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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나누는 기쁨 (누가복음 15:8~10)
오늘은 참 기쁜 날입니다. 지난 20년 가까이 19번의 대각성전도집회를 했습니다. 해가 거듭할수록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참 많다는 것을 이번 대각성전도집회를 통해 또 한번 절실히 체험하게 됩니다.
1982년에 첫 대각성전도집회를 시작했을 때 느꼈던 긴장과, 이어서 집회기간동안 진행되는 상황을 보면서 느꼈던 흥분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우리 교인들이 약 400명 정도 모일 때입니다. 예배장소라고 해야 한 300명이 앉으면 적당한데, 어떤 때는 그 좁은 곳에 400명, 450명을 밀어넣고 예배를 드릴 때가 가끔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또 대각성전도집회를 시작했으니 교인들이 약간 어리둥절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도를 포기하면 교회가 존재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처음으로 대각성전도집회를 시작했는데 교인들이 얼마나 열심히 협력을 잘해주었는지 모릅니다. 태신자를 위해서 부지런히 기도하면서, 드디어 첫 시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믿지 않는 자들을 인도해 교회로 들어왔는데, 예배가 시작되기도 전에 벌써 방안이 가뜩 찬 것입니다. 나중에 예배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서 복도에까지 사람들이 섰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우리 교인들이 새신자들을 많이 데리고 왔던 것입니다. 제가 흥분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는 결신을 시키려고 작정을 했습니다.
'오늘 복음을 들은 형제 자매들 중에서 예수를 믿기로 다짐하고 있는 분들이 있을 테니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콜링을 해야지.' 그리고는 떨리는 마음으로 콜링을 했습니다. 이 콜링이란 것이 참 어려운 것입니다. 그 시간에 "예수 믿으실 분들은 일어나십시오."라고 했는데 아무도 안 일어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초청하는 입장에서는 굉장히 떨리는 순간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다 믿도록 해주시고 일으켜 세우시지만, 행여 한 사람이라도 안 일어나면 어쩌나 하는 인간적인 생각이 들기 마련입니다. 제가 빌리 그래함입니까?
그런데 제가 떨리는 마음으로 "일어나십시오."라고 했는데 여기저기에서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한쪽에서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마도 데리고 온 남편이, 아니면 평소에 꼭 전도하고 싶어서 마음으로 기도하던 사람이 와서 일어난 모양입니다. 이렇게 눈물이 복받쳐서 우는 사람이 여러 명 있었습니다. 이런 순간을 제가 경험하고는 '야, 이 대각성전도집회 좋다. 내가 사랑의교회를 목회하는 동안은 계속 해야 되겠다.'고 마음에 결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대각성전도집회를 3, 4일 진행하면서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많이 모이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 날은 입추의 여지가 없어 온 사람이 돌아가기도 했는데, 그러면서도 계속 데리고 오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첫번째 대각성전도집회가 큰 성공을 했습니다. 그때는 너무나 재미있어 봄에 하고는 가을에 또 한번 했습니다. 그러자 똑같은 현상이 또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도 또 두 번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해부터는 제가 지쳐서 1년에 1번으로 조정했습니다.
이처럼 지금까지 집회를 통해 아마 줄잡아 15,000명 이상 되는 분들이 예수 믿고 돌아왔습니다. 이번 대각성전도집회를 통해 결신한 사람들까지 합하면 18,000명 이상이 지난 19년 동안 사랑의교회 대각성전도집회를 통해 복음을 듣고 '나 예수 믿겠습니다.' 하고 일어난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랑의교회에서 세미나를 마치고 간 목사님들 가운데 제자훈련을 제대로 하는 교회 치고 대각성전도집회를 안 하는 교회가 없습니다. ᄌ금까지 확인한 교회만 해도 100여 교회가 넘습니다. 그런데 대각성전도집회를 하는 교회마다 재미를 보는 것입니다.
서울 근교에 있는 어느 교회에서는 얼마 전에 대각성전도집회를 끝냈는데, 어느 시간에는 교인들이 24명을 데리고 왔다고 합니다. 그 교회는 큰 교회가 아닙니다. 마침 우리 교회 부목사님이 가서 복음을 전했는데, 24명이 다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또 어느 시간에는 183명 전체가 결신을 했다고 합니다. 200~300명이 출석하는 작은 교회에서 183명이 결신했다는 사실은 기적과도 같은 일입니다. 이렇게 교회마다 대각성전도집회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고 돌아오는 데, 매년 전체 결신자 수만 집계해도 수만 명은 될 것입니다. 실로 엄청난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대각성전도집회가 끝나고 나서 그 다음날 교회에 와서 조용히 기도하는데 갑자기 하나님께서 저에게 특별한 생각을 하게 만드셨습니다. 제 마음에 그런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너는 성격이 좀 별나서 이벤트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 기쁘면 기쁘다고 해야 하는데 지나고 나면 도무지 기쁜 표도 안내고, 무슨 사건이 있어도 사건을 잘 마무리하지 않고 그냥 넘기는 것이 네 성격이지. 어디 가서 좋은 것을 보고 와도 좋다는 말도 안하고...이것이 네 성격인데, 그것이 좋은 점도 있지만 나쁜 점도 많다. 이번에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는데 잔치 해야지. 그래서 기뻐해야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하나님께서 제게 깨닫게 하시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아, 하나님 옳습니다. 좋은 일은 좋다고 해야죠. 기쁜 일은 기쁘다고 해야죠. 제가 그런 면에서는 참 둔감한 사람인데, 용서해주세요.' 그리고는 오늘 주일을 새생명 감사 축제로 하나님께 예배 드리려고 마음 먹었습니다. 그리고는 몇 가지 준비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데 우리가 기뻐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1년에 몇 차례의 절기를 정해주셨습니다. 그 절기의 목적은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맥추절을 지키면서 오곡백과를 추수하게 하시고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기뻐하고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기뻐하고 감사하기 위해서 절기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을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또 유월절 같은 절기를 주시면서' 너희들이 애굽에서 어떻게 구원 받았는가를 잊지 말고 기억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잊어버리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초막절과 같은 절기를 주시면서 '너희들은 광야에서 너희 조상들이 얼마나 고생했는가를 깊이 묵상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기쁜 일을 맞이 했을 때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 돌리는 것이 그분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지금까지 제가 너무 소극적이었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할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제일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는 '하나님' 하면 문 밖에 나가서 잃은 자식 돌아오기 만을 기다리며 하염없이 먼 산을 쳐다보시는 아버지 모습을 그리지 않습니까?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제일 기뻐하시는 일은 자기가 구원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두손들고 회개하면서 하나님을 찾아 나오는 일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제일 기뻐하십니다. 그 기쁨을 표현하는 가장 대표적인 성경이 누가복음 15장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누가복음 전체에 흐르는 그 이야기의 한 토막인 것입니다.
어떤 여인이 10드라크마를 가지고 있었는데, 어느날 1개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세어도 9개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방을 사방으로 뒤지면서 찾고 나중에는 빗자루로 쓸면서 찾다가 결국 고생 끝에 찾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자기 혼자 가만히 그 기쁨을 주제할 수 없어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우리 함께 즐거워하자." 하면서 잔치를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드라크마는 어느 정도 액수이겠습니까? 그 당시에 로마 화폐로는 데나리온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 데나리온 은전과 헬라권에서 원래 사용하던 드라크마 은전과는 값어치가 비슷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알듯이 데나리온은 일꾼들이 하루 노동해서 버는 품삯입니다. 한 데나리온 받으면 일반적인 수준으로 받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돈으로 약 5~10만원 정도 내외가 될 것입니다. 드라크마도 그와 똑 같은 정도의 액수입니다. 따라서 적은 돈이 아닙니다. 은전 하나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그만한 가치를 가진 것이면 잊어버린 사람이 가만히 있을 리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찾으려고 할 것입니다. 결국 찾고서는 기뻐했습니다. 그것을 놓고 주님께서 무엇이라고 주석을 달았습니까?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10절)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이 기뻐하듯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누가복음 15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면 몇 가지 특징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잃은 양을 얻은 주인이 기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굉장히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두 번째 특징은 더불어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양을 찾아왔습니다. 드라크마를 찾았습니다. 방탕하던 둘째 아들이 돌아왔습니다. 그것을 보고 주인이, 아버지가 얼마나 기뻐했냐면, 이웃을 청하고 친구를 청해서 함께 잔치할 정도로 기뻐하는 모습이 여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더불어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여기에 나오는 기쁨은 평범한 것이 아닙니다. 엄청난 기쁨입니다. 15장 32절을 보면 탕자가 돌아온 것을 보고 자기 아버지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3중적인 강조 아닙니까? '즐거워한다'는 말만 해도 대단한데, 거기에다 '기뻐한다'는 말까지 하고, 그것도 모자라 '마땅하다', '당연하다'는 말까지 덧붙였으니 이 기쁨은 평범한 것이 아닙니다. 가만히 앉아서 주체하지 못하는 기쁨, 막 춤이라도 추어야 되고, 소문이라도 내야 되고, 사람들을 붙들고 그 기쁨을 전해야 되는 특별한 기쁨인 것입니다. 이 기쁨을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자기가 찾고 있는 죄인이 돌아오는 것을 볼 때에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15장을 보면 12번이나 '기뻐한다. 즐거워한다'는 말이 계속 반복되어 나옵니다. 성경 어디에도 이만큼 기뻐한다는 단어가 반복되어 나오는 장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잃은 양이 돌아오는 것을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한 영혼이 예수 믿고 구원 받아도 하나님께서 이처럼 기뻐하시는데 2,800명 가까운 사람들이 예수 믿고 돌아왔으니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직접 눈으로 보진 못하지만 아마 지금쯤 천국에선 난리가 났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군 천사들과 먼저 천국에 들어간 성도들과 더불어 지금쯤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너희들 사랑의교회를 아느냐? 이번에 대각성전도집회를 통해 몇 명이 예수 믿기로 작정한 줄 아느냐?' 하고 말씀하시면서 천사들이 팡파레를 불고 야단 났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기뻐하시는데 우리가 기뻐하지 않고 시큰둥하고 앉아 있으면 되겠습니까? 절대로 안됩니다.
기쁨이 뭔지 아실 것입니다. 기쁨은 어떤 좋은 것을 얻어서 실제로 누릴 때 느끼는 유쾌한 감정입니다. 아니면 '자기가 바라는 어떤 것을 기대할 수 있다. 얻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하는 소망 때문에 은근히 느껴지는 쾌감입니다. 이것이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이 기쁨을 흔히 자연적인 기쁨과 정신적인 기쁨으로 분류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육적인 기쁨과 영적인 기쁨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육적인 기쁨은 거의 본능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왜 발랄하고 기쁨이 넘쳐 보입니까? 젊음의 기쁨이 그들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20대의 젊음이 주는 특별한 기쁨이 있습니다. 또한 건강한 사람은 몸이 약한 사람보다 많이 웃고, 이야기를 할 때도 표정이 밝습니다. 건강에서 오는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이 자연적이고 육적인 것들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기쁨도 있습니다. 젊은이가 서로 사랑하게 되면 세상이 천국처럼 보이는 기쁨이 있습니다. 이러한 기쁨도 다 자연적이고 본능적인, 육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웬만한 사람이면 다 경험하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심지어 짐승도 그 정도의 기쁨은 느끼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이 자연적인 기쁨, 육적인 기쁨 외에 별다른 기쁨을 모른다고 하면 아마 그 사람의 신앙은 어린아이의 신앙일는지 모릅니다. 아니, 어린아이의 신앙도 아닙니다. 예수 믿은 지 3일도 안 되는 사람이 엄청난 기쁨을 맛보는 일이 자주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보면 무언가 잘못된 신앙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면 됩니다다.
우리에게는 영적인 기쁨이 있습니다. 세상사람이 모르는 영적인 기쁨이 있습니다. 차원이 다른 기쁨이 있습니다. 나이에 구애 받지 않는 기쁨이 있습니다. 병들던, 건강하던 이것을 떠나서 기뻐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었을 때도 기뻐하지만, 얻지 못했을 때도 기뻐하는 독특한 기쁨이 있습니다. 이런 영적 기쁨을 아는 사람을 성숙한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누리는 기쁨이 얼마나 독특한지 아십니까? 그 기쁨은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통해서 오는 기쁨입니다. 기도하면서,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찬송하면서, 예배하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내 영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그 분과 깊은 영교를 나눌 때 나도 모르게 마음 속에 기쁨의 샘이 솟는 것입니다. 이런 기쁨을 모르고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오는 기쁨이 있습니다. 내 뜻대로, 내 맘대로 살 때는 전혀 기쁨이 없었는데, 하나님께 순종할 때는 그 가운데 주시는 놀라운 기쁨이 있다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희생함으로써 얻는 기쁨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면서도 그 마음속에는 세상이 모르는 기쁨을 갖고 계셨습니다. 세상을 구원코자 자신을 희생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만이 알 수 있는 기쁨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내 기쁨은 세상이 빼앗지 못하는 기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웃을 위하여 썩는 밀알이 되어 헌신할 때 남이 모르는 기쁨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갈 때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 믿는다고 사람들이 욕하고, 핍박하고, 멸시하고, 못살게 굴 때도 그들이 모르는 기쁨을 가지고 찬송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와 같은 영적인 기쁨이 있습니다. 이 기쁨을 우리 모두가 소유해야 합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이 예수 믿고 돌아옵니까? 그것을 보고 하나님께서 기뻐한다면 그것은 영적인 기쁨입니다. 그 기쁨이 나에게도 전달되어야 하고, 아버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쁨이면 나도 기뻐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놀라운 기쁨입니다.
우리 교회에 송달 장로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참 감사하게도 사랑의교회에는 훌륭한 장로님들이 많은데, 그 가운데 이 송달 장로님은 특별한 분입니다. 회계학을 전공하신 분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아주 정상급에 있는 회계사입니다. 과거 한보사태 때 국가의 요청을 받아 그 기업의 재무구조를 전부 분석, 정리, 평가하는 책임자로 있었을 만큼 탁월한 분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재정을 담당하고 게셨습니다. 이제 50대 중반인데, 그가 지금 꿈꾸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회사를 은퇴하면 연변과학기술대학에 가서 경제학, 회계학을 가르치면서 학생들을 전도하고, 중국에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서 평생을 바치겠다는 꿈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장로님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6개월 전에 병원에 가서 진찰을 했는데 폐암이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제대로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암세포가 너무 많이 전이되어 있었습니다. 병원에서도 다른 대안이 없어 그동안 방사선 치료만 계속 해왔는데 별다른 진전이 없었습니다. 이제는 몸 이곳 저곳에서 통증이 심해졌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몰핀주사를 맞고 있을 정도입니다.
이 정도의 병을 가지고 병상에 누워있는 환자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 얼굴에 무슨 웃음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그런 병을 앓고 있다니 이해가 됩니까? 그런데 그 병실을 방문한 사람들마다 깊은 감동을 받습니다. 장로님의 얼굴이 어린아이와 같기 때문입니다. 그 얼굴에 웃음이 가득 피어 있습니다. 오히려 찾아간 사람이 민망할 정도입니다. 저도 몇 번 가서 보고는 똑같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한두 번은 사람이 위선할 수 있습니다. 가장도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왔으니 적어도 장로라는 체면에 어떻게 찡그리고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 병상에서 변함없이 수 개월 동안 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특별한 은혜가 그에게 있는 것입니다.
대각성전도집회가 끝난 그 다음날 아침이었습니다. 우리 교회 부목사님 한 분이 병상을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그 장로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더라는 것입니다. "목사님, 오늘은 특별히 기쁜 날입니다. 너무너무 기쁜 날입니다." 그래서 속으로 '의사가 병이 좀 나았다고 했나...' 하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목사님, 이번 대각성전도집회 때 저는 병상에 있어 참석을 못해 태신자만 등록시켰거든요. 그리고는 제가 등록한 부부를 놓고 계속 기도했는데, 그 태신자가 마지막 날 저녁에 참석해서 예수 믿겠다고 일어섰대요. 그리고는 예수를 믿기고 결신을 했더니 얼마나 마음이 기쁘고 감사한지 제 생각이 나서 그 다음날 아침 일찍 저를 찾아와 '장로님, 그동안 기도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장로님이 너무 기뻐 견디지 못하다가 마침 목사님이 오시니까 막 털어놓았던 것입니다. "너무너무 기뻐요. 목사님." 하고 기쁨을 아직도 삭이지 못한 채 말입니다.
자기가 지금 죽어가는 마당에, 살지 죽을지 모르는 처참한 병상에서 한 가정이 구원 받았다고 해서 그렇게 기뻐하는 것이 보통 일입니까?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인가요? 예수 믿고 돌아온 그 부부가 누구인지 물었더니 그 장로님의 자가용 기사였습니다. 그러니 같이 타고 다니면서 얼마나 전도를 많이 했겠습니까? 그런데도 귀를 막고 안 듣던 사람들이 이제 예수 믿고 스스로 하나님 앞에 돌아왔으니 얼마나 장로님이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병상에서 그렇게 중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 기쁨을 가슴에 안고, 그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는 장로님이 있는데, 우리가 건강한 몸으로 예배 드리고 있으면서 하나님 아버지가 기뻐하는 그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면 무언가 문제가 있지 않을까요?
저도 태신자 둘을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를 안 믿던 친구 둘을 예배당 한쪽에 앉혀 놓고 저도 그 옆에 앉아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담임 목사가 바로 옆에 두고 예배를 드리는 태신자는 좀 특별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초청하는 시간에 "누구든지 예수 믿기를 원하시는 사람은 일어나십시오." 하면 제 체면을 봐서라도 일어나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끝까지 안 일어났었습니다. 제가 옆에서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사람이 강제로 일으킨다고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그 마음을 움직여 주실 때 가능한 일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비록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고 있지만, 행여 누가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점잖은 사람들이 금방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분들이 일어났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임을 보여 줍니다. 성령이 주시는 감화입니다. 제 태신자도 못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좀 섭섭하긴 했지만 다른 형제들이 데리고 온 태신자들이 우르르 일어날 때 얼마나 감격하고 기뻤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는데 제가 기뻐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교회가 이런 주일을 맞아서 기뻐하고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입니다. 이 기쁨이 여러분의 마음 속에도 흐르고 넘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여러분의 가슴 속에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기쁨을 앞으로 계속 유지하기 위해 믿지 아니하는 심령들을 놓고 기도하고, 그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고자 계속 노력하십시오. 그 노력이 중단되지 않는 이상 우리 가슴에서 솟아오르는 이 기쁨도 중단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내 마음에 항상 살아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잃은 양을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을 안겨드려야 합니다. 이번 대각성전도집회를 통해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바라보고 감격하면서 이 기쁨이 여러분의 가정과 직장에 계속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다같이 기도하십시다.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이번 대각성전도집회를 통해서 수많은 영혼들을 불러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돌아온 영혼들을 바라보시고 기뻐하실 뿐 아니라, 그 기쁨을 우리 가슴 속에도 담아주시고 이 교회에도 넘치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모든 심령심령마다 막혔던 샘이 터져서, 하나님 기쁨의 샘이 터져서 하나님 앞에 영광과 찬양과 경배를 돌릴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출처/옥한흠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