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2
일꾼의 마음가짐 (마 20:1-16)
이 세상에는 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국가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중요한 일들이 산적해 있습니다. 사회는 항상 유능한 일꾼들을 찾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도 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인류를 구원하셔서 이 땅에 하나님의 정의로운 통치를 실현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위대한 목표를 수행하는 데에는 그 무엇보다 정의롭고 유능한 일꾼들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 1절에 품꾼을 기다리는 포도원 주인이 나옵니다. 본문의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일꾼을 부르시는 주님의 심정을 포도원 품꾼을 찾는 주인의 모습을 통하여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팔레스틴에서는 9월 말 경에 포도를 수확했는데, 우기가 곧 닥쳐오므로 서둘러서 수확하였습니다. 때문에 이 때가 일손이 부족한 때였습니다. 주인들은 틈만 있으면 장터에 나가 일할 사람들을 구했고, 한 시간만 일할 수 있어도 환영하였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본문의 포도원과 흡사합니다. 마지막 시대, 추수의 때입니다. 주님은 요 4:35에서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복음을 들은 적도 없는 사람들이 역사상 가장 많이 살고 있는 때입니다. 전 세계 65억의 인구 중 40억이 넘는 엄청난 수효의 영혼들이 방치된 채 멸망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주님의 심정이 어떠하시겠습니까?
그리고 복음을 받았지만 묵은 땅이 되어 반드시 기경해야 할 사람들이 역사상 가장 많은 때이기도 합니다. 많은 일꾼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주님은 지금 추수할 곡식을 앞에 두고 안타까운 심정으로 일꾼을 찾고 있는 농부의 심정으로 일꾼을 부르고 계십니다.
본문에 보면, 포도원 주인은 이른 아침 장터에 나가 한 데나리온의 일당을 약속하고 품꾼들을 포도원에 들여보냅니다. 그리고 3시와 6시, 9시에도 장터에서 놀고 있는 사람들을 품꾼으로 받아들여 포도원에 들여보냅니다.
우리 시간으로 말한다면, 이른 아침은 새벽 6시경, 그리고 3시와 6시와 9시는 각각 오전 9시, 12시, 그리고 오후 3시 경에 해당하는 시각입니다.
주인은 오후 5시경에 장터에 또 나갑니다. 거기 여전히 놀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오후 6시에는 해가 지고, 일도 끝이 납니다. 주인이 그들에게 묻습니다.
7절,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 가로되 우리를 품군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가로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놀라운 일입니다. 한 시간도 채 남지 않았는데, 그런데도 주인은 품꾼들을 초청합니다. 주인의 은혜로운 마음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제 날이 저물고, 하루의 일과가 끝이 납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입니다. 해질 무렵 피곤한 몸을 추스르고 이마의 땀을 훔치며 일당을 지급받는 기분좋은 장소에서, 뜻하지 아니하게 불평과 원망의 소리가 터져 나오게 되었습니다. 늦게 온 자나 아침부터 일한 자나 모두 한 데나리온씩 주는 주인을 향하여 불만의 목소리를 높이게 되었습니다.
처음 장터에서 불려 나와 일을 시작할 때의 기쁨과 감사는 간데 없고, 볼메인 목소리로 주인과 다른 품꾼들을 헐뜯게 된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고 원망하는 이들을 책망하시면서,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본문의 비유에서 우리는 교회의 일꾼이 어떤 마음으로 사역해야 하는가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부르신 주님, 그리고 마지막 날 일꾼에게 보상하시는 주님의 은혜로운 모습을 다시 한번 생각하며 감사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포도원 주인의 마음에 합하는 품꾼의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주님의 몸 된 우리 서현교회의 일꾼은 어떤 마음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까?
1. 비교의식을 버려야 함
10절,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11절,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12절,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품꾼들 가운데 집 주인을 원망한 자들은 ‘먼저 온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아마 새벽부터 와서 일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품꾼들이었습니다.
11절에서 ‘원망하여’의 원어는 ‘공귀조’ (비방하다, 수군거리다)의 미완료형입니다. 이 단어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어려움을 만나 모세와 하나님을 대항하여 불평할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출 15:24, 출 16:7,8). 이것이 미완료형으로 사용된 것은 품꾼들이 한 번만이 아니라 거듭 반복하여 주인을 원망하였음을 보여줍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디며 일한 것을 주인이 몰라준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 ‘수고’는 병이나 무거운 세금 등으로 인한 ‘내리누르는 숨막히는 고통’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불평하는 자들은 자신들이 온종일 숨막히는 고통을 참으며 일했는데, 일한 것에 대한 댓가가 너무 적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중 온 자들이 한 데나리온을 받았으니, 자기들은 ‘더 받을 줄’ 알았습니다.
이들의 마음 속에는 비교 의식이 있었고, 이것 때문에 자신들을 불러준 주인의 은혜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주님으로부터 칭찬받는 일꾼이 되려면 먼저 자신 속에 있는 비교의식을 버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마음이 있을 때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사라지게 됩니다.
원망하던 이들은 사실 주인과 한 데나리온의 일당을 약속하고 일을 시작하였고, 주인이 이제 한 데나리온을 품삯으로 주었기 때문에 불평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주인이 하는 말을 보십시오.
13절,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우리는 남과 비교를 잘 합니다. 주위의 사람들이 자기에 비해 뭔가 나은 것 같거나, 다른 사람의 인정을 더 받는 것 같을 때 우리의 비교 근성이 발동하기 쉽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런 일이 있기 쉽습니다.
‘저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저렇게 은혜를 주셨는데, 왜 나에게는 은혜주시지 않는가?’
‘저 사람은 나보다 별로 잘난 것도 없는데 교회에서 저렇게 중요한 직책을 받다니 너무 불공평한 것이 아닌가?’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성도에게 해당되지 않는 말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형제가 나보다 더 은혜받기를 원해야 합니다. 다른 성도가 더 많은 축복을 받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과 더불어 기꺼이 협력해야 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비교의식을 꽁꽁 묶어서 쓰레기통에 집어던져야 합니다.
내게 주신 한 데나리온에 만족하며, 늦게 온 사람들이 나와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는 것을 진심으로 기뻐해야 합니다.
포도원 주인되신 우리 주님은 이런 일꾼을 기뻐하시고, 이런 일꾼에게 더 많은 일거리를 주시며 더 많은 상급을 예비하실 것입니다.
우리 서현 교회의 일꾼은 어떤 마음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까?
2. 동역자 의식을 가져야 함
포도원에 먼저 왔던 이들에게는 동역자 의식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얼마를 받았느냐에만 관심이 있었지 함께 일했던 사람들에 대한 동료의식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주인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하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동역자 의식보다는 경쟁의식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사회는 서로 돕는 동역자 의식보다는 경쟁 의식을 더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경쟁 의식이 사라지고 동역자 의식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다른 성도와 경쟁하려 하기보다 오히려 서로 서로 도와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포도원에 일찍부터 와서 일하던 사람들이 늦게 온 사람들을 동료로 생각하였더면 적어도 이렇게 볼성 사납게 주인을 원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
13절에서 주인이 원망하는 자들을 향하여 ‘친구여’ 라고 부른 것을 주목하십시오. 이 말은 일차적으로는 ‘동료’(companion)란 의미이지만, ‘전우’(fellow-soldier)를 가리키는 데도 쓰입니다. 즉, 같은 목적을 가졌고 운명을 같이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성도들에게 동역자 의식이 강할 때 그 교회는 화목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한 주인 밑에 말과 당나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주인의 짐을 등에 가득 싣고 함께 떠나게 되었습니다. 하루 종일 걷다가 밤 늦게서야 주막에 들러 잠시 쉬고 다음날 새벽이면 길을 떠나는 힘든 나날이 며칠씩 계속되었습니다. 몸이 약한 당나귀가 말에게 부탁을 합니다.
“여보게, 좀 도와주게. 이대로 가다가는 죽고 말겠네. 그러니 내 짐을 조금만 가져가 주게.” 당나귀는 숨을 헐떡이며 말에게 애원했습니다.
그러자 말은 몹시 화를 내며 단번에 거절했습니다.
“안돼, 나도 지금 무거워 죽을 지경인데, 네 짐을 더 가지라고?”
당나귀는 더 이상 부탁하지 못하고, 얼마를 가다가 그만 쓰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당나귀의 등에 실었던 짐과 죽은 당나귀까지 말의 등에 실었습니다. 그래서 말은 훨씬 더 무거운 짐을 지고 걷게 되었습니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성도 여러분, 당나귀가 애원할 때 조금만 도와주었어도 혼자서 이런 고생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말은 주인에게 당나귀를 잃게 하는 죄를 지었고, 자신도 무거운 짐을 지는 고생을 하였습니다.
이 말과 같은 성도들을 교회에서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교회의 많은 일을 골고루 분담하지 않고 소수의 사람들이 너무 많은 일을 맡아서 기진맥진한 경우를 찾아보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교회에 큰 행사가 있을 때 보면, 처음 시작할 때는 마치 자기가 다 할 것 같이 해놓고는 나중에 슬쩍 빠져버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서로 도와가며 일을 하면 금방 끝낼 수 있는 일도 도와주지 않아서 몇몇 사람이 오래까지 그 일을 하느라고 고생해야 합니다. 이래서는 교회가 화목하여 온전히 설 수가 없습니다. 우리 교회의 일꾼들에게 이 동역자 의식은 매우 중요한 덕목입니다.
바울에게는 디모데와 누가, 실라와 아리스다고 같은 훌륭한 동역자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기의 동역자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 대하여 말하기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놓았나니”(롬 16:4) 라고 하였습니다.
바울같은 위대한 전도자에게도 동역자가 필요했습니다. 그에게 이런 동료들이 없었더면 성공적으로 사역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교회에서 얼마나 동역자 의식을 가지고 계십니까?
바울이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동분서주 할 때 그의 동역자들은 물질적인 필요를 채워 주었습니다. 사도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그들은 주님의 일을 감당했습니다. 바울이 어려울 때마다 많은 위로가 되어주었습니다. 그의 목숨을 위해서 목이라도 내어 놓았다는 말이 무엇이겠습니까?
포도원에 먼저 왔던 품꾼들은 나중 온 사람들과 함께 주인의 일을 동역한다는 동료 의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서현교회의 일꾼은 무엇보다 이 동역자 의식이 탁월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위의 형제 자매들과 더불어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가는 일에 합력하는 일에 기뻐하는 일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의 종들과 더불어 주의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주님을 섬기는 일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3. 빚진 자 의식을 가져야 함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꾼은 항상 은혜로 불러주신 주님께 빚진 자 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포도원에 일찍 와서 일한 사람들은 자기들이 한 데나리온을 약속 받고 포도원에서 일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일을 하고 품삯을 받았다는 사실로 인해 장터에서 놀고 있던 자신들을 불러준 주인의 고마움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주인의 음성을 기억하여야 했습니다.
7절, “가로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 가로되, 우리를 품군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가로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그러나 그들에게는 주인의 은혜에 대한 빚진 자 의식이 없었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주인에게 불평과 원망을 쏟아놓았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의 크신 사랑을 입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에 힘입어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의 멤버가 되어 교회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날마다 받아 누리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위해 봉사한다고 해서,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얼마나 갚을 수 있겠습니까?
영원히 멸망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흘려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갚을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우리가 감히 어떻게 주님의 은혜를 만분지 일이라도 갚을 수 있겠습니까?
교회에서 주의 일을 좀 했다고 해서 나를 내세울 수 있겠습니까?
‘내가 이만큼 했는데, 나를 몰라주다니’ 하는 섭섭한 마음을 갖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아직 주님께 빚진 자 의식을 갖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일했다고 해서 그에 상당한 대접을 요구할 권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에서(눅 18:9-15) 은총과 긍휼 앞에 선 겸허한 죄인과 자의로 강철 같이 버티는 교만한 율법 인간의 표본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의 장부책과 도덕의 장부책에는 잘한 것이나 빚 받을 것은 기록하지 말고 회개할 것과 사랑의 빚진 것만 기록해야 합니다. 쥐꼬리만하게 은혜를 입혀 주고 그를 일생 정신적 노예처럼 내 장부책에, 시혜자 명단에 올려 놓지 말아야 합니다.
한 성자가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선 성도들의 맨 뒷자리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모두들 훈장처럼 잘한 것을 달고 나온 가운데 그만은 유별났습니다.
"그대는 무엇을 하였느냐?"고 주님이 물으시는 말에 그가 대답했습니다.
"주여, 잘한 일이 하나도 기억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빚진 자들입니다. 빚진 자가 주를 위해 일 좀 했다고 무슨 큰 공을 세운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마음에 합한 일꾼은 자신이 받은 은혜에 만족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남과 비교하지 마십시오. 비교하는 마음에서는 불평과 원망이 쉽게 솟아나오는 법입니다.
함께 일하는 주위의 성도들과 동역자 의식을 더욱 가지십시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에 빚진 자라는 의식을 가지고 교회 생활을 할 때, 우리의 교회가 더욱 화목하고 화평이 넘치는 공동체로 성장하게 될 줄 믿습니다.
마라나타! 주님이 속히 오십니다!
출처/박순오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