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27
신앙적 기쁨의 신비 (빌립보서4:4)
어떤 목사님이 한 성도의 가정을 심방했습니다. 분명히 인기척은 있는데 아무리 벨을 눌러도 문을 열어 줄 생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음 심방이 급해진 목사님이 자신이 다녀갔다는 흔적을 남기기 위해 메모를 써 붙이고 떠났습니다. 시간이 급해서 길게 적지 못하고<요한계시록 3장20절>이라고만 적었습니다. 그 성도가 찾아보니 이런 말씀이었습니다. “볼 찌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다음 주일이 되었습니다. 사실은 남편과 함께 집에 있었는데 목사님을 맞이하지 못한 그 성도도 목사님 보기가 미안해서 자신도 집에서 목사님을 기다렸는데 나가보지 못한 이유를 차마 말씀드리기가 민망하다며 나름대로 목사님이 했던 방식대로 메모를 건네주었습니다. 목사님이 메모지를 받아들고 보았더니 <창세기 3장 10절>이라고 적은 메모지였습니다. 성경박사라고 하는 목사도 헷갈렸습니다. 조용히 서재로 들어와 성경을 들추었더니 이런 말씀이 적혀 있었습니다.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이럴 때 우리는 웃습니다. 웃음은 참 좋은 것이어서 긴장을 이완시켜서 스트레스를 해소해 줄 뿐 아니라 심장박동, 근육상태, 혈액순환 등에도 영향을 미쳐서 에어로빅 효과를 낸다고 합니다. 우리가 20초만 크게 웃어도 5분 동안 힘들여서 노를 젓는 효과를 가져 온다고 합니다.
사람의 뇌는 18가지의 신기한 요소를 생성해 내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둘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엔돌핀] 이요, 다른 하나는 [아드레날린]이라는 것입니다. [엔돌핀]은 사람이 많이 웃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감사한 마음, 기쁜 마음을 가질 때, 생성되어 흘러나옵니다. 이 [엔돌핀]은 암세포는 물론 인체에 해가 되는 많은 균들을 잡아먹습니다. 그러나 [아드레날린]은 반대로 인간이 슬퍼하거나 괴로워하며, 근심과 걱정에 사로잡히고, 남을 원망하고 저주하며 시기하고 질투할 때, 생성되어 흘러나오는 것으로 암을 유발하고 소화불량이나 기타 건강에 해로운 요소들을 활동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웃어야 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웃음은 사람에게만 주어진 특징입니다. 개가 웃는 것 보셨습니까? 돼지가 웃는 것 보셨나요? 웃음은 사람에게만 주어진 특권입니다. 사람이 웃을 줄 알아야합니다. 평생 살면서 웃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건 불행입니다. 사람은 웃음을 배우면서 성장합니다. 아이들이 세상에 처음 태어날 때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울음으로 세상살이를 시작합니다. 이게 안 울면 큰일입니다. 누구든지 태어나면 울어야만 삽니다. 그래서 엉덩이를 패서라도 울리고야맙니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들에게 이제부터는 웃음을 가르쳐야합니다. 그런데 그 방법이 문제입니다. 별 버라이어티 쇼를 해도 아이들이 웃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을 웃게 하는 딱 한가지의 방법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까꿍”입니다. “까꿍”하면 웃습니다. 그렇게 웃음을 배워 갑니다. 자, 우리도 옆 사람에게 한 번 해볼까요?“까꿍”앞으로 부부간에도 아침에 일어나서 첫인사를 “까꿍”으로 해보세요. 틀림없이 집안이 달라집니다. 출근하는 남편보고“까꿍”퇴근해서 집에 들어서자마자 아내보고“까꿍”해보십시오. 그래도 웃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주어진 것이 또 있습니다. 그것은 간지럼을 태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간지럼을 주신 목적은 하나인데 그것은 웃음을 배우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전혀 못 웃는 사람은 간지럼을 통해서라도 웃음을 배워야한다는 뜻입니다. 간지럼을 태우는데도 웃지 않고 화를 내는 사람은 어디가 잘 못된 사람입니다. 아이들이 하루에 400번을 웃는다고 합니다. 미국 성인의 경우 하루에 15번을 웃는다고 합니다. 한국 어른들 잘 웃지 않습니다. 무슨 한 맺힌 것이 그리도 많은지 늘 오만가지 상을 하고 삽니다. 여러분, 웃음이란 무엇입니까? 기쁨의 외적 표현입니다. 또한 즐거움은 웃음의 내적 원천입니다. 웃음이 있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기쁨과 즐거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핵심은 즐거움입니다. 신앙생활을 고역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그래서 영적으로 사는 사람일수록 즐거운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내가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가를 알고자 한다면 내가 얼마나 즐겁고 기뻐하며 사느냐를 생각해 보면 됩니다.
사도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기뻐해야 할 것과 특별히 신앙생활이 즐거워야 할 것을 거듭 말씀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우리는 “주 안에서”라고 하는 바울의 강조를 기억해야할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의 연구를 보면 사람들이 언제 기뻐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사람이 기뻐하려면 사랑을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으면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이 생깁니다. 또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을 손에 넣었을 때 사람은 기뻐한다고 합니다. 돈을 벌고 싶어 하는 사람은 돈을 벌었을 때 기뻐합니다. 명예를 얻고 싶어 하는 사람은 명예를 얻었을 때 기뻐합니다. 학문의 깊은 경지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만족스러운 연구 결과를 얻었을 때 기뻐합니다. 또한 자기의 형편을 좋게 받아들일 때 기뻐한다고 합니다. 내가 잘살든 못살든, 내 자신의 형편이 형통하든 형통하지 못하든 상관없습니다. 자기의 형편을 좋게 받아들이면 거기에 기쁨이 있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기쁨은 자기가 갖고 있는 소중한 것을 남과 나눌 때 오는 기쁨이라고 했습니다. 재산이 있는 사람이 재산을 나누어 선한 일에 투자할 때 기쁨이 옵니다. 지식을 가진 사람이 후학들에게 지식을 나눌 때 기쁨이 옵니다. 좋은 소식을 받은 사람이 그 소식을 다른 사람들과 나눌 때 기쁨이 생깁니다. 보통의 심리학자들은 이런 네 가지로 기쁨의 정도를 이야기합니다.
오늘 우리 모두도 예외는 아닐 찐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에게 이런 기쁨은 어떤 의미이냐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가장 가치 있는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기억하십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랑이 어느 정도 인지. 사도 바울은 우리가 받은 이 사랑에 대해서 롬5:5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놀라운 일입니다. 우리가 그 사랑을 받을 준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막 흘러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내가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하나님의 사랑은 홍수같이 우리를 가득 채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세상으로부터 슬픈 일을 당할 때가 있다면 그 때에 내가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지를 조용히 묵상해 보시기바랍니다. 혹여라도 마음이 아플 때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어떻게 사랑하고 계시는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바울처럼 우리도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은 기쁨을 만들어 내는 샘물입니다. 비록 세상은 나를 버리고, 사람들은 나를 외면할지라도 만유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나 같은 것을 특별히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마음 속 깊이 받아들이고 그것을 믿음으로 고백하면 틀림없이 그 사랑은 우리에게 기쁨을 안겨 줄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이라는 유명한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기쁨과 행복은 다릅니다. 행복해야만 기쁜 것은 아닙니다. 기쁘다고 행복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많은 일에 불행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불행 속에도 여전히 기쁨이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자녀이기 때문입니다.”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기에 불행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다는 진리, 이것이 바로 <신앙적 기쁨의 신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 신비를 모르기에 우리에게는 <항상 기뻐하는 삶>의 모습이 낯설고 어색하기만 한 것입니다.
바울의 기쁨을 보고 우리가 깨닫는 또 하나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했기에 기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기쁨의 클라이맥스는 빌3장 7, 8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 되고자 함이라”바울이 지금 가장 기뻐하는 이유는 예수님을 얻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얻음으로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물질만이라면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일 것입니다. 물질은 현대인에게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고 기쁨의 근원마저도 그것으로부터 찾고자 한다면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일본의 유명한 신학자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돈이 있으면 침대는 살 수 있으나 잠은 살 수 없으며, 장식품은 살 수 있으나 美는 살수 없으며, 약은 살 수 있으나 건강은 살 수 없으며, 책은 살 수 있으나 두뇌는 살 수 없으며, 음식은 살 수 있으나 입맛은 살 수 없으며, 유흥은 살 수 있으나 행복은 살 수 없으며, 십자가는 살 수 있으나 구세주는 불가능하며, 교회는 지을 수 있으나 하늘나라는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물질이 가져다 줄 수 있는 행복의 한계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록펠러]는 더 의미 있는 말을 했습니다.“가장 가난한 사람이란 돈 외에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이다.”새겨들어야 할 말입니다. 돈만 있고 사랑이 없으면 가난한 사람이요, 돈만 있고 인정이 없다면 진정한 부자가 아니요, 돈만 있고 기쁨이 없으면 그가 정말 가난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기뻐할 줄 모르는 동물적 소유에 집착하지 말고 무엇에도 빼앗길 수 없는 신앙적인 기쁨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외부의 조건과 환경이 내 기쁨을 좌우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바울로부터 기뻐하기를 권면 받고 있는 빌립보교인들의 외부적 환경과 조건으로는 결코 기뻐할 만한 상황이 아닙니다. 자기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그리스도를 전파하던 바울이 감옥에 갇혀있고,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박해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기쁨으로 여기라는 말입니다. 곧 외부의 환경과 조건에 의해 신앙적 기쁨을 빼앗기지 않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쁨>이라는 영어는 `JOY입니다. 이 단어를 잘 분석해 보면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기쁨이란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단어의 첫 자 J는 Jesus(예수)입니다. 즉 예수님이 나의 인생에 있어서 제일 처음에 와야 된다는 뜻입니다. O는 Others(이웃들), 나의 삶에 현장에서 하나님 다음으로 이웃이 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Y는 You(당신)을 말합니다. 맨 마지막에 당신을 생각할 때 진정한 기쁨을 맛볼 수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이 순서를 얼마나 바꾸고 살아왔습니까? 기도할 때, 생각할 때, 대접할 때, 살아갈 때도 항상 내가 앞자리에 아니면 중간 자리에 있기를 원하면서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세상에서의 문법은 언제나 1인칭은 `<나>이지만 성경의 1인칭은 언제나 <하나님>이며 2인칭은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이며 그다음 3인칭이 곧 `<나>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속에 진정한 기쁨이 숨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신앙적 기쁨의 신비>입니다. 오늘 바울이 말씀하는바 주 안에서 기뻐하는 방법이라는 말씀입니다.
희랍신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한 여인이 호수를 건너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뱃사공이 말합니다. “호수의 물을 마시고 건너지 않겠습니까?”,“물을 마시면 어떻게 되지요?”,“지난날의 괴로웠던 일들을 모두 잊게 됩니다.”,“그거 잘됐군요. 물을 기꺼이 마시겠습니다.”,“그러나 한 가지 명심할 것은 과거의 기쁜 추억도 모두 잊혀진다는 사실입니다.”여인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말했습니다.“물을 마시지 않겠습니다.”무슨 이야기입니까? 기쁨과 사랑의 무게는 슬픔과 괴로움의 무게와는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세상이 아름답지 않아 기쁨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기뻐하지 못해서 세상이 어두운 것입니다. 사람이 미워서 내 속에 즐거움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즐거워하지 못해서 사람이 미운 것입니다. 때로 신앙생활이 짐이 되고, 가끔씩은 신앙 때문에 손해 보는 것 같아서 후회가 됩니까? 그럴 때마다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에게 있어야할 신앙적 기쁨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오늘 바울의 말씀 속에서<신앙적 기쁨의 신비>를 발견하고 그 기쁨 속에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출처/김철현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어떤 목사님이 한 성도의 가정을 심방했습니다. 분명히 인기척은 있는데 아무리 벨을 눌러도 문을 열어 줄 생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음 심방이 급해진 목사님이 자신이 다녀갔다는 흔적을 남기기 위해 메모를 써 붙이고 떠났습니다. 시간이 급해서 길게 적지 못하고<요한계시록 3장20절>이라고만 적었습니다. 그 성도가 찾아보니 이런 말씀이었습니다. “볼 찌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다음 주일이 되었습니다. 사실은 남편과 함께 집에 있었는데 목사님을 맞이하지 못한 그 성도도 목사님 보기가 미안해서 자신도 집에서 목사님을 기다렸는데 나가보지 못한 이유를 차마 말씀드리기가 민망하다며 나름대로 목사님이 했던 방식대로 메모를 건네주었습니다. 목사님이 메모지를 받아들고 보았더니 <창세기 3장 10절>이라고 적은 메모지였습니다. 성경박사라고 하는 목사도 헷갈렸습니다. 조용히 서재로 들어와 성경을 들추었더니 이런 말씀이 적혀 있었습니다.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이럴 때 우리는 웃습니다. 웃음은 참 좋은 것이어서 긴장을 이완시켜서 스트레스를 해소해 줄 뿐 아니라 심장박동, 근육상태, 혈액순환 등에도 영향을 미쳐서 에어로빅 효과를 낸다고 합니다. 우리가 20초만 크게 웃어도 5분 동안 힘들여서 노를 젓는 효과를 가져 온다고 합니다.
사람의 뇌는 18가지의 신기한 요소를 생성해 내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둘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엔돌핀] 이요, 다른 하나는 [아드레날린]이라는 것입니다. [엔돌핀]은 사람이 많이 웃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감사한 마음, 기쁜 마음을 가질 때, 생성되어 흘러나옵니다. 이 [엔돌핀]은 암세포는 물론 인체에 해가 되는 많은 균들을 잡아먹습니다. 그러나 [아드레날린]은 반대로 인간이 슬퍼하거나 괴로워하며, 근심과 걱정에 사로잡히고, 남을 원망하고 저주하며 시기하고 질투할 때, 생성되어 흘러나오는 것으로 암을 유발하고 소화불량이나 기타 건강에 해로운 요소들을 활동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웃어야 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웃음은 사람에게만 주어진 특징입니다. 개가 웃는 것 보셨습니까? 돼지가 웃는 것 보셨나요? 웃음은 사람에게만 주어진 특권입니다. 사람이 웃을 줄 알아야합니다. 평생 살면서 웃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건 불행입니다. 사람은 웃음을 배우면서 성장합니다. 아이들이 세상에 처음 태어날 때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울음으로 세상살이를 시작합니다. 이게 안 울면 큰일입니다. 누구든지 태어나면 울어야만 삽니다. 그래서 엉덩이를 패서라도 울리고야맙니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들에게 이제부터는 웃음을 가르쳐야합니다. 그런데 그 방법이 문제입니다. 별 버라이어티 쇼를 해도 아이들이 웃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을 웃게 하는 딱 한가지의 방법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까꿍”입니다. “까꿍”하면 웃습니다. 그렇게 웃음을 배워 갑니다. 자, 우리도 옆 사람에게 한 번 해볼까요?“까꿍”앞으로 부부간에도 아침에 일어나서 첫인사를 “까꿍”으로 해보세요. 틀림없이 집안이 달라집니다. 출근하는 남편보고“까꿍”퇴근해서 집에 들어서자마자 아내보고“까꿍”해보십시오. 그래도 웃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주어진 것이 또 있습니다. 그것은 간지럼을 태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간지럼을 주신 목적은 하나인데 그것은 웃음을 배우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전혀 못 웃는 사람은 간지럼을 통해서라도 웃음을 배워야한다는 뜻입니다. 간지럼을 태우는데도 웃지 않고 화를 내는 사람은 어디가 잘 못된 사람입니다. 아이들이 하루에 400번을 웃는다고 합니다. 미국 성인의 경우 하루에 15번을 웃는다고 합니다. 한국 어른들 잘 웃지 않습니다. 무슨 한 맺힌 것이 그리도 많은지 늘 오만가지 상을 하고 삽니다. 여러분, 웃음이란 무엇입니까? 기쁨의 외적 표현입니다. 또한 즐거움은 웃음의 내적 원천입니다. 웃음이 있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기쁨과 즐거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핵심은 즐거움입니다. 신앙생활을 고역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그래서 영적으로 사는 사람일수록 즐거운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내가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가를 알고자 한다면 내가 얼마나 즐겁고 기뻐하며 사느냐를 생각해 보면 됩니다.
사도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기뻐해야 할 것과 특별히 신앙생활이 즐거워야 할 것을 거듭 말씀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우리는 “주 안에서”라고 하는 바울의 강조를 기억해야할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의 연구를 보면 사람들이 언제 기뻐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사람이 기뻐하려면 사랑을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으면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이 생깁니다. 또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을 손에 넣었을 때 사람은 기뻐한다고 합니다. 돈을 벌고 싶어 하는 사람은 돈을 벌었을 때 기뻐합니다. 명예를 얻고 싶어 하는 사람은 명예를 얻었을 때 기뻐합니다. 학문의 깊은 경지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만족스러운 연구 결과를 얻었을 때 기뻐합니다. 또한 자기의 형편을 좋게 받아들일 때 기뻐한다고 합니다. 내가 잘살든 못살든, 내 자신의 형편이 형통하든 형통하지 못하든 상관없습니다. 자기의 형편을 좋게 받아들이면 거기에 기쁨이 있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기쁨은 자기가 갖고 있는 소중한 것을 남과 나눌 때 오는 기쁨이라고 했습니다. 재산이 있는 사람이 재산을 나누어 선한 일에 투자할 때 기쁨이 옵니다. 지식을 가진 사람이 후학들에게 지식을 나눌 때 기쁨이 옵니다. 좋은 소식을 받은 사람이 그 소식을 다른 사람들과 나눌 때 기쁨이 생깁니다. 보통의 심리학자들은 이런 네 가지로 기쁨의 정도를 이야기합니다.
오늘 우리 모두도 예외는 아닐 찐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에게 이런 기쁨은 어떤 의미이냐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가장 가치 있는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기억하십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랑이 어느 정도 인지. 사도 바울은 우리가 받은 이 사랑에 대해서 롬5:5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놀라운 일입니다. 우리가 그 사랑을 받을 준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막 흘러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내가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하나님의 사랑은 홍수같이 우리를 가득 채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세상으로부터 슬픈 일을 당할 때가 있다면 그 때에 내가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지를 조용히 묵상해 보시기바랍니다. 혹여라도 마음이 아플 때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어떻게 사랑하고 계시는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바울처럼 우리도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은 기쁨을 만들어 내는 샘물입니다. 비록 세상은 나를 버리고, 사람들은 나를 외면할지라도 만유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나 같은 것을 특별히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마음 속 깊이 받아들이고 그것을 믿음으로 고백하면 틀림없이 그 사랑은 우리에게 기쁨을 안겨 줄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이라는 유명한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기쁨과 행복은 다릅니다. 행복해야만 기쁜 것은 아닙니다. 기쁘다고 행복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많은 일에 불행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불행 속에도 여전히 기쁨이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자녀이기 때문입니다.”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기에 불행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다는 진리, 이것이 바로 <신앙적 기쁨의 신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 신비를 모르기에 우리에게는 <항상 기뻐하는 삶>의 모습이 낯설고 어색하기만 한 것입니다.
바울의 기쁨을 보고 우리가 깨닫는 또 하나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했기에 기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기쁨의 클라이맥스는 빌3장 7, 8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 되고자 함이라”바울이 지금 가장 기뻐하는 이유는 예수님을 얻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얻음으로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물질만이라면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일 것입니다. 물질은 현대인에게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고 기쁨의 근원마저도 그것으로부터 찾고자 한다면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일본의 유명한 신학자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돈이 있으면 침대는 살 수 있으나 잠은 살 수 없으며, 장식품은 살 수 있으나 美는 살수 없으며, 약은 살 수 있으나 건강은 살 수 없으며, 책은 살 수 있으나 두뇌는 살 수 없으며, 음식은 살 수 있으나 입맛은 살 수 없으며, 유흥은 살 수 있으나 행복은 살 수 없으며, 십자가는 살 수 있으나 구세주는 불가능하며, 교회는 지을 수 있으나 하늘나라는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물질이 가져다 줄 수 있는 행복의 한계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록펠러]는 더 의미 있는 말을 했습니다.“가장 가난한 사람이란 돈 외에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이다.”새겨들어야 할 말입니다. 돈만 있고 사랑이 없으면 가난한 사람이요, 돈만 있고 인정이 없다면 진정한 부자가 아니요, 돈만 있고 기쁨이 없으면 그가 정말 가난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기뻐할 줄 모르는 동물적 소유에 집착하지 말고 무엇에도 빼앗길 수 없는 신앙적인 기쁨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외부의 조건과 환경이 내 기쁨을 좌우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바울로부터 기뻐하기를 권면 받고 있는 빌립보교인들의 외부적 환경과 조건으로는 결코 기뻐할 만한 상황이 아닙니다. 자기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그리스도를 전파하던 바울이 감옥에 갇혀있고,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박해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기쁨으로 여기라는 말입니다. 곧 외부의 환경과 조건에 의해 신앙적 기쁨을 빼앗기지 않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쁨>이라는 영어는 `JOY입니다. 이 단어를 잘 분석해 보면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기쁨이란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단어의 첫 자 J는 Jesus(예수)입니다. 즉 예수님이 나의 인생에 있어서 제일 처음에 와야 된다는 뜻입니다. O는 Others(이웃들), 나의 삶에 현장에서 하나님 다음으로 이웃이 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Y는 You(당신)을 말합니다. 맨 마지막에 당신을 생각할 때 진정한 기쁨을 맛볼 수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이 순서를 얼마나 바꾸고 살아왔습니까? 기도할 때, 생각할 때, 대접할 때, 살아갈 때도 항상 내가 앞자리에 아니면 중간 자리에 있기를 원하면서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세상에서의 문법은 언제나 1인칭은 `<나>이지만 성경의 1인칭은 언제나 <하나님>이며 2인칭은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이며 그다음 3인칭이 곧 `<나>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속에 진정한 기쁨이 숨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신앙적 기쁨의 신비>입니다. 오늘 바울이 말씀하는바 주 안에서 기뻐하는 방법이라는 말씀입니다.
희랍신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한 여인이 호수를 건너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뱃사공이 말합니다. “호수의 물을 마시고 건너지 않겠습니까?”,“물을 마시면 어떻게 되지요?”,“지난날의 괴로웠던 일들을 모두 잊게 됩니다.”,“그거 잘됐군요. 물을 기꺼이 마시겠습니다.”,“그러나 한 가지 명심할 것은 과거의 기쁜 추억도 모두 잊혀진다는 사실입니다.”여인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말했습니다.“물을 마시지 않겠습니다.”무슨 이야기입니까? 기쁨과 사랑의 무게는 슬픔과 괴로움의 무게와는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세상이 아름답지 않아 기쁨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기뻐하지 못해서 세상이 어두운 것입니다. 사람이 미워서 내 속에 즐거움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즐거워하지 못해서 사람이 미운 것입니다. 때로 신앙생활이 짐이 되고, 가끔씩은 신앙 때문에 손해 보는 것 같아서 후회가 됩니까? 그럴 때마다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에게 있어야할 신앙적 기쁨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오늘 바울의 말씀 속에서<신앙적 기쁨의 신비>를 발견하고 그 기쁨 속에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출처/김철현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