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6
말씀과 섬김 (누가복음 10: 38-42)
한 성도가 목사에게 물었습니다. “왜 주님께서는 가롯 유다 같은 이를 선택하셨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말을 들은 목사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조금 생각하더니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나는 그것보다 더 이상한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왜 나를 택하였는지 모르겠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 안에서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고(엡 1:4),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려고 처음부터 우리를 택하셨습니다(살후 2:13).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언제나 죄인일 수밖에 없는 우리가 목사의 고백처럼 이렇게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다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모두 죄인이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고,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며 탄식할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롬 8:19-24).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탄식만 하고 있기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너무나 큽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한편으로는 우리의 죄로 인하여 죄인된 존재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에 대한 믿음으로 인하여 우리는 의인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힘주어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 3:9).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의 고귀하고 신성한 삶의 의무입니다.
예수께서 베다니 마을에 가시니 그 마을의 마르다라는 여인이 예수를 영접하였습니다. 마리아라는 동생은 예수의 발아래 앉아 말씀을 듣고 마르다는 예수와 일행을 대접하기 위해서 분주하였습니다. 이 사건 속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길 바랍니다.
1. 우선적으로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실상 손님을 맞아들였으면 대접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아브라함은 지나가는 세 나그네를 보고 송아지를 잡아서 잘 대접했습니다. 후에 알고 보니 이 나그네들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아브람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손님을 잘 대접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손님 대접으로 복을 받은 것처럼 자신들도 그렇게 하여 복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마르다는 나사렛에서 위대한 선지자가 났다는 말을 듣고 있는 예수를 보자 마음을 다하여 예수를 잘 모시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집에 예수를 모셨습니다. 마르다는 대접하기 위해 음식을 만들었고, 동생 마리아는 예수의 발아래 앉아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여기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들었었고 창녀였던 막달라 마리아와는 다른 여인입니다. 이 마리아는 조선조의 사대부집 아가씨처럼 정숙하였습니다. 그녀는 예수의 발아래 앉아 말씀을 경청하고 있었습니다. 발아래 앉아 말씀을 경청하는 모습은 유대인들이 랍비 앞에서 교육 받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바울이 가마리엘 문하에서 교육을 받은 모습과 비슷합니다. 따라서 마리아는 스승의 가르침을 하청한 제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발아래 앉는 것은 제자가 스승의 가르침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대 사회에서 랍비의 제자가 될 수 있는 자격은 오로지 남자에게 주어집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예수의 제자가 된 것처럼 발아래 앉아 예수의 가르침을 받은 것은 참으로 이색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말씀을 선포하고 그 말씀에 은혜 받는 것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예배 중에 선포된 말씀을 듣고 배우는 것은 기독교 신자가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될 일입니다. 왜냐하면 들음에서 믿음이 나오고 이 믿음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헌신적인 봉사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점심 식사를 준비하기 위하여 몇몇 교인들이 식당에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이는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성도들을 따뜻한 밥과 국으로 접대하겠다는 것은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사랑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식당봉사를 하다가 말씀 듣기를 소홀히 하여 주일날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지나가는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봉사가 아닙니다. 성도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은 아름다운 행위이지만, 그 봉사에만 몰두하여 선포된 복음을 듣지 못하면 이는 신앙적으로 아름답지 못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예배하여 선포된 말씀을 순종하는 마음으로 듣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신앙은 참으로 훌륭하였습니다. 그녀는 말씀을 중요시하였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으로는 일하지 않는 마리아 보다는 일 열심히 하는 마르다가 칭찬받을지도 모르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역설적이게도 일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마리아가 더 아름답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서 예수를 모시고 잔치가 열렸을 때 마리아가 가서 머리를 풀어 사랑과 감사의 눈물로 주님의 발을 씻고 예수의 발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마리아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정성을 다하여 제자된 마음으로 예수의 말씀을 경청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선포된 말씀의 들음에서 진정한 믿음의 행위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행위는 영적인 깨달음을 불러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깨달음을 동반하지 않는 행위는 그 결과가 하나님의 뜻에 거스를 때가 많습니다. 반대로 말씀에 대한 영적 깨달음이 전정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행위를 할 수 있게 합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경우보다 우선적으로 말씀을 듣는 시간이 귀중합니다. 여기서부터 신앙의 성숙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2. 신앙에는 섬김으로 행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 그리고 나사로가 사는 집과 각별한 관계로 살았던 것 같습니다. 막달라 마리아,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 그리고 수산나 등은 예수의 공생애를 일찍부터 도왔습니다. 그녀들은 예수의 일행을 헌신적으로 섬겼을 것입니다. 그렇게 헌신적으로 섬겼기에 마르다와 마리아는 그녀들의 오라비인 나사로가 죽을 병에 걸렸을 때 스스럼없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와서 고쳐달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마르다는 예수의 일행을 초청해서 대접까지 한 것을 보면 예수와 가까웠던 관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말 헌신적인 모습이 보입니다. 예수의 공생애 3년은 예수께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실 정도로 고통스러운 삶이었기에 예수는 마르다의 정성어린 헌신으로 하여 많은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녀는 예수께서 마을을 지나가는데 자기 집으로 영접하였습니다. 아마 좋은 처소를 예비하였을 것이고 예수와 제자들이 편안하게 유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로 배려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선한 재료만을 선별하여 피로를 풀고 힘을 북돋을 수 있는 갖가지 좋은 음식을 준비하였을 것입니다. 머리 둘 곳도 없는 예수와 그 일행에게 마르다는 얼마나 고마운 사람이었겠습니까?
때때로 성도들을 심방할 때 저를 주의 종으로 생각하고 갖가지 값진 요리로 부족한 저를 대접하는 성도들의 따뜻한 마음을 보면서 저는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저는 대접받을 만한 종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족한 저임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은 최선을 다해서 준비했습니다. 저는 다만 성도들의 그 정성어린 마음에 감사할 뿐이고, 그런 성도들의 마음에서 큰 위로를 받습니다. 교회에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성도들 때문에 주의 종은 날마다 새 힘을 얻습니다.
보통 성도들은 주님을 대접하는 마음으로 교역자를 대접하고 교회에 봉사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접이나 봉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그 말씀에 대한 감사의 마음에서 나오는 헌신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봉사 때문에 오히려 말썽이 생깁니다. 철저히 그 봉사는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 기초한 신앙적 행위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지 않은 인간적 열심을 가지고서도 정성스럽게 봉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인간적 봉사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그런 인간적 봉사에는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전혀 들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외국의 어느 교회에 집회를 갔는데 여선교회 회장이 얼마나 헌신적이었는지 모릅니다. 저녁 집회가 끝나면 꼭 저녁 식사를 겸한 파티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녀가 그런 것을 준비한다고 집회에는 얼굴도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일을 사모하지 말씀을 사모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일을 좋아하지 말씀은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곳이고, 그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에 감사하여 하나님께 예배하는 장소입니다. 따라서 마땅히 교회 봉사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감사에서 우러러 나온 것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착한 일을 열심히 하기 위해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그런 일을 하려면 교회보다는 각종 사회복지센타에 가는 것이 현명합니다. 온갖 정성으로 좋은 일을 한 여선교회 회장에게 교회는 사회복지센타와 다름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는 무서운 인간적인 사고입니다. 교회는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배하는 곳입니다. 교회는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에 기도하는 곳입니다. 교회는 우선적으로 봉사하는 곳이 아닙니다. 예배 다음에 봉사가 있어야지 봉사 다음에 예배가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배와 말씀에서 은혜를 받고 봉사해야 됩니다. 여기에 마리아 같은 참된 헌신이 나올 수 있습니다.
3. 우리는 너무 분주하지 않아야 합니다.
IT 산업이 보여주듯이 현재는 스피드가 곧바로 돈과 직결되는 세상입니다. 우리가 지금 가장 참을 수 없어 하는 것은 느리게 부팅되는 컴퓨터이며, 느리게 전송되는 케이블이며, 1분 늦게 도착되는 핸드폰 문자 메시지입니다. 이런 분야에서 만약 속도가 1초라도 늦으면 그 사업체는 한 달도 안가 망합니다.
1초에 모든 것이 걸려 있을 정도로 속도로 모든 것이 판가름 나는 최첨단 테크놀로지 시대에 사는 우리의 가장 지혜로운 좌우명은 ‘보다 빠르게’입니다. 그래서 보다 빠른 것이 최고로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거리를 자가용 타고 5분 만에 가는 사람은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고, 버스 타고 15분 만에 가는 것은 보통이고, 걸어서 30분에 가는 사람은 ‘바보’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대접하고자 마음이 분주하였습니다. ‘분주하다’의 원뜻은 ‘사방에서 마음을 잡아당기다’입니다. 공동번역 성서에서는 “여러 가지 시중을 드니라 정신이 없었다”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혼자서 많은 사람의 음식 준비를 하려고 하니 마르다의 마음은 사방에서 잡아당기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마르다는 동생 마리아를 찾았습니다. 마리아는 그때 예수의 발아래 앉아 팔자 좋게 말씀만 듣고 있었습니다. 마르다가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한 것처럼 보입니다. 언니는 혼자 일하고 동생은 팔자 좋게 말씀만 듣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르다는 참고 참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말합니다.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40절).
마르다는 마리아를 비난하였습니다. 마르다의 눈에 마리아는 바쁜 언니의 일을 거들 생각도 없이 편히 쉬고만 있는 나쁜 동생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를 위하여 정성껏 음식을 만드는 자신의 일은 정당하고, 예수의 말씀을 듣고자 귀 기울이는 마리아의 일은 부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마르다는 자신의 봉사는 훌륭하고 다른 사람의 행동은 그렇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의 이런 헌신적인 봉사에 남들은 왜 참여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자기 입장을 지지해 주기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르다의 화난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그녀의 이름을 두 번이나 불렀습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가지만 하든지 혹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41-42절).
마르다는 일상적인 일에 너무 몰두하여 가장 중요한 일인 하나님 말씀 듣는 것을 소홀히 하였습니다. 이런 영적인 진리를 알려주려고 예수는 마르다는 책하시고 마리아는 칭찬한 것입니다. 우리는 마르다처럼 일상 생활에 몰두하여 예배에 참석해 하나님 말씀 듣는 것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너무 분주해서 예배에 빠지거나 예배에 늦게 오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일주일에 한번 보는 대예배에 빠지거나 늦게 올 정도로 분주합니까? 그런 분주함은 분명히 하나님 앞에서 죄임을 깨닫고 마리아처럼 하나님의 말씀 듣는 것에 온 정성을 쏟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가 가장 분주하게 해야 될 일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예배에 참석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의 은혜에 감사하여 헌신적으로 봉사를 하는 삶이 바로 우리 하나님 백성된 자의 본분입니다. 하루 종일 먹고사는데 분주해도 먹고 살까 말까한 요즈음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에 가장 분주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소리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어리석음이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가장 지혜롭습니다. 오늘 성도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 듣는 것에 분주하여 하늘이 내리는 복을 받길 바랍니다.
출처/전병금 목사 설교 중에서