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2
마음의 평안 (요16:32-33)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
(요한복음 16장 32절-33절)
1.현대를 일컬어 <불안한 시대> 라고 합니다.
과거에 비해 고도로 물질문명은 발달해 가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왜 그렇게 불안으로 차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불안해하는 것도 아니고,
당장에 입을 옷이 없어 불안해하는 것도 아닌,
삶 자체에 대한 막연한 불안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요즘 우울증에 걸려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심리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우울증>이란 전쟁지역이나,
절대가난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상대적 빈곤에서 오는 심리적 현상이라고 합니다.
사실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가 6.25 때 먹을 것이 없었던 때는 자살이란 말이 없었습니다.
어떻게든지 생존을 위한 발버둥치는 노력만이 있었을 뿐입니다.
꿀꿀이죽을 먹어가면서도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쳤습니다.
그런데 요즘 그때 보다는 모든 면에서 나아진 환경에서,
사실 몸 건강하여 움직이면 굶어죽지 않을 형편이 되었지만,
이제는 그렇게 살 바에는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기에
자살건수가 늘어나는 줄 압니다.
이것이 바로 상대적 가난이란 것입니다.
남처럼 누리지 못하고, 남처럼 먹이지 못하고,
남처럼 살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죽어버리자고 아파트에서 뛰어 내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립니다.
☞ 어제 신문을 보니, 충북의 모 시청의 국장급 간부가 은퇴를 앞두고 자살을 했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무엇인가 마음의 불안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현대인의 불안은 육체적인 면에서 보다 정신적인 면에서 오는 불안이란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육체적 고통도 참기 어렵지만,
마음의 고통은 육체까지도 파괴시킨다는 점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사람이 극도로 마음이 불안해 지면, 들을 것을 못 듣고, 말할 것을 바로
말하지 못하고, 판단력이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결국 정신 이상을 일으킵니다.
정신과 의사들의 이론대로 보면, 우리는 누구나 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이 못된다고 합니다.
☞ 어디엔가 한구석에 정신적 결함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 외부로부터 오는 불안의 요소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안으로부터의 심리적 문제들이라고 합니다.
☞ 마음의 고통은 <엑스레이> 로도 잡히지 않습니다.
공연히 불안 해 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생각밖에 많습니다.
☞ 어떤 사람들은 죽을병이 걸릴 것 같아서 불안하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 어떤 사람은 사고를 만날 것 같아 늘 불안하다는 경우도 있습니다.
☞ 그래서 얼굴에 웃음이 없습니다.
☞ 누가 별 뜻 없이 한 말에도 상처를 받습니다.
혹시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닌지 한편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왜 신앙이 필요한지 아십니까?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신앙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2. <신앙생활>이란 <마음의 평안> 과 연결되어진 생활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잘 하는 사람들 보면 얼굴에 나타납니다.
☞ 심방을 해 보아도 그 집의 분위기가 잡힙니다.
더욱이 기도해 보면, 그 기도가 빨려 들어가는 가정이 있는가 하면,
기도가 벽에 부딛쳐 도무지 들어가지 않는 가정이 있습니다.
그런 가정은 심방 오는 것이 부담스럽습니다.
대신 예배 보다는 인간적인 대접하는 일에 더 큰 관심을 갖습니다.
그러니, 그런 마음에 무슨 평안이 깃들게 되겠습니까?
<믿음>이란? <신뢰>와 <위임>이라고 한 신학자가 있습니다.(본 훼퍼).
누군가를 믿을 수 있으면 나의 문제를 그와 의논하게 되고,
더더욱 그런 사람에게 나의 모든 것을 맡기게 됩니다.
내가 <예수를 믿고 산 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예수그리스도께 나의 모든 문제를 의논하고 맡기고 산다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신앙은 <인격적>이어야합니다.
인격적이 못된 신앙은 하나의 미신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직도 예수를 미신적으로 믿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예수님께 나의 모든 문제를 위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생각과, 나의 계획과, 나의 판단에 예수님이 도와주기를 바라는 식입니다.
그런 신앙은 아직도 내가 주인입니다.
내가 하는 일에 예수님은 조력자만 되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직도 자기를 맡기지 못합니다.
자기명도가 되지 못한 상태에서 예수를 믿으라 하니, 그게 불안합니다.
☞ 그래서 세상의 불신 남편들이 아내들에게 하는 말이
‘예수만 믿으면 예수가 밥 먹여주느냐?’는 말이 나오게 됩니다.
그들로서는 당연한 말일 것입니다.
‘내가 일해야 먹고 살고, 내 몸을 내가 관리해야지 건강이 유지되지
보이지도 않는 예수가 어떻게 한다고 예수를 믿으라고 하느냐‘ 고 합니다.
☞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본 헤퍼) 우리의 신앙은 하나의 <포기>라고 했습니다. 이 <포기>라는 말은, <자기명도>란 말과 함께 이해를 해야 합니다.
내가 내 문제를 가지고 아무리 애를 써 봤지만,
결국 나는 이제 손을 들었다고 훌훌 털고, 이제 나의 모든 것은 당신께 전적으로 맡긴다는 행동적 고백이라야 그것이 참 신앙이란 말입니다.
3. 그러기에 마음의 <평안>의 주체는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 오늘 특별히 마음고생을 하는 분들이 계시면 잘 들으시길 바랍니다.
마음의 고통은 육체의 모든 것을 소유했어도 고칠 수 없습니다.
☞ 요즘 저는 아침 드라마 ‘강이 되어 만나리’를 보고 있습니다.
저는 그 드라마를 보면서 아무리 부잣집이라 해도 마음 편하지 못한 결혼 생활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드라마의 여주인공 <영선>이가 마음에도 없는 남자와 결혼하여 마음의 기쁨이 없는 것을 보면서 딸 가진 부모님들이 저것을 봐야겠구나 하는 것을 느껴 보았습니다.
좀 없이 살아도 마음 편한 곳에 딸을 줄래? 아니면 마음은 괴롭더라도 부잣집으로 시집갈래? 어느 것을 택하겠는가 하면 여러분은 어느 쪽을 택하겠습니까? 마음이 편해야지 아무리 먹을 것, 입을 것이 화려해도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의 신앙을 재검토해 보아야 할 것은, 내 속에 평안의 주체인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가? 물어야 할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안>을 소유에서 얻는 줄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저 무엇이든지 남보다 많이 가지고 있으면 행복하고,
그것이 평안을 가져다 줄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보다 더 많이 공부를 하여 지식을 많이 소유하려고 하고,
그래서 남보다 돈을 많이 소유하여 권세를 잡아보려고 하고,
그래서 남보다 권력을 많이 소유하려고 합니다.
오늘의 우리의 사회 현실에서 직감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부(富)의 편중
이란 문제가 아닙니까?
물질이 많다고 <마음의 평안>을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요즘 한때 이 나라의 경제를 주름답던 사람들 감옥에 가 있는 것 보면 그들의 마음이 평안하겠습니까?
또 권력과 힘을 소유하면 평안 할줄 압니다.
그러나 힘이 있으면, 사람을 교만 하게 만들 수는 있으나,
평안 하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요즘 대통령처럼 마음이 편치 않을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평안>은 위에서부터 내리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손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시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참 평안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고 하였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러워 하지도 말라” 고 하였습니다.(요14:27)
☞ 여러분!
이스라엘의 조상 야곱의 생애를 보시기 바랍니다.
야곱의 일생처럼 험한 생을 보낸 사람도 없습니다.
쌍둥이로 태어나 몇 초 사이에 동생이 되어 장자의 누릴 세상적인 축복의 기회를 놓쳤고, 그래서 인위적으로 아버지의 눈을 속여 장자 권을 뺏고 형의 노여움을 피해 하란으로 내려고 외삼촌 집에서 처가살이로 20년의 세월을 지내다가 애정도 없는 레아에게서는 아들을 주셨으나, 20년을 하루같이 사랑하는 마음에서 얻은 라헬에게는 태문이 열리지 않다가 드디어 요셉을 얻게 되었더니 그 애지중지하던 요셉이 어느날 행방불명이 된채 소식이 없어졌고, 둘째 벤야민을 낳다가 산고로 그만 사랑하는 라혤을 잃어 버리게 되었으니, 그 마음이 얼마나 아파겠습니까?
그러나 후에 그의 생애를 보면 그런 험한 인생길에서도 낙심치 않은 것은 브엘세바 들판에서 나타났던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 내가 너를 복주리라, 네 누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창28:13-15) 고 한 말을 붙잡고 그 말씀으로 위로와 힘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모두 야곱 같은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야곱기질을 다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야곱에게서 배워야할 본이 있다면, 그는 자기에게 나타난 하나님을 기억하고 살았다는 점입니다.
어떤 경우에서도 마음의 평안을 유지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주님이 내게 주신 평안을 마음에 소유하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과 무엇인가 동업을 해 보십시오.
주님께 먼저 상의하고 일을 시작해 보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무엇인가 말해 주실 것입니다.
그 말씀대로 준행하는 길에는 마음의 평안이 유지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마음의 평안을 누리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김이봉목사 설교 중에서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
(요한복음 16장 32절-33절)
1.현대를 일컬어 <불안한 시대> 라고 합니다.
과거에 비해 고도로 물질문명은 발달해 가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왜 그렇게 불안으로 차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불안해하는 것도 아니고,
당장에 입을 옷이 없어 불안해하는 것도 아닌,
삶 자체에 대한 막연한 불안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요즘 우울증에 걸려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심리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우울증>이란 전쟁지역이나,
절대가난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상대적 빈곤에서 오는 심리적 현상이라고 합니다.
사실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가 6.25 때 먹을 것이 없었던 때는 자살이란 말이 없었습니다.
어떻게든지 생존을 위한 발버둥치는 노력만이 있었을 뿐입니다.
꿀꿀이죽을 먹어가면서도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쳤습니다.
그런데 요즘 그때 보다는 모든 면에서 나아진 환경에서,
사실 몸 건강하여 움직이면 굶어죽지 않을 형편이 되었지만,
이제는 그렇게 살 바에는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기에
자살건수가 늘어나는 줄 압니다.
이것이 바로 상대적 가난이란 것입니다.
남처럼 누리지 못하고, 남처럼 먹이지 못하고,
남처럼 살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죽어버리자고 아파트에서 뛰어 내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립니다.
☞ 어제 신문을 보니, 충북의 모 시청의 국장급 간부가 은퇴를 앞두고 자살을 했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무엇인가 마음의 불안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현대인의 불안은 육체적인 면에서 보다 정신적인 면에서 오는 불안이란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육체적 고통도 참기 어렵지만,
마음의 고통은 육체까지도 파괴시킨다는 점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사람이 극도로 마음이 불안해 지면, 들을 것을 못 듣고, 말할 것을 바로
말하지 못하고, 판단력이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결국 정신 이상을 일으킵니다.
정신과 의사들의 이론대로 보면, 우리는 누구나 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이 못된다고 합니다.
☞ 어디엔가 한구석에 정신적 결함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 외부로부터 오는 불안의 요소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안으로부터의 심리적 문제들이라고 합니다.
☞ 마음의 고통은 <엑스레이> 로도 잡히지 않습니다.
공연히 불안 해 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생각밖에 많습니다.
☞ 어떤 사람들은 죽을병이 걸릴 것 같아서 불안하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 어떤 사람은 사고를 만날 것 같아 늘 불안하다는 경우도 있습니다.
☞ 그래서 얼굴에 웃음이 없습니다.
☞ 누가 별 뜻 없이 한 말에도 상처를 받습니다.
혹시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닌지 한편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왜 신앙이 필요한지 아십니까?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신앙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2. <신앙생활>이란 <마음의 평안> 과 연결되어진 생활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잘 하는 사람들 보면 얼굴에 나타납니다.
☞ 심방을 해 보아도 그 집의 분위기가 잡힙니다.
더욱이 기도해 보면, 그 기도가 빨려 들어가는 가정이 있는가 하면,
기도가 벽에 부딛쳐 도무지 들어가지 않는 가정이 있습니다.
그런 가정은 심방 오는 것이 부담스럽습니다.
대신 예배 보다는 인간적인 대접하는 일에 더 큰 관심을 갖습니다.
그러니, 그런 마음에 무슨 평안이 깃들게 되겠습니까?
<믿음>이란? <신뢰>와 <위임>이라고 한 신학자가 있습니다.(본 훼퍼).
누군가를 믿을 수 있으면 나의 문제를 그와 의논하게 되고,
더더욱 그런 사람에게 나의 모든 것을 맡기게 됩니다.
내가 <예수를 믿고 산 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예수그리스도께 나의 모든 문제를 의논하고 맡기고 산다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신앙은 <인격적>이어야합니다.
인격적이 못된 신앙은 하나의 미신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직도 예수를 미신적으로 믿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예수님께 나의 모든 문제를 위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생각과, 나의 계획과, 나의 판단에 예수님이 도와주기를 바라는 식입니다.
그런 신앙은 아직도 내가 주인입니다.
내가 하는 일에 예수님은 조력자만 되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직도 자기를 맡기지 못합니다.
자기명도가 되지 못한 상태에서 예수를 믿으라 하니, 그게 불안합니다.
☞ 그래서 세상의 불신 남편들이 아내들에게 하는 말이
‘예수만 믿으면 예수가 밥 먹여주느냐?’는 말이 나오게 됩니다.
그들로서는 당연한 말일 것입니다.
‘내가 일해야 먹고 살고, 내 몸을 내가 관리해야지 건강이 유지되지
보이지도 않는 예수가 어떻게 한다고 예수를 믿으라고 하느냐‘ 고 합니다.
☞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본 헤퍼) 우리의 신앙은 하나의 <포기>라고 했습니다. 이 <포기>라는 말은, <자기명도>란 말과 함께 이해를 해야 합니다.
내가 내 문제를 가지고 아무리 애를 써 봤지만,
결국 나는 이제 손을 들었다고 훌훌 털고, 이제 나의 모든 것은 당신께 전적으로 맡긴다는 행동적 고백이라야 그것이 참 신앙이란 말입니다.
3. 그러기에 마음의 <평안>의 주체는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 오늘 특별히 마음고생을 하는 분들이 계시면 잘 들으시길 바랍니다.
마음의 고통은 육체의 모든 것을 소유했어도 고칠 수 없습니다.
☞ 요즘 저는 아침 드라마 ‘강이 되어 만나리’를 보고 있습니다.
저는 그 드라마를 보면서 아무리 부잣집이라 해도 마음 편하지 못한 결혼 생활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드라마의 여주인공 <영선>이가 마음에도 없는 남자와 결혼하여 마음의 기쁨이 없는 것을 보면서 딸 가진 부모님들이 저것을 봐야겠구나 하는 것을 느껴 보았습니다.
좀 없이 살아도 마음 편한 곳에 딸을 줄래? 아니면 마음은 괴롭더라도 부잣집으로 시집갈래? 어느 것을 택하겠는가 하면 여러분은 어느 쪽을 택하겠습니까? 마음이 편해야지 아무리 먹을 것, 입을 것이 화려해도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의 신앙을 재검토해 보아야 할 것은, 내 속에 평안의 주체인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가? 물어야 할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안>을 소유에서 얻는 줄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저 무엇이든지 남보다 많이 가지고 있으면 행복하고,
그것이 평안을 가져다 줄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보다 더 많이 공부를 하여 지식을 많이 소유하려고 하고,
그래서 남보다 돈을 많이 소유하여 권세를 잡아보려고 하고,
그래서 남보다 권력을 많이 소유하려고 합니다.
오늘의 우리의 사회 현실에서 직감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부(富)의 편중
이란 문제가 아닙니까?
물질이 많다고 <마음의 평안>을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요즘 한때 이 나라의 경제를 주름답던 사람들 감옥에 가 있는 것 보면 그들의 마음이 평안하겠습니까?
또 권력과 힘을 소유하면 평안 할줄 압니다.
그러나 힘이 있으면, 사람을 교만 하게 만들 수는 있으나,
평안 하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요즘 대통령처럼 마음이 편치 않을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평안>은 위에서부터 내리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손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시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참 평안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고 하였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러워 하지도 말라” 고 하였습니다.(요14:27)
☞ 여러분!
이스라엘의 조상 야곱의 생애를 보시기 바랍니다.
야곱의 일생처럼 험한 생을 보낸 사람도 없습니다.
쌍둥이로 태어나 몇 초 사이에 동생이 되어 장자의 누릴 세상적인 축복의 기회를 놓쳤고, 그래서 인위적으로 아버지의 눈을 속여 장자 권을 뺏고 형의 노여움을 피해 하란으로 내려고 외삼촌 집에서 처가살이로 20년의 세월을 지내다가 애정도 없는 레아에게서는 아들을 주셨으나, 20년을 하루같이 사랑하는 마음에서 얻은 라헬에게는 태문이 열리지 않다가 드디어 요셉을 얻게 되었더니 그 애지중지하던 요셉이 어느날 행방불명이 된채 소식이 없어졌고, 둘째 벤야민을 낳다가 산고로 그만 사랑하는 라혤을 잃어 버리게 되었으니, 그 마음이 얼마나 아파겠습니까?
그러나 후에 그의 생애를 보면 그런 험한 인생길에서도 낙심치 않은 것은 브엘세바 들판에서 나타났던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 내가 너를 복주리라, 네 누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창28:13-15) 고 한 말을 붙잡고 그 말씀으로 위로와 힘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모두 야곱 같은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야곱기질을 다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야곱에게서 배워야할 본이 있다면, 그는 자기에게 나타난 하나님을 기억하고 살았다는 점입니다.
어떤 경우에서도 마음의 평안을 유지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주님이 내게 주신 평안을 마음에 소유하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과 무엇인가 동업을 해 보십시오.
주님께 먼저 상의하고 일을 시작해 보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무엇인가 말해 주실 것입니다.
그 말씀대로 준행하는 길에는 마음의 평안이 유지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마음의 평안을 누리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김이봉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