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0
베데스다의 기적 (요한복음 5:1~10)
예루살렘에 베데스다라는 못이 있습니다. 그 못가에는 많은 병자들이 모여 들고 있습니다. 그저 가벼운 병자들이 아니고 가망이 없는 중병자들이 많이 모여들고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했습니다. 베데스다라는 그 못가에 사람들이 이렇게 모여드는 것은 하나의 기이한 현상이고, 그것은 예루살렘에 있는 또 하나의 독특한 장소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38년 된 병자가 있었습니다. 저는 성경을 통해 이 사람을 만나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목회 중에 환자들을 자주 만납니다만 38년간 병을 앓고 만난 적은 없습니다. 아마 우리가 그런 병자를 만나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 가운데 38년간 앓고 누워있는 교우가 있다면 일반 환자보다는 다른 감정을 가질 것입니다. 저는 이 환자를 보면서 38년 동안이나 누워서 앓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살아있고 이렇게 날마다 이 베데스다 못가에 와서 병 낫기를 바라고 있는 것은 아주 끈질긴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을 느낍니다. 병든 체로 38년을 산 이 사람은 급성질환이 아니라 만성질환입니다. 그리고 고질병입니다. 이 사람은 병을 앓는다기보다 병을 지고 산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이 사람은 누가 보아도 가망이 없는 환자입니다. 그런데 이 환자들이 모여 있는 장소가 베데스다 못이라고 했습니다. 이 베데스다는 예루살렘 한 가운데 있는 못입니다. 지금 그 못이 발굴이 되어서 흔적을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은혜의 집
이 베데스다는 히브리말로 ‘은혜의 집’이란 뜻입니다. 글자 그대로 각종 병자들이 아무 조건 없이 그 베데스다 못가에 모였습니다. 이런 환자들은 유대의 환경에서 보면 제약이 많습니다. 이 사람들은 가고 싶은데도 못 갑니다. 그런 중병을 앓고 있는 사람은 성전에 못 갑니다. 그리고 제사장을 만나러 못 갑니다. 병이 낫고 가서 병 낳았다는 증거를 받는 것이지 병든 체로 제사장 앞에 가지를 못 합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버림받은 사람들입니다. 가족도 어떤 면에서는 기대를 하지 않습니다. 친구도, 이웃도, 율법사회가 이 사람들을 다 버렸습니다. 희망이 없는 사람들인데 유일하게 모일 수 있는 곳이 이 베데스다 못가입니다. 그야말로 은혜의 집입니다. 아무나 올 수 있습니다. 어떤 병자도 그곳에는 올 수 있습니다. 한번도 아니고 언제든지 영구적으로 그곳에는 올 수 있는 그야말로 은혜의 집입니다.
오늘 교회는 바로 베데스다, 곧 은혜의 집입니다. 교회는 영적인 면에서 보면 은혜의 집입니다. 오늘 우리가 은혜의 측면에서 이 자리에 나아왔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찬송할 자격이 없습니다. 기도할 자격이 없습니다. 은혜를 달라고 구할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가 여기에 나올 근거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에 나아왔습니다. 왜 나아옵니까? 은혜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자격이 없어도 용납합니다. 은혜는 더러워도 용납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 함량이 미달하지만 이곳에 올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38년 된 병자가 예수님을 만납니다. 극적입니다. 예수님이 그 환자에게 다가가신 것입니다. 그 사람은 누워서 꼼짝을 못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그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그 환자에게 던지는 제일성은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이 환자의 병이 오래된 것을 주님이 아시고 그렇게 물었습니다. 그때 이 병자가 대답하기를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질문과 이 병자의 대답은 오늘 이 설교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포인트가 됩니다. 이 사람이 38년간 병상에 누워서 꼼짝을 못하는 사람입니다만 왜 이 베데스다 못가에 나와 있느냐? 그래도 병 낫기를 바라는 소원을 가지고 나아오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움직일 때 거기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병 낫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자기도 그와 같은 일을 통해서 병 낫기를 바라면서 그 자리에 나아오고 있지만, 아무도 자기를 도와서 그 물이 동할 때 자기를 씻어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은혜의 집에 왔는데 이 사람을 도와줄 사람은 아직도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이 환자에게 주목할 사안이 여기에 있습니다.
바라는 소망
사람은 38년간 병을 앓고 있으면 어지간하면 포기합니다. 절망합니다. 어떤 사람은 10년만 앓고 나도 날 죽여 달라고 할 것입니다. 아니면 혀를 깨물고 죽을 힘이 있으면 자살이라도 할 만큼 그렇게 절망하고 좌절하는 것이 보통 인간의 의지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38년 동안이나 병 낫기를 바라는 소원을 안고 베데스다 못가에 나아와 누워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했던 ‘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다’는 이 말 속에는 언젠가는 나를 못에 넣어줄 누군가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인데 이 말 속에서 이 사람의 영적인 측면을 우리가 발견해야 됩니다.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메시아를 고대하는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릴 때부터 율법을 배웁니다. 선지자의 글을 배웁니다. 선지자의 글 가운데 핵심적인 메시지가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메시아가 이 땅에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 메시아 대망사상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도 병상에 그토록 오래 누워 있지만 누군가가 나를 도와서 이 못에 데리고 가서 나를 씻겨줄 메시아가 오셔서 해줄 것이다 라는 영적인 의미를 여기에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기다리는 사람은 가족도 아니고 친구도 아닙니다. 그는 사람 앞에 기대를 저버린 지는 벌써 오래입니다. 38년 동안 자기를 들어서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다는 거기에서 그는 이미 사람에 대한 기대는 포기한 사람입니다.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까?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목숨을 걸고 메시아를 기다린 사람은 이 사람뿐 아닙니다. 나이 많았던 시므온과 안나 같은 노인들도 자기 생애를 걸고 금식하며 메시아를 만날 소망을 가지고 성전에서 기도했던 사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성한 몸으로 성전에서 메시아를 기다렸고, 이 사람은 병상에 누워 있지만 언젠가 메시아가 오셔서 나를 들어 저 물에 담가 내 이 질병을 고쳐주실 날이 올 것이다, 그 소원을 안고 거기에 누워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그 병자의 말을 듣고는 파격적인 기적을 일으켜 주십니다. 데리고 내려가서 물이 동할 때 씻어주는 정도가 아니고 파격적인 기적입니다. “일어나라 그리고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주님께서 그를 일으켜 주셨습니다. 기적을 만나게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를 일으켜서 안고 물이 동할 때 씻어서 고쳐주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환자의 소원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소원을 넘어섭니다. 우리의 기대를 넘어서서 당장 일으켜서 당장 걸어가게 하시는 기적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환자에게 주목할 영적 교훈은 기다림입니다. 이사야 30장 18절에 보면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이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시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기다림과 성도의 기다림이 일치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은혜를 베풀 때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다려야 합니다. 은혜 받을 때를 기다려야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다림의 의미를 생애 속에 주십니다. 아브라함에게 25년, 요셉에게 13년, 사울에게 13년을 기다리게 하신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신앙생활에 기다림의 기간을 주십니다. 이 환자의 38년은 영적으로는 우리의 생애 속에 하나님이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주목을 해 보십시오. 이 사람이 37년 만에 포기했더라면 오늘 예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30년 되던 해에 나를 더 이상 베데스다에 데리고 가지 마라, 나는 이대로 집에서 죽을 것이라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매일매일 가족을 졸라서 ‘오늘도 나를 베데스다에 데려다 다오’라고 했던 인고의 시간이 38년입니다. 38년 동안 변함없이 병 낫기를 기대하는 소망을 가지고, 메시아가 오셔서 나를 고쳐주실 그 믿음 하나를 붙잡고 이 환자는 오늘도 베데스다를 찾아 나선 것입니다. 그리고 물이 동할 때 자기를 넣어줄 그 사람, 그 메시아가 언젠가는 자기를 고쳐주실 것을 고대하고 있는 믿음입니다.
인내의 연단
여러분, ‘나 참을 만큼 참았다’라는 말을 혹 해본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는 이 말이 전혀 성립이 안 됩니다. 참을 만큼 참았습니까? 거기서 또 참아야 됩니다. 우리는 참을 만큼 참았다 하고 포기합니다. 참을 만큼 참았다 하고 절망해 버립니다. 참을 만큼 참았다 하고 그만 헛소리를 해 버립니다. 아닙니다. 참을 만큼 참았습니까? 거기서 또 참아야 됩니다. 이것이 성경이 요구하는 기다림의 의미입니다. 이 38년의 인고의 인내를 가졌던 환자, 그를 참게 했던 그 유일한 가능성은 자기도 낫고자 하는 소망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낫게 해줄 그 사람이 나타날 것을 기대하는 소망이었습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 신앙의 본질입니다. 조급하지 말기 바랍니다.
고 이병철 회장의 골프철학이 소개 된 적이 있습니다. 이 어른은 키가 167m로 아담한 체구를 가진 분인데 프로골퍼가 레슨을 했다고 합니다. 이 어른은 한번도 골프를 칠 때 시간을 어기는 일이 없고 먼저 와서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얼마나 철두철미한지 칸트라는 철저한 철학자의 이름을 별명으로 붙였답니다. 그런데 이 어른은 게임에서 지던지 이기던지 골프 치는 날은 꼭 연습을 하는데 공 24개가 들어가는 상자 20박스를 연습을 한답니다. 늦게까지 연습을 하는데 게임에 지면 더 연습을 한답니다. 기자가 물었습니다. “회장님 어떻게 그렇게 연습을 열심히 하십니까?” “그래, 내가 연습을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 같지만 사실은 내가 골프연습을 통해서 인내의 훈련을 하는 거야.” 인내의 훈련을 위해서 그는 그렇게도 열심히 연습했다는 것입니다. 골프는 인내하지 않고는 도무지 의미를 모르는 스포츠라는 게 그분의 철학입니다. 그야말로 분통이 터지도록 게임이 안 될 때도 있고 게임에 져도 자존심 상하게 지고 나면 감정을 주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연습을 하면서 자기를 달래고 참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은 과정을 늘 살려야 됩니다. 참는다는 영적인 의미는 과정을 살려간다는 뜻입니다. 그저 막연하게 한숨 쉬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인내가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인내는 무언가 높은 가치를 붙잡고 그것 때문에 하루하루를 참아가는 과정이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38년 된 병자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참을 수 있었습니까? 낫기를 바라는 소망입니다. 누군가가 자기를 낫게 해줄 것이라는 메시아를 향한 소망입니다. 그것이 이 사람을 날마다 소망 속에 참게 한 것입니다. 비록 몸은 누워 있지만 그래도 매일매일 메시아가 오셔서 자기를 고쳐줄 소망 안에서 하루하루를 참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배워야 되고 이것을 살려가야 할 줄 믿습니다.
살아있는 과정
신동엽의 ‘신장개업’이라는 프로가 있습니다. 일본에도 이와 비슷한 ‘사랑의 빈곤탈출’이라는 프로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프로그램은 시종일관 흥미와 재미를 곁들여 웃어가면서 이 프로를 진행합니다. 보는 사람도 재미있고 오락처럼 봅니다. 그러나 일본의 이 프로는 주인공이 혹독한 과정을 거치면서 경험을 하는데 이 주인공이 너무 안스러워 시청자들이 다 운다는 것입니다. 그 프로그램은 일본 시청자들을 울리는 우울한 프로그램인데 한국의 신장개업은 시종일관 재미있고 웃는다는 것입니다. 왜 그 사람들이 그렇게 침울한가? 장사가 잘 안 되는 그 주인을 불러놓고는 결점을 전부 지적하면서 꾸중부터 한다는 것입니다. 청소가 잘못된 것, 게으른 것 등 장사가 잘 안 되는 요인들을 체크해서 그것부터 공개적으로 혹독하게 꾸중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 꾸중을 들을 때 그 사람의 모든 인격과 자존심이 박살이 나는 지경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친척이라면 그 프로를 보기 너무 어려울 만큼 혹독하게 주인공을 다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현장실습을 시키는 것입니다. 가게를 성공적으로 경영한 전문가에게 의뢰해서 10일 동안 가게 문을 닫고 밤에 잠을 재우지 않고 혹독한 음식실습을 시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보통훈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인공이 훈련받다가 소질이 없으면 주인한테 좇겨 나기도 하고, 너 같이 소질 없는 놈은 음식점을 아예 하지 말아야 된다, 희망 없는 너를 가르칠 이유가 없다고 한밤중에 좇아낸다는 것입니다. 좇겨 나서 시내어귀 골목에서 앉아 울고 있는 장면까지 비춰주는데 그것을 보고 안 우는 시청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10여일 동안 음식을 가르쳐서 50여명의 시식단이 먹어보고 평가가 났을 때 이제 마지막 장면을 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안 되면 또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한 시간 울면서 진행하는 게 일본의 프로그램인데 우리나라 프로그램은 한번 딱 운다고 합니다. 마지막에 매상고 올려서 돈을 셀 때 감격해서 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본의 시청자가 우리나라의 프로를 보고 이런 평가를 했습니다. ‘저렇게 대충해서 어떻게 개업에 성공을 할 수 있을까?’ 의심스럽다는 평가가 나왔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신앙생활에 대단히 중요한 것이 과정을 살려야 됩니다. 하루하루를 살아있는 신앙생활을 하기 바랍니다. 하루하루 주님 앞에 순종하십시오. 과정이 살아 있으면서 기다려야 됩니다. 과정을 포기하고 죽이면 안 됩니다. 낙심하고 기다리는 것은 성경적인 기다림이 아닙니다. 소망 중에 기다려야 합니다.
기적의 목적은 바로 사는 것
오늘 우리는 가치관이 오염되었다고 모두가 탄식을 합니다. 철학자도 대학교수도 종교인들도 모두가 강의를 하면서 한국인의 가치관의 병든 모습을 다 지적합니다. 오염이 되어 버린 것, 어쩔 수 없습니다. 학원에 가면 유명한 강사들이 밤을 새워 강의를 합니다. 학생들이 인산인해로 몰려옵니다. 그런데 그 유명한 강사가 그야말로 숭고한 교육정신을 가지고, 국민헌장에 근거한 정신을 가지고 내가 스승으로서 가르쳐보자는 숭고한 교육자의 중심에서 그렇게 밤을 새워 열강을 하느냐?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유명한 강사가 교사직만 해도 밥을 먹고 사는데 왜 그렇게 밤늦도록 목에 피를 쏟으며 열심히 사느냐? 금전적인 인센티브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가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한국인은 금전적인 인센티브만 주면 다 미쳐 버린다.” 그 평가 앞에 우리가 할 말이 없습니다. 기준도 없고 철학도 없고 사상도 없고 도덕성도 없고 금전적인 인센티브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사람들이 미친다는 것입니다.
대학교수들이 정부 일에 관계하는 분야가 더러 많습니다. 금융감독위원회, 정보통신위원회, 공조위원회 기타 모든 부서마다 대학교수들의 자문을 받거나 엄청난 연구비를 지급하면서 논문과 정책을 의뢰합니다. 그런 일에 관계하는 교수들이 정부가 하는 일에 부정적으로 비판할 리가 없습니다. 정부가 기업관련 소송에 걸려들 때 대학교수들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어느 교수가 어떤 논문을 쓰는데 어떤 근거가 있다, 그래서 대학교수들을 참고인으로 불러다가 법정에 세우기도 하는 것입니다. 어떤 교수는 원고입장에서 말하고, 어떤 교수는 피고입장에서 말하고 엄청난 금전적인 인센티브가 오고 가기 때문에 대학교수들이 경제원리를 짓밟고는 자기 유익을 따라서 할 말을 하는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유독 그런 교수들만 우리가 탓할 것입니까? 오늘 우리의 이야기를 한마디 곁들여야 됩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도 금전적인 인센티브 때문에, 육신의 인센티브 때문에 예수를 믿는다면 우리 믿음은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야 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너무 오염이 많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환자를 만나서 이런 말씀을 합니다. 14절 말씀에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낳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사람을 고쳐 주셨는데 성전에서 만났습니다. 전에는 성전에 오지도 못하던 이 사람이 성전에서 만났습니다. 주님이 이 사람을 만나서 하시는 말씀이, 이 사람아 이제 낳았으니까 이제는 바로 살아라,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맺는 말
예수님이 이 사람을 고쳐주신 기적의 목적은 건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건강 때문이라면 기적을 행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만약 이 사람이 건강을 얻어서 다시 죄를 짓고 산다면 예수님의 은혜가 무엇이 됩니까? 예수님의 기적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오늘 우리가 받은 은혜가 38년 간 병으로 있다가 고침 받은 이 사람이 받은 은혜와 우리가 지금 누리는 이 은혜를 비교할 때 우리가 몇 천 배, 몇 만 배로 큰 은혜 안에 사는 줄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하려고 38년간 던져야 되겠습니까?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38년간 앓은 적도 없습니다. 앓은 사람과 안 앓은 사람이 비교됩니까? 우리는 그렇게도 비교할 수 없는 천만 배의 은혜를 받고 오늘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이 큰 은혜를 사는 우리가 은혜의 목적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순종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 받은 오늘 우리의 은혜의 모습을 가지고 죄를 짓고 불신앙으로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원리에 역행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그렇게 요구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 은혜에 보답하는 삶, 하나님을 순종하는 삶으로 축복이 지속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