨을 체험했다고 고백합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주님을 깊이 만나는 체험과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도 사단은 그린치처럼 성탄절의 기쁨을 빼앗아가려고 끊임없이 교회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단의 공격에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고 마음의 상처가 있어도 예수님을 내 삶의 진정한 주인으로 모시고 살면 우리에게도 큰 웃음과 기쁨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
우리는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며 살아야 합니다. 실패하는 사람은 삶이 항상 어둡고, 삶의 의욕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면 성공할 수 없고, 혹시 성공해도 공허할 뿐입니다. 반면에 성공하는 사람은 삶이 항상 기쁩니다. 그처럼 기쁘게 살면 그 사람이 가는 곳마다 활기가 넘치게 되고, 성공도 자연스럽게 주어집니다.
지금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십시오. 우리가 기쁘게 살 때는 우리 인생에 큰 진보와 발전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공하고 싶으면 먼저 기쁨을 찾아야 합니다. 물론 살면서 전혀 슬픔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슬퍼할 때는 슬퍼해야 합니다. 우리는 죄를 슬퍼하고, 친구의 슬픔에 같이 슬퍼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말고 곧 기쁨을 회복해야 합니다. 십자가만 바라보지 말고 부활까지 바라보아야 합니다.
기쁨이 없으면 언제나 부정적이고, 패배적이고, 비판적이 됩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 왜 문제가 생깁니까? 어떤 분은 “목사님! 제 말 좀 들어보세요!”라고 해서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는 이유를 듭니다. 물론 그 중에는 수긍할만한 이유도 있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자신 안에 기쁨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부싸움을 할 때도 여러 가지 싸움의 이유를 대지만 자세히 보면 근본적인 이유는 자신 안에 기쁨이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신 안에 기쁨이 없다는 것은 예수님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렇다면 억제할 수 없는 기쁨과 ‘큰 웃음’이 있어야 합니다. 잠시 슬픔을 당해도 금방 그 슬픔을 극복하고 다시 기쁨을 찾아야 합니다. 오늘 이 아침에 다시 한번 말씀을 체험하고 기쁨을 체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떤 분은 말합니다. “이렇게 힘들고, 이런 일을 당했는데 어떻게 기뻐합니까?” 그러나 성경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말은 사실상 “힘들 때 기뻐하라!”는 말입니다. 기쁠 때는 기뻐하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분은 말합니다. “제가 이런 말을 듣고 어떻게 기뻐합니까?” 정말 사람 중에는 말을 너무 함부로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때로는 너무 말도 안 되는 비인격적인 말을 합니다. 그래도 기쁨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상처가 되는 어떤 말을 들으면 “입 가진 사람이 그런 말도 할 수 있지.”라고 생각하고 그 영혼을 용서해야 합니다. 그리고 안타깝게 생각하고 오히려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곧 마음의 기쁨이 회복될 것입니다.
지난 7월에 재정위원장이 재정사고를 치고 도망갔을 때, 어떻게 하면 성도들에게 낙심의 기운이 퍼지지 않을까 하는 것이 저의 제일 관심이었습니다. 저는 그런 때일수록 더욱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고 편한 얼굴을 보여주자고 다짐했습니다. 집에서도 가족들의 영혼을 위해 한 점 어두운 기색을 하거나 나쁜 언어를 쏟아내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문제가 시간이 가면서 하나씩 해결되는 것을 봅니다. 기쁨은 문제해결의 원천입니다.
서울에 사는 어떤 집사님은 언제나 밝고 기쁨이 넘쳤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집사님에게는 아무 근심거리가 없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분에게는 날 때부터 엄마의 도움 없이는 하루도 스스로 살기 힘든 심각한 장애를 가진 딸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 집사님은 결코 낙심하지 않고 오히려 주위를 기쁘게 해주며 즐겁게 삽니다.
교우들이 가끔 위로해주었습니다. “집사님! 얼마나 고생이 많아요?” 그러면 그 집사님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물론 마음이 힘들 때도 있지만 그래도 힘든 중에 때때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저는 저의 딸아이를 통해 주님의 마음과 사랑을 배우고 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고백입니까?
삶에서 진짜 귀한 것은 고난을 통해 주어지고 발견됩니다. 하나님께서 고난 속에서 우리를 정금같이 만드시고, 값진 보화를 얻게 하십니다. 장인이 돌 속에 숨은 옥을 찾아내어 불필요한 것들을 제거하고 갈아서 찬란한 옥을 만들 듯이 하나님은 우리 속에 숨어 있는 아름다운 성품과 자질을 끌어내기 위해서 때로는 고난도 허락하십니다. 베드로나 바울도 다 그런 과정을 통해 반석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숨겨진 주옥을 잘 몰라도 주님은 우리 안에 숨겨진 주옥을 아십니다. 그래서 고난을 숫돌로 삼아 우리를 최상의 주옥으로 만드실 것입니다. 그런 확신을 잃지 않고 범사에 감사하면 우리는 더욱 정금 같은 신앙을 얻게 될 것이고, 그때 주님은 우리와 더욱 가까이 하시면서 넘치는 기쁨을 주실 것입니다. 그런 기쁨과 평안이 삶에 항상 넘치기를 바랍니다.
출처/이한규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