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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물 (창세기1:9~13 요한복음3:5)
서울교회(www.seoulch.or.kr)배성산 목사(seoulch@gmail.com)
‘물을 떠난 고기는 살수 없다.’ ‘물이 없으면 사람이 살수 없다.’는 이 말은 마땅한 말이다. 그리하여 옛 사람들은 ‘물의 근원이 없어지면 물줄기는 끊어지고 고기는 물이 없으면 죽으며 나무는 뿌리가 없으면 살지 못 한다’는 속담을 가지고 살았다. 그 말은 사실이다. 물은 지구 표면적의 3/4 을 바다, 빙원, 호소(湖沼=호수와 늪), 하천의 형태로 차지하고 있다. 또 지구 내부의 흙이나 바위 속에 스며있거나 지하수의 상태로 존재한다. 이러한 해수, 육수 등이 태양열을 흡수하여 수증기가 되고 대기 속에 확산하고 그 수증기는 응축되어 구름이나 안개가 되고 다시 비, 눈, 우박 등이 되어 지표면에 내린 다음 모여서 하천이 되어 해양, 호소로 흘러간다. 이것은 물의 순환을 말함이다.
이렇게 물이 순환하는 사이에 저지(低地)나 호상(湖上=호수 위))을 깍 아내고 강의 흐름을 바꾸며 흙이나 바위를 멀리 운반하기도 한다. 예컨대 비나 강이 범람하여 산을 깍 고 깊은 골짜기를 만들고 단단한 바위를 침식하는 것이다. 밀려오는 격랑은 끊임없이 해안선을 침식하여 섬이나 대륙의 형태를 변화시킨다. 물은 또한 지구상의 기후를 좌우하며 모든 식물이 뿌리를 내리는 토양을 만드는 힘이 되고 증기나 수력전기가 되어 근대산업의 근원인 기계를 움직이게 한다. 물의 이러한 순환작용 때문에 천지창조 이래로 줄지도 늘지도 않는 지구의 물은 인간이 끊임없이 쓰고 버려왔음에도 인류는 오늘날 까지 깨끗한 물을 자연에서 얻을 수 있음에 인류는 놀라움의 감사를 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무심코 마시는 물이 태고(太古)적 사람들이 마시는 물과 같은 물 그 물을 지금 우리가 마시는 물이라고 생각할 때 창조자의 뜻에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어떤 사물이든지 그 근본이 없어지면 존재할 수 없음을 알게 하는 말임도 뜻하는 것이다. 물은 인류를 비롯한 모든 생물에게 물질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며 사람을 위시한 생체의 주요한 성분이 되고 있음도 알게 한다. 그러므로 물은 사람의 몸에 약70%, 어류는 약80%, 그 밖의 미생물은 약95%가 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또한 특이 한 것은 자연의 모든 생물의 생명현상도 여러 가지 물질이 물에 녹은 수용액에 의해서 일어나는 화학변화가 복잡하게 얽힌 것이라고 말한다.
성서의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의 창조에서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며 궁창을 하늘이라 하고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물을 드러나게 하신 다’고 했다. ‘물을 땅이라 칭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셨다’고 창조 둘째, 셋째 날의 창조 기사를 보아 알게 한다. 궁창, 바다, 땅, 식물로 이어지는 셋째 날까지의 창조 사역은 건물의 골격과 같이 온 우주의 기본 형태와 모양을 결정짓는 작업으로서 지혜의 근본이신 하나님의 뛰어난 건축 감각을 실감하게 한다. 이렇게 결정된 기본 틀 위에 하나님은 그 광활한 천지의 무대를 만들고 생명이 살아가도록 생명을 갖춘 존재가치로서 사람과 생물이 살아가도록 환경을 만드심에 감사치 아니할 수 없다.
하늘은 아버지 되시고 땅은 어머니 되시며 하나님과 생물 사이에 땅이 그 중보(仲保)가 되어 생명 태생(胎生)의 이치가 드러남을 알게 하는 것이다. 궁창 밑의 물 들은 바다로 모이고 궁창 위의 물들은 푸른 하늘의 하수가 되어 때때로 비가 되어 땅으로 내린다. 땅에 있는 생물들은 비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어 그 속에서 삶(生)이 자라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옛 사람들은 땅을 ‘어머니’라고 불렀다. 하늘은 아버지, 땅은 어머니가 되어 생명을 이루어가는 이치를 터득하여 결국 이 말은 하나님의 창조생명을 증언한 말이 된 것이다. 이렇게 물은 인간의 존재를 위해서나 절대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초기 문명인들은 강우가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물(生物)의 성장을 지탱하기에 충분한 곳, 또는 비가 끊임없이 내리는 유프라테스 강이나 티그리스 강 및 나일 강과 같은 강들에 유수가 공급될만한 곳에서 세계문명은 발달하고 번영할 수 있었음을 우리는 학교 교과서에서 배워 익히 알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인류의 역사는 물의 근원을 얻는 문제로 근동의 역사를 통해 농사하는 자들과 양치는 자들의 끊임없는 분쟁의 핵심이었음도 역사를 배움으로 해서 아는 것이다. 예컨대 가인이 아벨을 살해하는 것과 부합되는 이유도 이들 유목민들이 수력 장치를 제일 목표로 삼아 정착민들을 끊임없이 약탈하고 싸웠던 이유도 아는 것이다. 성서는 물을 예비하는 것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으로 생각하였기에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이 물과 관련해서 나오고 영적 생활의 빈곤과 영적 생활에 대한 갈망이 물에 대한 갈증의 말로 묘사된 점도 성서에서 우리는 보는 것이다. 성서에서 물에 대한 일상적인 의미로 쓰여 진 점은 물에 대한 그 특징들을 통하여 나타남을 아는 것이다.
성서는 물로서 샘, 호수, 바다, 비 등을 가리킨다. 이렇게 물의 특징들이 은유의 기초를 마련하고 있다. 예를 들면 ‘물에 비취이면 얼굴이 서로 같은 것 같이 사람의 마음도 서로 비취느니 라’(잠27:19),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약1:6), ‘불결을 씻는 물’, ‘거룩한 물’ 등 은유(隱喩)적 비유와 물이 가지고 있는 상징은 결코 제의적인 의미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물의 이미지가 지니는 신학적 의미역시 광야 생활에 관한 고대 이스라엘의 전승들에 표현되어 있음도 알게 된다. 이렇게 물은 신적인 축복과 구원을 상징하는 친근한 요소이며 이것은 그 물의 근원이 태고의 깊음에서 보여 진다. 물은 고대의 세계상을 반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야훼와 카오스의 물 사이의 드라마적인 투쟁을 내포하고 있으며 때로는 그 투쟁을 명확히 표현하고 있음을 보게 한다.
동양에서 인간의 고통의 삶을 고해(苦海)에 비유하듯이 성서에서도 바다는 복종되기는 하지만 완전히 소멸되지 않는 혼돈 적이고 악마적인 세력들을 상징하기 때문에 묵시문학적 작가들은 긴 역사를 통해 있어 온 투쟁이 끝나게 될 미래를 기대할 때 쓰이기도 함에 유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의 묵시는 더 이상 바다에도 있지 아니할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한 환상에서 절정에 달하고 있으며 기독교의 신앙에 있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승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통치에 대한 기대와 약속인 것을 알아야한다. 이러한 전제 아래 ‘사람과 물’의 영적인 관계를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였다.
또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고 하심을 (요3:5, 7:37-38) 알게 한다. 물은 소생함에 깨끗함과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시며 그리스도를 증거 하게 하는 것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 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 이니라 증거 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로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 라’(요일5:6-8)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을 이로다’(사12:3)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많고 다양한 구원의 말씀들을 열어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구원의 즐거움을 누리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수의 샘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마음이 마른 땅이 되어 갈급하게 주님을 사모해야 한다. 그래서 갈급한 심령을 가지고 사마리아의 수가 성(城) 여인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영원한 생수를 발견하고 생명에 관한 모든 문제를 해결 받아야 한다. 물로서 생명이 소생함을 보듯이 그는 물의 쓰임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땅과 물과 사람이 다 같이 살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구원에 관한 문제, 생명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그 일차적 조건이 믿음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기쁘게 할 수도 없음을 알게 한다.
물은 믿음과 같다.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행15:9)고 한다. 구원은 ’믿음으로 만‘이다. 천지간(天地間)에 사람(天地人)까지 형성된 물이 회복되지 않으면 생명도 구원도 얻을 수 없다. 이것은 창조의 되찾음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實相=실제의 상태)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證據)이라‘고 했고 물은 그대로의 믿음의 실상(實狀=실제의 모습)이기도 함에 유의한다. 구원은 죄와 죽음으로 부터의 해방이다. 그러므로 죄의 회개와 회심의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한 것이다. 그것이 죄 씻음의 정결(淨潔)로서 물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는 물의 역할이다.
물은 하늘과 땅 사이를 오르내리는 순환을 거듭하면서 하늘의 에너지와 땅의 에너지를 받게도 하며 물 고유의 특성을 발휘하면서 오염된 하늘과 땅을 정회시켜주고 있음을 알게 한다. 물로 세례를 받음도 그러한 의미를 담고 있다. 살아 있는 생명의 특징은 유기체적인 관계에 놓인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의 단절을 말한다. 그러나 구원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회복을 말한다. 여기에 물의 이해가 그 근거를 찾게 한다. 공기와 더불어 생물이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물을 알게 한다. 자유와 해방이 없는 통제된 것은 경직(硬直)되어 생명은 죽고 만다. 물은 생명을 위해 유기체적인 관계로 순환함을 보게 한다. 물속에는 다양한 불순물도 함양한다.
그리고 증발과정에서 바다의 염류는 바다에 그대로 남지만 빗물은 공기 중에서 소량의 암모늄염과 각종 기체를 받아들인다. 산악지방에서 호수와 강물은 비교적 순수하지만 흐르는 물은 점차적으로 염류를 통해 흡수하고 부유(浮游)하는 무기물이나 식물 찌끼를 받아들인다. 이것은 물이 생명을 살리는 것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물은 정화(淨化)한다. 죄는 정결(淨潔)해야 한다. 정결하려면 회개해야 한다. 회개는 구원의 입문(入門)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함을 알게 하는 것이다.
서울교회(www.seoulch.or.kr)배성산 목사(seoulch@gmail.com)
‘물을 떠난 고기는 살수 없다.’ ‘물이 없으면 사람이 살수 없다.’는 이 말은 마땅한 말이다. 그리하여 옛 사람들은 ‘물의 근원이 없어지면 물줄기는 끊어지고 고기는 물이 없으면 죽으며 나무는 뿌리가 없으면 살지 못 한다’는 속담을 가지고 살았다. 그 말은 사실이다. 물은 지구 표면적의 3/4 을 바다, 빙원, 호소(湖沼=호수와 늪), 하천의 형태로 차지하고 있다. 또 지구 내부의 흙이나 바위 속에 스며있거나 지하수의 상태로 존재한다. 이러한 해수, 육수 등이 태양열을 흡수하여 수증기가 되고 대기 속에 확산하고 그 수증기는 응축되어 구름이나 안개가 되고 다시 비, 눈, 우박 등이 되어 지표면에 내린 다음 모여서 하천이 되어 해양, 호소로 흘러간다. 이것은 물의 순환을 말함이다.
이렇게 물이 순환하는 사이에 저지(低地)나 호상(湖上=호수 위))을 깍 아내고 강의 흐름을 바꾸며 흙이나 바위를 멀리 운반하기도 한다. 예컨대 비나 강이 범람하여 산을 깍 고 깊은 골짜기를 만들고 단단한 바위를 침식하는 것이다. 밀려오는 격랑은 끊임없이 해안선을 침식하여 섬이나 대륙의 형태를 변화시킨다. 물은 또한 지구상의 기후를 좌우하며 모든 식물이 뿌리를 내리는 토양을 만드는 힘이 되고 증기나 수력전기가 되어 근대산업의 근원인 기계를 움직이게 한다. 물의 이러한 순환작용 때문에 천지창조 이래로 줄지도 늘지도 않는 지구의 물은 인간이 끊임없이 쓰고 버려왔음에도 인류는 오늘날 까지 깨끗한 물을 자연에서 얻을 수 있음에 인류는 놀라움의 감사를 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무심코 마시는 물이 태고(太古)적 사람들이 마시는 물과 같은 물 그 물을 지금 우리가 마시는 물이라고 생각할 때 창조자의 뜻에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어떤 사물이든지 그 근본이 없어지면 존재할 수 없음을 알게 하는 말임도 뜻하는 것이다. 물은 인류를 비롯한 모든 생물에게 물질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며 사람을 위시한 생체의 주요한 성분이 되고 있음도 알게 한다. 그러므로 물은 사람의 몸에 약70%, 어류는 약80%, 그 밖의 미생물은 약95%가 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또한 특이 한 것은 자연의 모든 생물의 생명현상도 여러 가지 물질이 물에 녹은 수용액에 의해서 일어나는 화학변화가 복잡하게 얽힌 것이라고 말한다.
성서의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의 창조에서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며 궁창을 하늘이라 하고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물을 드러나게 하신 다’고 했다. ‘물을 땅이라 칭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셨다’고 창조 둘째, 셋째 날의 창조 기사를 보아 알게 한다. 궁창, 바다, 땅, 식물로 이어지는 셋째 날까지의 창조 사역은 건물의 골격과 같이 온 우주의 기본 형태와 모양을 결정짓는 작업으로서 지혜의 근본이신 하나님의 뛰어난 건축 감각을 실감하게 한다. 이렇게 결정된 기본 틀 위에 하나님은 그 광활한 천지의 무대를 만들고 생명이 살아가도록 생명을 갖춘 존재가치로서 사람과 생물이 살아가도록 환경을 만드심에 감사치 아니할 수 없다.
하늘은 아버지 되시고 땅은 어머니 되시며 하나님과 생물 사이에 땅이 그 중보(仲保)가 되어 생명 태생(胎生)의 이치가 드러남을 알게 하는 것이다. 궁창 밑의 물 들은 바다로 모이고 궁창 위의 물들은 푸른 하늘의 하수가 되어 때때로 비가 되어 땅으로 내린다. 땅에 있는 생물들은 비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어 그 속에서 삶(生)이 자라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옛 사람들은 땅을 ‘어머니’라고 불렀다. 하늘은 아버지, 땅은 어머니가 되어 생명을 이루어가는 이치를 터득하여 결국 이 말은 하나님의 창조생명을 증언한 말이 된 것이다. 이렇게 물은 인간의 존재를 위해서나 절대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초기 문명인들은 강우가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물(生物)의 성장을 지탱하기에 충분한 곳, 또는 비가 끊임없이 내리는 유프라테스 강이나 티그리스 강 및 나일 강과 같은 강들에 유수가 공급될만한 곳에서 세계문명은 발달하고 번영할 수 있었음을 우리는 학교 교과서에서 배워 익히 알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인류의 역사는 물의 근원을 얻는 문제로 근동의 역사를 통해 농사하는 자들과 양치는 자들의 끊임없는 분쟁의 핵심이었음도 역사를 배움으로 해서 아는 것이다. 예컨대 가인이 아벨을 살해하는 것과 부합되는 이유도 이들 유목민들이 수력 장치를 제일 목표로 삼아 정착민들을 끊임없이 약탈하고 싸웠던 이유도 아는 것이다. 성서는 물을 예비하는 것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으로 생각하였기에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이 물과 관련해서 나오고 영적 생활의 빈곤과 영적 생활에 대한 갈망이 물에 대한 갈증의 말로 묘사된 점도 성서에서 우리는 보는 것이다. 성서에서 물에 대한 일상적인 의미로 쓰여 진 점은 물에 대한 그 특징들을 통하여 나타남을 아는 것이다.
성서는 물로서 샘, 호수, 바다, 비 등을 가리킨다. 이렇게 물의 특징들이 은유의 기초를 마련하고 있다. 예를 들면 ‘물에 비취이면 얼굴이 서로 같은 것 같이 사람의 마음도 서로 비취느니 라’(잠27:19),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약1:6), ‘불결을 씻는 물’, ‘거룩한 물’ 등 은유(隱喩)적 비유와 물이 가지고 있는 상징은 결코 제의적인 의미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물의 이미지가 지니는 신학적 의미역시 광야 생활에 관한 고대 이스라엘의 전승들에 표현되어 있음도 알게 된다. 이렇게 물은 신적인 축복과 구원을 상징하는 친근한 요소이며 이것은 그 물의 근원이 태고의 깊음에서 보여 진다. 물은 고대의 세계상을 반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야훼와 카오스의 물 사이의 드라마적인 투쟁을 내포하고 있으며 때로는 그 투쟁을 명확히 표현하고 있음을 보게 한다.
동양에서 인간의 고통의 삶을 고해(苦海)에 비유하듯이 성서에서도 바다는 복종되기는 하지만 완전히 소멸되지 않는 혼돈 적이고 악마적인 세력들을 상징하기 때문에 묵시문학적 작가들은 긴 역사를 통해 있어 온 투쟁이 끝나게 될 미래를 기대할 때 쓰이기도 함에 유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의 묵시는 더 이상 바다에도 있지 아니할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한 환상에서 절정에 달하고 있으며 기독교의 신앙에 있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승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통치에 대한 기대와 약속인 것을 알아야한다. 이러한 전제 아래 ‘사람과 물’의 영적인 관계를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였다.
또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고 하심을 (요3:5, 7:37-38) 알게 한다. 물은 소생함에 깨끗함과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시며 그리스도를 증거 하게 하는 것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 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 이니라 증거 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로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 라’(요일5:6-8)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을 이로다’(사12:3)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많고 다양한 구원의 말씀들을 열어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구원의 즐거움을 누리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수의 샘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마음이 마른 땅이 되어 갈급하게 주님을 사모해야 한다. 그래서 갈급한 심령을 가지고 사마리아의 수가 성(城) 여인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영원한 생수를 발견하고 생명에 관한 모든 문제를 해결 받아야 한다. 물로서 생명이 소생함을 보듯이 그는 물의 쓰임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땅과 물과 사람이 다 같이 살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구원에 관한 문제, 생명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그 일차적 조건이 믿음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기쁘게 할 수도 없음을 알게 한다.
물은 믿음과 같다.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행15:9)고 한다. 구원은 ’믿음으로 만‘이다. 천지간(天地間)에 사람(天地人)까지 형성된 물이 회복되지 않으면 생명도 구원도 얻을 수 없다. 이것은 창조의 되찾음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實相=실제의 상태)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證據)이라‘고 했고 물은 그대로의 믿음의 실상(實狀=실제의 모습)이기도 함에 유의한다. 구원은 죄와 죽음으로 부터의 해방이다. 그러므로 죄의 회개와 회심의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한 것이다. 그것이 죄 씻음의 정결(淨潔)로서 물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는 물의 역할이다.
물은 하늘과 땅 사이를 오르내리는 순환을 거듭하면서 하늘의 에너지와 땅의 에너지를 받게도 하며 물 고유의 특성을 발휘하면서 오염된 하늘과 땅을 정회시켜주고 있음을 알게 한다. 물로 세례를 받음도 그러한 의미를 담고 있다. 살아 있는 생명의 특징은 유기체적인 관계에 놓인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의 단절을 말한다. 그러나 구원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회복을 말한다. 여기에 물의 이해가 그 근거를 찾게 한다. 공기와 더불어 생물이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물을 알게 한다. 자유와 해방이 없는 통제된 것은 경직(硬直)되어 생명은 죽고 만다. 물은 생명을 위해 유기체적인 관계로 순환함을 보게 한다. 물속에는 다양한 불순물도 함양한다.
그리고 증발과정에서 바다의 염류는 바다에 그대로 남지만 빗물은 공기 중에서 소량의 암모늄염과 각종 기체를 받아들인다. 산악지방에서 호수와 강물은 비교적 순수하지만 흐르는 물은 점차적으로 염류를 통해 흡수하고 부유(浮游)하는 무기물이나 식물 찌끼를 받아들인다. 이것은 물이 생명을 살리는 것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물은 정화(淨化)한다. 죄는 정결(淨潔)해야 한다. 정결하려면 회개해야 한다. 회개는 구원의 입문(入門)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함을 알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