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2
생각하는 마음 (대상29:18 마9:4)
성서는 인간은 갈대같이 아주 약한 존재로 이해한다. 그러나 인간이란 ‘생각하는 갈대’로 이해함에는 천하보다도 더 값진 생명을 가지고 있기에 그 존재는 존엄하기 그지없다. 그러기에 파스칼은 그의 명상록 팡세에서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라고 말한다. 포로 말기의 이사야 선지자는 장차 올 매시야 상을 그리면서 인간을 ‘상한 갈대도 꺽 지 않는’분으로 말하며 포로로 잡혀간 망국의 실향민을 가리켜 버드나무 가지에 거문고를 걸고 목이 메어 망향의 노래도 부를 수 없었던 유대족을 가리켜 상한 갈대로서의 인간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지금의 세계는 물건을 얻고 인간을 잃어간다. 온 세계의 인간들이 한 낱 도구로 밖에 존재하지 않음에 유의 하면서 갈대로서의 인간 아닌 ‘생각과 마음’을 가지고 지고(至高)의 선(善)을 추구하며 사는 인간 존재임을 알아야 함에 유의해 보는 것이다.
오직하면 파스칼이 ‘생각하는 갈대’라는 말을 하게 될 가 생각하는 것이다. 인간의 머릿속 에는 다채롭고 미묘한 움직임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의식이란 이러한 일체의 심리현상 즉 감각이나 감정, 희망이나 의지 또는 상상 나아가서는 ‘사고(思考)’라고 불리어지는 추리나 판단작용 등 모두를 포함하는 인간 내부의 구조가 있다. 이렇게 미묘하고 복잡한 의식의 본성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는지 알고 싶다. 의식의 본성은 그 자체만으로 독립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고도로 조직된 물질 즉 뇌라는 물질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철학에서는 물질이란 우리의 의식과 독립하여 존재하고 그 자체 독립적인 운동을 하며 모든 감각의 기초를 이루고 그 감각을 기초로 하여 인식할 수 있는 객관적인 실체로 말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뇌의 활동 그것이 바로 의식인 것이다. 그러나 뇌는 물질의 활동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며 물질처럼 그 자체가 독립하여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님을 유의한다. 그러므로 뇌의 활동도 감각이나 사고와 같이 여러 가지 형태를 취하면서 적극적으로 외계를 반영하는 활동이다. 여기에 물질은 본래적으로 다른 물질을 반영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음도 아는 것이다. 한 가지 예로서 지붕이 태양에 의해 빛과 열을 발하여 갑자기 불타듯이 눈부시게 빛나는 반영에서 보는 것이다. 이것은 물질적 세계가 보편적인 관련 속에 있다는 것을 경험하는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물체에 있어서 외계(환경)와의 물질대사에 의하여 그 존재를 유지하는 것이 생물체의 특징임도 아는 것이다.
이러한 생물체에 외계의 반영은 곧 대응이다. 뇌는 고등동물일수록 신 피질이라고 불리어지는 부분이 발달하는 데 특히 인간의 경우 이 부분의 발달이 매우 현저하여 아주 정밀하게 외계에 적응하면서 대응한다고 한다. 인간의 뇌는 오랜 생물의 진화과정의 산물로서 중층적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각 부분은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지고 분담하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인간의 특징은 ‘생각 한다’는 활동 즉 이성과 그것에 기초한 행동의 명령은 주로 신 피질에서 이뤄진다는 것이다. 한편 신 피질이 파괴되면 그것만으로 사람이 죽는 것은 아니지만 생각하는 능력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뇌간이 없어지면 죽게 된다.
‘생각’은 머리를 써서 궁리하고 헤아리는 판단과 그 무엇을 이루려고 하는 마음먹음(느끼어 일어나는 마음)에 마음은 사람의 몸에 깃들어서 지식, 감정, 의지 등의 정신활동에 성의(誠意),정성(情性)을 하게 하는 것이다. 주의 깊게 살펴보면 신앙적인 여러 가지 정신 활동은 현실을 거꾸로 반영된 즉 역 반영으로서 인간의 마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인간의 무력감에 대한 역 반영으로서 위대한 힘을 가진 신에 대한 신앙이 또한 현실 세계의 불공평에 대한 역 반영으로서 저 세상의 공평이 나타났고 이 세상의 암흑에 대한 하늘나라의 광명이 인간 세계의 허무함에 하늘나라의 영원성이 역 반영되어 나타난 것이다. 이것이 신앙하는 마음인 것이다. 지난 인터넷 설교에 “사람의 몸과 마음‘에 대하여 몸과 마음의 관계를 이렇게 말했다.
‘몸과 마음의 관계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물질이나 몸이 실재적 또는 실체적인 반면에 마음은 그것의 산물이거나 그 존재와 특성 양면을 물질이나 몸에 의존하고 있다는 견해로서 유물론에서의 해결 방안이 되고 한편으로는 마음만이 실재적, 또는 실체적이며 물질이나 몸은 마음의 현상 또는 나타남이거나 또는 어디에선가 그 존재 및 특성을 마음에 의존해 있다는 것으로 관념론과 유심론의 해결방안 이 된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결국 몸은 궁극적으로 마음으로 드러남을 아는 것이다. 유한한 몸과 마음과의 관계는 상호작용의 관계로 드러난다. 그러나 이제 다양한 사회적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사람의 몸을 단순히 우리의 개인적 또는 주관적 인상으로 간주해서는 아니 되는 점을 유의하게 한다.
왜냐하면 자기의 몸뿐만 아니라 타인의 몸은 정신적이거나 영적인 실재, 우리 자신과는 별개이고 독립적인 실재이고 그럼에도 우리와 유사한 실재, 외양임도 알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의 몸이 또 다른 마음의 표현이 된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우리가 생명이 있는 동안 몸의 성장으로 간주 할 수 있는 것, 즉 뇌는 대부분이 우리 마음의 작용에 의해 ‘생각’ 하고 결정되는 구조와 조직을 갖고 있고 뇌는 그 같은 작용에 의해 높든 낮든 간에 우리의 욕망과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한 더 완전한 도구가 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데카르트는 중세의 특징을 논하면서 중세기에는 철학이 신학의 시녀였다고 하면서 그때 까지는 신 중심의 철학, 신을 위한 철학을 말해왔다.
그리하여 그는 끊임없는 의심을 통해서 철학의 궁극적인 제일 원리 즉 의심과 행위를 통해 진리를 찾아 단 1%의 회의도 없는 절대적인 지식을 얻기 위해 방법적인 회의(懷疑)를 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의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 한다’이다. 이 모든 추론이 근거하는 것은 자아에 대한 지식에 근거한다. 그는 인간이 의심할 수없는 단 한 가지 명제는 곧 그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이 사실은 그가 의식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 즉 그것이 이 명제인 것이다. 그는 생각하기 위해서는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명백히 했다. 실로 감각은 우리를 그릇되게 인도할 수도 있다. 실제로 그러나 내가 아무리 많이 속았다고 해도 내가 존재 한다는 사실 즉 내가 생각하는 존재로 있다는 사실은 남는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 한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관념 속에 존재하며 심지어는 의심 자체 속에서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지식의 토대로서의 사유되는 개념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정신은 유한한 본질 이상의 실재를 내포하고 있는 무한을 의식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한다. ‘신 의식은 우리의 자아의식보다 선행한다고도 말한다. 만약 우리가 우리 본성의 결점을 인식하고 그것과 비교하여 완전한 존재에 대한 관념을 원래부터 소유하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우리가 의심하거나 소유할 수가 있으며 어떤 것이 우리에게 부족하다는 것과 우리가 전혀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어떻게 의식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에 이르게 한다.
이것은 데카르트의 체계가 이원론적이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그가 진리 탐구에서 이룩한 발전은 지대함을 아는 것이다. 그가 정신의 자유와 이성의 주권을 확립함에 그 노고를 만인이 인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선입견(先入見)을 수용 하면서 구약 본문을 보게 된다. 이스라엘의 정치적 안정을 이룩하였던 성웅 다윗이 솔로몬의 성전 건축 역사를 앞에 놓고 이스라엘 전국에 모금운동을 벌였던 사실과 다윗은 최후를 맞으면서 까지 하나님의 그의 나라를 위해 아름다운 봉사를 아끼지 않았다. 여기서 다윗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마음을 샅샅이 감찰하신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정직히 행한 자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삶을 인정하신다는 확고한 신념을 굳힐 수가 있었다는 점에 유의한다.
하나님을 위해 물질에 인색하지 않았던 이스라엘 백성의 아름다운 마음을 하나님은 아신다는 점을 확고히 했다. 사실 인간의 마음속에 선한 계획을 계속적으로 간직하기 위해서는 선한 생각과 공의로운 마음이 계속 유지 될 수 있도록 ‘생각하는 마음’이 날마다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 것을 깨닫게 된 점이며 ‘생각과 마음’을 일치해야 함을 알게 하는 것이다. 또한 이사야 10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책망하시고 경계하실 때 그 심판의 도구로 이방민족을 사용하시지만 궁극적으로는 당신의 신실한 자들을 구원하신다는 전제는 변함없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앗수르를 도구로 삼으셨을 때 그들이 어떤 마음을 가젖는가를 알게 한다.
앗수르 왕은 하나님의 계획과는 달리 그의 뜻과 생각이 허다한 나라를 파괴하며 멸망시키려는 정복욕뿐 이었다. 그러나 ‘그의 뜻은 남은 자에게는 이같이 아니하며 그 마음의 생각도 이같이 아니하며’(사10:7)로 결국 남은 자가 생각과 마음이 일치하여 앗수르의 손에서 구원된 사실을 보여준 점에 유의하게 하는 것이다. 또 신약 본문은 병자들을 고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긍휼을 여러 가지 실례를 들어 입증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시는 예수의 복음 사역이다. 당시 서기관들은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 라’ 는 예수의 말씀을 듣고 마음속으로 ‘이 사람이 참람(僭濫)하도다’라고 생각했다.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는 신약 본문의 말씀이 생각과 마음이 일치하지 않음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교훈으로 삼아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요20:29)의 말씀대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생각하고 그 마음을 따르는 자는 그 말씀을 실천하는 복을 이룸에 대하여 교훈을 갖게 한다. 이러한 사실을 마음에 새겨 예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의 생각으로 ‘마음을 다하고 몸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생각과 마음’은 따로 국밥이 아니다. ‘생각하는 마음’은 인간 존재의 실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