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27
기쁨이 충만 하려면 (요한복음 15:1-11)
<本文>
"1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2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3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8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요15:1-11)
<序言>
지난 금요연합집회 강사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 나라가 건국 초기에 일제 수탈과 내전으로 인해 먹을 것이 없을 때 당시 초대 대통령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에 원조를 요청해 무쇠 밥솥을 얻어 왔다고 합니다. 이후에 박정희 대통령이 그 무쇠밥솥에 밥을 가득 지었다고 합니다. 전두환 대통령이 그 밥을 다 먹어 치웠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 노태우 대통령은 솥에 남은 누룽지를 다 긁어 먹었다고 합니다. 김영삼 대통령이 밥솥채 팔아먹었다고 합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아무 것도 없으니 카드로 전기 밥솥을 사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이 그나마 전기 밥솥 코드를 잘못 꽂아 전기 밥솥채 태워 먹었다고 합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그 강사가 지은 말이 아니고 항간에 떠돌아 다니는 말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 나라 경제를 해학적으로 만들어 낸 이야기입니다. 저는 우리 나라 대통령들을 부정적으로만 평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얼마나 살기가 힘들면 이런 이야기를 만들었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의 경제는 국가적으로 가정적으로나 어렵습니다. 단적으로 기쁨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 농부가 있습니다. 농부가 포도나무를 심습니다. 그 포도나무는 가지가 자라납니다. 농부는 그 가지들이 좋은 포도열매를 많이 맺히기를 원합니다. 농부는 열매 맺히는 가지는 더욱 잘 관리해 주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잘라냅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잘려서 말라지게 되고 불사름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포도나무 가지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포도나무 원 줄기에 붙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하신 이유는 제자들이 과실(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과실'이 가리키는 상징성을 직역하면 예수님이 맡기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확대 해석하면 온전한 영적 상태와 신앙의 상태와 행위의 상태, 곧 하나님이 원하시고 주시고자 하는 온전한 삶을 말합니다. 곧 예수님이 이 이야기를 하신 목적은 제자들이 참 제자답게 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8절).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이 주시기를 원하는 '기쁨'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11절에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이 포도나무 이야기를 제자들에게 하신 목적은 예수님이 가지고 있는 기쁨을 제자들도 얻어 누리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아들'은 히브리적 개념으로 볼 때 아버지의 형상(얼굴)을 가진 자이고, 아버지의 일(직업)을 하는 자이고, 아버지의 기업(재산)을 누리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이며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이며 하나님의 모든 풍성한 복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요14:9, 4:34, 마28:18). 예수님은 그것들을 제자들에게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마치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 원줄기에 붙어 있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 붙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本論>
1.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 열매를 맺으려면 포도나무 원줄기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참포도나무'라고 했고, 제자들을 그 '가지'라고 했습니다 (1, 5절).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원하는 삶을 사므로 예수님이 주시는 기쁨을 충만히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께 붙어 있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 붙어 있는 생활은 예수님 안에 거하는 생활을 말합니다. 4절에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미 깨끗해졌다고 했습니다 (3절). 가룟유다를 제외한 나머지 제자들은 모두 이미 예수님을 믿고 거듭났습니다. 예수님과 영적으로 연합되었습니다 (요13:10). 이제 그의 안에 거하면 됩니다. 이미 믿음으로 연합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는 말은 여러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조건적 약속의 의미로 본다면 '너희가 내 안에 있으라 그러면 나도 너의 안에 있겠다'는 의미입니다. 의지적 명령의 의미로 본다면 '나는 틀림없이 너희 안에 있다 그러므로 너희도 반드시 내 안에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상호내주적 관계의 의미로 본다면 '나는 너희 안에 있고 너희는 내 안에 있다 그 관계를 계속 유지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두번째 의미인 조건적 명령의 의미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를 믿고 거듭난 이후 우리 안에 계속 거하고 계십니다.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요한복음 14:16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더라도, 심지어는 우리가 그를 떠나더라도 그는 우리를 놓지 않고 떠나지 않습니다. 당연히 우리도 그를 놓지 않고 떠나지 않아야 합니다. '거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이나테(μεινατε)는 지속적인 행동를 요구하는 명령형입니다.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떠나지 않기를 힘써야 합니다.
2.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해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말은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한다는 말도 됩니다. 9절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사랑하셨습니다. 마태복음3:17에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절대로 놓지 않는 사랑을 느끼시고 그 사랑 안에 거하려 했습니다. 하나님 뜻이 아니면 행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행하므로 만족을 얻었습니다. 요한복음4:34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된 우리를 사랑의 대상으로 여기시고 사랑하십니다. 하나님된 영광을 내 놓으시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창조자인 그가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여 죄와 그 결과로 오는 형벌에서 구원하기 위해 제한된 피조세계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당해야 할 모든 고난을 당하시고 마침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빌2:5-8). 그는 부활하여 승천하신 이후 하나님 우편에도 우리의 대언자가 되어 주십니다. 요한일서2:1에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παρακλητον)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성화를 위해 우리가 범죄할 때도 하나님의 심판을 유예시키기 위해 우리를 변호합니다. 또한 성령으로 우리의 연약함을 돕습니다. 로마서8:26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연약하여 무엇을 구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저 해가 될 것도 모른 채 눈 앞에 좋게 보이는 것을 구합니다. 무엇을 추구하며 살지 모릅니다. 헛된 것, 부정적인 것을 추구하며 삽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탄식하면서 우리가 바른 가치관과 바른 추구점을 가지도록 도와주시고 하나님께 대신 구해 주십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사랑을 인식하고 그 사랑 안에 거해야 합니다. 주의 뜻이면 가고 주의 뜻이 아니면 하지 않는, 주가 원하는 일이면 하고 주가 원하지 않는 일이면 하지 않아야 합니다.
3. 예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한다는 말은 예수님의 계명을 지킨다는 말도 됩니다. 10절에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명을 온전히 순종했습니다. 고난이 와도 순종을 했습니다. 고난으로 순종을 배웠습니다 (롬5:19, 히5:8). 그는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나님과 동등됨도 포기하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했습니다 (빌2:5-8). 그는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마26:39).
제자된 우리도 예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요한복음14:15에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했습니다. 14:21에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라고 했습니다. 특히 예수님이 주신 사명을 순종해야 합니다 (마28:19-20, 행1:4,8). 본문은 예수님이 고난받음으로 인하여 제자들도 환난을 당할 것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어떤 환난이 와도 주님이 맡기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요16:33).
<結言>
예수님 안에 거하는 자,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룰 것이라고 했습니다. 7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했습니다. 16절에도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요한일서5:14에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으면 모든 가치 기준이 예수님과 관계를 유지하고 그가 주신 사명을 감당하려는 데 있으므로 그가 생각하는 것도 예수님이 생각과 같고 그가 소원하는 것도 예수님 마음에 합하고 그가 구하는 것도 예수님이 기뻐하는 내용이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구하는 것마다 이루어 주십니다. 그야말로 기쁨이 충만하지 않겠습니까?
출처/차용철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